일본의 의미 (10) 세기의 사기극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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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4-05 21:55 조회22,15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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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세기의 사기극 5.18
위안부, 강제징용 등 반일 사기극은 대한민국에 기생하는 북조선 트로이 목마들이 벌이는 반대한민국 반역 사기극의 일부다. 반일 사기극의 발원은 반 대한민국 반역의 사기극이고, 반 대한민국 반역 사기극의 전형은 5.18 사기극이다. 선전포고 없이 몰래 게릴라부대를 침투시켜 국가를 전복하려 했던 북조선의 전쟁 범죄를 숨겨주기 위해 국가와 국민을 기만하고 농락하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미증유의 대사기극이다.
5.18 역사는 3개
대한민국 현대사의 핵은 5.18이다.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 역사는 대남공작의 역사이고 대남간첩의 역사다. 그 정상에 5.18 역사가 있다. 1997년 전두환 내란사건에 대한 재판으로 대한민국의 이념 체제는 뒤바뀌었다. 1980년의 국가반역자 김대중이 1997년에는 민주화 영웅이 되고, 1980년 이후 7년 동안 대한민국을 부흥시킨 전두환이 내란죄를 뒤집어쓰고 종신형 선고를 받았다. 이후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시절에 간첩죄로 복역한 사람들 모두가 민주화 유공자로 등극하여 재심 판사로부터 '국가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인사를 받고 1인당 수억에서 수십억 원씩의 배상을 받고 사회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 이들에 지급된 국가 예산이 1조 5천억 원 정도일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름만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지 내용은 이미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공산국가가 돼 있는 것이다.
1989년 부산 동의대 사건, 극좌 학생들이 트집을 잡아 난동을 벌였다. 이를 진압하러 온 경찰관 7명에게 신나를 뿌리고 성냥을 그어대 불태워 죽인 주모자는 당시 종신형을 받았다. 그런데 김대중은 2002년 그에게 6억 원을 보상했다. 경찰은 ‘정부의 개’이기 때문에 많이 죽일수록 민주화 유공 급수가 높다는 것이었다.
5.18 역사는 모두 세 개다. 하나는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이 확정한 역사다. 이 역사에서는 5.18이, '김대중이 정권을 잡기 위해 벌인 내란 목적의 폭동'이었다. 다른 하나는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이 뒤집은 역사다. 5.18은 전두환이 주도한 내란이라는 것이다. 이는 일사부재리 원칙을 위반한 것이고, 형벌불소급의 원칙도 위반한 것이고, 공소시효를 무시한 것으로, 그야말로 네로의 법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이 책의 저자가 쓴 학문적 학설의 역사다. '5.18은 북한이 주도한 게릴라전이었다’는 것이다.
5.18 역사는 이처럼 대한민국의 이념체제를 바꾸는 역사이고, 국민의 국가혼을 가름하는 역사이기에, 누군가는 반드시 밝혀야 하는 중대한 역사다. 그 역사를 나이 60세부터 인생의 황금기라는 20여 년을 꼬박 바쳐 연구한 사람은 오로지 저자 한 사람뿐이다.
한 사람뿐이기에 그 연구로 인해 저자는 지난 20여 년 동안 광주의 야만적 폭력과 공산권력의 횡포와 언론의 마녀사냥에 의해 홀로 도마 위에 누워 난자질을 당해온 것이다.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대통령도 요설보다 더 요설로 쓰인 판결문에 의해 난자질을 당한 판에 저자와 같이 저항 능력이 전혀 없는 자연인이 당한 고통과 수모가 그 얼마이겠는가? 전두환이 어떻게 난자질당했는지는 [다큐소설 전두환]에 총정리돼 있다.
한일관계, 양국의 발전과 행복을 좌우하는 귀중한 문제다. 한일역사를 왜곡해온 집단은 대한민국에 기생하는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점을 저자는 앞에서 밝혔다. 대한민국 국민과 일본 국민 공동의 적이 김일성주의자들이라는 점도 앞에서 밝혔다. 여기에서는 이런 사악한 세력이 사실상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얼마나 사악하고 얼마나 파괴력이 강한 집단인지에 대해 더 설명하려고 한다. 한마디로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규모 국가 단위의 사기집단인 것이다.
5.18의 진실은 무엇인가?
2002년부터 저자가 연구한 결론은 아래와 같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지축을 뒤흔든 광주폭동은 김일성이 살인기계로 훈련시킨 특수 공작조 600명과 그들을 위장해주고 게릴라에 필요한 심리전을 펴기 위해 동원된 또 다른 600여 명의 남녀노소 집단이 벌인 국가전복 폭동이었다.“
감히 적국 깊숙한 후방에, 600명이라는 적지 않은 숫자의 특공대와 또다른 600여 명의 남녀노소 민간인 집단을 보내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것은 이 세상 그 누구의 상상력 안에 있지 않은 불가능 그 자체였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곳을 찌르는 것이 지구상에 둘도 없는 김일성 집단의 생리라는 것을 5.18이라는 비싼 치욕을 통해 교훈삼아야 할 것이다.
1) 이들은 어떻게 왔는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되자마자 김일성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살인기계로 훈련시킨 특공요원 600명을 6개월여에 걸쳐 잠수함과 태백산맥을 통해 소규모 단위로 침투시켜 광주 근방과 목포지역에 은신시켰다. 양아치 (넝마주이)등으로 위장케하고 때로는 가족 단위로 행동케하면서 광주 시가지 전투를 위한 정찰을 시켰다. 전남 지역 17개 시군에 위장돼있는 44개의 무기고를 고정간첩들을 동원하여 발견케했다.
민간인들은 대형선박으로 왔다. 대형선박? 1950년 6.25 직전의 한국군도 간첩이 지휘했다는 정황증거 10가지가 군번 1번 이형근 대장(참모총장)의 회고록에 기재돼 있다. 마찬가지로 1980년 5월 18일 직전, 당시 합참의장 유병현 대장이 매우 수상하게도 전남 해안 경비부대를 전부 전라북도 변산반도 이북으로 이동 배치시킨 사실이 있다! 이는 유병현 회고록 453쪽에 명시돼 있다. 5.18 당시 광주 시내에는 추산치로 600여 명이나 되는 남녀노소 민간 그룹이 질서 정연하게 몰려 있는 것을 촬영한 사진들이 많다. 업힌 아이, 안긴아이, 손에 이끌려 다니는 아이들의 모습까지 촬영돼있다. 당시 광주시민은 집 밖을 나가면, 날아다니는 총알에 맞는다며 아이들을 단속하고 문을 걸어잠그고 꼭꼭 숨어 있었다. 멋모르고 몇몇 광주 청년들이 이들 민간인 집단 속에 들어갔다가 북한 말로 주고받는 대화를 들었다. 그런 청년은 영락없이 증거 인멸을 꾀하는 북 요원들에 의해 도청으로 체포돼 가서 살해당했다. 어깨가 꺾인 채 연행되어 가는 모습의 사진이 4개나 있고, 4명이 살해됐다.
2) 특수 공작조 600명은 무엇을 했는가?이들은 300명씩 A조와 B조로 나뉘어 활동했다. 1980년 5월 16일은, 김대중이 국가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날이다. 최규하 대통령이 이끄는 내각을 즉시 해체하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로 인해 선포돼있는 계엄령을 철폐할 것 등을 5월 19일까지 김대중에 통보하지 않으면 5월 22일을 기해 전국 폭동을 일으키겠다는 최후통첩이었다. 최규하 정부는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김대중 등 24명으로 구성된 '김대중 혁명 내각' 요원들을 체포하면서 계엄을 한층 강화하는 계엄령 확대 선포를 했다. 25,000명의 계엄군을 교도소, 방송국, 대학 등에 배치했다. 실제로 보안사는 김대중이 작성한 혁명내각(Shadows Cabinet) 명단을 그 부인 이희호 핸드백에서 꺼내냈다.
5월 18일, 전국의 거리에는 젊은이들이 일절 보이지 않았다. 경찰의 예비검속에 걸리면 많은 고통을 받기 때문이었다. 강화된 계엄령에 따라 광주에는 전북 금마에 주둔하는 7공수여단 중 33대대(300명)와 35대대(300명)가 각 광주에 소재한 전남대와 조선대로 1개대대씩 출동해 있었고, 이들 공수부대 장병의 40%는 전라도 출신이었다. 대한민국 청년들이라면 당연히 집에 꼭꼭 숨어 있어야 정상이었던 5월 18일 오전 9시, 배낭에 돌멩이를 담아온 300명의 어깨급 청년들이 전남대 권승만 중령(전남이 고향)이 지휘하는 33대대를 찾아가 도서관에 가겠다며 시비를 걸면서 기습적으로 돌멩이 공격을 가해 7명의 공수대원 얼굴에서 피가 낭자하게 흐르게 했다. 공수대원들이 화가 나서 달려갔지만 이들 300명의 속도를 당할 수 없었다.
이들은 금남로와 충장로로 달려가 파출소들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차량바퀴에도 불을 질러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오르게 하여 멀리에 있는 시민들까지도 달려오게 했다. 시민들이 몰려오자 이들은 미리 준비해온 괴담과 유언비어를 퍼트려 광주시민을 분노의 히스테리 집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공수부대를 지휘하도록 명령을 받은 광주지역 향토사단 정웅 사단장은 사상이 의심스러운 회색분자였다. 그는 공수부대가 모략 받는 집단이 되도록 교묘한 지휘를 했다. 출동 인원이 불과 400여 명에 불과했던 2개 대대에 명령하여 금남로를 가득 채운 수만 명의 시민 중에서 젊은이들만 골라 모두 체포하라 했다. 소수의 병사들이 100배나 되는 군중에서 젊은이들을 찾아내 체포하려니 역공이 대단했고, 역공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다급하게 곤봉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 옥상에 촬영기들을 대기시켜놓고 기다리던 촬영조들이 이 곤봉 사용 장면을 찍어 다음날부터 시민들에 배포했다. 그래서 시민들은 더욱 흥분했다. 곤봉 사진은 모두 다 옥상에서 내려다보고 찍은 것들이다. 모두가 정교하게 기획된 게릴라 작전이었던 것이다. 5월 19일부터는 계엄군이 100대 1이 넘는 시위 군중으로부터 매타작을 당했다. 차량들의 고속 질주에 의해 깔려죽는 병사들이 발생하고 중상을 입는 병사들이 인도에 누워 닥터 헬기의 도움조차 받지 못했다.
5월 20일 오전까지 조금씩 조금씩 축차 투입된 공수부대 규모는 고작 1,000명, 100대 1 또는 200대 1의 다수를 당해낼 수 없었다. 군은 20사단 투입을 결정했다. 20사단은 14,000명, 이들이 광주에 오면 게임은 즉시 끝난다. 광주에서 북한군 600명을 지휘하는 인민군 장군은 북한에서 게릴라전의 전설로 통하는 리을설 원수. 그는 당시 3성 장군 신분으로 광주에 왔다. 민간 그룹 600여 명까지 모두를 총지휘하는 사람은 당시 북한의 현역 대남공작 부장(통전부장) 김중린, 1974년, 이후락의 카운터 파트였던 악명높은 인물이었다. 리을설은 20사단의 광주 진입을 막는 전략을 세웠다. 20사단이 광주로 진입하는 통로는 철로와 고속도로다. 이 두 개의 군사 접근로를 차단한 리을설의 작전은 절묘했고 과감했다.
리을설은 간첩을 통해 20사단 지휘부 차량부대가 5월 21일 08시에 광주 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극비 정보를 입수한 후 A조 300명에는 톨게이트에서 광주 시내로 들어오는 길목인 '군분교'(작은 교량)에 매복하여 20사단 지휘부의 진입을 차단시킬 것을 명했고, B조 300명에는 광주역을 지키면서 20사단 주 병력의 하차를 엄호하려는 공수부대 5개 대대를 섬멸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20일 저녁 군분교로 달려온 A조 300명은 중장비들을 동원하여 몇 개의 도로는 도자로 깊이 파서 차량이 통행할 수 없도록 했고, 다른 도로들에는 버스, 콘크리트, 철골 등 장애물들을 높이 쌓아 길을 막고, 300명으로 하여금 그 장애물 뒤에 숨어서 매복할 수 있게 준비했다. 그리고 광주역에 있던 5개 공수대대는 새벽 2시까지 B조 300명이 이끄는 시민들에 포위되어 전멸될 위기에 처해 있다가 가까스로 실탄이 공급되는 바람에 전남대로 철수할 수 있었다. 철수한 이후에도 이 3공수여단 5개 대대는 밤새 내 그리고 21일 오후 5시 철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전남대에 갇혀 몰살될 위기를 견뎌내고 있었다.
5월 21일에 북한군이 벌인 작전은 세계 군사 세계의 불가사의로 불리는 이스라엘의 엔테베 작전보다 더 고난도의 정교한 작전이었다. 북한군 A조는 군분교에 쌓인 장애물 뒤에 숨어 20사단 차량이 나타나기를 기다렸고, 노인들인지 노인으로 위장한 부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노인부대가 나서서 20사단 지휘부 차량 부대에게 환영한다는 손짓을 하며 반기는 연기를 했다. 군인들은 자기들을 광주시민들이 열렬히 환영하는 줄로만 알고, 그들이 유도하는 대로 차량을 몰았다. 들어가 보니 가두리장이었다. 차량들이 갇히자 매복해 있던 도깨비 부대 요원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낫과 몽둥이로 전두서열(전투능력에 따라 매긴 급수) 높은 20사단 병력을 공격했다. 20사단 장병들은 차량도 총기도 내던지고 도주했다. 1명은 실종됐다가 여러 날 후에 돌아왔다. 광주 시위에서 사망한 사람, 체포된 사람의 80%는 광주에서 천대받던 구두닦이, 껌팔이, 석공, 목공, 자개공, 구두공 등 개념 없는 콩가루들이었다. 이런 광주시민들에서 과연 현역 전투사단을 만만히 보고, 하루 전에 가두리장을 공사해 놓고, 매복하고 있다가, 공격할 수 있는 계획을 짜고, 전투 행위를 할 수 있는 300명이 구성될 수 있었겠는가? 지휘자가 있고, 지휘 체제가 있고 작전계획이 있는 이런 군사활동을 과연 광주시민들이 조직할 수 있었겠는가?
A조 300명은 사단장용 지프차 등 지프차 14대와 트럭을 몰고 인근에 위치한 자동차 군납업체 아시아 공장으로 달려갔다. 09:00시, 아시아 자동차 공장에는 A조 300명과 B조 300명, 계 600명이 집결했다. 높은 담벽과 망루에 설치된 기관총으로 경비되는 군납업체는 속수무책으로 점령됐다. 600명은 단 한 번도 출고되지 않은 이태리형 장갑차 4대와 374대의 군용트럭을 탈취해 일부는 시내로 나갔고, 일부는 전남 지역 17개 시군에 위장돼있는 44개 무기고를 향해 예행연습을 한 것처럼 달려가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무려 5,403정의 총기와 다이너마이트 폭탄 재료를 탈취했다.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작전이었다. 이러한 작전을 광주의 구두닦이, 철가방, 껌팔이들이 주도할 수 있었겠는가?
이들 600명은 왜 무기를 이렇게 많이 훑어 왔는가? 첫째는 광주시민에게 나누어주면 열심히 계엄군과 싸울 줄로 알았다. 그래서 5,400여 정의 무기를 탈취한 것이다. 둘째 광주교도소에는 간첩수 170명을 포함하여 2,700명의 수용자가 있었다. 이들을 해방시키고, 이들에게 총을 나누어주어 폭동의 동력으로 삼으려 했다. 300명 1개 조는 21일 오후 1시경, 금남로 대학살 계획을 준비했고, 또 다른 1개 조는 광주공원 등에서 시민들에게 총 쏘는 방법을 가르쳐주면서 총기를 듣고 계엄군과 싸우라 독려했다. 이 시간에 공수부대 5개 대대는 도청을 지키고 있었고 3공수여단의 5개 대대는 전남대에 꼼짝 못 하고 갇혀있었다.
이들은 이른바 '도청 앞 집단 발포'라는 마타도어를 만들어내기 위해 교활한 작전계획을 세웠다. 북 특수군은 도청 앞에 늘어선 공수부대원들의 사격을 유도하기 위해 장갑차를 몇 차례 돌진시켰다. 계엄군이 깔려 죽고, 중상을 입자 계엄군 지휘관들에게만 몇 발씩 배급돼있는 실탄들이 장갑차를 향해 날아갔다. 이 총소리를 이용해 금남로를 좌우로 에워싸고 있는 7~10층 건물들의 옥상을 미리 점령하고 있던 무장괴한들이 금남로를 가득 메우고 있던 시민들을 향해 총을 내려다보고 쏘았다. 60도 각도에서 70도 각도로 내려쏜 것이다. 금남로 바닥은 도청에서 직선이 그어지지 않는 곳이다. 이날 금남로에서 사망한 사람이 40여 명, 부상 당한 사람이 또 다른 40여 명이었다. 당시 광주 사람들의 증언들과 당시 의사들의 검시 보고서를 종합한 결과. 도청 앞에서 계엄군 총인 M16에 의해 사망한 사람은 단 1명도 없었다. 5월 21일 00시 01분부터 24:00시에 이르기까지 광주에서 사망한 사람은 모두 62명, 이들 중 대부분이 새벽 시간과 밤 시간에 사망했고 계엄군이 없는 곳에서 사망했다. 영화 '화려한 휴가'와 영화 '택시운전사'는 계엄군이 5월 21일 사살한 광주시민 수가 2천 명 이상이라고 부풀렸다. 하지만 광주폭동 기간 광주에서 사망한 광주시민은 지금까지 154명뿐이다. 이는 이태원 참사 인원 159명보다 적은 숫자다. 지금도 광주에서 학살당한 자가 2천 명이라고 알고 있는 국민이 무척 많다.
한 개 조가 도청 앞 발포라는 모략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금남로 옥상 사살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다른 한 조는 광주공원 등에서 시민들에 총기를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총기를 주변 광주시민들이 신나게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이 어인 일인가! 광주시민들이 북한 특수군을 의심의 눈초리로 쏘아보면서 받으려 하지 않고, 심지어는 “아저씨 광주 사람 아니네요?“ 쏘아붙이는 시민도 있었다. 여기에 중요한 착오가 발생한 것이다. 총을 받아야 폭동을 타 지역으로 확산할 수 있었는데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리을설 상장(3성)이 다급한 어조로 북에 무전을 쳤다. "광주시민들이 총을 안 받습네다" 이 보고를 받은 김일성은 '날래 교도소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명령은 여러 차례 무전을 탔다. 이 무전을 감정한 계엄사는 전투력이 약한 광주 향토사단인 31사가 경비하고 있던 교도소 방어를 3공수여단에 맡겼다. 전남대를 탈출한 3공수여단이 숨 가쁘게 이동하여 교도소 주위에 호를 파고 '시민군'이 공격해오기를 기다렸다. 밤중 공격이 세 차례 있었고 다음 날 두 차례의 출현이 보고되었다. 밤중 공격에서 북한군은 600명의 정예특공조 중 475명을 잃었다. 475명이라는 숫자와 그 죽음이 아까워 절규하는 표현은 북한이 1980년 바로 그해 제작한 광주 기록영화에도 내레이트돼 있고, 북한 책 3권에도 기록돼있다. [찢겨진 깃폭], [광주의 분노],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5월 21일의 작전 내용은 무적의 작전이었다. 하지만 600명 정예 전투력 중 475명을 잃은 북한 침투군은 작전을 포기하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5월 23일은 김대중과 연결돼있는 독일 기자 힌츠페터가 두 번째로 광주에 오는 날이었다. 힌츠페터는 5월 20일에 광주에 들어와 5월 18일, 북한팀이 촬영해 놓은 곤봉사진을 가져다 독일 방송국 NDR에게 송고했다. 5월 23일은 대한민국 국가가 양민을 학살하는 악의 집단이라는 모략을 하기 위해 시체장사를 벌여 대대적으로 촬영해야 하는 날이었다. 현장 사진들 가운데 시체장사 행사를 하는 사진들이 매우 많다. 5월 21일 밤, 475명을 잃은 북한 침투 부대, 언제라도 계엄군이 들어오면 꼼짝없이 점령되어 정체가 드러날 수 있었다. 그러면 김일성이 침략자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서야 했다. 계엄군이 들어오면 스스로 자폭해서 증거를 인멸해야 했다. 북한 사람들만 자폭하면 증거가 잡힌다. 그래서 광주시 모두를 날릴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그 수단이 바로 도청 안에 TNT로 조합해 놓은 2,100발의 폭탄이었다. TNT 2,100발을 순식간에 조립할 수 있는 집단, 광주의 천덕꾸러기 계급인 구두닦이가 아니었다. 5월 25일과 26일에 걸쳐 목숨 걸고 도청에 잠입하여 이를 해체한 사람이 지역 계엄사령부 내의 배승일 문관(5급감)이었다. 5월 23일, 계엄군의 진입은 없었다. 시체장사 행사가 성대하게 진행되어 각가지 사진들이 출현했다. 그리고 5월 24일 오전, 계엄군에는 이상한 명령이 내려왔다. 광주 목포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공수부대 11공수여단을 급히 광주 비행장으로 철수시켜, 길을 열어 주었다. 도청 안에 집결해 있었던 민간부대 600여 명과 지휘부 그리고 살아남은 125명의 특공조가 목포로 가서 대형선박을 타고 북으로 사라졌다.
3) 475명의 시체는 어디로 갔는가? 2014년 5월 13일에는 청주 야산 밀림지역에 축구공원을 형성하는 작업을 하다가 굉장히 특이한 무연고 유골 430구가 작업자들에 의해 발견됐다. 지하 1m 깊이의 넓은 공간에 규격이 일정한 나무판에 하얀 비닐로 포장이 돼있고, 포장 위에는 군번처럼 일련번호가 씌여있고, 일제 유품이 없는 유골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시체를 하얀 비닐로 포장한 곳은 오로지 광주뿐이었다. 시체는 다량으로 나오고, 여름이라 썩은 물이 나오고 악취가 진동하기 때문에 급히 비닐로 감은 것이다. 이것이 보도되자 청주시는 갑자기 보도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이후 이 430구에 대한 미스터리가 이어졌다. 우선 430구의 의미부터 알아보자. 1989년 2월, 전남대 5.18 연구소 자료에는 당시 43세 여교사 최봉희의 증언이 있다. 시립 공동묘지 관리자 손을 거친 시체가 모두 594구라는 증언이다. 당시 광주에서 광주에서 사망한 사람은 164명으로 공식화돼 있었다. 164+430=594. 아귀가 과학적으로 맞는다. 164명 중 12구는 북한인이었다.
이 430구가 왜 청주로 갔는가? 1988년 7월 같은 전남대 5,18연구소 자료에는 안병복이라는 당시 60세 여성의 증언이 있다. 5월 27일 새벽, 시체를 가득 실은 화물차 여러 대가 광주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았다는 증언이다. 왜 하필 그 430구가 청주로 갔을까? 5.18 현장 사진 여러 곳에 손을 허리에 얹고 찍힌 사람이 바로 김일성이 아끼는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간첩 손성모다. 손성모의 활동 공간이 문경새재와 붙어있는 청주였고, 손성모는 청주지역에서 체포됐다. 그가 감시하고 관리하기 좋은 곳이 청주였다. 그 많은 시체를 광주 인근에 붙으면 도시 확장 과정에서 금방 발견되기 때문에 광주에서 200km 떨어진 청주 흥덕지구에 갖다 묻었을 것이다. 그러면 475명 중에서 430구를 뺀 나머지 45구는 어디로 갔나? 12구는 신원불상자로 5.18 묘지에 묻혀있다. 2구는 부산의 국제신문 기자 이양우가 교도소 부근 창평에서 5월 22일 보았다는 시체다. 얼굴이 어두운 청년들이 주위를 살피면서 리어카 2개에 관을 하나씩 얹고, 찔레꽃을 동여매고, 야산으로 야반도주하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나머지 31구는 이삭으로 찔레꽃을 달고 이 산 저 산에 묻혔거나 아니면 중상 상태로 북으로 가다가 배에서 죽었거나 북에 가서 죽었을 것이다.
4) 430구의 시체는 어디로 갔나? 무연고 유골이 1개만 발견돼도 지방자치단체는 조달본부 나라장터에 장묘업체를 상대로 입찰공고를 내야 한다. 그런데 청주시는 430구나 되는 무연고 유골을 이름도 없는 영세업체 '현대장묘개발'과 수의 계약을 체결했다. 서울, 광주, 부산 등 각 지역에서의 화장 및 안장 단가는 1구당 80만 원에서 100만 원 사이였다. 그런데 청주시는 '현대장묘개발'에 구당 20,000원, 50분의 1, 2%의 돈만 지불했고, '현대장묘개발'은 나무판(칠성판)에 있던 유골을 한 구씩 불투명한 비닐봉지에 털어 넣고 그 위에 일련번호를 기입한 후 컨테이너 안의 철골 다이 위에 가지런히 진열해 놓았고, 그 컨테이너 박스는 그 후 온데간데없다. 화장한 유골을 왜 구태여 콘테이너 박스 안에 철골 다이를 설치하고 한 구씩 봉투에 담아 일련번호를 기입하는 것인가? 메디컬 뉴스 등에 의하면 2014년도 충청북도에 소재한 4개의 화장터에서 화장한 무연고 유골은 겨우 18구, 청주시는 430구를 화장했다는 유일한 증거인 화장증명서를 법원에 제출하지 않았다. 청주시는 그 430구를 화장하지 않았다.
그럼 그 컨테이너 박스는 어디로 갔을까? 저자에게는 수수께끼가 두 개 있었다. 유골 컨테이너 박스의 행방과 김정은 전용기에 대한 수수께끼였다.2014년 10월 4일은 인천 아시안게임이 끝나는 폐막일이었다. 상식을 초월한 사건이 그날 발생했다. 북한 권력 3인방이었던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이 김정은 전용기를 타고 인천에 와서 하루종일 하품만 하다가 폐막식에 얼굴을 비친 후 북으로 돌아간 사건이다. 참가국 관리들은 개막식에 참석하지 폐막식에 오지 않는다. 권력 3인방이 함께 김정은 전용기를 타고 왔다는 것이 정상은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 하는 것이 늘 수수께끼였다가 어느 날 무릎을 쳤다.
컨테이너에 실린 430구의 공화국 영웅을 정중히 모셔 가려고 왔던 것이다. 이 직감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있다. 2014년 9월 19일부터 열리는 아시안게임에 북한은 시큰둥했다. 그런데 청주 유골 430구가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나온지 10일 지난 5월 24일, 갑자기 북한이 부산을 떨면서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겠다고 대시해 왔다. 이에 대해 미국 Fox 뉴스는 북한의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보도까지 냈다. 2014년 7월 17일 판문점에서 남북한 실무접촉이 있었다. 남측에서는 권경상(아시안게임 조직위 사무총장 겸 청산실장), 정기영(조직위 국제본부장), 김영일(조직위 자문위원)이 나갔고, 북측에서는 손광호, 장수명, 고정철이었는데 이 세 사람은 1980년 5월 광주 현장 사진에 얼굴이 들어 있는 광수들이었다. 2014년 8월 17일, 북한의 통전부장 김양건이 뜬금없이 김대중 사망 5주기를 기념하는 화환을 증정하겠다며 간첩보다 더 붉은박지원, 임동원, 김홍일을 찍어 개성으로 와서 화환을 받아가라 했다. 아마도 430구가 담긴 컨테이너를 실어갈 방법을 의논했을 것이다. 2014년 8월 19일, 조 추첨 명목으로 북한 대표단이 8명씩이나 인천에 또 왔다. 구체적인 현장검증을 하러 왔을 것이다. 10월 4일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이 오자 청산실장 권경상 등이 황병서를 밀착 수행했다. 청산실장은 북한 선수들의 짐을 챙겨주는 부서장이다. 저자의 해석으로는 430구는 결국 북으로 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1979년 10월 26일 밤의 역사로부터 전두환 대통령이 마녀사냥을 당할 때까지의 모든 역사는 저자의 소설 [옥중 다큐소설 전두환]에 정리돼 있다. 저자의 추리가 맞다면 청산실장 권경상은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인터넷 검색에 걸리는 굵은 인물이다. 박지원과 임동원 등도 알고 있을 것이다.
무엇이 사기인가?
1. 5.18 세력은 북한이 주도한 게릴라전에 부화뇌동한 반국가 폭동을 1215년 영국의 마그나카르타에 맞먹는 세계 민주화의 금자탑이라 자평하면서 대한민국 역사의 주인공으로 행세하고 있다. 광주가 이승만 등 역대 독재 정권에서 신음하던 국민들에게, 민주주의와 자유를 찾아주기 위해, 전두환 군부 세력에 저항하여 목숨을 바쳐 획득한 민주화이기 때문에 전 국민은 자자손손 자손만대에 걸쳐 광주시민에 감사하고 세금을 내서 예우를 갖춰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 광주 판사들의 판결문 내용이다. 조선은 아름다운 나라로, 조선왕들을 선군으로 미화하기 위해 이완용이 희생양이 되었듯이, 5.18이 성스러운 민주화 운동이 되려면 전두환을 희생시켜야만 했다.
2. 북한의 전쟁범죄를 은닉시키기 위해, 광주의 피해가 북한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엄군에 의해 발생했다며, 계엄군을 살인 집단이요 강간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다. 그 어느 나라 국민이 자기들을 지켜주는 국군을 저주하며 살인 집단, 강간 집단으로 매도하는가? 이 자체가 조국을 반역하는 반국가세력의 사기인 것이다.
3. 5.18과 광주가 정치인들의 메카가 돼있다. 5.18은 헌법과 대통령 위에 군림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유세기간 중 광주 묘역에 찾아가 남다른 애정과 존경의 제스처를 보였고, 이후 틈나는 대로 5.18을 헌법 전문에 기재하여, 헌법을 지배하는 정신으로 기리겠다고 약속했다. 여당 의원이나 야당 의원이나 모두 5.18 앞에서는 경의를 표한다. 5.18 단체와 광주가 대통령 위에 군림한다. 5.18 유공자는 해가 갈수록 늘어난다. 아마 6천 명 정도로 늘어났을 테지만 일체 발표가 없다. 그런데 유공자를 해마다 선정하는 권한은 광주시장에 있다. 광주시장이 5.18 유공자를 선정하여 대통령에 통보하면 대통령이 선정된 유공자들에 혜택을 제공한다. 대통령 위에 광주시장이 군림해 있다는 것을 이보다 어떻게 더 입증할 수 있을까! 헌법은 대통령 위에 있다. 5.18은 곧 헌법이다. 따라서 광주시장은 대통령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대통령의 논리인 것이다.
4. 5.18은 건국을 부정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등의 역사는 반역의 역사이고 오로지 5.18 민주화를 신봉하는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만이 양심적이고 정통성 있는 대통령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앞으로 대한민국 정치는 민주화 세력만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 민주화 세력의 신앙이고 주장이다.
5. 5.18 유공자 중에는 당시 광주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 더 많다. 언론인, 예술인, 정치인, 대학 총장, 종교인의 85%가 가짜유공자인 것으로 일간지 스카이데일리에 의해 조사돼 있다. 국민들은 이들에게 세금을 바치고 있지만, 국가도 광주시청도 유공자 숫자가 얼마인지, 무슨 공적을 쌓아 유공자가 되었는지 전혀 밝히지 않는다. 공개하라고 정보공개 청구를 하고, 소송도 많이 했지만, 유공자 수와, 유공자 이름과, 유공 공적은 절대 비밀로 취급돼왔다.
헌법에는 평등권이 기재돼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이 헌법 위에 군림해 특별한게 비밀대접을 받는 귀족집단, 세도집단이 있다. 이것이 무슨 민주주의 국가인가? 일본에게 물어보자. 일본에서도 이런 몰상식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지를!
6. 5.18은 전라도 산업으로 역할해 왔다. 전라도는 국가 예산을 확보하는데 최우선권을 갖는다. 공항을 중복해 지어도 예산을 주고, 사업의 타당성과 관계없이 전라도가 달라하면 이의를 달지 않고 예산을 배정한다.
7.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치외법권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현 대통령은 국내 행사에서나 UN 등 국제 행사에서 '자유'라는 말을 한 번에도 수십 차례 반복하지만, 국민들은 5.18 세력에 의해 표현에 대한 자유를 억압받고 있다. 국회는 2021년 1월 5일부터 시행되는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제8조에, 5.18에 대해 광주가 인정하지 않는 발언을 하는 국민에게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처벌대상자를 찾기 위해 광주시청에는 인터넷을 검색하는 공무원들이 별도 배정돼있다. 이들이 광주 경찰에 고발하면 강원도 사람도, 인천사람도 광주에 가서 조사를 받는다. 대학교 수업 과정에서 5.18에 대해 조금만 비우호적인 강의를 해도, 일부 학생이 녹취하여 광주에 보내면 5.18단체들이 떼로 몰려와 대학 총장과 재단 이사장을 압박하여 교수를 퇴출시킨다. 이렇게 직장을 잃은 교수들과 고소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받은 교수들이 많이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대한민국에 특수 귀족 조직이 존재하고 귀족 지방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나라인지 묻고 싶다.
사기는 어떤 식으로 쳤는가?
5.18 사기는 권력과 폭력의 수단으로 이루어졌다. 2002년 8월 16일, 저자는 동아일보 5단 광고에 의견을 실었다. 3.500자의 컬럼형 광고문에는 35자로 구성된 문장 한 개가 있었다. ‘5.18은 소수의 불순분자와 북한 특수군이 순진한 광주시민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었다’ 이 문단을 트집 잡아 2002년 8월 20일, 5.18 부상자회 회장 김후식이 11명의 어깨를 서울로 데려와 충무로 5층에 있는 저자의 사무실에 침입해 기물을 부수고, 건물주에게 사무실을 회수하도록 압박했다. 다행히 중부경찰서 경찰관이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피신하라 해서 화는 면했다.
이어서 안양에 있는 저자의 아파트로 찾아와 대문을 부수고, 차량을 부수고, 동네 사람들 앞에서 난동을 부리고 갔다. 경찰은 피신하라고 가족에게 알려준 것 말고는 폭력 행위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 누구도 광주 앞에서는 오금을 저려 했다.
2002년 8월 24일, 광주 경찰 4명이 구두를 신고 저자 거소의 거실로 들어와 가족이 울부짖는 가운데 저자에게 뒷수갑을 채우고 개 끌고 가듯 끌고 갔다. 신사적으로 가자고 말하면 순순히 갈 터이지만 증오에 찬 매너가 참으로 고약했다. 뒷좌석 가운데에는 저자를 태우고 양쪽에 경찰이 앉았다. 운전은 김용철, 조수석에는 박찬수, 양 옆에는 이일남과 이규행이었다. 저자보다 30세가량 연하인, 아들뻘 되는 광주 서부 경찰서 경찰관들이었다. 6시간 동안 수갑을 뒤로 차고, 쉴새 없이 이들 4명으로부터 쥐어박히고 욕을 들었다.
"니미씨발 좇같이, 뭐 이런 개새끼가 다 있어. 야 이 씨발놈아, 네깟놈이 무얼 안다고 감히 5.18을 건드려. 이 씨발 개새끼 가다가 목을 비틀어 파묻고 가야 한당께, 뭐 이런 싸가지 없는 개새끼가 다 있어. 야, 이 새끼야, 너 이회창으로 부터 얼마나 받아쳐먹었냐, 이런 새끼가 무슨 대령 출신이야.. 이런 새끼가 무슨 육사 출신이야, 대령질 하면서 돈을 얼마나 챙겨 쳐묵었겠냐, 부하 꽤나 잡아 쳐먹었을 것이다. 이런 쥐새끼 같은 새끼, 우익 새끼들은 모조리 죽여 버려야 한당께. 너 이 새끼 가다가 죽을 줄 알아. 너를 때려죽여서 파묻어도 증거가 남냐, 증거가?..." |
저자는 이들이 상관들로부터 전화를 받을 때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을 듣고 이들의 이름을 외우고 또 외웠다.
담당 최성필 검사는 저자가 도착하자마자 손을 높이 쳐들고 곧 내려칠 듯이 달려들었다. "당신이 뭘 알아, 당신 이회창으로부터 얼마나 받아쳐먹었어. 돈 벌려고 한 짓 아냐? 이 개새끼 수갑 풀지 말고 밤새워 조사해" 뒷수갑은 그 후 두 시간 후에 풀렸다. 풀어주었지만 감각이 없었다. 등, 어깨, 손가락 모두가 마비 상태였다. 이후 여성 검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치마폭을 날리며 들어왔다.
"어이 좀 보소, 이자가 지만원이라는 그 자랑 가엥~, 이보소, 얼굴 좀 들어보소, 당신 눈에는 광주시민 전체가 빨갱이로 보이요 엥~ 당신 눈에는 여기 있는 우리가 빨갱이로 보인당가요엥~ 이자도 인간이단가 잉~ 참말로다잉, 광주가 아니었다면 한국에 무신 민주주의가 생겼겠소, 어림도 없지 잉~ 어이 이 보소. 당신이 시스템 공학박사요엥? 시스템 공학이랑게 잇당감~ 어디서 학위를 받았소? 처음 듣는긴데 이거 가짜 아닝가벼. 좀 알아봐야겠구먼이라. 어이 좀 알아보소." |
영장실질심사에 나선 정경헌 판사(1957, 전남 함평)는 저자의 변호를 맡은 광주 출신 변호사 이근우에게 탁자를 치고 도끼눈을 떴다. "변호인은 광주시민들에게 무신 욕을 들으려고 서울 사람의 재판을 맡았소?" 자기보다 21세나 많은 광주 거주 변호인에게 무안을 주었다. 탁자를 치면서 저자를 한동안 노려보았다. 절해의 고도로 납치돼 간 처녀의 심정이 아마 그때의 저자 심정이었을 것이다. 거기서 징역 10월 형을 받았다.
이 과도한 반응이 의구심을 자극했다. 저자는 10년이든 20년이든 5.18의 진실을 캐겠다고 결심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변호인단으로부터 수사 및 재판기록 18만 쪽을 빌렸다. 7년 동안 연구하여 결과는 1,720쪽 분량의 4부작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을 저작했다. 이 책의 결론은 보다 명확했다. ‘5.18은 북한이 주도한 국가전복 폭동이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5.18 부상자회 등 단체들이 고소를 했다. 이번에는 저자의 인터넷 글에 동조하는 네티즌들이 많아서 광주 검사가 모두를 광주로 끌어갈 수 없었다. 매우 다행하게도 저자 역시 관할 지역인 안양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2011년 1월 19일 무죄판결을 받았다. 무죄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5.18 관련자들이 수천수만 명이기 때문에 유독 고소자들의 명예가 특별히 더 훼손됐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저자의 책은 학술 목적으로 저술한 것이지, 고소인들의 명예를 훼손시키기 위해 저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보다 약한 표현인데도 광주 법원이 재판하면 징역 10개월이 되었고, 보다 강한 표현인데도 안양법원에서 재판하면 무죄가 된 것이다. 이래서 모든 5.18 사건을 광주법원이 끌어다 재판을 하려고 온갖 행패를 부려 왔던 것이다. 이 무죄판결은 서울고법을 통해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이것이 뉴스가 되었다. 사람들은 저자가 또 감옥에 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무죄라니! TV조선과 채널A가 번갈아 출연을 제의해 왔다. 저자는 1980년 5월 21일 상황을 간단히 소개했다. 그랬더니 남녀진행자 모두가 동시에 "그건 북한 특수군이 한 일이지 광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입을 모았다. 이에 5개월 동안 두 방송국은 경쟁적으로 탈북자들을 초청해 북한 주민에게 북한에서는 5.18이 어떻게 알려져 있는지를 물어보는 프로를 진행했다. 이런 방송을 5개월이나 하니까 5.18은 북한소행이었다는 여론이 확산됐다.
광주시장 윤장현이 다급해졌다. 2013년 5월 24일 광주 단체 338개를 규합하고 광주 소재 변호사 20여 명을 규합하여 '5.18역사왜곡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일명 ‘지만원 대책반’이었다. 하지만 '북한군 개입' 주장은 대법원에서 이미 죄가 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5.18의 주역이 북한군이었다면, 광주 현장 사진 속 주역들이 북한군 얼굴이어야 한다. 하지만 얼굴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저자 수준에서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다 2015년 5월 3일, 한 네티즌이 2010년 5월 17일, 평양 노동자 회관에서 거행된 5.18, 30주년 기념 행사장 로열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영락없는 광주 현장 대표적 상징 인물의 얼굴과 똑같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미 정보기관에서 안면인식 업무를 수행했다고 자신을 소개한 필명 '노숙자담요'(이하'노담')가 전문가적 매너로 두 개의 얼굴이 북한 농업상 김창식이라며 어째서 두 얼굴이 한 사람의 얼굴인지를 특징점을 가지고 분석해주었고 부위와 부위를 연결하여 구성된 기하학적 도면에서 선의 길이와 선 사이의 각도가 일치하기 때문에 두 얼굴은 한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해주었다. 네티즌들은 이런 설명 없이도 "영락없이 닮았네, 맞네" 감탄들을 했다. 맨 처음 발견된 레이저 시선의 사나이가 1광수가 됐다. 네티즌들은 비슷한 얼굴을 어떻게 찾아내는지 잘도 찾아냈고, 찾아낼 때마다 노담에 검증을 신청했다.
광수라는 별명은 네티즌들이 붙여주었다. 그 유래는 2009년 10월, 탈북 군인들이 구성한 '자유군인북한연합'이 16편의 탈북자 수기 450쪽 분량을 책으로 엮어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데 있다. 5.18 당시 북한TV에서는 다른 프로들은 생략하고 광주 현장을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방송했고, 이는 군 내무반에서도 관람했다. 갑자기 한 병사가 화면을 보면서 "야, 저기 광수 있다, 광수. 기관총을 차에 올리고 광주시가를 주름잡는 저놈이 광수야 광수~" 이 대목을 읽은 네티즌들이 북한 얼굴이 확인되는 순서에 따라 제1광수, 제2광수... 661광수까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실제로 광주 현장 사진에서 캐리버 50 중기관총을 트럭 위에 장착하고 보니트 위에는 타이어 바퀴로 요새를 쌓은 상태에서 광주시가를 달리는 3인 1개 조가 2010년 5월 17일 평양노동자회관에서 성대하게 거행된 5.18 기념식 식장 로열석에, 광주 차량에 서 있던 그 순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들이 1, 2, 3 광수로 지정됐다. 제3광수의 이름이 김광수, 훗날 체육인으로 출세한 사람이다.
광주시와 5.18 단체 6개월 동안 광수 사진전 열어
광수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흥분한 네티즌들 가운데는 인터넷 신문 ‘뉴스타운’이 있었다. ‘뉴스타운’이 호외지 1, 2, 3호를 각 10만 부씩 발행하였고, 이는 전국 네티즌들에 의해 방방곡곡에 배부됐다. 이어서 [5.18 영상 고발]이라는 A4사이즈의 광수 화보책이 발간되어 무료 배포되었다. "영락없이 닮았네~" 실제로 김성웅 목사님은 광수 사진을 크고 정교하게 확대하여 광화문 종각 앞에서 주말마다 사진들을 걸어놓았다. 감탄하지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 감탄의 표현들은 한동안 신백훈 박사가 한동안 유튜브 영상에 담아 방송했다. 모든 표현의 대명사는 ”영락없네“였다. 감탄과 함께 광수 여론이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자 광주시와 5.18 단체들은 광수 사진들을 확대하여 광주의 수많은 번화가에서 사진전을 열면서 "5.18 영웅의 주역들은 나서달라" 호소했다. 2015년 10월부터 2016년 3월까지 6개월 동안 사진전을 열었지만 아무도 나타난 사람 없었다. 그로부터 17년 전인 1999년 5월 18일, 방송 3사가 광주 사진 속 주역 얼굴 4명을 하루종일 스퍼트뉴스로 내보내며 해당하는 영웅은 나서 달라 했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까지를 보면 현장 주역은 광주에 없다는 것이 된다.
다급한 광주는 기상천외한 음모를 꾸몄다. 적당한 사람을 16명 찾아내, "변호사들이 다 알아서 해줄 테니 당신이 제00 광수라 우겨라" 형사 소송과 민사소송에 내보낸 것이다. 이 가운데는 90대 노파와 해남의 여자 농군인 80대 노파도 있었다. 이들은 인터넷에 접근할 군번도 아니었고, 귀가 어둡고 눈이 어두운 데다 말귀 자체를 알아듣지 못하는 노파들이었다. 이 16명은 경찰조서에 ‘5.18기념재단 간부가 알려줘서 자기가 00광수로 지정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진술했다. 이 둘은 흔들린 사진을 내놓고 '00광수가 나'라고 주장했다. 누구든 이 사진만 보면 육안만으로도 내가 00광수임을 알 것이다. 내가 내 얼굴 모르겠느냐?" 이런 주장을 놓고 광주 판사, 주사파 판사들은 ”광주 고소인들의 주장이 자세하고 구체적이며 모순이 없는 진실한 사실“이라는 문장으로 판결서를 썼다. 판사들이 인간 범주에 속해있지 않았다.
중간에 재판을 맡던 김경진 판사가 19세 고2 중퇴자 다방 종업원이었던 박철에게 물었다.
판사: (흔들린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흔들린 사진을 보고 증인의 사진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요?
박철: 장발했던 사실이 저임을 입증합니다.
피고인 측 변호사가 병역 미필자인 20세 박선재에게 물었다.
변호인: 증인이 제출한 얼굴 사진이 어째서 제8광수와 같은지 설명할 수 있나요?
박선재: 육안만으로 보아도 나인데 무슨 설명이 필요합니까.
변호인: 제8광수는 약실을 검사하고 있고, 옆 사람은 방아쇠 검사를 하고 있지 않느냐?
박선재: 둘다 아닙니다. 도청에서 격발하면 큰일납니다.
동문서답, 한마디로 개념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주사파 판사들: 알리바이 없어도 광주인의 진술은 모두 진실한 사실이다. 지역 차별, 주사파 판사들에는 광주인은 귀족, 타 지역인은 천민이었다.
목포에 거주하는 90대 중반 노파 김진순은 1980년 5월 23일, 도청 내에서 관을 잡고 우는 여인이 자기라고 주장했다.이는 광주 변호사들이 5.18 기념재단과 함께 만들어낸 음모였다. 5.18기념 재단 홈페이지 사이버 추모 공간의 망 이용충 난에는, 김진순이 아들 이용충의 사망 사실을 경찰로부터 통보받은 날이 1980년 6월 30일인 것으로 기록돼있다. 경찰서에서 아들의 유품과 사진을 유리관에 진열해 놓고, 와서 확인하라는 연락을 해주어서 유리관 속 유품을 보고 아들 이용충의 사망 사실을 6월 30일에 알았다는 기록인 것이다. 그런데도 주사파 판사는 5월 23일 아들 이용충의 관을 잡고 우는 여인이 김진순이라고 판결했다. 타 지역 국민은 사람 취급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해남의 여성 농군인 80대 중반의 노파 심복례는 1980년 5월 23일, 도청에서 자기 남편 김인태의 관을 잡고 우는 여인이 바로 자기라고 주장했다.그런데 5.18 기념재단 홈페이지에는 심복례가 남편이 사망한 사실을 군청 직원으로부터 통보받은 날짜가 1980년 5월 29일이었고, 망월동 가매장 장소에서 부패한 남편의 모습을 확인한 날짜가 이튿날인 5월 30일이라 기록돼 있다. 5월 30일에 땅속에 가매장된 남편을 처음으로 확인한 심복례가 5월 23일 남편의 관을 붙잡고 울었고 주장하는 것이 진실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법관이 아니라 조폭인 것이다. 그래도 광주 판사와 주사파 판사들은 줄줄이 심복례의 주장이 진실한 사실이라고 판결했다. 점령군 판사도 이렇게 얼굴이 무쇠솥뚜껑처럼 두껍지는 않을 것이다.
박남선, 제71 광수 황장엽이 자기라고 주장했다. 제71 광수가 자기여야 하는데 지만원이 황장엽과 비슷한 얼굴을 창작해 자기 몸에 합성시켰다고 주장했다. 피고인 측에서 모 신문사 사진DB의 주소를 제시하고, 사진이 변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는데도 막무가내 판사들은 박남선 주장이 진실한 사실이라고 판결했다. 속 터져 죽으라는 노골적인 테러행위였다.
서울 판사 김경진 재판장이 판결했다면 무죄였을 것이다.
이 사건 1심 판사는 네 사람이었다. 세 번째 판사는 서울 출신 김경진 판사였고 네 번째 판사는 광주일고 출신 김태호, 선고 판사였다. 세 번째 판사 김경진 재판장은 2018년 8월 16일 제4회 공판준비기일 조서에 사실상 이 재판의 판결과도 같은 명령을 검사에게 내렸다.
① 광주 현장 사진 속 얼굴이 고소인들의 얼굴과 동일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를 제출하여 입증할 것을 촉구한다.
② 피고인은 광주 현장 사진 속 얼굴이 고소인들의 얼굴이 아니라 북한군 얼굴이라고 주장하는데, 검찰은 무슨 이유로 공소장에서 고소인들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고 피고인의 주장을 허위로 판단하여 공소장 기재를 하였는지 그 논리적 근거를 제출할 것을 촉구한다.
이것이 정답이었다. 만일 김경진 판사가 선고 판사였다면 피고인은 100% 무죄였을 것이다. 이후 검찰은 이에 대해 아무런 자료를 내지 않았다. 1심 선고자 김태호 판사는 광주일고 출신이었고 2심 판사는 국제법 연구의 김예영, 장윤선, 장성학, 3심 주심은 노정희, 판사 이홍구였다. 이홍구 대법관은 1985년 깃발 사건 관련 국보법을 위반하여 1심 3년 징역형을 받았다. 저자는 바로 이런 공산주의 판사들로부터 점령군식 판결을 받은 것이다. 이들 판사들의 판결문 요지는 가히 해학적이다.
① 5.18이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은 1997년 대법원 판결과 5.18관련 법률과 역사적 평가에 의해 확정돼있다. 따라서 북한군은 절대로 광주에 오지 않았다.
② 따라서 광주 현장 사진 속 인물들은 100% 다 광주시민들이고, 북한 얼굴이라는 피고인의 주장은 의도적인 허위다.
③ 제388 광수를 북한의 양정성장관 문응조(당시 38세)라 지칭한 것은 광주 다방 종업원 박철(당시 19세)을 특정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는 5.18 유공자 박철의 명예를 훼손한 행위다.
광주시민은 귀족 대우, 피고인은 노예 취급
한 인물에 대해 노담은 5~6쪽(A4지)에 걸쳐 전문용어와 전문가적 매너로 왜 현장 얼굴이 북한 사람 얼굴인지를 분석했고, 또 다른 5~6쪽에 걸쳐 어째서 현장 얼굴이 고소인의 얼굴이 아닌지를 분석했다. 이 분석이 정확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면 상당한 몰두 과정을 통한 학습이 필요하다. 하지만 웬만한 눈썰미만 있으면 금방 판박이라는 것을 느낌으로 안다. 그렇다면 고소인들도 이에 상응하는 방법으로 어째서 현장 얼굴 제00광수가 자기 얼굴이어야 하는지를 객관성 있는 논리와 얼굴 비교 분석 요령에 대해 근거를 제시해야 했다. 그런데 광주시민들은 "맨눈으로만 보아도 누구나 다 00광수가 내 얼굴임을 알 수 있다. 내가 내 얼굴 모르겠느냐" "내 얼굴인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냐?", "장발이 똑같지 않느냐?" 이렇게만 주장했다. 그런데도 판사들은 광주시민들의 주장이 구체적이고 모순이 없다며 귀족 대우를 한 반면, 노담의 분석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노담은 광수 얼굴과 북한 얼굴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까지만 보여줬을 뿐, 구체적인 수치가 없다고 했다. 재판부의 영상분석 논리도 제시했다. 두 사진이 같은 사람인지를 판단하려면, "촬영 장소, 촬영 시간, 자세, 시선, 의복, 두발 상태"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지, 특징이니 기하학적인 분석이니 하는 것은 얼굴 분석의 방법이 될 수 없다는 막말도 했다. 무식무도한 막말이었다. 피고인에게는 인격 자체가 없다는 막말인 것이다. 영상 비교 과학의 핵심 논리는 특징과 얼굴 지문이지 촬영 장소, 시간, 자세, 시선, 의복, 두발 상태가 아닌 것이다.
국과수 디지털 분석과 문기웅 감정관의 감정
검사는 비교적 영상이 또렷한 얼굴 사진 2개를 2016년 6월,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했다. 국과수 '문기웅 감정관'의 답이 나왔다.
① 해상도와 계조가 낮아 특징점 비교가 어렵다.
② 키, 체형 등 신체 특징점과도 연결해 감정해야 하는데, 얼굴만으로 판독하는 것은 어렵다. (이는 코미디다)
③ 두 사진의 촬영 시간이 30년 이상 차이가 있어서 비교 자체가 곤란하다.
④ 개략적 얼굴 형태는 유사해 보이고 턱의 발달 형태가 비슷해 보이지만 눈썹의 가장자리, 코끝, 아랫입술은 차이가 있어 보인다. ②항은 해학 그 자체다. 얼굴을 인식하는 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몸체 사진이 있어야 한다는 국립과학 연구원 문기웅 감정관의 감정서는 세계젹인 코미디로 기억돼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얼굴인식 과학을 전혀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 감정사 노릇을 하는 것이다. 국과수는 국가 최고의 과학 능력을 동원하라는 기관이지. 스스로가 최고인 척하여 생사람 잡으라고 설치한 기관이 아닐 것이다.
검사의 판단
사진 기술이 발달해가고 있다. 1980년의 사진은 화질이 조악할 수밖에 없다.
② 이 조악한 화질을 가지고 고화질 사진과 비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노담의 얼굴 비교분석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신뢰할 수 없다.
③국과수 감정 결과에 동의한다.
한마디로 무식이 유식을 때려잡는 곳이 검찰이었다.
국과수 감정과 검찰 주장이 황당한 이유
① 해상도의 발달은 솜털과 땀구멍 등을 묘사해 낼 수 있는 성격의 것이지 얼굴의 특징을 발달시키거나 부위와 부위와의 거리 및 각도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두 얼굴을 비교 분석하는 수단은 특징이고 부위와 부위 간을 연결한 얼굴 지문이다.
② 2017년 KBS 뉴스는 25년 전의 탈옥수를 얼굴로 체포했다는 뉴스가 있다. 탈옥한지 25년 만에 자신의 운전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 덜미가 잡혔다 한다. 국과수와 검사의 주장대로라면 이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③ 2020년 뉴스1에는 안면인식 기술로 두 살 때 헤어진 친부모를 32년 만에 찾아 주었다는 뉴스가 있다. 2세의 아이가 34세 때 부모를 찾은 것이다. 검찰은 이 뉴스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③ 2023. 동아일보는 우리나라 보안업체 에스원이 칠흑의 밤에 마스크를 쓴 얼굴이 누구의 얼굴인지 인식하는 확률이 99%인 안면인식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도했다. 칠흑밤 카메라에 계조가 무엇이고 해상도가 무엇인가?
④ 2023. NBN뉴스는 어린 시절의 얼굴로 176명을 가족에게 보내주었다는 보도를 했다.
⑤ 신한은행은 2023년 5월 11일부터 얼굴로 결제를 한다는 뉴스가 있다.
⑥ 중국에서는 5만 콘서트홀 입구에 설치된 CCTV에 비친 얼굴이 수년 전의 범인이라는 것을 3초 이내에 찾아냈다는 보도가 있다.
광주의 민사재판 판사들과 서울의 주사파 판사의 논리
① 피고인은 현장 사진 속 얼굴이 북한 간부들의 얼굴들과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비슷한 사진들을 나란히 대비시켜놓고, 이를 근거로 광주에 북한군이 왔다는 허위사실을 지어냈다.
② 현장 사진 속 얼굴은 모두 광주시민의 얼굴일 수밖에 없다. 피고인이 139 광수를 김정일 첫부인 홍일천이라 지정한 것은 곧 해남의 80대 노파 심복례를 특정한 것이고, 피고인이 62광수를 북한 인민군 원수 리을설이라고 지정한 것은 곧 목포에 사는 90대 노파인 김진순을 특정한 것이 된다. 이는 존경받아야 할 5.18 유공자에 대한 명예훼손 행위다.
③ 제출한 사진이 흔들려 식별이 잘 안돼도 장발이 같다고 하면 같은 얼굴이다.
④ 광주시민이 자기가 00광수라고 주장하면 알리바이에 관계없이 진실한 사실로 보아야 한다.
⑤ 얼굴 비교분석은 특징점 분석과 얼굴 지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시선 ㉡자세 ㉢복장 ㉣두발 상태 ㉤촬영 시간 ㉥촬영 장소를 종합하여 판단해야 한다. 이상 6개 요소로 판단해 보니 노담의 얼굴 비교분석은 전혀 신뢰할 수 없다.
이 판결은 두고두고 반복적으로 세상에 알려져야 할 것이다. 저자가 2년의 징역형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막무가내식 관심법에 의한 것이다. 2016년 5월 광주시민 50여 명이 재판정에 와서 퇴장하는 저자에게 몰매를 때렸는데도 그들은 기소하지 않고 저자에게만 상해 폭행이라는 기상천외한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이영남 검사였다. 이것이 지역 차별이고 이념 차별의 적나라한 증거이고, 검찰의 만행인 것이다. 이런 판결에 의해 저자는 광주에 있는 사기꾼들에 도합 2억 4천만 원을 배상해주었고, 또 다른 소가 1억 8천만 원의 사건이 1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두 개의 얼굴이 비슷하게 보인다는 의미
판사들은 저자가 광주 현장 사진의 얼굴과 북한 간부의 얼굴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점에 착안하여 서로 닮은 얼굴을 대비시켜놓고, 이를 근거로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는 주장을 폈다고 판결했다. 이는 모략이다. 저자는 피고인 자격으로 선-문헌연구, 후-사진 분석이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하고 어필했다. 북한군이 5.18을 주도했다는 연구 결과는 2008년에 저술한 4부작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에서 밝혔고, 이 결과에 대한 표현에 대해 2012년 대법원에서까지 무죄를 받았다. 영상분석은 2015년 5월 5일 제1 광수가 확인되는 순간에서부터 시작됐다. 주사파 판사들은 북한군 개입을 부정하기 위해 한국 사회에 아직 덜 알려진 얼굴 비교 분야를 약점 삼아 공략한 것이다. 문화일보 이현종 논설위원은 최근 저자가 비슷한 얼굴 몇 개를 근거로 북한군 개입을 주장하고 있는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비하했다.
신한은행이 얼굴로 결제하는 논리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객이 카운터에 앉으면 카메라가 얼굴을 촬영한다. 이 얼굴은 100만 명의 거래자 얼굴 이 저장돼 있는 데이터 베이스(DB)에 있는 한 점씩의 얼굴과 1:1로 대조된다. 같은 얼굴을 찾아내면 그 얼굴을 DB에서 꺼내내 데스크 앞 고객의 얼굴과 나란히 비쳐준다. 이렇게 비춰진 두 얼굴은 머리 스타일을 바꿔도 비슷해 보이는 한 사람의 얼굴인 것이다.
세상의 그 누구에게 사진 한 장을 주면서 이와 비슷한 얼굴을 구해오라 하면 10년이 가도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컴퓨터는 비슷한 얼굴을 1~2초 만에 찾아낸다. 그리고 컴퓨터가 찾아낸 비슷한 얼굴은 동일인이다. 노담 역시 광주 현장 얼굴 하나를 오려내서, 그것을 북한 인물 사진 DB와 대조시켰다. 컴퓨터가 북한 인물 DB에서 찾아낸 얼굴이 곧 북한 간부의 얼굴이며, 광주 판사와 주사파들이 판결문에 기재한 "비슷한 얼굴"인 것이다. 광주 판사, 주사파 판사의 판결문 ‘비슷하게 보인다는 점에 착안하여’는 곧 동일인이라는 뜻이다. 영상분석의 문외한이 칼을 듣고, 영상분석 학습자와 전문가를 마구 베어버린 것이다. 이는 만행이다.
저자에 이토록 협작 행위를 멈추지 않는 이유
민사소송 관할권도 서울지역 법원에 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재판에 지겠으니까 광주의 세도를 앞세워 광주 법원이 독점해 왔다. 이 자체가 채신없는 행위다. 모든 민사소에서 저자가 패한 이유는 '5.18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판사들의 잣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2019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북한군 개입]여부를 4년 동안 조사한 '5.18 진상규명 조사위원회'는 북한개입 여부를 밝히지 못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잣대로 저자에게 광주 판사, 이념 판사들이 2억 4천을 뜯어갔고, 감옥살이를 시키는 것이다. 김구가 아무 죄 없는 일본인 행상 스치다 조스케를 몽둥이와 돌멩이로 때려죽였다. 광주 판사, 이념 판사들이 김구족이고 저자가 스치다 조스케가 된 것이다. 광주와 이념 세력이 오로지 저자를 이토록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은 5.18 성역을 지키려는 단말마적 발악일 것이다. 5.18을 헌법 전문에 실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사상누각이 무너질까 두려워서일 것이다. 5.18을 헌법 전문에 넣으려 하는 것, 저자를 집중 공략하는 것, 유공자 명단과 공적을 비밀에 붙이는 것 모두가 모래성이 무너져 내릴 것이 두려워서일 것이다.
이 세상에 이와 같은 집단 단위의 사기극이 동서고금에 또 있을까? 광주시는 2019년의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를 유치할 욕심으로 2011년 국무총리 서한과 국무총리, 문체부 장관 사인까지 위조했다. 그렇게 해서 유치한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는 허점투성이였고, 국민은 억울하게 세금만 바쳤다. 광주시라는 공공기관이 국무총리 사인까지 위조해서 '수영장 시설을 중앙정부가 보증한다'는 가짜 제안서를 만들어, 국민에게 억울한 덤터기를 씌우는 사기행위를 감히 어떻게 자행할 수 있을까, 이것이 대한민국을 호령하고 있는 광주의 민낯인 것이다. 더욱 해학적이고 비극적인 것은 대통령을 위시한 한국의모든 정치인들이 이 사기의 고장 광주를 신격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5.18을 놓고 광주시, 광주단체, 광주 판사들이 펼치는 사기는 세계적으로도 상상을 초월하는 요마악귀들의 음모가 아닐 수 없다. 위안부를 가지고 일본을 모략하고, 일본에 간 근로자들을 강제징용이라고 모략하는 행위 정도는 이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될 것이다.
5.18 유공자 명단과 공적조서가 공개되면 이 사회는 분노가 하늘을 찌를 만큼 폭발하여 천지개벽에 이를 것이다. 이로 인한 사회 혼란이 두려워 정부가 광주에 질질 끌려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5.18 세력은 광주의 극히 일부다. 대부분의 광주시민들과 전남 사람들은 5.18 단체를 포함한 일부 5.18로 득을 보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있다. 또한, 5.18의 진실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광주 대부분의 사람들이고 전남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2002년 필자가 광주교도소에 던져졌을 때 감방에는 13명이 수용돼 있었다. 5.18을 모독했다 해서 감옥에 왔으니 몰매를 맞고 이지메를 당할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 방 전체 인원이 저자에 역성을 들었다. 이웃 조폭들이 오가며 ‘교수님’ 이라 ㅂ누르며 화장품을 넣어주었다. 5.18단체놈들은 조폭이고, 5.18유공자는 거의가 다 이웃 사기꾼들이 꿰어찼다며 욕들을 했다. 이것이 광주 시민일반의 정서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광주 조폭을 떠받들고 있으니 광주 시민들이 표를 주겠는가? 헛다리를 긁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바로잡을 때 비로소 광주와 전남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고, 국민 통합도 지역 통합도 가능한 것이다. 5.18로 이득을 보는 사기꾼들은 광주-전라인들의 극히 일부라는 사실을 위정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문명인이기는커녕 인성 자체가 철저히 파괴당한 음모의 악귀들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국민들의 상투를 옭아잡고 농락해가면서 적화시키고 있다. 이 세기적 세계적인 야만 행위를 모든 지구인들에게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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