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실의 탈북 과정 [탈북자들의 위험한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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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9-29 21:53 조회3,81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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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실의 탈북 과정>
[탈북자들의 위험한 가면]
탈북과정에 대한 요약
2012년 6월 11일,동아일보는 이렇게 기사를 썼다. 첫 탈북을 시도한 해는 2001년이었다. 9번 북송당했다가 9번 고문당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2006년 마지막 10번째 탈북했고, 딸과는 중국에서 2008년에 생이별했다. 중국 브로커에 속아 딸을 잃었다. 택시 운전사가 검문을 피한다며 이순실과 딸을 따로 태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사는 인신매매범이었다. 이순실은 5000위안(약 923,000원), 딸은 3000위안(약 554,000원)에 팔렸다,
2012년 9월 6일, 시카고 중앙일보는 이렇게 썼다. 드디어 10번째에 탈북에 성공하지만 중국 인신매매단에 의해 아이가 눈앞에서 3천원에 팔려갔다. 딸아이가 그렇게 울던 것은 처음이다. 저기 가서 만나자고 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아이를 하루라도 잊어본 적이 없다.
2012년 10월 4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화장실 밑으로 빠져서 변을 파는 구멍으로 나왔다. 상처에 똥독이 올랐다. 탈출한지 이틀 만에 다시 잡혔다. 감옥살이를 6개월 했다. 탈북은 먹기 위해 했지, 한국에 간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중국공안에 잡혔다. 애기 따로 엄마 따로 택시에 나눠 탔다. 사람들이 5천 위안과 3천 위안에 팔렸다고 하더라. 맨 마지막 탈북한 시점은 장마철이었다. 장마철에는 물이 많아 사람이 떠내려가니까 깊은 물에는 경비를 서지 않는다. 오로지 중국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애기 엄마 4명이 4살 미만짜리 애기들을 배낭에 메고 강을 건넜다. 나는 원래 신발이 없었다. 강 밑에 있는 돌멩이들에 물때가 끼어서 미끄러지면 끝장이기 때문에 새끼줄로 꽁꽁 묶었다. 건너자마자 중국공안에 잡혔다. 처음에는 엄마 아이 한 차에 태워가다가 갈림길이 나서자 검문소가 있다 하면서 어른과 아이들을 따로 분리해 따로 차에 태웠다. 갑자기 차 안에 함께 탔던 브로커들이 때리고 협박했다. 아이들은 3천 위안에 팔렸으니 찾을 생각하지 말고 입 다물라고 협박하며 마구 때렸다. 브로커들의 말로는 엄마들은 5천 위안에 팔렸다 하더라. 3일 동안을 달려 어느 농촌 집에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구경 와서 한 사람씩 선택해 간다는 것이었다. 4명은 다 도망을 쳤다. 도망치다 2명은 다시 잡혀갔고, 나를 포함한 2명은 성공했다. 산으로 가니 무덤 지키는 아버지가 저기 십자가가 있는 집으로 가라고 했다. 그 한인교회에서 여러 달 먹고 잤다.
2012년 12월 4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2살 된 딸아이를 업고 열 번째 탈북을 시도했다. 하나원은 2006년 12월에 이수했다. 현 남편과의 결혼은 2007년 10월 25일에 했다.
2013년 7월 23일에는 이런 말을 했다. 유독 나에게만 고문이 가혹했던 이유는 내가 당원이었고 부모의 출신성분이 좋았으며 국가로부터 많은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7번째와 8번째는 때리지도 않더라.
2013년 3월 19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네 번째까지는 홀몸으로(애가 없을 때니까) 탈북했다. 잡히면 중국에선 임산부로 대우해줬지만 북한에선 누구 종자냐고 해서 남편 이름 대니까 군인 자식이라 살려줬다. 나는 내 남편이 2군단 출신이라고 말했다. 한국 가다 잡힌 아주머니가 감옥에 들어왔는데 한국 가는 길 알려줘서 한국 가는 희망 잃지 않았다. 열 번 만에 탈북 성공했다. 2013년 7월 30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1997년부터 10년 동안 탈북해서 8번 중국에서 강제북송을 당했고 9번 만에 성공했다.
2014년 5월 20일에는 이런 말을 했다. 조국에 대한 배신감이 들었다. 세관다리 밑에서 5년 동안 꽃제비 생활을 했다. 그 때 탈북을 결심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탈북이라는 걸 몰랐다. 그냥 밀수꾼들이 왔다갔다하는 것을 탈북이라고 알고 있었다. 우리 같이 돈 없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장마당에서 아주머니들을 만나게 되었다. 철국이 엄마를 만나게 됐다. 둘이 끌어안고 통곡했다. 알고 보니 친구였다. 우리 중국 가자고 그녀가 제안했다. 겨울에 애기를 배낭에 업고 중국에 갔다. 길에 버린 언 사과를 게걸스레 먹고 있는데 공안요원들이 뒤로부터 다가왔다. 아기는 “엄마 나도 줘, 나도 먹을 래”, 공안요원들이 우리를 보더니 불쌍했는지, 태워가지고 변방대로 데려갔다. 거기에 3일 동안 있었다. 그들은 끼마다 하얀 쌀죽에 돼지고기 삶아서 주었다. 그리고 북한으로 보냈다. 북한 보위부 요원들이 난로 쑤시는 쇠꼬챙이로 지졌다. 코바늘로 손바닥을 고문했다. 1997년 혜산으로 올라가 5년 이후인 2002년에 첫 탈북을 해서 중국에 가서 돼지고기와 쌀죽을 먹고 북송됐다는 것이다. 1997년에 첫 탈북을 했다는 이전의 말과 다른 것이다.
2015년 8월 15일에는 이런 말을 했다. 중국에 가자는 결심했다. 겨울에는 엄청 추워 탈북 시즌이었다. 1-2월에는 외상으로 중국에 갈 수 있었다. 외상으로 한국에 보내 준 후 한국에 가면 정착금에서 뺏아간다. . . 탈북과 감옥 가는 일을 8번 계속했다. . 1997~2007년 10년 사이, 4년 동안 교도소 생활했다. 2007년에 8번째 탈북으로 감옥에서 출소했다.
2017년 5월 30일에는 이런 말을 했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10년간 8번 북송 당했다. 매번 감옥 갔다. 8번째 출소하는 날 다시 중국에 못 가게 하려고 오빠한테 인계했다. 오빠네 가서 올케, 큰 조카 모습 보고 더 이상 여기 못 있겠다 생각해 떠나기로 작정했다. 애를 데리고 중국에 가자 결심했다. 평산에서 혜산으로 다시 이동해 배낭에 아이를 담아 등에 업고 강에 들어섰다. 아이도 압록강 강 건너는 것을 알았다. 총에 맞고 잡혀 간다는 것을 알았다. 공포를 알았다. 아이가 배낭끈을 붙들고 부들부들 떨었다. 눈물을 꾹 꾹 참으면서 소리 내서 울지 못했다. “애기야 울자마라, 울면 군대가 총 쏜다, 절대 울지 마라. 우리 다 죽는다‘ 말했더니 애기가 ’알았어 엄마 알았어‘ 말했다. 숲속에 숨어있는 인신매매단에 잡혔다. 인신매매단이 강제로 빼앗자 아이가 엄마 손을 꼭 잡았다. 2살짜리가 그렇게 힘이 센지 몰랐다. ”엄마 놓지마, 꼭 잡아 놓지마“ 소리쳤다.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 건너니까 강 옆에 숨어 있던 인신매매단이아이를 분리시켰다. 아이가 엄마 손 잡고 소리를 쳤다. 엄마 안 가 안 가, 같이 가, 엄마야 같이 가, 같이 가, 나 안 가, 나 배 안 고파, 이제 배고프다 말 안 할게.
2018년 1월 12일에는 이런 말을 했다. 다. 혜산 보위부 감옥에 잠깐 수용됐다. 원칙대로라면 고향 주거지 감옥에 가야 하는데 교통수단이 안 되는 데다 수용인은 많고, 먹을 게 부족하니까 금방 풀어주었다. 쉽게 넘어가고 쉽게 풀어주는 환경이었다. 나는 8전 9기로 탈북에 성공한 사람이다. 6번째 7번째 잡히니까, 보위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너 또 왔냐” 하면서 몇 번 때리더니 아이가 있으니까 중국으로 아주 가라고 했다. 아이랑 압록강 강둑에서 자는데 꽃제비 엄마들이 저벅저벅자갈밭을 걷는 소리가 났다. 배추, 무, 볏단, 강아지 등을 중국에서 훔쳐오는 길이었다. 이들은 중국에는 먹을 게 지천이라 말했다. 나더러 중국에 가라고 했다. 그래서 강을 건널 생각을 했다. 97년부터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중국 변방대에 잡혀가면 쌀죽도 끓여주고 돼지 껍데기도 삶아주었다. 8번째 탈북하니까, 오빠에게 연락해서 데려가게 했다. 와보니 오빠 집이 파산 직전이었다. 다시 나가려 하니 오빠가 ‘너는 병자다. 무르팍에 물이차서 붓고, 몸은 병자이니까 시집을 가라했다. 오빠가 써주는 주소를 가지고 70리 걸어서 개성으로 갔다. 그것이 시집이었다. 남편은 오빠의 친구였다. 장마당 가게 주인이 식기들을 집으로 갖다 놓으라고 심부름을 시키자 중간에서 팔아 양식을 구했다. 그리고 1월에 압록강을 건넜다. . 건너자마자 인신매매원들이 풀밭에서 튀어나와 아기를 강탈해 놓고, 내가 보는 앞에서 아기를 장마당 물건처럼 흥정했다.
2019년 8월 4일에는 이런 말을 했다. 97년부터 탈북시도해서 2007년에 한국에 왔다. 꽃제비로 중국에 주워 먹으러 가는 사람들이니까, 그냥 잡으면 보위부로 보냈다. 중국도 북한도 “너 또 왔나” 하고 감옥에 넣었다가 다시 내주곤 했다.
2019년 8월 30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97년 탈북을 시작해서 2007년에 성공했다. 97년까지는 고향에 있었다.
2019년 9월 9일에는 이렇게 말했다. 북송 됐을 때 오빠 손잡고 집에 가라 해서 오빠와 함께 집에 왔다. 오빠의 손을 잡고 부모님 산소를 한식 때 찾아가보니, 초라한 묘에는 굵은 싱아들이 자라있었다. 어머니가주신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다 베어다 장마당에 팔았다.
2019년 9월 26일에는 중국에서 식당 일을 했다는 말을 했다. 중국에 들어와서 저를 포함해 탈북자 3명이 식당에서 설거지 일을 하면서 지하방에서 잤다. 곰팡이가 쓸고 하수관에서 물이 떨어졌는데 그걸 피해 두 명은 침대에서 한 명은 바닥에서 잤다.
탈북과정에 대한 평가
위 발표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탈북 스토리의 앞과 뒤가 맞지 않고 시기마다 말이 다르며,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아 그녀의 탈북 스토리기 과연 실존했던 것이기는 한 것인가, 장진성의 탈북 스토리처럼 가공해낸 스토리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간다.
첫 탈북을 시도한 해도 여러 가지로 말했다. 첫 탈북을 2001년에 했다고도 했다. 97년부터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고도 말했다. 97년부터 탈북시도해서 2007년에 왔다고도 했다. 97년까지는 고향에 있었다는 말도 했다. 딸은 유리 독이 올라, 나는 굶어 죽기를 바라면서도 행인들에게 젖을 구걸해 아이를 키웠는데 2살이 돼도 걷질 못했기 때문에 아기를 살리기 위해 탈북을 시도했다는 말도 했다. 첫 번째 탈북한 시점에 대해서는 1997년이라 했다가 2001년이라고 했다가 2002년이라고도 했다가 딸아이가 2살이 돼도 걷지를 못하기 때문에 딸을 살리기 위해 2006년 12월 이전에 시도했다고도 말한 것이다.
마지막 탈북에 대한 스토리도 달랐다. 마지막 탈북은 10번째였고, 2006년이었다는 말도 했다. 딸과는 중국에서 2008년에 생이별을 했다는 말도 했다. 맨 마지막 탈북은 장마철이었다고도 했다. 장마철에는 물이 많아 사람이 떠내려가니까 깊은 물에는 경비를 서지 않기 때문에 깊은 물을 선택해 엄마 4명이 4살 미만의 애기들을 배낭에 메고 강을 건넜는데 곧바로 중국 공안에 잡혔고, 아이들을 빼앗긴 상태에서 엄마들만 3일을 꼬박 달려 데리고 가 어느 농촌에 내려놓고 팔려고 했는데 2명은 팔려갔고, 자기를 포함해 2명은 도망을 해서 한인교회로 가게 됐다는 말도 했다. 이와는 정반대되는 말도 했다. 마지막 탈북을 여름에 한 것이 아니라 한겨울 1월에 했다는 말을 한 것이다. 가장 추운 1월에 얼어붙은 강을 건너 탈북에 성공했다는 말을 한 것이다. 8번째 북송되었고, 8번째 감옥살이를 했는데 출소하는 북한 보위부는 나를 다시 중국에 못 가게 하려고 오빠한테 인계됐는데 오빠네 가서 올케, 큰 조카 모습 보고 더 이상 여기 못 있겠다 생각해 애를 데리고 중국에 가자고 결심한 후 배낭에 담아 등에 업고 강에 들어섰다는 말도 했다. 이전에는 2007년 8번째 탈북 실패를 한 후 오빠집에 이끌려 왔다가 시집을 갔다 해놓고, 지금은 오빠 집에 왔을 때 이미 애기가 있었고, 그 애기를 업고 마지막 탈북을 결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원을 이수한 시가가 2006년 12월이라 했고, 남한에서 현 남편과 결혼한 날짜가 2007년 10월 25일이라고 했다.
8번째 북송당한 후 감옥에서 오빠 손잡고 집에 가라 해서 오빠와 함께 집에 왔고, 오빠와 손잡고 부모님 산소를 한식 때 찾아가보니, 묘에 굵은 싱아들이 자라있어서 베어다 팔았다는 말도 했다. 8번째 탈북하니까, 오빠에게 연락해서 데려가게 했다. 와보니 오빠 집이 파산 직전이었다. 다시 나가려 하니 오빠가 “너는 병자다. 무르팍에 물이차서 붓고, 몸은 병자이니까 시집을 가라”했고, 오빠가 써주는 주소를 가지고 70리 걸어서 개성으로 갔는데 이것이 곧 시집이었다는 말도 했다. 8번째 탈북 이후 곧장 2살 난 아이를 업고 영원한 탈북으로 이어지는 강을 건넜다고도 했고, 8번째 탈북 이후 오빠 친구와 결혼했다는 말도 했다. 마지막 탈북에 대해서는 한겨울 1월에 압록강 얼음 위로 건넜다고도 했고, 장미철에 가장 깊은 곳으로 애기를 업은 엄마 4명이 함께 건넜다는 말도 했다. 탈북에 성공한 때가 2006년이었다고도 했고, 2007년이었다고도 했으며 2008년이었다고도 했다. 장미철에 물이 가장 많이 불어나서 경비조차 설 필요가 없는 깊고 험한 격랑을 이겨내고 4명의 엄마들이 각기 애를 하나씩 업고 압록강을 건넜다는 것은 무협지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이지 아기를 업은 엄마들에 해당할 수는 없는 황당한 우화다.
마지막 탈북 시점과 상황도 발표할 때마다 다르다. 마지막 탈북이 9번째라고도 했다가 10번째라고도 했다. 마지막 탈북시기에 대해서는 2006년, 2007년, 2008년이라고 각기 달리 말했다. 추운 1월 얼어붙은 강을 혼자 아이 업고 건넜다고도 했고, 장마철에 경비를 피하기 위해 가장 깊은 곳을 골라 애기를 업은 4명의 엄마들이 함께 강을 건넜다는 황당한 말도 했다. 8번째 탈북에 실패한 후에는 혜산에서 평산으로 내려와 오빠 친구와 결혼을 했다는 말도 했고, 오빠와 함께 평산으로 내려와 오빠가 가난하게 사는 것을 보고 2살 난 아이를 업고 곧장 강을 건널 결심을 했다는 황당한 말도 했다.
황해도 평산에서 특별관리지역인 ‘국경연선지구’에 속한 혜산으로 가려면 푸른 줄 2개가 인쇄된 여행증을 받아야 하는데 이런 특수여행증을 받으려면 신분과 뇌물이 필요한데 이순실은 마치 평산과 혜산 사이를 왔다 갔다 반복하는 행위가 여행증 없이도 가능하고, 도보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이순실의 탈북과정을 보면 이순실은 1997년 평산에서 6개월 동안 걸어서 혜산에 갔고, 2007년 8번째 탈북과 감옥생활을 마친 후 오빠와 함께 평산으로 내려왔고, 다시 혜산으로 가서 마지막 탈북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전개돼 있다.
2017년 5월 30일, 이순실은 “달구지나 기차보다 더 빠른 게 사람 걷는 거다. 혜산에까지 6개월 걸렸다” 이렇게 말했다. 평산에서 혜산으로, 혜산에서 평산으로, 다시 평산에서 혜산으로 여행을 했다는 것은 북한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가공의 스토리에 속한다.
탈북한 횟수에 대한 말도 여러 가지다. 2살 된 딸아이를 업고 10번째 탈북을 시도했다는 말도 여러 번 했다. 1997년부터 10년 동안 탈북해서 8번 중국에서 강제북송을 당했고 9번 만에 성공했다는 말도 여러 번 했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10년간 8번 북송 당했다는 말도 했다. “나는 8전 9기로 탈북에 성공한 사람”이랴는 말도 했다. 8전 9기라는 말도 했고, 9전 10기라는 말도 여러 번 했다.
탈북 동기에 대해서도 제각각이다. 한국에 가다가 잡힌 아주머니가 감옥에 들어왔는데 한국 가는 길 알려줘서 한국 가는 희망 잃지 않았다는 말도 했다. 아이랑 압록강 강둑에서 자는데 중국에서 배추, 무, 볏단, 강아지 등을 중국에서 훔쳐오는 꽃제비 엄마들이 중국에는 먹을 게 지천이라며 나더러 중국에 가라고 해서 중국에 갔다는 말도 했다. 97년에 처음으로 강을 건넜다고도 했고 2001년에 처음 건넜다고도 했다. 97년에는 평산에서 혜산으로 6개월에 걸쳐 걸어갔다고도 했고, 97년에 처음으로 압록강을 건넜다는 말도 했다. 딸이 유리독에 올랐고, 2살이 돼도 걷질 못했기 때문에 아기를 살리기 위해 탈북을 시도했다는 말을 한 반면 014년 5월 20일에는 유리로 탯줄을잘랐는데 염증이 없었다고 말했다.
딸과 헤어질 때의 상황설명도 제각각이다. 마지막 탈북에 성공할 때의 상황설명도 제각각이고 현실적으로 황당하다. 4명의 여인들이 4명의 애기들을 배낭에 메고 장마철에 압록강 중 가장 깊은 곳을 골라 도강에 성공했는데 건너자마자 곧바로 중국 공안에 잡혔고, 4명의 아이들을 빼앗긴 채, 4명의 엄마들만 3일을 꼬박 달려 어느 농촌에 하차시켜놓고 필려고 하는 순간 도망쳐 한인교회로 왔다는 말도 했고, 1월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자 강 옆에 숨어 있던 인신매매단이 아이를 분리시켰는데 아이가 엄마 손 잡고 “엄마 안가 안 가, 같이 가, 엄마야 같이 가, 같이 가, 나 안 가, 나 배 안 고파, 이제 배고프다 말 안 할게” 이렇게 말했다는 이야기도 했고, 겨울 강을 건너자마자 숲속에 숨어있던 인신매매단이 강제로 아이를 빼앗은 순간 아이가 엄마 손을 꼭 잡으면서 “엄마 놓지마, 꼭 잡아 놓지마” 소리쳤는데 그 순간 2살짜리 아이가 그렇게 힘이 센지 몰랐다는 말도 했다. 1월에 압록강 얼음 위로 강을 건너자마자 인신매매원들이 풀밭에서 튀어나와 아기를 강탈해 놓고, 내가 보는 앞에서 아기를 장마당 물건처럼 흥정했다고도 했다. 겨울에 인신매매단이 숨을 만한 풀밭이 존재한다는 말도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돌이 지난 2살짜리 아이가 위험을 인식하는 지능이 있고, 말을 알아듣고 의사를 표현했다는 이야기는 모두 이솝우화에서나 칠 수 있는 허풍일 것이다. 거짓말이라 해도 아이를 키워 본 엄마는 이런 허풍을 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한국의 남녀들은 이런 허풍에 놀아나 눈물을 바가지로 흘렸다.
고문에 대한 말도 제각이다. 온 몸에 고문 받은 상처가 나 있으며 손바닥에는 코바늘로 고문당한 상처가 지금도 나있다고 했다. 코비늘이란 뜨게 바늘을 의미한다. 9번 고문당한 흔적 그대로 있다고도 했다. 보안요원이 허리띠 같은 걸로 나를 때리는데 허리띠가 위로 올라갈 때마다 2살짜리 젖먹이 아기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 때리지 마” 울부짖었다는 말도 했다. 고문이 너무 심해 화장실 밑으로 빠져서 변을 파는 구멍으로 나온 적이 있는데 상처에 똥독이 올랐다가 또 잡혀 6개월 감옥생활을 했다는 말도 했다. 7번째와 8번째는 때리지도 않았다는 말도 했다. 혜산 보위부 감옥에 잠깐 수용됐다고도 했다. 원칙대로라면 고향 주거지 감옥에 가야 하는데 교통수단이 안 되는 데다 수용인은 많고, 먹을 게 부족하니까 금방 풀어주었다. 쉽게 넘어가고 쉽게 풀어주는 환경이었다는 말도 했다. 6번째 7번째 잡히니까, 보고 했다. 보위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너 또 왔냐’ 하면서 몇 번 때리더니 아이가 있으니까 중국으로 아주 가라고 했다. 꽃제비로 중국에 주워 먹으러 가는 사람들이니까, 그냥 잡으면 보위부로 보낸다. 중국도 북한도 “너 또 왔나” 하고 감옥에 넣었다가 다시 내주곤 했다.
헤어질 때의 딸 나이에 대한 평가도 발표 시기마다 다르다. 한국에서 2살짜리 아이 볼 때마다 딸 생각난다고 하소연했다. 2살 난 딸 때문에 지금의 남편이랑 기도를 한다고도 말했다. 지금도 내 딸은 영원한 두 살로 내 가슴에 남아있다고도 말했다. 역전 보일러실에서 출산한 딸이 2살이 될 때까지 따뜻한 집에서 한번 재워보지 못했고, 옷 한 벌, 마른 기저귀 한번 채워보지 못한 채 인신매매단에 빼앗겼다고도 말했다.2018년 1월 12일 배나TV 사회자가 “지금 살아있다면 12살, 13살 쯤 되었을가요?” 하고 질문하자 이순실은 “잘 모르겠다. 3살 아이만 기억한다. 애기 얼굴도 잘 기억 안 난다”고 말했다. 딸을 한 순간도 잊지 못해 아기곰 엄마곰 인형을 쓰다듬으면서 그리워했다는 엄마가 그리고 수많은 기회를 이용해 딸에 대한 슬픔을 호소했던 엄마가 2018년 1월 12일 당시 딸의 현재 나이를 알지 못하고, 딸의 얼굴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언한 순간은 한 마디로 경악할만한 장면이었다. 더구나 이순실은 딸의 생일이 12월 25일이라고도 했고, 12월 27일이라고도 말했다. 이순실은 헤어질 때의 딸이 2살이었다고 귀가 따갑도록 반복해 시청자들에 ‘2살 난 딸’로 각인시켜 놓았었다. 그런데 필자가 2015년 11월 7일 이순실을 제24광수로 발표하자 그 후인 2018년 1월 12일에는 헤어질 때의 딸이 3살이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나이를 만으로 계산한다. 2004년 12월에 출산한 딸은 2006년 12월부터 2007년 12월까지는 2살이 된다. 헤어질 때의 딸 나이가 3살이려면 그 달과는 2008년에 헤어졌어야 했고, 남한에는 2008년 또는 그 이후에 도착했어야 한다.
2020.9.2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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