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사형, 레이건이 중지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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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4-13 08:10 조회3,99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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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사형, 레이건이 중지시켜
국내에서는 그를 즉각 사형시키자는 여론과 재야세력의 끈질긴 구명운동이 한동안 팽팽히 맞섰지만 사형시키자는 쪽이 매우 우세했다. 바로 이 시기에 저자는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이 생생한 여론을 이른바 S-레포트를 통해 생생하게 접하고 있었다. 이 S-레포트는 중앙정보부에서도 불과 손가락 꼽히는 수뇌들만 볼 수 있는 손바닥 크기의 보고서였다. 당시의 분위기로는 김대중이 곧 처단될 예정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레이건 대통령 실에서 협상이 들어왔다. 1981년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집무를 시작한 이래 맨 처음 만나는 국빈으로 전두환이 선정됐다. 그 대신 김대중을 사형시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결과 김대중은 82년 2월에 20년으로 감형되었고 82년 12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옥중에 있던 김대중은 전두환에게 최고의 존칭을 써가면서 다시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을 것이고 국가안보를 허무는 일을 하지 않을 테니 신병치료를 할 수 있도록 미국에 보내 달라 앙청하는 자필 편지를 썼다.
김대중의 앙망편지, “전두환 대통령 각하”
국사에 전념하신 가운데 각하의 존체 더욱 건승하심을 앙축하나이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본인은 교도소 생활이 2년 반에 이르렀사온데 본래의 지병인 고관절변형증과 이명 등으로 고초를 겪고 있으며, 전문의에 의한 충분한 치료를 받고자 갈망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출국허가만 해주신다면 미국에 가서 2 3년간 체류하면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자 희망하온데 허가하여 주시면 감사천만이겠습니다. 아울러 말씀드릴 것은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체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치안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옵니다. 1982년12월 13일 김대중.
일단 풀려나자 그는 약속을 뒤집었다. 83년 7월,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개설하여 반정부 활동을 계속한 것이다. 그 결과 85년 2월 귀국과 동시에 가택 연금을 당하게 됐고,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그는 85년 3월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만들어 김영삼과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87년5월에는 사면복권이 됐고, 이어서 87년 11월 평민당(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총재로 취임한 후 제13대 대통령 후보에서 3위로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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