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TV]제231화, 권영해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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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4-06 21:56 조회4,45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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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TV]제231화, 권영해 연구
https://www.youtube.com/watch?v=7y_W7FR_ww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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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1화, 권영해 연구
1900년 1월 3당합당 시 김영삼의 말
* 5공청산 안 하겠다
*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 1995.10. 노태우로부터 받은 비자금 터지자 갑자기 전두환 구속
* 전두환을 유죄로 얽어넣지 못하면 김영삼이 감옥행
* 두 개의 공작 필요성 대두
1) 재심 절차를 회피하면서 5.18을 다시 재판할 수 있는 방법 대두
2) 재판과정에서 전두환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기위한 공작방법 대두
* 재심 없이 다시 재판하는 기발한 방법 - [5.18특별법]
* 재판과정에서 유죄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한 공작 – 권정달과 홍준 표 같은 캐릭터 절실 (증언자 매수, 법-왕개미 필요)
5.18역사를 뒤집고 전두환 등 신군부 수십 명에게 죄지은 사람
권영해-권정달-홍준표
권정달 도영심(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이사장)
자유총연맹 총재 횡령, 2009년 12월 징역3년 집유 4년 선고
권영해 프로필
육사 창설 초기의 육사출신들은 양심의 상징으로 통했다. 그런데 그런 육사출신들 상당수가 타락하기 시작했다. 육사 13기 중 두뇌로 알려졌던 임동원은 골수 빨갱이가 되어 육사로부터 불명예 퇴출당했고, 육사 출신들 중에서 전라도 출신들은 그 대부분이 반골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지난 번 대한문 태극기집회에는 각 기에서 애국자들만 선별적으로 팀을 구성하여 깃발을 들고 참가했다.
권영해는 정치군인들로 알려진 하나회를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육사 후배들을 대거 숙청했다. 이런 삐뚫어진 충성으로 인해 그는 김영삼 정권에서 국방장관도 했고, 안기부장도 했다. 하지만 권영해는 1997년 대선 직전에 ‘북풍' 공작을 주도한 혐의로 1999년 4월 징역 5년이 확정되었고, 2003년 12월에는 안기부 예산을 빼돌려 총선 등에 지원한 ‘안풍 사건’으로 징역 10개월을, 2005년 6월에는 안기부 예산 10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징역 2년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무려 8년에 가까운 형을 선고 받은 것이다.
왜 나는 권영해를 도마에 올리는가?
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공적인 이유에서다. 최근 5.18만이 국가를 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이에 죽기살기로 대항하고 나서는 집단들이 있다. 첫째는 5.18세력, 전라도 세력, 빨갱이 세력이다. 이런 세력이 반발하고 공격해 오는 행위는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우익 보수의 탈을 쓰고 있으면서 그 위장망을 이용해 5.18 연구결과를 의도적으로 폄훼하고 5.18과의 전쟁에 앞장 서왔던 지만원을 모함 모략 폄훼하는 일련의 거점 세력들이 존재한다.
이미 적시한 바와 같이 조갑제-김진-정규재-황장수 세력이 그 하나이고, 권영해가 또 다른 거대한 거점이다. 권영해는 전 안기부장이었다는 이유로 그가 말하면 그것이 정확한 정보라고 인식될 수 있다. 매우 위험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권영해는 아래의 흑색선전 내용을 같은 사람들에게 여러 번씩 하면서 “지만원은 조심해야 할 사람”이라 했다는 제보들이 들어와 있다. 육사 후배들 사이에도 꽤 많이 퍼져 있고, 일반 사회에도 알려져 있는 것을 보면 “어쩌다 한 말”이 아니라 의도성을 가지고 작전 차원에서 지만원을 뒤에서 폄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2017년 5월 23일 권영해에게 내가 들었던 아래 내용들을 문자로 보내면서 “뒤에서 지만원에 대해 흑색선전을 하고 다니는 이유가 무엇이냐” 질문했다. 5월 24일까지 그 이유를 말해 달라고 최후통첩까지 보냈다. 그런데 그로부터는 아무런 답이 없다. 5월 24일, 세 차례 전화를 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거니 말하게 된 동기를 이야기하고 용서를 주문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권영해가 했다는 말
1. 지만원은 공명심이 많다
2. 지만원 주위에는 사람이 없다
3. 나는 5.18에 대해 지만원보다 더 많이 안다
4. 지만원은 여자관계 복잡하다.
5. 지만원이 부정한 돈을 받았다
나는 이상의 내용들을 모두 권영해에 문자로 보냈지만 권영해는 이 5개 항에 대해 억울하다는 반론이 일체 없다. 나는 권영해에게 또 다른 문자를 보냈다. “육사16기인 김영택 선배는 81세의 노구로 광수 영상을 분석하여 일반이 쉽게 알 수 있도록 PT를 만들어 가지고 여러 곳을 다니면서 애국을 하고 계신데. 그 1년 선배라는 당신은 겨우 5.18에 대한 연구내용을 훼손하고 지만원에 대한 마타도어를 하고 다니는것 아니냐,”
돈을 먹었다는 말
위의 5개 항목 중에서 제1,2,3항은 주관적인 의견이겠지만 제4,5항은 악성적인 명예훼손적 표현이다. 나는 매일 사무실에 나왔다가 사무실에서 퇴근한다. 하루 종일 컴퓨터를 이용하여 정보를 생산한다. 어제만 하더라도 오후 8시 반에야 시국진단 6월호를 편집해 인쇄소로 보냈다. 눈이 너무 아파 거울을 보니, 양쪽 눈이 토끼눈처럼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이런 것들이 내 생활인데, 지만원 옆에 사람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이고 공명심이 앞서있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인가? 육사 7년 선배로서 자기는 무얼 하고 지내기에 열심히 일하는 후배를 작전 차원에서 모략하고 다니는 것인가?
먼저 제5항인 돈을 먹었다는 말을 해명해 주기 바란다. 연구소에 있을 때부터 나는 육사 14기인 이종구 선배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1990년 나는 육군총장이었던 그를 찾아가 F/A-18기가 비록 선택에서 이기긴 했어도 곧 가격을 2배 정도 올릴 것이라는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마침 그가 장관이 되었고, F/A-18기 가격이 2배 올랐다. 지만원의 말이 딱 들어맞았다고 생각한 이종구 장관은 단번에 기종을 변경했다. 차세대 전투기가 F-16으로 변경된 것이다.
F-16 제작사인 GD사는 나에게 고맙다며 엔진사업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장사꾼이 아니라 선비라며 거절했다. 그러자 GD사 이사는 술집 바닥에서 존경스럽다며 내게 큰 절을 했고, 그 후 한국지사장은 수십 년 동안 명절 때마다 선물을 보내주었다. 사업이 졸지에 뒤집히자 당시 공군총장이었던 서동열 전 공군총장은 내가 GD사로부터 돈을 먹었을 것이라는 막말을 했고, 이 말로 인해 당국은 내 모든 계좌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2008년 윤웅걸 검사는 내가 없는 동안, 내 집을 샅샅이 뒤졌다. 국민주택 규모라는 32평 아파트에서 아무 것도 나오는 게 없었다. 검사실 요원들은 미안했는지 구치소로 압송할 때 내게 수갑을 채우지 않았다. 아마도 구치소로 압송되어간 사람들 중 수갑을 채우지 않은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앞의 프로필에서 보듯이 그는 10억원을 횡령한 죄로 징역 2년을 추가해서 선고받은 사람이다. 나에 대해 돈을 먹었다고 말하고 다닐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권영해는 안기부장이라는 과거의 직함을 가지고 함부로 후배에 대한 마타도어 작전을 펴고 있다. 매우 위험한 현상이다. 돈을 먹었다는 말에 대해 권영해는 해명해야 할 것이다.
여성관계가 복잡하다는 말
제4항인 여성 문제에 대해 잠시 피력한다. 여성문제를 가지고 나를 공격한 원전은 조갑제닷컴이다. 나와 조갑제는 한 번도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에 대해 적대감을 표시했다. 1967-71년 나는 소위-대위 시절, 베트남 전쟁터에서 목숨을 내놓고 전투를 했다. 이런 나를 놓고 ‘파아란’이라는 이상한 여성이 조갑제닷컴에 단골로 서식하면서 “지만원이 전방에서 어린 여학생을 강간했다”는 등의 표현으로 나를 모략했다. 조갑제더러 지워달라 요청했더니, 매우 놀랍게도 그는 지워줄 수 없다고 버티었다. 조갑제까지 함께 고소를 하겠다 했더니 그제야 지웠다.
그 후 7-8명의 조갑제측 사람들이 조갑제닷컴에서 “지만원은 위자료가 아까워 젊은 여성과 결혼도 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등의 황당한 글들을 썼다. 내가 이들 모두를 고소했고 이들은 모두 처벌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 조갑제는 그런 글들을 한동안씩 방치했다. 아래는 조갑제가 한동안 씩 방조했던 악의적인 모략물들이다. 조갑제의 이런 나쁜 행위들에 대해 나는 도합 5회에 걸쳐 조갑제게 공개경고를 했다. 아마도 이것이 여성문제에 대한 악의적인 진원이었을 것이다. 이때로부터 나는 조갑제를 인간 이하로 보게 되었다.
조갑제에 주는 1차 경고(지만원 음해에 나선 파아란과 조갑제) 2006.3.26
조갑제에 주는 2차 경고(알거지와 조갑제에 경고함)
조갑제에 주는 3-4 번째 경고
조갑제에 주는 5번째 경고
(2012.1.30.)
조갑제에 주는 5번째 경고
필자는 2012년 1월 29일, 하루 종일 조갑제닷컴을 통해 지독한 허위사실들과 모욕적인 언사들로 필자에 대해 집단적 공격행위를 가한 4인에 대해 고소장을 썼다. 그리고 이날 20:42분에 “조갑제에 주는 네 번째 경고”를 본 홈페이지 최근글에 게시했다. 오늘 또 하루 그 고소장을 손보면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했다.
그런데 1.29일 20:42분 이후 1.30일 오전까지 조갑제 닷컴에는 patriot9와 equit366이라는 사람이 도합 무려 5회에 걸쳐 아래와 같은 요지의 글들을 올렸다.
두 사람이 쓴 글의 요지
“지만원은 국가에 공헌한 적이 없고, 중상모략과 음해에 능한 사람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미국박사까지 국민세금으로 공부했으면서도 유학의 의무기간이 끝나자 막대한 연금을 받아 살아가는 기생충이다. 지만원은 ‘사회악’이다.”
“지만원은 지빠에 충성하는 탈북자들을 꼬셔서 유언비어들을 말하게 했고, 지만원이 그 유언비어를 받아 ‘찌라시책’을 썼다.”
“지만원은 조갑제에 비해 격이 한참 모자라는 덜떨어진 인간이고 생계형 애국장사꾼이며 전라도 혐오병에 걸린 환자”다.
결 론
권영해의 모략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그 혼자만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조갑제-김진-정규재-황장수 등과 같은 시기에 피치를 올리고 있다. 같은 대상들에게 중복적으로 모략하고, 그 대상들이 넓게 분포돼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흔히 육사 선배들 중에서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어떤 좌석에서 후배인 지만원 이야기기 나올 때마다 못 마땅해 하면서 “아, 그런데 그 친구, 저 혼자 잘난 사람이야, 그 친구 잘난 척 많이 해” 이런 식으로 깎아내리는 선배들이 꽤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권영해가 하는 말은 항목이 5개나 되고, 한 사람의 인격을 상처 내는 악성적인 내용인데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때로는 같은 사람들에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작전 차원의 공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수많은 애국국민들이 5.18로 살길을 뚫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 중차대한 시점에 그가 뛰어들었다는 점이다.
권영해는 김영삼의 충복이다. 김영삼은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뒤집은 역적이다. 뒤집는 과정에서 권영해는 안기부장에 어울리는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권영해가 5.18을 다시 뒤집는 애국적 행보에 찬동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권영해가 지금 바로 이 순간 지만원을 작전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음해하고 다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권영해와 권정달
권영해 같은 사람은 안기부장이라는 전직을 내세워 이렇게 말한다. “한 50명 내외의 간첩들은 광주에 왔을 것이다. 600명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참으로 위험한 행동이다. 2018년 2월, 민주당 이철희 의원은 5.18진실규명 특별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광주에 북한군이 그렇게 많이 왔다면 전두환-노태우 시대에 그 엄청난 정보력을 가지고 왜 몰랐겠느냐? 하지만 특별법의 승복력을 위해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자”
전두환-노태우 시대의 막강한(?) 정보력을 가진 시대에도 난삽하게 기록돼 있는 상황일지로부터 북한특수군 600명을 발견하지 못했다. 600명이라는 숫자는 5월 18일부터 5월 21일까지의 상황일지에 많이 등장해 있다. 그런데 당시의 분석관들은 그들 600명이 수행한 고난도의 특수작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음미할 줄 몰랐다. 통계처리조차 할 줄 몰랐다. 막강(?)하다는 당시의 정보력은 모두가 재래식 방법이었기에 눈 뜬 장님(청맹과니)의 정보력이었다.
그런데 1993년에 등장한 김영삼 정부의 안기부장이었던 권영해가 어찌 분석관들도 모르는 정보를 알 수 있었겠는가? 권영해는 일반 상식만 가지고 왕년의 안기부장이었다는 사실을 내세워 경솔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의 회고록에서 지만원의 분석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참고로 권영해는 1995년 김영삼을 도와 5.18의 성격을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사법판단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육사 동기생인 권정달이 음모의 도구가 되었다. 존재하지도 않은 “집권시나리오”가 전두환에게 있었다는 음모를 꾸민 것이다. 이 하나의 공작으로 인해 전두환과 관련자들이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던 것이다. 이런 권영해가 원로사회, 각 분야에 다니면서 “지만원은 나보다 5.18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다닌다. 안기부장이라는 전력을 가진 권영해, 그는 누구보다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안에 대해 말을 아껴야 할 사람이다.
육사 21기 최승우 장군과 권영해
국가와 군이 해야 할 일을 혼자서 묵묵히 해오고 있는 사람이 있다. 육사 21기 최승우 예비역 소장이다. 이른바 하나회로 YS의 심부름꾼 권영해에 의해 군에서 숙청당한 사람이며 2차에 걸쳐 예산군수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해마다 7월이면 자비로 ‘한국전참전 메달’과 ‘감사장’을 무더기로 만들어 비행기에 싣고 미국으로 날아간다. “은혜에 대한 보답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1-2년만 하고 끝내는 것은 진정한 보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신사복과 장군예복을 갖춰 입고 한국전 용사들의 모임을 만들고, 거기에서 메달과 감사장을 수여한다. 감사장에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과 발전은 여러분들의 거룩한 희생 덕분입니다”라는 감사의 글이 적혀 있다. 병원에 있는 참전용사들을 찾아가면 그들은 한국전 참전이 중요한 인생의 일부였다며 눈물을 짓는다. 그가 가면 6시간 이상 차를 몰고 오는 노병들이 있다. 1999년 테네시주 낙스빌 시의 애시 시장은 7월 11일을 최승우의 날로 선포했다. 그는 해마다 미국의 중소도시와 대도시를 선정하여 이러한 행사를 하고 있다. 국가가 해야 할 일, 한국군이 해야 할 일을 그가 묵묵히 혼자 하고 있는 것이다.
2003년 3월 27일자 주간조선은 그의 활동 일부를 소개했다. “한국은 미군전우들을 기억합니다”라는 제 하에 최승우 예비역 장군을 소개했다. “최승우 예비역 육군소장, 그는 3월 22일, 국방성이 주관하고 미육군전차무기사령부가 후원하여 디트로이트에서 열리는‘한국전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는 3천여 명의 한국전 전우들에게 메달과 감사장을 수여한다. 여기에는 디트로이트 시장, 연방 상하원 의원들, 재향군인 지역단체들, 한국참전노병들, 재향군인회 등이 모인다. 이들은 휴전협정이 조인된 1953년을 기념일로 정하고 있다.”
최승우 장군은 육사21기, 1993년 김영삼과 권영해 국방장관이 주도하는 하나회 청소작업에 의해 육군본부 인사참모를 끝으로 군문을 나갔다. 그의 인품과 리더십과 행동은 도토리 키재기식으로 비교될 수 있는 성격의 것들이 아니라 매우 특출하다. 역대 한미연합사령관들은 국방장관 출신이 만나자 해도 망설이는 경우가 있지만 그가 만나자면 언제나 즉시 만나준다. 사단장에 이르기까지 야전에서 그를 따르던 부하들은 지금도 그를 찾는다.
필자는 육사 22기이지만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예편하고도 10여년이 지난 때였다. 필자의 글과 활동을 관찰한 그가 어느 날 필자를 불러 점심을 사주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물심양면으로 필자를 아껴준다. 고구마도 보내주고, 사과와 배도 보내주고, 쇠고기도 보내주고 홍삼 팩을 쉴 새 없이 대준다.
최승우 장군은 내게 권영해가 얼마나 야비한 사람인가에 대해 여러 차례 말해주었다. 권영해는 후배들과 부하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는 최승우 장군을 도태시키기 위해 3명의 공작원들을 보내 뒤를 캤다. 어느 날 그 3명의 공작원들이 최승우 장군에 나타났다. 그리고 권영해로부터 받은 밀명을 고백했다.
“우리는 권영해로부터 최장군님의 뒤를 캐서 약점을 가져오라는 밀명을 받고, 최장군님이 보직돼 있던 곳들을 다 다니며 수소문 했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최장군님의 대한 칭송의 소리만 높았을 뿐, 약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권영해를 나쁜 인간으로 단정하고 오늘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권영해는 오랫동안 교도소 생활을 했다. 교도소에서 양심의 가책을 받았는지 권영해는 6년 후배인 최장군에게 참회의 편지를 썼다. 최장군은 오랜 동안 그를 증오했고, 증오심이 동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자기 건강을 위해서라도 권영해를 용서하기로 하고 용서한다는 편지를 썼다. 하지만 권영해가 나를 음해한다는 말을 듣고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말을 했다.
최승우 장군은 하나회였지만 권영해는 하나회가 아니었다. 통상 하나회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회에 대해 열등감을 갖거나 증오한다. 김영삼이 등극하자 권영해는 김현철에까지 굽실댄다는 소문들이 자자했다. 그리고 김영삼의 충복이 되어 하나회를 벌초하듯 소멸시켜 버렸다. 권영해가 김영삼을 이용하여 하나회에 대한 분풀이를 했는지, 그가 김영삼의 주구노릇을 자청했는지는 그들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일 것이다. 후배인 최승우 장군을 대상으로 공직자 3명을 흥신소 역할을 시켰던 그라면 하나회의 오야봉 전두환에 대해서는 공작 그 이상이라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유상종이라더니 그 권영해에 그 홍준표, 그 권정달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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