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TV, 제245화 5.18 전쟁, 우리가 이겼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5-17 21:57 조회6,649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제245화, 5.18 전쟁, 우리가 이겼다
https://www.youtube.com/watch?v=6qjtP_YuChs
.
비밀문서 내용 요약
“폭동은 간첩과 김대중 추종자들이 일으켰다. 폭동의 핵은 550명 정도이고, 그 중 50명이 극렬분자이고, 500명 정도는 자발적 추종자들이었다. 폭동은 유언비어 확산 등 전문적인 방법으로 선동되었고, 전문가들이 주도하여 군중의 흥분을 유발시켰다. 여기에 복학생들이 주로 가담하였다. 폭동에 이용당한 사람들은 자개공 트럭운전자 등 사회저변 계급들이다. 특히 목포로부터 폭도들이 대거 광주로 유입됐다. 폭도는 장갑차, 238대의 차량, 3,500여정의 총기, 4만여 개의 실탄을 확보하였고, 5월 21일의 폭도는 15만 명에 달했다. 극렬분자들은 몇몇의 광주시민을 인민재판하여 처형했다. 이러한 극렬적 폭동을 극히 적은 희생으로 진압한 것은 군이 진압군을 대량 투입했고, 주어져 있는 자위권 행사를 끝까지 보류하면서 자제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특히 군이 목숨을 걸고 도청에 잠입하여 폭도가 조립해놓은 폭탄을 해체한 노력이 매우 돋보인다.”
미국 문서에 대한 종합 평가
1. 이번 미국무부 보고서는 5.18이 김대중과 간첩 세력이 야합하여 일으킨 폭동이라는 점을 밝혔다.
1980년 대 후반부터 남한 사회는 [민주화]의 쓰나미가 사회를 휩쓸었다. 그래서 1981년 1월 23일의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전두환을 역적으로 매도해왔다. 그런데 미국 보고서라면 하늘의 보고서인 것처럼 여겼던 좌익들은 이번 미국정부의 자료 제공에 된 서리를 맞았다. 이제 2009년 8월에 탈북자들이 낸 증언록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의 내용을 여기에 대입해 보자.
1) 광주인민봉기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김대중과 짜고 만든 통일 작품이다. 우리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믿는다. 북한에서 김대중은 혁명가다.(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 39쪽 하2-8줄)
2) “전라남도 광주인민봉기는 조선의 특수부대가 애국투사인 김대중 선생님을 도와주기위해서 내려가서 싸운 것으로 알고 있어요.” (165쪽 하 2-4줄)
3) 김일성은 광주폭동이 성공해서 전국적인 인민항쟁으로 퍼져나갔다면 남조선괴뢰정권은 무너지고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혁명정권이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큰 실수라고 말한 적이 있다..(224쪽 6-12줄)
4) 북한사회에서 김대중의 몸값은 ‘선생님’이라는 칭호와 함께 통일혁명당의 수괴였던 김종태, 차영도 등과 함께 조국통일과 남조선혁명을 위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는‘영웅’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이 사실만 놓고 보아도 북한이 광주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5.18의 조작을 위하여 고민하고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다. 북한사회에서는 광주사태를 마지막까지 남조선통일과 연결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 지금까지도 도처에서 후회하는 목소리가 많다. (243쪽 8-16줄)
5) 김대중이의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북한에서는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남조선의 ‘김대중 선생’이라고 하면 통일을 위해서 적후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투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다. 저는 남조선에 와서 지금까지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이나 발언들을 보면서 북한에서 이 사람을 큰 인물로 인정하고 내세워주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었고 과연 의심할 바 없는 확실한 북한 쪽의 사람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5.18사건이 김대중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김일성이 생전에 정권을 잡고 있을 때나 지금의 김정일 정권에서나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고 북한사람들 치고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 한목소리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257쪽 하1줄-258쪽 11줄)
6) 광주사태는 보태지도 덜지도 않고 김대중의 친북 조직과 북한정권이 남조선에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조작한 협공작전이라는 것이 그가 확실하게 장담하는 내용이었다.(421쪽 하3줄-422쪽 1줄)
2. 미국 보고서는 핵심 주동자들이 550명이라고 했다. 이는 한국정부 공식문서에 있고 북한 문헌들에 있는 내용 숫자 600명과 비슷한 숫자다.
3. 미국 보고서는 목포로부터 대규모 폭동세력이 광주시위에 동참했다고 한다. 그 많은 지역 중에 왜 하필이면 목포인가? 유병헌 합참의장이 전남 해안 경비부대 모두를 전북 변산반도 이북으로 이동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목포는 북한 선박의 교두보가 되었다. 이로써 북한은 대형 선박을 통해 북한의 공작부대 즉 로열패밀리, 행정 엘리트, 예술가, 노인 부녀자 아이들까지 목포를 경우 광주에 올 수 있었다. 미 보고서의 이 내용은 필자의 이 판단과 배치하지 않는 보완의 내용이다.
4. 미 보고서에는 극렬분자들이 여러 명의 광주사람을 즉결처분 하였다고 한다. 이는 김인태(47)와 김중식(39) 등이 도청으로 팔을 꺾여 체포돼 간 후 사살된 것과 배치하지 않는 보완의 내용이다.
5. 미 보고서에는 발포명령이 없었다는 사실이 잉태돼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1) 이번에 비밀 해제하여 한국정부에 보내준 문서는 1979년 12월 13일부터 1980년 12월 13일까지의 보고서다. 발포명령은 국가의 살인명령이다. 미국이 생산한 문건에는 그런 명령이 없다. 만일 발포명령이 있었다면 그것은 최상급의 정보이며 미국이 이를 용납할 리가 없다. 이번에 포함되지 않았으면 영원히 없는 것이다.
2) 미국 정부는 당시 한국정부가 광주시민들을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 극도의 자제력을 보였고, 심지어는 목숨을 걸고 도청에 들어가 폭도들이 조립해 놓은 폭탄을 해체할 만큼 광주시민의 안전에 최선을 다했다고 썼다. 이렇게 광주시민을 아낀 정부가 광주시민들을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빨갱이들이나 할 수 있는 적반하장의 모략이다.
< 위 내용에 대한 원문 타이핑 록과 번역문 >
미국 국무부의 5.18 폭동 보고서 007089
MARTIAL LAW COMMAND (MLC) ISSUED ON MAY 31 A "COMPREHENSIVE REPORT" ON THE KWANGJU INSURRECTIDN (REF). SEOUL DAILIES MAY 31 CARRIED SUMMARIES PLUS THE FULL 5,000 -WORD TEXT. HEADLINES FEATURED OFFICIAL DEATH-TOLL FIGURES: 144 CIVILIANS, 22 SOLDIERS, AND 4 POLICEMEN KILLED.
THRUST OF THE REPORT WAS THAT RIOT WAS PROFESSIONALLY-INSTIGATED AND ATTAINED PROPORTIONS OF "MASS HYSTERIA"
IT ALLEGED THAT RIOT WAS SUBDUED WITH MINIMAL BLOODSHED, BECAUSE OF RESOURCEFULNESS AND SELF-RESTRAINT OF ROK ARMY TROOPS.
계엄사령부는 5월 31일 광주 반란군에 대한 "종합 보고서"를 발표했다. 서울의 일간지는 일제히 5천 단어로 된 전문과 요약을 보도했다. 특집기사로 보도된 공식 사망자 현황은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그리고 경찰 4명이다. 기사에서 강조된 점은 폭동이 전문적으로 선동되어 "군중 흥분 소동"을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폭동은 육군의 충분한 병력자원과 군인들의 자제력에 힘입어 최소한의 유혈로 진압된 것으로 평가되었다.
THF RIOT WAS THE WORK OF COMMUNIST AGENTS AND THE FOLLOWERS OF KIM DAE-JUNG (M-R: KIM TAE CHUNG), ACCORDING TO THE MLC ACCOUNT. TWO REINSTATED STUDENTS (I.E. FORMER POLITICAL OFFENDERS PERMITTED TO RETURN TO COLLEGE THE BEGINNING OF THE PRESENT SEMESTER), ONE EACH FROM CHOSUN AND CHONNAM UNIVERSITIES AND BOTH PAID KDJ LOYALISTS, ARE NAMED AS THE PRINCIPAL AGITATORS BEHIND THE ORIGINAL STUDENT PROTESTS.
폭동은 공산주의자인 간첩과 김대중의 추종자들이 일으킨 것이었다.
이번 학생소요를 배후에서 조종한 주동자로 지목된 사람은 반체제 선동가로서 징계를 받았다가 이번 학기에 복학이 허용된 조선대와 전남대의 복학생 2명으로서 모두 김대중의 열성 지지자였다.
THE FIRST ACT OF THESE ANO OTHER "INSTIGATORS" WAS TO FAN THESE STUDENT PROTESTS INTO A GENERAL INSURRECTION.
THIS THEY DID BY FABRICATING AND SPREADING RUMORS. THE OFFICIAL ACCOUNT ADMITS THAT "YOUNG SOLDIERS... DEALT ROUGHLY WITH SOME STUDENTS," BUT SAYS THAT THE ATROCITY RUMORS WHICH THEN QUICKLY SPREAD WERE "INCOMPREHENSIBLE TO MEN OF REASON. " NEVERTHELESS THE RUMORS APPARENTLY CARRIED ENOUGH FORCE TO DRAW IN THE MASS OF CITIZENS. AND, WITHIN 24 HOURS, "MASS HYSTERIA PREVAILED" IN KWANGJU.
이 두 복학생과 여타 "선동자"들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이 학생소요를 전체적 시민반란으로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유언비어를 조작 및 유포하는 방법을 통하여 이를 실행하였다.
공식 수사에서 확인된 유언비어로는 "젊은 병사들이 학생들을 거칠게 다루었다"는 것이었으며, 당시 가장 신속히 유포되었던 악성 유언비어는 "인간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짓"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언비어들은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군중들에게 유포되어 매우 큰 악영향을 미쳤으며, 광주에는 불과 24시간 이내에 "군중 흥분 소동이 만연하게" 되었다.
THE INVOLVEMENT OF THE CITY'S MASSES IS NOT DENIED, AND VIGNETTES OF THE RIOT LEADERS--"A MOTHER-OF-PEARL CARVER, CHIEF OF THE STRIKE FORCE, A TRUCK DRIVER, CHIEF OF THE SITUATION ROOM, ETC. -- CONVEY RATHER DRAMATICALLY THE SENSE OF A PLEBEIAN UPRISING. THERE IS EVEN MENTION OF A 33-YEAR-OLD ARMY RESERVE CAPTAIN CONDUCTING AD HOC SQUAD-TACTICS TRAINING IN THE YMCA. THERE IS A DISTINCTION DRAWN HOWEVER BETWEEN THE HIGHLY SUGGESTIBLE CITIZENRY AND THE "HARD CORE" OF "IMPURE ELEMENTS" WHO INSISTED ON A BLOODY FIGHT TO THE END.
시민 군중의 개입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폭동 주동자들에게 이용당한 사람들은 "자개공, 노조위원장, 트럭운전사, 상황실장" 등등의 직업을 가진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통해 이 폭동이 하층민들의 반란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YMCA에서는 특수전 훈련을 담당하던 33세의 예비역 육군 대위에 대한 진술도 있다.
한눈에 알 수 있는 일반 군중과는 달리 끝까지 유혈 전투를 주장하던 "불순분자"인 "핵심세력"이 별도로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CREDIT FOR CASUALTIES BEING NO HIGHER THAN THEY WERE IN KWANGJU IS GIVEN ENTIRELY TO THE TROOPS, WHO "RESTRAINED THEMSELVcS FROM USING THEIR RIGHT OF SELF DEFENSE." THEIR RESOURCEFULNESS IS PRAISED AS WELL: AWARE THAT RIOTERS HAD MINED THE PROVINCIAL GOVERNMENT BUILDING. "MARTIAL LAW TROOPS INFILTRATED... THE BUILDING AND DEFUSED THE CHARGES, " THUS PREVENTING A MASSIVE BLAST WITH MANY CASUALTIES WHEN KWANGJU WAS RETAKEN. FINALLY, SECURITY FORCES ARE CREDITED WITH GREAT GENEROSITY OF SPIRIT IN R'ELEASING WITH ADMONITIONS 1,010 OF THE 1,740 PERSONS TAKEN INTO CUSTODY DURING AND AFTER THE INSURRECTION.
광주에서의 사망자 수가 예상보다 적었던 것은 전적으로 자위권 발동을 끝까지 자제한 계엄군의 덕분이었다. 군의 충분한 병력 배치도 또한 칭찬받아야 한다. 폭도들은 도청에 대량의 폭약을 설치하였는데, 계엄군은 목숨을 걸고 도청에 잠입하여 폭약의 뇌관을 제거함으로써 도청 재진입 작전시 대형 폭발 사고를 방지할 수 있었다. 끝으로 계엄군은 폭동기간 중에 체포한 1,740명 중 1,010명을 훈방함으로써 관용정신을 베풀어 인정을 받았다.
THE REACTION OF KOREANS WE HAVE SPOKEN TO, INCLUDING THOSE NORMALLY CONSERVATIVE AND PRO GOVERNMENT HAS BEEN SKEPTICAL.
THE OFFICIAL REPORT DENIES THE TALES OF TROOP ATROCITIES ON MAY 18 WHICH BY NOW MOST KOREANS HAVE HEARD AND SEEM TO BELIEVE.
THE REPORT DOES NOT REALLY ACCOUNT FOR THE PHENOMENON OF THE CITIZENS' JOINING THE STUDENTS; LURID RUMORS ARE A FACT OF LIFE IN KOREA AND THEY DO NOT NORMALlY RESULT IN MASS HYSTERICS.
THE REPORT GIVES A CASUALTY COUNT WHICH MOST TO WHOM WE TALK CONSIDER VERY LOW.
IT CONTAINS SOME INTERESTING AND COLORFUL DETAILS, SUCH AS THE INFILTRATORS' DISARMING THE EXPLOSIVES.
BUT IT IS NOT LIKELY TO GAIN WIDESPREAD ACCEPTANCE AS THE LAST WORD ON KWANGJU. GLEYSTEEN
우리가 접촉한 한국인들은 보수적이고 친정부적인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공식보고서에는 계엄군의 잔혹행위에 대하여 부정하고 있지만 현재는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고, 또 믿는 것같다. 고서는 실제로 시민들이 학생들과 합류하는 현상에 대하여 해명하지 않고 있다. 끔찍한 유언비어들이 한국인들에게는 사실이 되었으나 군중 흥분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보고서의 희생자 수는 매우 적은 수라고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또 계엄군이 도청에 잠입하여 폭약을 해체한 사실 등 흥미롭고 화려한 기록을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이 광주사태의 중요한 마지막 언급으로서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는 것 같다.
글라이스틴
======================
제9장 학문적 표현에 쏟아진 날벼락
저자 탄압 위해 국정원 동원
5.18은 한국 현대사 중 가장 크고 중요한 매머드급 역사다. 매머드급의 역사일수록 그에 대한 연구는 사회적으로 환영돼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대한민국에서는 건국의 아버지인 이승만 대통령과 부국의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 등 대한민국을 위해 찬란한 신화를 이룩한 역사적 인물을 폄훼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고 있지만, 5.18사건, 4.3사건, 일본, 위안부, 강제징용 등 공산주의자들이 철옹성처럼 호위하고 있는 반역의 역사에 대해서는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차단당하고 있다. 위 몇 개의 역사 사건에 대해서는 일각의 판-검사 집단과 좌익집단 사이에 붉은 카르텔을 형성해 철옹성처럼 호위하고 있다.
저자는 2002년 8월 16일 동아일보 광고에 김대중의 반역 행위들을 나열하는 의견광고를 냈다. 5.18에 대한 1980년 대법원 판결을 인용하여 “5.18은 소수의 좌익세력과 북한특수군이 순수한 시민들을 선동해 일으킨 폭동이었다”는 표현을 하였다. 광고문 3,500자 중에서 이 15자를 제외하면 모두가 김대중이 역적이라는 믿음을 주게 하는 팩트들의 나열이었다. 감히 살아 있는 권력 김대중을 메이저 언론사인 동아일보를 통해 빨갱이요 김정일 총독이라는 요지로 공격한 것은 엄청난 이변이자 모험이었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주당 대변인들이 성명서를 내고 MBC의 손석희가 전화 인터뷰에 나서는 등 정국이 벌집 쑤신 듯 요란했다. 더구나 저자는 1995년 10월 하순의 일주일 동안 베이징 조어대에서 매일 세끼 식사를 김대중과 한 테이블에 하면서 지냈고, 그가 대통령이 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원하는 자리를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을 만큼 가까워 있었다. 그런 저자가 웃는 김대중의 얼굴에 침을 뱉었으니 그가 얼마나 저자를 미워했겠는가. 그러나 저자가 김대중의 적화 행진에 대해 경고음을 낸 것은 2002년이 처음이 아니라 1999년 금강산 관광사업을 본격화하면서부터였다.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때부터 김대중과 그의 아바타 임동원이 국정원을 동원하여 저자를 탄압했다. 저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불법도청과 미행을 통해 추적하여 저자의 강연활동과 기고활동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어느 날부터 저자의 대기업 강연 약속들이 줄줄이 취소되었다. 참고로 저자는 당시 강연으로 연간 1억 원 이상을 버는 사람의 리스트에 올라있었는데 그 밥줄이 단칼에 끊어진 것이다. 아래는 1995.4.25. 매일경제신문의 기사다. “우리나라 경영계에도 고액강사 시대가 열렸다. 강연료만으로 연간 1억 원의 수익을 올리는 전문강사들이 등장하고 있다. . .최근 민간기업 연수원장들이 뽑은 베스트 10강사로는 . . 지만원 사회발전연구소장. . 등이 꼽히고 있다.. .”
.
2005년 11월 16일짜 한국경제에는 “영장서 드러난 DJ정부 국정원 충격적 도청 실태“라는 제목아래 ”실제로 당시 국정원은 DJ정부 햇볕정책을 비판한 군사전문가 지만원씨와 `안풍' 사건에 연루됐던 한나라당 강삼재 의원, 한국논단 이도형 발행인 등 정권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인사들을 도청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저자에 대한 탄압이 얼마나 악성이었는지는 2007년 국정원 차장 김은성과 제8국장의 검찰진술 조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를 증거로 하여 저자는 2006년 5월 17일, 국가와 임동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를 냈다. 하지만 법원은 도청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겨우 2,000만원의 배상을 판결했다. 판결의 주문 이유는 겨우 "국정원의 불법 도청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통신의 비밀 및 자유, 사생활의 비밀 및 자유를 침해했다"는 것뿐, 저자가 잃어버린 수입에 대해서는 일체 고려가 없었다. 아마도 좌익이 이런 탄압을 받았다면 몇 억대는 받았을 것이다.
검찰: 왜 지만원이라는 사람을 DJ가 싫어했나요.
김은성: 그 내막은 모르지만, 아무튼 극우론자로 알려진 논객인데 그 무게에 비하여 DJ가 유별나게 싫어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검찰: 그럼 임동원 원장도 지만원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나요,
김은성: 방금 말씀드린 대로 대통령이 싫어하는 인물이고, 또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다닌 사람이었기 때문에 임동원 원장도 지만원의 행동거지에 관심이 매우 컸습니다.
검찰: 피의자가 기억하기로 지만원 관련 통신첩보 내용은 어떤 것이었나요.
김은성: 지만원 본인의 통화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슨 교수나, 예비역 장성 등과 전화를 하면서 “DJ 햇볕 정책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지하여야 된다, DJ나 임동원 이런 친구 전부 빨갱이다.”는 내용, . . “[김은성 차장 피의자신문조서(제3회)14-15쪽(촉탁문서 85쪽 5째줄-86쪽 12째줄)]
검찰: 원장이 관심을 가졌던 사안과 관련한 통신첩보 내용 중 구체적으로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김은성: 우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DJ 관심이 많은 부분인데, 지만원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제가 아는 바로는 DJ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지만원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시 “DJ와 임동원 원장이 나라를 빨갱이들에게 팔아먹었다”는 식의 강연회 등을 다니면서 발언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오랫동안 . . . 보고서를 본 것만 해도 10~20여회가 넘을 것입니다. 그 시기는 정확치는 않지만 역시 2000년도 제가 부임했을 때부터(엄익준 차장 때도 감청) 2001년도 제가 퇴직할 때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했을 것입니다.
검찰: 임동원이 김은성 차장에게 지만원에 대한 첩보를 채근하고, 감시 조치를 더욱 강화하라 독려했는가요?
김은성: “김차장, 자꾸 통화만 한다고 되는가요, 적극적으로 조치를 취하여야지”라는 식으로 채근을 했고, 수시로 저에게 인터폰으로 연락이 와서 “뜬 것 보셨습니까?”(지만원의 행동이나 발언 동향에 대한 8국이나 대공정책실의 첩보 내용) 또는 “지만원 좀 조치가 되었습니까” 이런 식으로 수시로 체크를 하였습니다. 제 재임 기간 중 지만원으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김은성 차장 피의자신문조서(제3회) 14쪽(촉탁문서 85쪽 11-18째줄)]
검찰: 그럼 지만원에 대한 통신첩보는 임동원 원장도 본다는 말인가요.
김은성: 그렇습니다. 원장의 관심사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통신 첩보가 보고 된 날이면 방금 진술한대로 임동원 원장이 저에게 인터폰을 하여, 수차 지만원의 활동에 대한 우려를 전달하기도 하고, 조치 사항을 주문하기도 수차 하였습니다.[김은성 차장 피의자신문조서(제3회) 15쪽(촉탁문서 86쪽 2-6째줄)]
검찰: 지만원이 실정법을 위반했나요?
김은성: 아닙니다.
검찰: 지만원에 대한 통신 감청은 언제부터 언제까지 진행되었나요.
김은성: 2000.4경에 부임하였고, 남북정상회담이 2000.6경 열렸습니다. 그러니 아마 그 해 가을 무렵부터 시작해서 줄곧 통신감청보고서가 10 ~ 20여 건 이상 계속 올라왔습니다. 거의 2001년 11월부터 제가 사직할 때까지 계속 하였습니다. 제가 떠날 무렵까지 드문드문 지만원 관련 통신첩보를 본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래는 국정원 제8국장 김병두의 검찰진술서 내용의 일부다.
검찰: 김은성 차장의 진술에 의하면 지만원의 경우 DJ를 비난하고 다녔기 때문에 임동원 원장도 매우 큰 관심을 가졌다고 하면서, 지만원에 대한 통신감청보고서를 10-20회 이상 보았다고 진술하는데요.
김병두: 지만원에 대하여는 제가 오기 직전부터 죽 감청을 해 왔고, 그 이후에도 죽 감청을 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00년도 말로 기억하는데 원장 비서실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비서실장인지 정보비서관인지 “지만원이 대통령과 원장님을 극렬하게 음해하고 다녀 원장님 관심이 크다, 집중적으로 지만원에 대하여 첩보를 수집하라”는 지시를 받은 기억이 납니다. [김병두 8국장 피의자신문조서(제6회)11-12쪽(촉탁문서 114쪽 15째줄-115쪽 9째줄)]
검찰: 그런 식으로 원장실에서 전화가 오는 경우가 자주 있는가요.
김병두: 제가 8국장으로 있으면서 처음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제가 기억을 하는 것입니다.[김병두 8국장 피의자신문조서(제6회) 11-12쪽(촉탁문서 114쪽 15째줄-115쪽 12째줄)]
검찰: 지만원에 대한 통신첩보는 주로 어떤 내용이었나요.
김병두: 주로 강연회 간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병두 8국장 피의자신문조서(제6회) 123쪽(촉탁문서 116쪽 1-2째줄)]
김대중은 1995년 5월부터 1997년 말까지 3년에 가까운 기간에 저자에게 엄청난 애정을 표현했다. 그는 사람을 시켜 꿀 항아리와 30만원을 저자에게 보내면서 아태재단 정치학원의 강사로 나와 달라 요청했다. 그리고 3개월 후 학생들의 인기도 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 동안 1위를 치지했던 임동원이 2위로 밀려났다. 그의 요청으로 1995년 5월 24일,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열리는 한중 국제 세미나에서 기조연설도 했다. [통일개념을 바꾸자]는 제목이었다. “1988년 12월 7일 고르바쵸프 대통령이 UN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불과 253자에 해당하는 짧은 연설문이었습니다. 이 짧은 연설문이 수십 년간 쌓아올렸던 냉전의 벽을 한순간에 허물어 버렸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인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했던 이데올로기적 가치관이 사라져 버리고, 이제 세계인들의 마음 속엔 [삶의 질]이라고 하는 새로운 가치관이 자리하게 됐습니다. 이 새로운 가치관이 두 개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 . .” 원고 없이 외워서 18분 동안 연설한 내용에 인기가 폭발했다. 신선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같은 종류의 세미나가 열린다며 또 가서 발표를 해달라 요청이 왔다. 그래서 1995년 10월 24일부터 31일까지 일주일 동안 그와 함께 중국 영빈관이라는 조어대에 머물렀다. 10월 25일 열린 세미나에서도 기찬 발상이라며 양국 참석자들로부터 많은 박수와 찬사를 받았다. 그 후 여기저기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는 주변인들에 ‘지교수 최고야’라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참고로 김대중은 중국에 있으면서 10월 27일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는 전략적 발언을 했다. 그보다 8일 전인 10월 19일, 박계동이 노태우 비자금 4천억 원을 발표한 사건의 연장선이었다.
대통령이 돼서는 청와대 안보수석(황원탁), 경제수석(김태동), 총무수석(박금옥), 김상현 의원을 보내 애정을 표했고 원하는 자리를 말하라 했다. 특히 김상현 의원은 저자를 3차례나 독대하여 원하는 자리를 말하라 했다. 심지어는 박지원도 그가 청와대 비서실장 자리로 가기 며칠 전, 힐튼호텔에서 단둘이 조찬을 하자 제의했고, 만난 그 자리에서 원하는 것을 말해달라고 했다. 동교동 좌장이라는 권노갑은 여러 차례 평창동 자기 집에 초청해 저녁을 대접하고 비싼 양주와 이태리제 넥타이 등 귀한 것들을 싸주었다. 김상현과 권노갑은 저자에 매우 살가웠다. 김대중은 1996년 10월 25일 베이징으로 가는 비행기 일등칸에서 그의 부인 이휘호와 자리를 바꾸라 하여 저자를 그의 옆자리에 태워갔다. 이렇게 웃어주는 얼굴에 저자는 침을 뱉었다. 햇볕정책을 추진하고, 봉이 김선달식 금강산 사업을 개시하면서부터 김대중과 임동원을 위장 반역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던 저자의 태도 변화는 패러다임상 돌연변이적 배신이라 할 수 있었다. 저자에게 동지애를 표현했던 김대중 추종자들이 경악하고 저자를 증오하는 감정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노벨평화상을 탄 김대중이 국정원이라는 공조직을 그가 개인적으로 미워하는 한 자연인에 가한 폭력적 탄압행위였다. 당시의 국정원장 임동원을 사전 구속한 결정적 이유로 감찰이 부각시킨 사안은 바로 ‘저항능력 없는 자연인 지만원’에 대한 집중적 도청을 했다는 것이고, 그 죄질이 고약하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2002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 광고문에 대해 김대중은 그를 빨갱이로 정의했던 팩트들에 대해서는 차마 소송을 하지 못하고, [북한특수군 개입]을 의미하는 35자의 문장 하나를 걸어 저자를 탄압했다. 탄압의 대리자들은 광주 5월 단체들과 광주 판-검사들이었다. 저자에 대한 탄압 주체가 국정원으로부터 광주공화국으로 이전되는 순간이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