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TV]216화, 5.18항소이유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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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3-19 22:12 조회4,40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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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TV]216화, 5.18항소이유 마무리
https://www.youtube.com/watch?v=4Yza_y7fN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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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이유서 줄거리 및 마무리
1. 5.18사건은 지역감정과 이념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미증유의 민감한 정치 재판 사건입니다. 원심 재판장님은 광주일고 출신입니다. 법관이라 해서 지역 정서와 이념을 초월하였다는 데 대한 증명은 없습니다. 형사소송법 제15조는 법관이 지역정서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여 제정된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인지 원심은 사실과 과학을 제시한 피고인의 답변서는 아예 무시하고 재판장님의 편견, 지역정서, 이념 성향을 일방적으로 반영하였습니다. 그래서 피고인은 항소장을 제출하면서 본 법원장님께 전라도-광주 출신 법관들이 없는 항소심 재판부에 이 사건을 배당해 달라 탄원한 바 있습니다.
2. 원심 공판 과정이 매우 허술하였습니다. 현 사법부는 공판중심주의와 구두변론주의를 재판의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원심이 생략한 공개다툼의 기회를 항소심에서 허락해 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원심의 3년 7개월 동안에는 증인 신문만 이루어졌고, 피고인 측으로부터 방대한 분량의 답변서 및 그 증거들만 제출돼 있을 뿐, 유무죄를 가르는 핵심 쟁점에 대해서는 일체 구두로 다투어진 바가 없습니다. 공판중심주의 구두변론주의가 생략되었습니다. 원심 공판 기록들 중에서 제4회 공판 기록을 빼고 나면 의미 있는 기록이 별로 없습니다. 항소심에서는 공판 기록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재판을 진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재판사건에 병합된 모든 개별 사건들은 심지어 상해 사건까지도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는가의 여부에 종속돼 있습니다.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피고인의 연구결과가 [의견]이냐 [허위사실]이냐에 따라 모든 개별 사건에 대한 유무죄가 갈리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북한군 표현이 [학자의 의견]이라 주장했지만, 원심은 [허위 사실]이라 단정 판결하였습니다. 피고인의 주장에는 과학이 있었지만, 원심의 판결에는 과학이 없었습니다. 이에 더해 (1) [북한군 개입] 표현은, 2012.12.27. 대법원 확정으로 무죄가 선고된 표현이고 (2) 2019.12.30.의 영등포경찰서도 [의견]으로 결론 내렸고, (3) 북한군 개입 여부에 대한 규명은 국방부 고유의 배타적 소관 업무인데다 국방부가 [북한군 개입 여부]를 가리기 위해 진상규명위원회를 지금 한창 구성 중에 있으며 이 위원회에 의해 앞으로 2년 또는 연장하여 3년 동안 다루어질 규명 과제 그 자체입니다. 국방부가 수백억 원의 예산을 배정받아 지금으로부터 막 규명을 시작하려 하는 실로 중차대한 사안에 대해 사법부가 초장에 뛰어들어 [북한군 개입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월권이요 희극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원심은 (1) 북한군 표현이 [의견]이라고 판단한 대법원 판례와 (2) 영등포경찰서의 무혐의 처분 사례를 다 무시하고 (3) 여기에 더해 국방부가 진행하고 있는 ing형 업무까지 월권하여 [북한군 개입]은 없었다고 판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월권판결에 따라 개별사건 모두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구두다툼을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4. 5.18에 북한군이 개입되지 않았다는 원심 판결이 국방부 고유의 업무 영역을 침범한 월권이고 그래서 무효가 되는 것인지 여부에 대해 구두다툼을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5. [북한군 개입]이 없었다는 원심판단의 근거 4개가 정당한 근거인지에 대해 구두다툼을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6. 피고인에게 광수를 주장하는 고소인들에 대한 범의가 있었는지에 대해 공개적으로 다투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7. [북한군 개입] 결론은 증151 연구 결과에 의해 형성됐습니다. 이 연구 결과를 신념으로 하는 피고인으로서는 광주현장사진 속 주역들 대부분이 북한 사람들일 것이라는 가정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피고인에게는 영상을 분석하여 타인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답답할 때에 네티즌들과 노숙자담요가 구세주처럼 나타나 영상을 분석해 발표했습니다. 그 영상 분석 과정을 세밀히 관찰한 사람들은 노숙자담요의 분석 기법을 신뢰하였습니다. 피고인도 그 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상 분석 기술이 없는 피고인이 그것이 있는 전문가로부터 광수분석표들을 전달받아 그것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 신뢰한 나머지 그 영상 분석표를 [노숙자담요의 분석 결과]라는 단서를 달아 그대로 발표한 행위가 이 부분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될 수 있는 것인지, 구두다툼을 진행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8. 원심 재판부는 원심 법관이 얼굴 인식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사실상 인정하였습니다. 재판부 법관이 얼굴인식 전문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는지, 법관의 얼굴 인식 능력이 판단의 잣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공개 다툼을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9. 증156은 [북한군 및 600명의 증거]라는 A4지 사이즈의 책이며 21개의 증거들이 1)북한군이 광주에 왔고, 그것도 600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스모킹 건입니다.
10. 5.18을 북한군 폭동이라 정의한 사람은 피고인만이 아닙니다. 재미 역사학자 김대령 박사는 4권의 5.18역사책을 썼고, 9명의 박사, 2명의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19명의 [5.18역사학회]가 피고인의 저서와 김대령 박사의 저서 내용을 적극 지지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저술한 9권의 책, 김대령 박사의 4권의 책이 모두 5.18을 폄훼하기 위해 저술되었는지, [5.18역사학회]의 성명서(증189) 내용이 범죄 행위를 비호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공개적 다툼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재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1. 광주 스스로도 북한군 개입을 사실상 인정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공개 다툼이 이루어지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1) 광주시장 윤장현과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김양래는 북한군 개입을 사실상 입증하는 증언들을 했습니다. 윤장현은 광주시장 재직 당시 광주시민이 광주교도소를 절대로 공격하지 않았다고 언론들을 통해 공언하였습니다. 그런데 1997년 대법원 판결서에는 (1) 교도소에는 간첩수 170명이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 (2) 광주교도소는 제3공수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는 사실 (3) 무장한 광주시위대가 5차례에 걸쳐 교도소를 공격했다는 사실이 기재돼 있습니다(증59, 8항, 183쪽). 대법원은 교도소 공격을 광주의 무장시민군이 공격했다고 했고, 광주시장과 5월 단체들은 교도소 공격을 광주시민이 하지 않았다고 하면, 교도소를 공격한 집단은 북한군 또는 정체불명의 외지인뿐이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결국 윤장현 등은 교도소 공격을 북한군이 했다는 점을 사실상 증명해 준 것이 될 것입니다(공소 기각된 사건2017고단8331). 광주교도소를 공격한 주체가 광주의 무장시민인지, 북한군인지, 아니면 그 외의 외지인들인지에 대해 확실하게 판단하지 않으면 [북한군 개입]이 없었다는 판결을 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2) 5.18기념재단 공식 홈페이지에는 [1980년 5월 22일 오후 3:08분 서울서 온 대학생 500여 명 환영행사 거행]이라는 글이 기록돼 있습니다. 역사기념물인 대형 석조 조형물에도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증156의 36쪽, 증인 김양래 신문사항) 이에 대해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김양래는 2018년 10월 12일 이 법정 증언에서 서울학생 500여 명의 실체에 대해 [5월단체들은 규명한 바 없다]고 답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확실한 규명이 내려지지 않는 한, [북한군 개입]이 허위라는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3) 다시 김양래에게 광주현장 사진 12개를 보여주며, 단련된 몸매에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무전기들을 들고 유니폼을 입고 지휘체계가 갖추어지고 조직화돼 있는 현장 주역들이 광주시민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광주시민이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그 현장 주역들이 전두환이 투입시킨 편의대(게릴라)인지 앞으로 연구하겠다고 답했습니다. 무장한 조직들이 광주시민이 아니라 외지인이라는 뜻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확실한 규명이 내려지지 않는 한, [북한군 개입]이 허위라는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4) 증59의 6항에는 5.18유공자 최고 반열에 속한 사람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이 부분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광주에는 5.18의 주역이 없다는 증언들입니다. 증59의 6항에는 이른바 항쟁 지휘부의 사령관 김종배를 포함하여 김창길, 정상용, 허규정, 박남선 등 사형과 무기형을 받았던 사람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지금 이들은 자기들이 5.18의 주역이라고 노이즈 마케팅을 합니다. 하지만 김대중 시대에 전남대가 편집한 솔직한 증언록을 보면 이들은 북한군이 도청을 버리고 도주한 이후에 각자 개인 단위로 도청에 들어갔던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이동 중인 현역사단을 습격하고 4시간 만에 전남지역 17개 시군의 44개 무기고를 털면서 도깨비처럼 날아다니던 폭동의 주역들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폭동의 주역들을 잡지 못한 계엄당국이 여론을 의식해 사형과 무기형을 내렸지만 곧 풀어주었던 것입니다. 증59의 6항 증언록에 의하면 이들이 개인 단위로 도청에 처음 들어갔던 시각은 1980.5.25.이며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끼리 도청에서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25일부터 26일까지 줄곧 의견다툼만 하다가 5.27. 새벽에 점령당했다고 증언합니다. 5월 24일 낮까지 도청은 위엄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통제했고, 5월 21일 총소리가 나자 모두 각자 도생하자며 숨어 다녔고, 무기는 누가 털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증언하였습니다. 5.18최고급 유공자들이 1980.5.21. 상황을 주도한 주역들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5) 요약하면 윤장현의 선언, 김양래의 증언, 5.18항쟁본부를 이끌었던 5.18유공자들의 증언, 군 상황일지, 5.18기념재단 항쟁일지, 안기부 기록, 북한 기록, 검찰의 수사결과 모두가 북한군 600명의 개입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12. 통일부 작성의 [주간북한동향 보고서]에 의하면 5.18은 북한의 역사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공개적 공방이 이루어지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13. 피고인은 18년 동안 연구한 학문적 결과를 스스로 신봉합니다. 그 신념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형성되었습니다. 이유 있고 근거 있는 학문적 신념에 따라 5.18이 [북한군 개입 없는 순수한 민주화운동이 아니라]는 표현을 한 것이 범죄가 되는지에 대해 공개 다툼을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1) 5.18은 광주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벌어졌던 10일간의 무력 충돌 사건이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은 서릿발 같은 계엄령이 선포되어 무자비한 예비 검속이 시작된 날입니다. 그런데 매우 놀랍게도 이날 오전 9:30분, 대학생으로 위장한 200여 명의 어깨들이 전남대에 진주한 공수부대를 찾아가 감히 가방에 숨겨온 돌멩이를 던지는 이변이 발생했습니다(증59의 6쪽, 25쪽, 68쪽). 5.18은 바로 이 순간에 촉발되었고, 열흘만인 5월 27일 05시 23분에 종료되었습니다. 1980년의 대법원이 5.18사건을 재판했습니다. 김대중이 죄인이었습니다. 이렇게 종결된 재판이 1996년 재심 절차 없이 다시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전두환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변하니 역적과 충신이 뒤바뀐 것입니다. 이처럼 권력이 쓴 역사는 승복력을 상실합니다. 그래서 역사는 객관성이 보장된 공론의 장에서 다투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후 5.18에 대한 표현은 이해집단에 의해 철저하게 봉쇄돼 왔습니다. 5.18 성역화로 이익을 보는 집단이 5.18을 마치 배타적 권리증이나 되는 것처럼 법 위에 군림해왔습니다. 5.18마패만 치켜들면 국가도 헌법도 대통령도 그 존재 가치들을 상실하였습니다. 피고인이 지금까지 받아온 수많은 소송과 집단폭력들이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2) 하지만 5.18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말은 과학의 결과가 아니라 정치인들의 흥정물입니다.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표현하도록 당국차원에서 처음으로 허용한 존재는 노태우 정권이었습니다. 1989년 당시 노태우 정권은 여소야대였습니다. 위기를 느낀 노태우는 1990년 1월, 3당 합당을 추진했습니다. 합당에 응하는 김영삼과 김종필은 차기의 대통령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걸림돌이 정호용이었습니다. 정호용을 제거하기 위한 흥정이 진행됐습니다. 정호용을 제거하는 데에는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정호용에 뒤집어씌운 것이 그가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원흉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광주사태’의 성격이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연구 결과를 반영해준 것이 아니라 정치인들이 흥정한 것입니다.
3) 이 사건에서 고소를 하였다가 취하한 윤장현은 광주시장이었던 당시 광주교도소를 외지인들이 공격했다 공언하였고, 5.18기념재단 상임이사였던 고소인 김양래는 광주 현장사진 속의 조직화되고 지휘체계가 갖추어진 군병들이 외지인이라 답하였습니다. 5.18기념재단 공식 홈페이지에는 1980.5.22. 오후 3:08분에 서울서 온 대학생 500여 명에 대한 환영 행사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증인 신문 과정에서 그는 이 500여 명의 정체에 대해 5월 단체들은 규명한 바 없다 하였습니다.
4) 북한에서는 해마다 5월이 되면 전 지역의 시, 군, 도시 단위에서 여러 날에 걸쳐 5.18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하고, 남한보다 18년 전인 1991년에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를 개봉하여 해마다 관람시키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북한에서 최고인 것에는 영예의 상징으로 5.18 글자를 넣어 이름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5) 국가 문서인 증59의 제1,2,3항에는 조직화된 200여 명 집단이 계엄군 소재지로 찾아가 그 무섭다는 공수부대 요원들에 돌멩이를 던져 7명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기록, 극비의 시간표에 따라 행군하는 제20사단 지휘부 차량부대를 300명이 매복 기습하여 사단장용 지프차 등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했다는 기록, 중무장으로 경비되던 인근 군납 업체인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600명이 점령해 출품을 기다리고 있던 신형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00여대를 탈취하여(증59의 11~12쪽, 증59의 제2항) 이를 몰고 전남 17개 시군에 위장돼 있는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털어(증59의 2항) 도합 5,403정(증59의 75쪽)의 총기를 탈취하였다는 기록, 총상 사망자 117명 중 75%에 해당하는 88 명이 무기고 총에 의해 살해됐다는 기록(증59의 73쪽), 광주사망자의 80%가 계엄군이 없는 곳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증59의 5항의 사망 장소 분석), 도청 지하실에 2,100발의 TNT폭탄을 조립해 놓았다(증59의 185쪽)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이 정도의 내용들만 종합해도 피고인은 5.18을 순수한 민주화운동이라고 믿을 수 없었고, 이러한 전투 행위들이 광주의 순수한 10~20대 하층 계급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6) 검찰의 수사결과 보고서, 육군본부가 발행한 [계엄사], 안기부 보고서, 통일부 자료, 북한 문헌 등에서 북한군 개입이 읽혀진다 해도 한 가지 미진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항쟁본부]를 결성해 5.18을 주도했다는 인물들은 당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말끔히 해소시켜야 연구에 산뜻한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피고인은 증59의 6항, [5.18항쟁 증언자료집]을 분석하였습니다. 이 증언들에는 5.18 시위대를 구성한 사람도, 지휘한 사람도 광주에 없다는 결론이 들어있었습니다(위 11-4)항 참조).
7) 피고인은 17년 동안 연구하여, 이 사회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위와 같은 사실들을 처음으로 찾아냈습니다. 이 연구 결과는 증거들로 뒷받침된 것이어서 허위 사실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어째서 허위 사실이 되고, 범죄 행위가 되는 것인지 구두다툼이 이루어지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14. 이 소송이 위계에 의한 소송이었는지에 대해 다투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15. [북한군 개입]을 연구결과로 내놓은 것이 광주의 명예를 보호한 것인지 또는 훼손한 것인지 공개다툼을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16. 증61을 북한이 1982년에 제작한 삐라라고 믿는 것이 범죄행위가 되는지에 대하여 공개적 다툼이 이루어지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1) 피고인은 1980~81년 중앙정보부에서 북한이 남한에 보내는 삐라와 남한이 북한에 보내는 삐라를 심리전 차원에서 다뤄본 적이 있습니다. 증61의 삐라는 재미 역사학자 김대령 박사가 제공한 것이며, 광주가 유네스코에 보낸 자료 중에서 추출되었을 것입니다. 삐라의 내용들과 인쇄술이 북한의 것이라 판명되고, 그 중에서도 머리를 톱으로 자르다 만 얼굴은 북한 황해도 신천박물관의 대미 모략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2) 증61에는 6개의 삐라가 있습니다. 삐라에 있는 떼어 쓰기를 그대로 이기합니다. “주한미군은 이 땅을 불법강점한 침략군이다. 미군은 당장 물러가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름으로 발행한 의거 입북하는 국군장병들”에게 보내는 입북증, “광주대학살 잊지말자, 광주대학살 5,000여명, 총기로 사살한 수 2,600여명, 장갑차로 깔아죽인 수 150여명, . .생매장 하여 죽인 수 1,700여명, 광주용사들의 소원 자주.민주.통일이었건만” “인간백정 전두환 도당의 귀축 같은 살육만행을 보라” “1982.5. 민주화추진위원회”의 격문, “광주의 한을 풀자!” 등의 글자들이 허술한 인쇄술에 의해 기재돼 있습니다. 피고인은 이런 삐라를 대한민국 당국이 살포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반 여건상 한국의 좌경분자들이 살포했을 리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들로 보아 피고인은 그 삐라를 북한이 제작한 삐라라고 평가하였습니다. 반면 원심은 북한이 제작한 삐라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3) 삐라의 원산지를 놓고 피고인과 재판부의 평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이 이를 북한산이라고 믿는 것이 범죄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삐라에 대한 해석 역시 [북한군 개입] 표현이 의견이냐 허위사실이냐에 따라 어느 정도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피고인은 군 초급장교 때 정보특기를 인정받아 정보 분야에서 일했고, 중앙정보부에서도 근무했습니다. 1년간의 전략정보 교육과정도 이수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피고인은 북한 전문가 클래스에 속한다 할 것입니다. 이 분야에서는 상대적 비전문가라 할 수 있는 법관이 다른 삐라 전문가들의 자문도 받지 않고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국민 일반에 공포를 주는 처사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쟁점은 광주신부들이 관련된 사건의 주요 핵심일 것입니다. 이에 대한 구두다툼을 진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7. 김양래는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명의로 발행한 15구의 시체 얼굴을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 등재된 광주 사망자 154명(증147, 148)의 영정 사진들과 대조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 자체가 증거 없는 주장인 것입니다. 피고인 역시 15구의 얼굴을 154명 중에서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더해 1982년의 북한 삐라에 기재된 5명의 얼굴이 15구의 얼굴 중에 포함돼 있고, 북한의 모략수법인 톱으로 잘리다 만 얼굴 사진이 삐라에 포함돼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 공개다툼을 진행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18. 이영선 신부 등 1987년 및 1995년 화보 발행 당시 정의평화위원회 소속이 아니었던 신부들을 피해자로 선정하여 고소한 행위는 위계에 의한 소송일 것입니다. 그 정당성에 대해 심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19. 상해 사건에 대해 심층 심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영상을 다시 관람한 후 쟁점별 구두다툼을 진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상해사건에 대해서는 별도의 답변서를 제출했고, 2018.12.18자 답변서 127 내지 151쪽에 석명돼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영상을 다시 관찰한 후 쟁점별 구두다툼을 진행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20. 장철현에 대해 심층 심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철현에 대해서는 신문 시간이 4시간 반 정도였습니다. 별도의 두꺼운 답변서를 2018.2.25.에 제출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도 공방이 이루어지도록 진행해 주시기 바랍니다.
21. 김사복의 아들 김승필에 대한 공방도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결 론
피고인은 낮에는 일하면서 야간 중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요행히도 육사에 입교하여 난생처음 교육다운 교육을 받았고, 그것도 무료로 받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소위 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대위에 이르기까지 44개월 동안 대게릴라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매우 유익한 전투 경험을 쌓았고, 군인의 박봉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유학시험에 합격하여 하버드나 스탠포드 학비의 2.5배나 되는 귀족학교인 미 해군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비싼 학비를 국가가 대주었습니다.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피고인은 평생 국가를 위해 충성해 왔습니다.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인생의 황금기라는 60 내지 70대를 이 나라 좌파들의 뿌리인 5.18민주화운동의 본질을 찾는 연구에 바쳤습니다.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였습니다. 구하기 어려운 자료들을 획득하였습니다. 10년이든 20년이든 반드시 진실을 밝힐 것을 마음먹었습니다. 시판된 책만 해도 9권을 저술하였습니다. 이는 국가사회에 대한 기여임과 동시에 피고인 개인에게도 영광스러운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피고인은 이 5.18연구로 인해 자유민주주의대한민국 수호 세력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국가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은 피고인이 국가에 보답한다는 일념으로 무려 20년 가까이 방대한 양의 공익적 연구를 한 애국 행위가 국가로부터 상은커녕 벌을 받는다는 것이 놀랍고 서글픕니다.
증거자료
증185. [역사로서의 5.18] 책 4권
증186 2013.6.8. 뉴데일리 “[역사로서의 5.18] 4부작, 미스터리 해결판 나왔다”
증187. [5.18역사학회 성명서]
증188. 책자 [5.18진상규명 대공청회]
피고인 지만원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항소 제8-3부 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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