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기간 중의 북한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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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4-13 07:59 조회3,94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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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기간 중의 북한동향
5월 18일에 일어난 광주 시위사태가 점차 확대되어 전라남도 17개 시(市)와 군(郡)에도 치안부재의 무정부상태가 되는 혼란이 일어나자, 북한은 심상치 않은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전국비상계엄이 확대 선포된 5월 17일 심야와 광주사태가 발생한 5월 18일에 연이어 [군․정․기관 고위간부회의]를 개최하여 한국의 국내정세를 검토하고 통일에 대비하라고 지시했다. 북한 인민군은 5월 18일에 전군 연대장급 이상 전원간부회의를 소집하고 한국의 정세를 평가한 후에 유사시 군사행동을 감행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5월 19일에는 북한 전역에 걸쳐 군수물자 동원검열을 실시하는 등 전쟁준비계획을 총 점검했다. 5월 20일에는 중국을 방문 중이던 군사대표단장 백학림 중장이 북한은 통일을 위하여 전쟁준비를 강화하고 있다고 공언했고, 5월 21일에는 긴장된 국내외 정세를 이유로 군인의 외출과 출장을 일체 금지시키는 한편 출장 중인 군인과 당원을 5월 27일까지 귀대하도록 지시했다.
북한은 또한 5월 20일에 통혁당과 19개 사회단체 연합 성명을, 그리고 5월 21일에는 통혁당 전라남도 위원장 명의의 담화문을 통하여 광주사태를 “민주화를 위한 성전” “평화적 통일을 위한 애국투쟁” 이라고 고무하면서 노동자, 청년 학생, 지성인, 계엄군 장병은 영웅적 투쟁에 합류하라고 선동했다. 5월 21일에 평양에서 대규모 군중대회를 연 것을 기점으로 “광주 반정부 투쟁”을 지지 성원하는 군중대회가 북한 전역으로 확대됐다. 광주사태 당시 우리나라와 미국 정보기관이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북한은 9개조의 비정규전 부대를 후방에 투입함과 동시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광주사태가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1988.6 안전기획부 작성 “광주사태 관련기본자료”).
1982년 2월에 육군본부가 펴낸 [계엄사] 114p에는 아래 내용이 있다.
“1979년10월27일, 전군에 ‘전투태세강화’(폭풍5호)를 지시했고, 10월 29일에는 동구를 방문 중인 오극렬 총참모장 일행이 급거 귀환하여 군사 회의를 소집했고, 12월 18일에는 군-당 전원확대회의를 개최하면서 전군에 ‘통일에 대비한 무장’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1980년 2월에는 해주, 세포, 곡산, 양덕 등에서 전쟁물자동원훈련을 실시했고, 철도역에 비상열차를 24시간 대기시켰다. 1980년 3월에는 남파돼 있는 간첩들에게 남한의 시위조직을 확대하여 반정부 투쟁을 강화하고, 시위군중이 폭도로 변질되도록 ‘점화 기폭조’를 시위 군중에 잠입시키라는 지령을 내렸다. 조총련에는 공작원을 침투시켜 시위대를 거리로 유도하고, 민중봉기의 계기를 조성하라고 지시했다.”
1979년 11월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김일성은 다음과 같은 비밀교시를 내렸다.
“10·26사태는 결정적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권력층 내부의 모순과 갈등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들은 지금 계엄상태를 선포해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민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합니다.”
김일성은 또 1979년 12월 20일 중앙당 확대간부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비밀교시를 내렸다.
“12·12사태는 미제의 조종 하에 신 군부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입니다. 계엄사령관 관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남조선 정세가 그만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군 수뇌부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연락부와 인민무력부에서는 언제든지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행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24시간 무휴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1980년 5월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비밀교시를 내렸다.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일어났습니다. 사북탄광의 유혈사태는 반세기에 걸친 식민지 통치의 필연적 산물이며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울분의 폭발입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청년학생, 도시 빈민 할 것 없이 전 민중들이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빈민 등 각계각층 에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하여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이러한 북한의 움직임에 김대중도 호응했다. 5월 15일 서울역 앞 시위대 규모가 10만을 넘자 김대중은 잔뜩 상기되어 최규하 정부를 전복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5월 7일자 제1차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에서 요구한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신현확 내각의 즉각 퇴진, 정치범의 전원석방 및 복권, 언론의 자유보장, 유정회, 통일주최국민회의와 정부 개헌심의위원회의 즉각 해체 등에 대하여 5월 19일 10시까지 정부가 명확한 답변을 할 것을 요구한다.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아니하면 5월 22일 정오를 기해 대정부 투쟁에 돌입할 것을 선언했다. 여기에서 김대중은 또 반정부 투쟁 방침을 명확하게 선언했다.
“민주 애국시민은 유신체제를 종결 짓는 민주투쟁에 동참하는 의사표시로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단다. 비상계엄은 무효이므로 국군은 비상계엄령에 의거한 일체의 지시에 복종하지 말 것이며, 언론은 검열과 통제를 거부하고, 전 국민은 민주화투쟁을 용감히 전개한다. 정당, 사회단체, 종교단체, 노동자, 농민, 학생, 공무원, 중소상인, 민주애국시민은 5월 22일 정오에, 서울은 장충단 공원, 지방은 시청 앞 광장에서 민주화촉진국민대회를 개최한다.”
‘국민연합’에 의한 5월 16일의 ‘제2차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은 5월 22일을 기해 국가를 전복시키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이는 대규모 폭력시위의 기세를 믿고, 과도정부를 얕잡아 보면서 협박성 선전포고를 한 것으로 이해됐다. 당시 수세에 몰렸던 과도정부로서는 그야말로 일대 위기에 직면한 것이었다. 정국은 정부가 붕괴하느냐, 김대중이 붕괴하느냐에 대한 최후의 결전장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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