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5.18인민재판 희생자 두사람 사진은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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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방울이 작성일20-06-12 01:05 조회4,654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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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향기님과 김제갈윤님께서 올리신 새로운 5.18사진에 대해 이리저리 검색해 본 결과입니다.
확증은 없습니다. 아마도 5.18때 희생자(인민재판피해자)가 아래에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추측일 뿐입니다.
노숙자담요님께서 귀띰이라도 해 주시면 참 좋으련만!!
http://cyber.518.org/sub.php?PID=01#message2
[1-85] 이명진
http://www.systemclub.co.kr/bbs/board.php?bo_table=13&wr_id=21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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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이명진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1묘역
- 묘역번호 :1-85
- 성 명 :이명진
- 출생년도 :1943-01-01
- 사망일자 :1980-05-22
- 이장일자 :1997-05-06
- 직 업 :자영업
- 사망장소 :광주교도소 앞
- 사망원인 :총상
- 내 용 :-아들의 죽음이 남긴 것들
부평공단에서 완구수출업에 종사하던 이명진 씨는 1980년 5월 15일, 1년 넘게 별거 중인 처자식과 부모형제를 보기 위해 광주로 내려왔다. 31사단 앞에서 살던 부모님 댁에서 머물던 이명진 씨는 밖이 소란스러우니 집에 있으라는 아버지 이안식 씨의 충고를 무시하고 농성동에 사는 형을 보러 집을 나섰다가 총에 맞아 죽고 말았다.
이명진 씨가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 이안식 씨는 21일, 아내와 함께 시내를 돌며 아들 이명진 씨를 찾아다녔다. 조선대병원 등 병원이란 병원은 모두 가봤고, 상무대도 들렸고, 심지어는 담양 어딘가 시체들이 암매장돼 있다는 이야길 듣고 찾아가 모래밭을 다 파헤쳐보기도 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이명진 씨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이 이안식 씨를 찾아와 법원 9호 검사실로 가라고 일러줬다. 이안식 씨는 며칠을 지은 죄가 없어 가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아들의 일이라는 귀띔을 받고서야 검사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이안식 씨는 아들의 시신이 찍힌 사진들을 보게 됐고, 이명진 씨가 망월동에 매장돼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이안식 씨는 당장 망월동 118호 묘지로 달려가 아들 이명진 씨가 묻혀 있는 걸 확인하고, 다음날 교회식으로 장례를 치러줬다.
이안식 씨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과 유가족들에 대한 사과를 바라며 죽은 아들의 묘를 보듬고 있다. (증언자 : 이안식)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http://cyber.518.org/sub.php?PID=01#message2
1-8 박기현
http://www.systemclub.co.kr/bbs/board.php?bo_table=13&wr_id=211293
1-8 박기현
기 현 ! 네가 떠나던 오월이 이렇게 푸르렀는지 비석 위 햇살은 거짓말처럼 내려온다. 붉은 혈은 언제쯤……. 언제쯤이나 멈출 수 있을까. 너의 못다 핀 젊음이 네 묘지 앞 민들레로 살아난 듯 싶구나.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1묘역
- 묘역번호 :1-8
- 성 명 :박기현
- 출생년도 :1966-02-08
- 사망일자 :1980-05-20
- 이장일자 :1997-05-04
- 직 업 :중학생
- 사망장소 :계림극장 동문다리 부근
- 사망원인 :뇌좌상, 두부‧배흉부‧전흉부‧우완상부‧다발성 타박상
- 내 용 :-막둥이와 함께 보낸 지상의 마지막 밤
박기현 씨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우등생배지를 놓쳐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여러 방면에 걸쳐 많은 상장을 받을 만큼 재능이 넘쳤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공부하는 것을 더 좋아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자랑스러운 막내아들이었다. 그 해 5월, 박기현 씨는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왔다.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사왔지만 어머니가 대구에 사는 이모의 병 수발을 위해 집을 비운 터였다. 집에 돌아왔지만 수학여행의 여운이 남아 마음이 들떠있던 박기현 씨는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아 텔레비전을 보며 어머니를 기다렸다. 그런데 문화방송이 불타고 KBS 방송국마저 시민들이 점거한 탓에 보고 있던 방송마저 끊기자 그는 괜히 밖에 나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는 밖이 어수선하니 집을 나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박기현 씨는 “책을 사야 한다.”며 자전거를 끌고 계림동 책방으로 향했다. 거기서 책을 사서 자전거에 오르던 그를 계엄군 두엇이 발견해 낚아채 끌었다. “너 연락병이지?”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연락병으로 몰린 박기현 씨는 끝까지 그냥 중학생이라고 항변했지만 진압봉이 정수리에 꽂혀 기절, 사망했다. 계엄군은 박기현 씨가 쓰러진 후에도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광주로 들어오는 길이 막혀 간신히 돌아온 어머니와 주린 배를 움켜잡고 하루 종일 아들을 찾아 뛰어다니던 아버지는, 그 다음날이 돼서야 전대 병원에서 박기현 씨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생전에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여름 교복을 다려 입고 망월동에 안치 되었다가 후에 신묘역으로 이장 됐다. (증언자 : 이정애)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youtu.be/cPGa7Ft1z9g</a href="https:>
http://cyber.518.org/sub.php?PID=01#message2
1-47 임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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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임균수
동방의 명의를 꿈꾸며 원광대학교 한의대본과 2학년 재학 중 조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그대여! 오오! 애 재라. 그 인물! 불생불멸의 진리를 깨달아 원력을 크게 깨우소서!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1묘역
- 묘역번호 :1-47
- 성 명 :임균수
- 출생년도 :1959-08-25
- 사망일자 :1980-05-21
- 이장일자 :1997-05-05
- 직 업 :대학생(원광대 한의대 본과 2학년)
- 사망장소 :도청 앞
- 사망원인 :총상(두대골절, 하악골 골절)
- 내 용 :-민주애국학생 임균수
1980년,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집회가 매일같이 열렸다.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가 시위를 했고, 임균수 씨는 학내에서 열리는 집회에 빠지지 않고 나가던 깨어있는 학생이었다. 1980년 5월 17일,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광주로 내려 온 임균수 씨는 전국으로 확대된 계엄령과, 휴교령 때문에 광주에 며칠 더 머물게 됐다. 임균수 씨는 18일, 19일을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보냈다. 그러나 20일, 부모님이 관등행사로 집을 비우자 다음날인 21일, 형 임양수 씨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도청 앞으로 갔을 때, 총성이 울렸다. 도청 앞에서 협상결과를 기다리던 시민을 향해 군이 무차별 사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놀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달아나기 시작했고, 인파에 밀려 두 형제는 헤어지고 말았다. 임양수 씨는 집으로 가 동생을 기다렸으나, 임균수 씨는 그만 전일빌딩 옥상에서 날아 온 총에 맞고 말았다.
임양수 씨는 늦게까지 임균수 씨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친구들과 도청 부근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 22일, 기독교병원 영안실에서 임균수 씨를 발견했고, 이 사실을 부모님에게는 알릴 방도가 없어 누나에게라도 알리려했으나, 누나를 만나러 가는 길에 계엄군에게 잡혀 알리지 못했다. 임양수 씨는 두 달이나 고문을 받았고, 때문에 동생 임균수 씨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가 나왔을 때, 동생은 이미 안장된 후였다.
한편, 등불행사에 참여했던 부모님은 광주로 가는 교통이 모두 끊겨 시골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 광주항쟁이 점점 심각해진다는 소식을 듣고 택시를 대절해서 광주로 향했다. 큰딸에게서 임균수 씨의 죽음과 임양수 씨의 실종 소식을 들었다. 임균수 씨의 장례를 임양수 씨가 오면 하자고 미루다가, 결국 임양수 씨가 오기 전에 망월동에 안장했다. 임균수 씨의 아버지는 민주항쟁으로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장학금 사업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사후에도 장학 사업이 계속 운영 될 수 있게 노력하고 계신다. (증언자 : 임병대)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http://cyber.518.org/sub.php?PID=01#mess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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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전영진
어머니 조국이 나를 부릅니다. 민주·정의·자유 위해 앞서 갑니다.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1묘역
- 묘역번호 :1-51
- 성 명 :전영진
- 출생년도 :1962-12-05
- 사망일자 :1980-05-21
- 이장일자 :1997-06-14
- 직 업 :고등학생(대동고 3학년)
- 사망장소 :노동청 앞
- 사망원인 :총상(우측 두부)
- 내 용 :-맑은 오월, 푸른 십대의 죽음
1980년 5월 19일, 도교육위원회에서 초중고의 수업을 오전으로 단축하고 20일 하루 동안 휴교할 것을 각 학교에 지시했으나, 휴교는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전영진 씨는 초조해졌다. 혼자서 공부를 하긴 했으나, 친구들이 모두 과외를 받았기 때문이다. 전영진 씨는 어머니에게 친구들이 모두 과외를 받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어머니 김순희 씨는 집안 살림을 조금 아끼면 된다며 전영진 씨가 과외를 하도록 해줬다. 전영진 씨는 들뜬 마음으로 문제집을 사러 나갔으나, 멀리 가지 못하고 금방 집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길에서 마주친 계엄군이 다짜고짜 전영진 씨를 붙들고 등을 때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놀라 마음에 집으로 들어가긴 했으나, 분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전영진 씨는 시위에 나가고 싶다고 어머니에게 말했으나, 어머니의 완강한 반대로 20일 하루를 집에서 보냈다. 다음날 21일, 일찍 밥을 먹은 전영진 씨는 어머니가 설거지를 하는 틈을 타 집 밖으로 나갔다. 그는 당장 도청으로 향했다가 계엄군이 쏜 총에 의해 사망했다.
뒤늦게 아들을 찾아 나섰던 어머니 김순희 씨와 아버지 전계량 씨는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전대병원과 적십자 병원으로 향했으나 그곳에 전영진 씨는 없었다. 다음날이 돼서야 전영진 씨가 기독교병원 영안실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고, 전계량 씨가 혼자 아들 전영진 씨의 시체를 입관 시켰다. 김순희 씨는 떨리는 마음 때문에 아들이 안장 되는 것도 보지 못했으나, 아들의 죽음을 규명하고 광주시민의 명예를 찾기 위한 투쟁에 앞장섰다. 전계량 씨는 유족회 회장직을 맡아 김순희 씨를 도왔다. (증언자 : 김순희)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http://cyber.518.org/sub.php?PID=01#mess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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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핏방울이 이 땅에 뿌리 되어…….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1묘역
- 묘역번호 :1-71
- 성 명 :김재수
- 출생년도 :1955-02-27
- 사망일자 :1980-05-22
- 이장일자 :1997-05-05
- 직 업 :미장공
- 사망장소 :전남대병원
- 사망원인 :총상(복부관통 총상)
- 내 용 :-아들의 끝없는 방황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지만, 김재수 씨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이제 막 돌이 지난 아들이 있었다. 미장일을 하며 가족을 돌보던 김재수 씨는 형님 김재한 씨를 유독 챙겼는데, 같은 건축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형제들보다 우애가 깊었다. 1980년 5월, 광주 곳곳에서 공수부대가 진압봉을 휘둘렀지만, 김재수 씨는 쉬지 않고 일을 나갔다. 20일 아침에도 일을 나가야만 했다. 아내가 말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집을 나선 김재수 씨는 광주역 앞에서 복부에 총상을 입고 21일 오후에 전대병원으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으나, 22일 새벽에 숨지고 말았다.
형 김재한 씨는 김재수 씨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을 뒤져 동생을 찾았으나 한발 늦고 말았다. 김재수 씨가 숨을 거둔 다음에야 찾은 것이었다. 김재한 씨는 김재수 씨의 시체를 수습해 입관시켰다. 도청 분수대에서 합동 추모식을 갖은 뒤, 김재수 씨는 망월동 묘역에 안장됐다.
김재수 씨의 아들 김용화 씨는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고 방황 중이며, 김재한 씨는 5·18 때문에 상처받은 김용화 씨의 마음을 달래줄 방도가 없어 마음 아파하고 있다. (증언자 : 김재한)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http://cyber.518.org/sub.php?PID=01#message2
???
참뜻을 펼치다 산화한 내 아들아! 편히 잠들어라. -아버지가-
- 안장장소 :국립5·18민주묘지
- 묘역구분 :2묘역
- 묘역번호 :2-2
- 성 명 :박병현
- 출생년도 :1956-11-04
- 사망일자 :1980-05-23
- 이장일자 :1997-05-05
- 직 업 :외판원(시계점)
- 사망장소 :효덕동(노대부락 앞)
- 사망원인 :총상(두정부 맹관 파편창)
- 내 용 :-5월의 초록 뒤에 감춰진 총부리
대학입시에 실패한 박병현 씨는 군대를 일찍 다녀왔다. 그래서 1980년 5월 23일, 친구 김영길 씨와 효덕동 노대부락 앞을 지나다 계엄군에게 발각 되었을 때도, 박병현 씨는 침착하게 저항의 의사가 없음을 계엄군에게 전했다. 항복의 표시를 확실히 전했으나 계엄군들은 박병현 씨에게 총을 쐈다. 박병현 씨는 그 자리에 쓰러졌고, 계엄군 둘은 군홧발과 개머리판으로 그를 구타했다. 곧, 박병현 씨는 숨을 거뒀고 계엄군은 그를 노대부락 앞산에 암매장했다.
혼자 도망쳤던 친구 김영길 씨는 광주로 돌아갔으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그의 죽음을 쉽게 알리지 못했다. 며칠을 혼자 앓다가 뒤늦게 친구 김병수 씨에게 박병현 씨의 죽음을 털어놓았고 김병수 씨가 박병현 씨의 형에게 그의 죽음을 알렸다. 형 박종수 씨는 아버지 박월래 씨와 함께 그가 암매장 된 곳으로 가 시체를 조대병원으로 옮겼다. 부검을 마친 뒤에는 망월동에 안장했다. (증언자 : 박월래)
"증언자의 증언을 토대로 요약한 내용입니다. 실제 사건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구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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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훈장님의 댓글
제주훈장 작성일귀중한 자료 감사합닉다
진리true님의 댓글
진리true 작성일
전두환 정권은 무얼 했길래, 5/18-역사조작에 대하여 법적소송 근거도 남기지 못했는가?
참으로 비겁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