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소설] 전두환 (3) - 박정희 업적(수정완료)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1-03 23:37 조회32,242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다큐소설] 전두환(3) - 박정희 업적 -
(수정완료)
<박정희 업적>
일본의 의미
이승만의 주요 업적은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과 한미동맹이었고, 박정희와 전두환의 주요 업적은 경제 부흥이었다. 박정희를 설명하려면 전두환을 설명해야 하고, 전두환을 설명하려면 박정희를 설명해야 한다. 박정희는 중화학공업, 제철산업, 기계산업, 건설산업, 산림산업, 사회간접산업을 통해 ‘한강 기적’의 좌측을 완성했고, 전두환은 반도체산업, 전자산업, 통신산업, 원자력산업, 문화산업으로 ‘한강 기적’의 우측을 완성하여 우리나라를 경제 10대 강국으로 올려놓았다. 박정희는 많은 자유를 묶었고, 전두환은 그가 묶어놓은 자유를 모두 풀었다. 이러하기에 박정희와 전두환은 한 세트인 것이다.
이승만은 정치달인이기에 일본을 적대시 했지만 박정희와 전두환은 경제를 중시했기에 일본의 경제능력을 활용했다. 일본을 증오하는 것은 감정이고, 일본을 이용하는 것은 이성이다. 식민지? 지구상 존재하는 모든 국가의 80% 이상이 오랫동안 식민지였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그들을 지배했던 식민종주국을 적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마워한다. 미개한 생각을 깨워주고 원시를 문명으로 바꾸어준 데 대해 고마워하는 것이다. 최근 70대 노인이 독학과 검정고시로 대학까지 졸업했다고 한다. 왜 그렇게 노력했냐고 물으니 공부를 하니까 비로소 세상이 보인다고 했다. 이것이 개화다.
일본을 개화시킨 사람은 1만엔권에 초상이 세겨진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그는 수 많은 유학생들을 모아 옥스퍼드 영영사전을 ‘영-한문’사전으로 전환했다. 이는 문자학계의 불가사의로 꼽힌다. 이 영-한문 사전이 영한사전이 된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의 눈 뜬 청년, 유길준 등에게 ‘영-한문’ 사전을 ‘영-한글’사전으로 전환하라 코치해주었다. 언어와 문자 없이는 개화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개화도 사전으로 시작되었고, 조선의 개화도 사전으로 본격화됐던 것이다.
개화된 이승만 대통령의 눈에는 무엇이 보였는가? 발전된 미국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보였다. 이승만은 그것을 이상으로 하여 대한민국을 세웠다. 일본 육사를 통해 개화된 박정희의 눈에는 무엇이 보였는가? 미스비시 중공업이 보였고, 항공모함이 보였다. 경제와 안보가 보인 것이다.
이승만이 물려받은 국가유산은 얼마였나? 마지막 27대 조선 왕이 담긴 논과 밭 4억 달러와 일본이 남기고 간 23억달러였다. 이조 518년 동안 이씨 왕들이 벌어놓은 자산은 전염병과 초가와 똥오줌의 거리와 악취나는 우물 그리고 논밭이었다. 일본이 36년 동안 남한에 쌓아놓은 자산은 철도, 도로, 광산, 각급 학교, 그리고 오늘의 대기업의 전신인 업체들이었다. 이 일본 자산이 건국초기 총 국가자산의 80%를 상회한 것이다. 이 자산을 가지고 출범하여 12년동안 통치한 결과는 160개 나라 중 인도 다음으로 못사는 거지의 나라였다. 하지만 그는 건국의 터를 자유민주주의에 잡았고, 북의 공산당이나 남의 공산당이 훔쳐갈 수 없도록 한미동맹을 굳건하게 결속시켜놓았다. 이는 금전으로 환산이 불가능한 위대한 업적이었다.
눈물 젖은 달러
박정희의 과제는 배곯는 국민을 배부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술 마시고, 마약하고, 투전하고, 쌈질하는 퇴폐분위기를 개화시키기 위해 새마을운동이라는 문화운동을 전개했다. 국민에너지를 이용하여 마을을 현대화하고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고 토의하는 문화를 계발시켰다. 가난에서 벗어나보겠다며 케네디에게 돈을 빌리러 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다. 달러를 벌겠다며 서독에 간호부와 탄광 노동자를 수출해놓고 그들이 불쌍하다며 서독으로 날아가 부여잡고 울었다. 서독 수상에게 ‘반드시 갚을테니 돈좀 꾸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견하여 베트남 건설 사업권을 따내고, 장병들의 전투수당을 빌려 산업자금으로 썼다. 전투성적이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얻게 되자 세계 은행들이 돈을 빌려주고, 한국의 브랜드가치가 상승했다. 여기에서 단련된 병사들을 험악한 모래바람의 사막 땅 중동에 보내 중동건설의 역군이 되게 했다.
민둥산에 나무를 심었다. 나무를 땔감으로 베어가지 말라고 19공탄을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산림자산이 되었다. 영국에서는 1750년대에 나무 대신 석탄을 사용했다. 밖에서는 이런 산업혁명이 지축을 흔들고 있을 때 조선 왕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있었다.
산업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국민은 일하고 싶어도 일할 곳이 없었다. 실업률 30%에 인구 증가율 2.9%, 박정희는 일본에서 살 길을 찾기로 했다. 농업에서 공업국가로 전환한다는 것은 돈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일본의 기술이 필요했다. 그 돌파구가 일본과의 국교를 트는 일이었다. 일본으로부터 청구자금을 받아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기술을 빌리는 것이었다. 거저 받는 이 기술은 청구자금의 수십-수백의 가치가 있었다. 무상 3억달러는 이자와 원금을 갚지 않는 것이고, 유상 2억달러는 원금과 이자를 갚는 것이고, 상업차관 3억달러는 기업들이 꾸어 쓰는 돈이었다. 국가가 꾸어 쓰는 돈의 한계가 2억달러, 기업이 꾸어 쓸 수 있는 돈의 한계가 3억달러라는 것이다. 그 어느 나라가 160개국 중 159번인 못사는 나라에게 돈을 꾸어주려 하겠는가?
박정희에 감동한 일본의 도움
공업화의 토대는 제철공장이다. 제철소는 모든 산업국가의 로망이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며 돈 좀 꾸어 달라 했는데도 문전박대 당했는데, 그 어느 나라가 제철공장 짓겠다는 거지 나라에게 돈을 꾸어주겠는가? 이러하기에 박정희와 일본대사 가나야마의 궁합이 전설이 되는 것이다. 청구권자금 중 1억2천만달러를 투입하기로 양국이 합의했다. 이에 따라 6년만인 1973년 103만톤 규모의 포항제철, 등소평이 그토록 부러워했던 포항제철이 완공된 것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고속도로 없이는 실현이 불가능했다. 1967년, 세계은행(IBRD)등 국제금융기구를 모두 접촉했지만 비웃기만 했다. 처량한 국가였다. 여기에 일본이 청구권자금 690만달러를 투입하는데 동의해주었다. 1968년 2월 1일 착공, 공사장에는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2년 5개월 만인 1970년 6월 27일, 소백산 당제터널공사가 완료되는 순간, 428km의 경부고속도로가 완성됐다. 세계에 유래가 없는 기적이었다. 수많은 낙반사고, 용수분출 등으로 인해 77명이 순직했다. 이 순직자들을 기리기 위해 매년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충북, 옥천군 동이면에 [경부고속도로 건설 순직자 위령탑]이 세워져있다. 눈물젖은 공사장, 땀에 젖고 피에 젖은 이 공사장에 민주화의 영웅이라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달려와 큰 대자로 가로누워 한동안 공사를 방해했다. 박정희가 불쌍한 농민의 논과 밭을 아작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고속도로 없는 국가를, 이 두 민주화 투사들이 민주화시켰으면 지금쯤 국가는 어느 공간에 가 있을까!
소양강댐, 아시아에서는 최대, 세계에서는 네 번째로 큰 다목적 댐으로 담수량은 29억톤, 수력발전 용량은 20만kw, 1967년 4월부터 6년 동안 건설되어 1973년 10월에 완공됐다. 일본 청구권 유상자금 2,150억 달러가 투입됐다. 역시 일본기술이었다. 여기에서 습득한 기술로 충주댐(27.5억톤), 안동댐, 대청댐, 평화의 댐(26.3억톤)을 위시해 수많은 댐을 건설함으로써 한국은 댐 건설의 선진국이 되었다. 이어서 이 일본자금으로 호남정유, 나주 비료를 위시한 중화학공업 건설과 수많은 산업 인프라 그리고 철로, 수도, 해운, 송배전, 개량사업 등 인프라가 증강되었다.
한심한 기업들
상업차관 3억달러, 이 범위 내에서 기업들이 저마다 일본 자금을 사용했지만 경영능력은 부족하고 부정축재가 만연하여 원금은커녕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기업인들의 경영능력이 정부의 경영능력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 이자와 원금을 정부와 은행이 대신 갚아주는 한심한 사태가 발생했다. 일부의 경영권을 박탈하기로 했지만 이는 근본적인 처방이 아니었다. 기업들이 마구 빚을 지니 은행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고리사채로 연명했지만 그럴수록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나마 기업을 도산시키면 경제가 사망할 수 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비상조치를 단행했다. “고리사채에 대한 원금과 이자를 동결한다.” 지하의 고리 사채업자들이 눈을 뜬 채 날벼락을 맞았다. 이른바 ‘8.3긴급경제조치’, 1972년 8월 3일이었다. 고리 사채업자는 없어도 되지만 기업은 반드시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고육지책이었다. 기업에 외자도입을 정지시켰다. 일본 차관을 봉쇄한 것이다. 그 대신 외국기업을 한국에 들어오도록 유치했다. 수십 개 공단을 조성하고 ‘수출자유지역’을 설치하여 수출 확대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경공업 체제를 기계공업과 중화학공업 체제로 전환했다.
실업률 30%에서 0%로
공단을 많이 설치하면 자동적으로 외국 기업들이 들어오는가? 기술노동력이 있어야 들어온다. 박정희는 갑자기 공업학교를 많이 만들어 기능공을 양성했다. 해마다 서독에서 기능올림픽대회가 열렸다. 1,2,3등을 한국 청년들이 다 차지했다. 국제사회에 보도가 되자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로 인식됐다. 대사와 특사들이 선진국에 나가 “한국은 값싸고 질 좋고 온순한 기능공들이 많고, 공단도 많이 설치돼 있으니 한국에 투자해달라” 홍보를 했다. 어느 나라 기업들이 가장 많이 들어왔겠는가? 공단 대부분을 일본 기업들이 채웠다. 왜 그랬을까?
한국에는 원자재, 원료, 부품들이 없었다. 그런데 선진국들에는 이것이 풍부했다. 만일 일본이 아프리카 희망봉 정도에 위치했다면 부품과 소재를 한국공단으로 가져오는데 시일이 오래걸리고 수송비도 매우 비싸서 한국공단 입주를 꺼렸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게는 유럽 국가들보다 한국이 가깝고, 미국 기업들보다도 한국이 가깝다. 그래서 일본 기업들이 가장 많이 들어온 것이다.
결국 한국은 일본의 기술, 일본 소재, 일본 부품을 가져다 조립해서 주로 미국에 수출하는 체제로 경제기반이 형성됐다. 미국은 한국군의 월남참전을 계기로 매우 사이가 가까워져 이른바 [Buy Korea]정책을 폈다. 1970년 당시 미국에서 일본기업 브랜드가 찍힌 뮤직 시스템을 구매해서 집에 와 뜯어보면 [Made in Korea]가 붙어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한국경제를 [통과경제(Transit Economy)]라고도 했다. 실업률이 30%에서 0%로 떨어졌다. 기술자의 봉급이 사장 봉급보다 높았다. 잠실의 수박농가가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가 됐다. 여기에서 ‘졸부’라는 경멸적 표현이 등장했던 것이다.
기술에 살고 기술에 죽고!
박정희가 여기에 만족했겠는가? 모든 기술 개발은 ‘모방(Copy)’에서 출발한다. 국산화를 시작했다. 무기 국산화, 그는 청와대 뜰에 지프차, 박격포, M16소총, 무전기, 유선전화기 등을 진열해놓고 국방장관을 위시한 군 수뇌들과 국방과학연구소장 등 기술간부들을 불러모았다.
“이것들과 똑같은 것을 국산화 하시오”
맨땅에 헤딩하라는 지시였다. 대전 국방과학연구소(ADD)에는 자그마한 별채가 하나 있었다. ‘영빈관’, 대통령이 와서 며칠씩 묵어가면서 기술개발을 독려하던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말고는 그 누구도 초라하게 지어진 그 영빈관을 찾는 대통령이 없었다.
수많은 기업들에 국산화 품목을 할당했다. 서양에서는 이미 한물 간 사양품(Sunset item)을 국산화하라는 것이었다. 사양제품이라 해도 그것을 제조하려면 기술자료(TDP; Technical Data Package)가 있어야했다. 수많은 부품들에 대한 설계도면, 조립설명서, 부품별 스펙들을 영어 또는 일어, 독일어 등으로 설명한 문서들이 수십만쪽씩 되었다. 이것들을 배로 실어다 기업에 나누어주니, 기업들이 무슨 재주로 이 문서들을 해독하겠는가? 그래서 대통령은 미리 해외에 나가있는 우리나라 두뇌들을 대거 유치하여 KIST를 만들고 ADD를 만들고, 그들이 거주할 아파트를 지어준 것이다. 정밀도와 강도에 대한 개념이 없는 기업인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생산공정 모두를 지휘하게 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생산기술의 모태가 되고 기반이 된 것이다. 과기처 등 기술계 직책에 있는 사람이 전화를 하면 대통령은 회의를 하다가도 그 전화부터 받았다. 과학자들과 자주 커피를 마신 대통령의 사랑과 의지에 감동한 과학자들이 과로로 사망들을 했다. 이러한 대통령을 죽이기 위해 김일성은 폭탄 설치조를 보냈고, 저격범을 보냈고, 김신조 특공조를 보냈다. 이런 대통령을 훼방하기 위해 김대중과 김영삼 그리고 남로당 빨치산 후예들이 온갖 소요와 파괴공작을 일삼았던 것이다. 빵이 없으면 자유도 없고, 민주화도 없다. 가장 기본적인 자유는 궁핍으로부터의 자유와 공포로부터의 자유다. 이 두 개의 자유가 없는 곳이 바로 북한이다. 대한민국은 북한만 사라지고 남한 내 공산당만 사라지면 한없이 행복한 나라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