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무부 5.18기밀문서에 실린 내용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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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5-17 14:42 조회7,16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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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무부 5.18기밀문서에 실린 내용
아래는 “美, 韓정부에 5·18 기밀문서 전달…추가 문서 확보 첫 발”이라는 제하의 2020년 5월 15일짜 동아일보의 기사 일부다.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00515/101062940/1
“미 국무부가 5·18 민주화 운동 40주년을 맞아 5.18과 관련한 문서 43건을 한국 정부에 제공하면서 진상 규명을 위한 추가 문서 확보에 첫 발을 디뎠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
15일 외교부에 따르면 추가 비밀해제된 기록물은 43건, 140쪽 분량의 미 국무부 문서로 주한미국대사관 생산 문서가 포함돼 있다. 과거 공개된 문서 대부분은 일부 내용이 삭제된 채 비밀 해제됐으나 이번에 완전한 공개가 이뤄졌다. 문서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 직후인 1979년12월13일부터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 선포,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재판이 끝날 때까지인 1980년 12월13일까지의 기록 일부다. .“
좌경세력의 반응
만일 위 문서들에 좌익에 유리한 내용이 담겨 있었으면 지금쯤 그들은 미국을 칭송하기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문서들에는 좌익들에 매우 불리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이제까지 좌익들은 1980년 5월 9일자 미 CIA 문서에 북한군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사실 하나를 가지고 [북한군 개입]에 대해서는 미CIA도 몰랐다며 선동을 했고, 광주법원들은 이를 근거로 필자에게 패소판결을 했다.
비밀문서 내용 요약
아래에 여러가지 원문 자료와 해석 자료를 정리한다. 전체적인 윤곽을 보면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폭동은 간첩과 김대중 추종자들이 일으켰다. 폭동의 핵인550명 정도이고, 그 중 50명이 극렬분자이고, 500명 정도는 자발적 추종자들이었다. 폭동은 유언비어 확산 등 전문적인 방법으로 선동되었고, 전문가들이 주도하여 군중의 흥분을 유발시켰다. 여기에 복학생들이 주로 가담하였다. 폭동에 이용당한 사람들은 자개공 트럭운전자 등 사회저변 계급들이다. 특히 목포로부터 폭도들이 대거 광주로 유입됐다. 폭도는 장갑차, 238대의 차량, 3,500여정의 총기, 4만여 개의 실탄을 확보하였고, 5월 21일의 폭도는 15만 명에 달했다. 극렬분자들은 몇몇의 광주시민을 인민재판하여 처형했다. 이러한 극렬적 폭동을 극히 적은 희생으로 진압한 것은 군이 진압군을 대량 투입했고,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특히 군이 목숨을 걸고 도청에 잠입하여 폭도가 조립해놓은 폭탄을 해체한 노력이 매우 돋보인다.”
< 위 내용에 대한 원문 타이핑기록과 번역문 >
미국 국무부의 5.18 폭동 보고서
007089
MARTIAL LAW COMMAND (MLC) ISSUED ON MAY 31 A "COMPREHENSIVE REPORT" ON THE KWANGJU INSURRECTIDN (REF). SEOUL DAILIES MAY 31 CARRIED SUMMARIES PLUS THE FULL 5,000 -WORD TEXT. HEADLINES FEATURED OFFICIAL DEATH-TOLL FIGURES: 144 CIVILIANS, 22 SOLDIERS, AND 4 POLICEMEN KILLED.
THRUST OF THE REPORT WAS THAT RIOT WAS PROFESSIONALLY-INSTIGATED AND ATTAINED PROPORTIONS OF "MASS HYSTERIA"
IT ALLEGED THAT RIOT WAS SUBDUED WITH MINIMAL BLOODSHED, BECAUSE OF RESOURCEFULNESS AND SELF-RESTRAINT OF ROK ARMY TROOPS.
계엄사령부는 5월 31일 광주 반란군에 대한 "종합 보고서"를 발표했다.
서울의 일간지는 일제히 5천 단어로 된 전문과 요약을 보도했다.
특집기사로 보도된 공식 사망자 현황은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그리고 경찰 4명이다.
기사에서 강조된 점은 폭동이 전문적으로 선동되어 "군중 흥분 소동"을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폭동은 육군의 충분한 병력자원과 군인들의 자제력에 힘입어 최소한의 유혈로 진압된 것으로 평가되었다.
THF RIOT WAS THE WORK OF COMMUNIST AGENTS AND THE FOLLOWERS OF KIM DAE-JUNG (M-R: KIM TAE CHUNG), ACCORDING TO THE MLC ACCOUNT. TWO REINSTATED STUDENTS (I.E. FORMER POLITICAL OFFENDERS PERMITTED TO RETURN TO COLLEGE THE BEGINNING OF THE PRESENT SEMESTER), ONE EACH FROM CHOSUN AND CHONNAM UNIVERSITIES AND BOTH PAID KDJ LOYALISTS, ARE NAMED AS THE PRINCIPAL AGITATORS BEHIND THE ORIGINAL STUDENT PROTESTS.
폭동은 공산주의자인 간첩과 김대중의 추종자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이번 학생소요를 배후에서 조종한 주동자로 지목된 사람은 반체제 선동가로서 징계를 받았다가 이번 학기에 복학이 허용된 조선대와 전남대의 복학생 2명으로서 모두 김대중의 열성 지지자였다.
THE FIRST ACT OF THESE ANO OTHER "INSTIGATORS" WAS TO FAN THESE STUDENT PROTESTS INTO A GENERAL INSURRECTION.
THIS THEY DID BY FABRICATING AND SPREADING RUMORS. THE OFFICIAL ACCOUNT ADMITS THAT "YOUNG SOLDIERS... DEALT ROUGHLY WITH SOME STUDENTS," BUT SAYS THAT THE ATROCITY RUMORS WHICH THEN QUICKLY SPREAD WERE "INCOMPREHENSIBLE TO MEN OF REASON. " NEVERTHELESS THE RUMORS APPARENTLY CARRIED ENOUGH FORCE TO DRAW IN THE MASS OF CITIZENS. AND, WITHIN 24 HOURS, "MASS HYSTERIA PREVAILED" IN KWANGJU.
이 두 복학생과 여타 "선동자"들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이 학생소요를 전체적 시민반란으로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유언비어를 조작 및 유포하는 방법을 통하여 이를 실행하였다.
공식 수사에서 확인된 유언비어로는 "젊은 병사들이 학생들을 거칠게 다루었다"는 것이었으며, 당시 가장 신속히 유포되었던 악성 유언비어는 "인간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짓"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언비어들은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군중들에게 유포되어 매우 큰 악영향을 미쳤으며, 광주에는 불과 24시간 이내에 "군중 흥분 소동이 만연하게" 되었다.
THE INVOLVEMENT OF THE CITY'S MASSES IS NOT DENIED, AND VIGNETTES OF THE RIOT LEADERS--"A MOTHER-OF-PEARL CARVER, CHIEF OF THE STRIKE FORCE, A TRUCK DRIVER, CHIEF OF THE SITUATION ROOM, ETC. -- CONVEY RATHER DRAMATICALLY THE SENSE OF A PLEBEIAN UPRISING. THERE IS EVEN MENTION OF A 33-YEAR-OLD ARMY RESERVE CAPTAIN CONDUCTING AD HOC SQUAD-TACTICS TRAINING IN THE YMCA. THERE IS A DISTINCTION DRAWN HOWEVER BETWEEN THE HIGHLY SUGGESTIBLE CITIZENRY AND THE "HARD CORE" OF "IMPURE ELEMENTS" WHO INSISTED ON A BLOODY FIGHT TO THE END.
시민 군중의 개입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폭동 주동자들에게 이용당한 사람들은 "자개공, 노조위원장, 트럭운전사, 상황실장" 등등의 직업을 가진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이 폭동이 하층민들의 반란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YMCA에서는 특수전 훈련을 담당하던 33세의 예비역 육군 대위에 대한 진술도 있다.
한눈에 알 수 있는 일반 군중과는 달리 끝까지 유혈 전투를 주장하던 "불순분자"인 "핵심세력"이 별도로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CREDIT FOR CASUALTIES BEING NO HIGHER THAN THEY WERE IN KWANGJU IS GIVEN ENTIRELY TO THE TROOPS, WHO "RESTRAINED THEMSELVcS FROM USING THEIR RIGHT OF SELF DEFENSE." THEIR RESOURCEFULNESS IS PRAISED AS WELL: AWARE THAT RIOTERS HAD MINED THE PROVINCIAL GOVERNMENT BUILDING. "MARTIAL LAW TROOPS INFILTRATED... THE BUILDING AND DEFUSED THE CHARGES, " THUS PREVENTING A MASSIVE BLAST WITH MANY CASUALTIES WHEN KWANGJU WAS RETAKEN. FINALLY, SECURITY FORCES ARE CREDITED WITH GREAT GENEROSITY OF SPIRIT IN R'ELEASING WITH ADMONITIONS 1,010 OF THE 1,740 PERSONS TAKEN INTO CUSTODY DURING AND AFTER THE INSURRECTION.
광주에서의 사망자 수가 예상보다 적었던 것은 전적으로 자위권 발동을 끝까지 자제한 계엄군의 덕분이었다. 군의 충분한 병력 배치도 또한 칭찬받아야 한다.
폭도들은 도청에 대량의 폭약을 설치하였는데, 계엄군은 목숨을 걸고 도청에 잠입하여 폭약의 뇌관을 제거함으로써 도청 재진입 작전시 대형 폭발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다.
끝으로 계엄군은 폭동기간 중에 체포한 1,740명 중 1,010명을 훈방함으로써 관용정신을 베풀어 인정을 받았다.
THE REACTION OF KOREANS WE HAVE SPOKEN TO, INCLUDING THOSE NORMALLY CONSERVATIVE AND PRO GOVERNMENT HAS BEEN SKEPTICAL.
THE OFFICIAL REPORT DENIES THE TALES OF TROOP ATROCITIES ON MAY 18 WHICH BY NOW MOST KOREANS HAVE HEARD AND SEEM TO BELIEVE.
THE REPORT DOES NOT REALLY ACCOUNT FOR THE PHENOMENON OF THE CITIZENS' JOINING THE STUDENTS; LURID RUMORS ARE A FACT OF LIFE IN KOREA AND THEY DO NOT NORMALlY RESULT IN MASS HYSTERICS.
THE REPORT GIVES A CASUALTY COUNT WHICH MOST TO WHOM WE TALK CONSIDER VERY LOW.
IT CONTAINS SOME INTERESTING AND COLORFUL DETAILS, SUCH AS THE INFILTRATORS' DISARMING THE EXPLOSIVES.
BUT IT IS NOT LIKELY TO GAIN WIDESPREAD ACCEPTANCE AS THE LAST WORD ON KWANGJU. GLEYSTEEN
우리가 접촉한 한국인들은 보수적이고 친정부적인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공식보고서에는 계엄군의 잔혹행위에 대하여 부정하고 있지만 현재는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고, 또 믿는 것같다.
보고서는 실제로 시민들이 학생들과 합류하는 현상에 대하여 해명하지 않고 있다.
끔찍한 유언비어들이 한국인들에게는 사실이 되었으나 군중 흥분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보고서의 희생자 수는 매우 적은 수라고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또 계엄군이 도청에 잠입하여 폭약을 해체한 사실 등 흥미롭고 화려한 기록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이 광주사태의 중요한 마지막 언급으로서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것 같다.
글라이스틴
2020. 5. 1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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