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통합당 75의석 도난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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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4-25 22:10 조회4,72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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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8화, 통합당 75의석 도난 당해
https://www.youtube.com/watch?v=XAg_HE00s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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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선투표 사전투표
제21대 총선의 개표 결과는 민주당 180석, 통합당 103석으로 종결 통계수학의 이론으로는 통합당이 75개 근방의 의석수를 도둑맞았다 본선투표에서는 통합당이 124석, 민주당이 123석
2000만 규모의 국민이 247석을 124 대 123으로 나누어 준 것
그런데 사전투표에 참가한 1000만 규모의 국민은 247석을 각기 49 대 198로 나누어주었다.
2000만 국민과 1000만 국민은 같은 국민이 아니라는 뜻
통계학적으로 해석하면 두 집단은 같은 집단이 아니다.
공정선거를 감시하는 소수 국민들의 노력으로 인해 이 통계학적 이론을 뒷밭침하는 공작 징후들이 1000만 사전투표 과정에서 매우 많이 드러났다.
5.18의 결전장 광주교도소
6.25직전 남로당 총책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침을 주문했다. 일단 침략만 하면 남한의 공산주의자 수십만 명이 동조하여 승기를 잡을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믿고 남침한 김일성은 결국 전쟁 시나리오에 엄청난 차질을 당해야 했다. 5.18 때에도 김일성에게는 이와 유사한 시나리오가 있었을 것이다. 게릴라전은 상대국 주민의 적극적 동조와 협력을 전제로 한다. 그 적극적 동조와 협력은 무기고에서 총을 털어다 광주시민들에 안겨주면 광주시민들이 적극 호응하여 총을 들고 싸울 것이라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광주에서 북한군은 무기를 털어 여러 곳에서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총을 들라며 나누어 주었다. 개념 없는 양아치급 부나비들은 총을 들었지만 그들은 싸울 능력 자체가 없는 계급들이었다. 지각이 있는 시민들은 총을 나누어주는 북한군에게 “아저씨 여기 사람 아니지요?” 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총만 주면 한편이 되어 싸워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광주시민들은 그들을 의심했다. 이는 5.18 게릴라전쟁 시나리오에 엄청난 착오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엄청난 시나리오의 착오는 게릴라전 승패를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즉시 북으로 보고되었을 것이다.
다급해진 북한은 광주교도소를 공격하여 그 수용자들을 폭동의 동력으로 이용하라는 명령을 무전을 통해 내렸다. 1980년 5월 21일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간첩범 170명을 포함한 2,700명이 수용돼 있었다. 광주에 침투했을 암약자들에 보내는 이 무전이 계엄당국에 청취되었다. 당시 광주교도소는 광주지역 향토사단인 제31사단 병력이 경비하고 있었다. 당시의 향토사단은 민병대로 불릴 만큼 체계도 훈련도 부족했다. 육군의 전투서열 상 가장 강한 군대가 공수부대이고 그 다음이 정규사단이다. 더구나 31사단을 지휘한 정웅 사단장은 사상이 매우 의심스러운 행동을 많이 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여기에서 계엄당국의 발 빠른 조치가 매우 돋보인다. 교도소를 느슨하게 경비하고 있던 31사단 병력을 원대복귀 시키고 그 자리에 최강의 공수부대를 보내 결전에 대비하라고 지시한 사실이다. 전남대학교에 주둔했던 제3공수여단 5개 대대는 단 2시간 만에 교도소 주위를 요새로 만들고 총부리를 밖으로 겨누고 있었다. 수류탄과 대전차포와 다수의 인마를 조밥으로 만들 수 있는 클래모어를 설치했다. 이런 무장은 31사단 병력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이렇게 준비된 방어진지를 향해 무장시위대는 5월 21일 밤에 무려 5회에 걸쳐 공격했다. 매우 무리한 행동이었지만 그것은 거역할 수 없는 김일성의 명령 때문이었다. 5회의 파상 공격은 광주시민들이 시도할 수 있는 전투행위가 아니었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김일성의 명령인지라 대규모 희생이 뒤따를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북한군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쳤던 것이다. 국민들은 1996년 9월 16일 강릉에 침투한 상어급 잠수함 침투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살아가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11명이 집단 자살을 했다. 자기들이 생포되면 북한 가족들이 몰살당하고, 자기들이 죽으면 북한의 가족들은 영웅대접을 받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북한특수군 600명이 교도소도 점령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살아서 돌아간다면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모두 몰살될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따라서 교도소를 점령하라는 김일성 명령은 이들 600명에게 죽으라는 명령이었다. 목숨을 건 공격이 밤중에 다섯 차례나 있었다면 5회의 공격에 참여한 대부분의 북한군이 살해됐을 것이라는 추측은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김일성이 이런 명령을 내릴 때에는 그의 머리에 승산의 가정이 있었을 것이다. 명령이 하달되던 시각, 교도소는 전투형태로 방어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민병대 수준에 불과한 31사단 병력이 경비만 서고 있었다. 이런 경비병이라면 능히 교도소 공격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 31사단의 수장은 남한에서 사상적으로 의심받는 정웅이었다. 김일성은 이 두 가지 사실을 전제로 하여 교도소 공격명령을 내렸을 것 같기도 하다. 만일 계엄당국이 단 2시간 만에 31사단을 공수부대로 바꾸어 놓지 않았다면 아마도 교도소는 쉽게 점령됐을 것이고, 그러면 2,700명의 수감자들이 총을 들고 폭도로 돌변했을 것이다. 불과 2시간 안에 계엄당국이 취한 조치로 인해 수백 명의 북한군이 사살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김일성은 남한의 계엄당국이 불과 2시간의 전광석화 속도로 31사단 병력을 제3공수여단으로 대체시킬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공격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이 결전장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어야만 군사 상식에 부합한다. 하지만 동이 튼 다음 시체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북한군이 참전했다는 꼬리가 잡히면 북한은 UN 차원에서 처벌을 받는다. 그 증거를 인멸하는 것이 북한군 지상의 명령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상을 당해 가망이 없을 때는 스스로의 몸을 분해시킬 수 있는 작은 크기의 폭탄을 소지케 했던 것이다. 6.25때의 고지전을 방불케 하는 이 5회의 전투에 600명이 투입됐다면 그 중 얼마나 많은 숫자가 죽었겠는가? 그 숫자는 북한이 암시해 주었고, 숫자는 475명이었다. 이는 상식에도 일치한다.
진달래 475송이의 증거 4
첫째, 1982년 조국통일사가 펴낸 [주체의 기치에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제591쪽 14-16줄에 기재돼 있다. “광주시의 도청 지하실 한 곳에만도 얼굴을 알 수 없도록 화염방사기에 그슬리고 찢긴 475구의 시체가 쌓여져 있는 사실만 놓고 보아도 놈들의 살육만행이 얼마나 참혹하였는가를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는 것이다”
둘째, 1985년 북한의 [노동당출판사]가 발행한 [광주의 분노] 제86쪽에 기재돼 있다.
“<민주투쟁위원회>는 신임괴뢰국무총리가 광주에 온다는 소식을 봉기군에게 알려주었다. <민주투쟁위원회>는 <공정대>놈들이 <도청> 지하실에 감추어 놓았던 475구의 봉기군 시체를 꺼내다 <도청> 분수대 앞에 안치하여 놓았다.
셋째, [김일성훈장을 수여받은 조선기록영화촬영소 편집]으로 자막 돼 있는 북한이 제작한 선전 선동 기록물 [군사파쑈도당을 반대하는 광주인민항쟁] 42분 분량의 분노에 찬 선동영화가 있다. 5.18 직후부터 전라도 사람들이 몰래 모여서 보았다는 [광주비디오]인 것이다. 아래는 그 일부를 녹취한 것이다.
“경상도 괴뢰공정대놈들이 장갑차는 물론 미사일까지 내왔다, . . 야수 같은 인간 도살자 전두환은 광주시민 70%를 무조건 죽이라고 명령했다. . 젊은 놈들은 무조건 죽여라. .관용과 인정은 군대의 금물이다. . 괴로군놈들은 환각제를 마시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조건 찌르고 쏘라는 살인명령을 받았다. . .만족살인에 광분한 괴뢰군 놈들. . 동족상쟁을 일삼는 남조선 군사파쑈놈들, , 국민학생은 물론 세 살난 어린이 노인들까지 가리지 않고 살육 . . 임신부 태아를 꺼내 남판치는 치떨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 . 순진한 여학생들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잔인성만이 군대의 길이라고 명령했다 피로 물든 광주는 참혹한 인간도살장이 됐고 피의 목욕탕으로 변했다. 하루에 475명이나 도청지하실에 끌어다 죽였다. . 여학생들과 부녀자들을 생매장했다. . 학살된 사람이 2천명을 넘고 부상당한 자가 1만5천을 넘는다. .전두환 도당의 살인만행은 절대로 용서될 수 없다. . 통일이어 어서 오라 민주화와 주국통일을 위해 싸운 광주시민들의 영웅적인 투쟁은 영원히 승리할 것이다. . 광주인민들이 흘린 피 값을 천백배로 받아내며 통일을 향해 전진할 것이다. . 민주 자유 통일의 열망이 솟구치던 광주, 전두환을 영원히 쓸어버릴 새로운 투쟁의 폭풍을 준비하고 있다. 인민의 의사를 짓밟은 전두환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
넷째, 5.18사태가 진압된 지 1주일 만인 1980년 6월 5일, 일본에서 ‘천주교정의평화협의회’가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 [찢어진 깃폭-어느 한 목격자의 진술]에도 475명이 한 순간에 떼죽음 당했다는 내용이 게재돼 있다.
“그들은 시신을 도청 지하실에서 꺼내 밖으로 내오기 시작했다. . 지하실에 내려가 475구의 시체를 보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불에 탄 것도 있어 시민들은 다시 한 번 분노에 치를 떨었다.”
[찢어진 깃폭]의 말미에는 아래 표현이 있다.[붉은 깃폭]은 북한에서 영웅이 죽었을 때 덮는 천이다. 수많은 영웅들이 광주에서 무리로 죽음을 당했고, 총알을 맞아 누더기처럼 찢겨진 영웅의 시체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풀길 없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는 절규인 것이다.
“총알에 누더기가 되고 동포의 피로 얼룩진 민중의 응어리진 원한이 서린 저 깃폭을 보라. 뉘라서 이 응어리진 분노를 풀어 줄 것인가. 눈을 감으면 아직도 떠오른다. 저 찢기고 누더기가 된 깃폭이.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혁명의 붉은 깃폭 아래”
무등산의 진달래
2015년 10월 13일, 저자는 서울 보신각에 집회무대를 차려놓고 5.18관련 집회를 했다. 그때 북한 여성 2명이 나와서 매우 귀한 증언을 했다. 초등생이었을 때 등교할 때마다 매일같이 학교에서 확성기를 통해 들려주던 노래라며 그 노래를 들려준 것이다. 키워드는 ‘광주’ ‘무등산’ ‘억세게 싸우다가 무리죽음 당한 그들’ ‘하나로 잇자’ 등이다.
제1절
광주라 무등산에 겨울을 이겨내고
연분홍 진달래가 곱게 피어나네
동강난 조국땅을 하나로 다시 잇자
억세게 싸우다가 무리죽음 당한 그들
사랑하는 부모형제 죽어서도 못 잊어
죽은 넋이 꽃이 되어 무등산에 피어나네
제2절
광주라 무등산에 봄철을 부르면서
새빨간 진달래가 붉게 피어나네
찢어진 민족혈맥 하나로 다시 잇자
억세게 싸우다가 무리죽음 당한 그들
사랑하는 부모형제 죽어서도 못 잊어
젊은 넋이 꽃이 되어 무등산에 피어나네
https://www.youtube.com/watch?v=UsKRD9ubvDA&feature=youtu.be (18분부터)
북한이 왜 매일 등교하는 어린 학생들에게 이 노래를 틀어줄까? 북한이 왜 광주를 노래하고 무등산에 흩어진 넋을 죽어서도 잊지 못한다 슬픈 곡조로 노래할까? 동강난 조국 땅과 민족의 혈맥을 다시 잇고자 광주에서 억세게 싸우다 무리죽음 당한 그들이 과연 광주의 양아치들일까? 북한이 어째서 광주의 천대받던 양아치들을 이토록 애간장 녹이듯 슬프게 노래할까? 무리죽음 당한 이들의 사랑하는 부모형제가 북한에 있다는 것인가, 남한에 있다는 것인가? 청주에 가매장돼 있던 430구, 망월동에 신원불상자로 묻혀있는 12구 그리고 미처 거두지 못한 시신과 북으로 철수한 중상자의 주검이 바로 억세게 싸우다 무리죽음당한 그들일 것이다.
북한은 동강 난 한반도를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해 공들여 훈련시킨 600명의 맥가이버들을 광주로 보냈다가 그 중 475명을 잃었고, 그 귀한 목숨들이 억세게 교도소를 공격하다가 떼죽음 당한데 대해 “죽어서도 못 잊는다”며 한과 분노를 노래한 것이다.
북한이 선전해온 [찢어진 깃폭]에도 같은 취지의 분노와 증오심이 표출돼 있다. “총알에 누더기가 되고 동포의 피로 얼룩진 민중의 응어리진 원한이 서린 저 깃폭을 보라. 뉘라서 이 응어리진 분노를 풀어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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