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tv, 일주일 동안 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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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0-01-17 20:46 조회4,68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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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tv는 아래 내용이 규정에 어긋난다며 1주일 동안 차단당했습니다
제111화, 조선에선 노예, 일본에선 자유인
‘강제징용’개념 정리
강제징용과 일본군위안부는 반일종족들이 국민들을 선동하는 주제다. 일본을 야만의 나라 악마의 나라로 인식시키고 증오케 함으로써 한미일 삼각안보체제를 허물고 그 결과 남조선을 붕괴시키려는 종북주의자들의 전략이다. 이들 종북주의자들은 김일성 종교에 병든 사람들로, 민족의 정통성은 북조선에 있고 남조선은 태어나서는 안 될 더러운 나라라는 교리를 주입한다. 강제징용과 위안부라는 주제는 한국국민들로 하여금 일본을 영구적으로 적대시하게 만들기 위한 이념상품이다. 어려서부터 증오심을 가슴에 물려받은 종족들은 그 증오심으로 인해 도덕심과 인간성 그리고 지식을 습득하지 못해 늘 자기들이 속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다. 열등의식과 소영웅주의는 동전의 앞뒤다. 많은 사람들은 반일감정을 강하게 표출하는 것이 남들부터 애국자인 것처럼 지식인인 것처럼 인정받는 길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팩트가 없다. 문제는 언론 대부분이 종북주의자들의 노예가 돼 있다는 사실과 대다수 국민들이 보도매체를 맹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대다수 국민들이 독서의 빈곤으로 인해 생각하는 능력이 길러지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조선말기의 조선인들의 행태를 비관한 윤치호 선생은 ‘조선인은 10%의 논리와 90%의 감성으로 구성돼 있다’고 말했다. 이 90%의 조선인 감성이 지금의 한국인들에 그대로 유전돼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가 연구한 것, 이영훈 등이 연구한 것을 종합해보면 ‘강제 위안부’도 없었고, ‘강제징용’도 없었다. 반면 일본이 미개한 조선인들을 개화시켰다는데 대한 증거들은 사방에 널려있다. 조선은 미개한 원시부족이었다. 중국에 물질도 바치고 아름다운 여자들도 바치는 조공의 부족국이었다. 일본을 향해 왕실만 보존시켜 준다면 조선 땅 모두를 가져가도 좋다고 한 순종이나, 임진왜란 때 중국으로 피난 가겠다고 유성룡에 떼를 썼던 선조를 보라. 조선의 왕들은 부족의 추장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런 수치스러웠던 조선을 아름다운 꽃동산이요 격조 있는 문화사회였다고 미화시킨 종북주의자들, 그들은 왜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역사를 왜곡했겠는가? 30%의 양반이 동족의 70%를 노예로 삼은 나라가 이 세계에서 조선 말고 어디 또 있는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양반의 후예인가, 노예의 후손인가? “조선왕조 실록‘(2012. 김남 저) 제29쪽을 보면 ”우리는 십중팔구 상놈의 자손“이라는 중간제목이 있고, 그 제53쪽에는 ”햇수만 길 뿐, 의미 없는 오백년 위선의 역사“라는 제목이 있다. 이조 500년 동안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 일본에 병합되지 않고 그대로 또 다른 110년을 살았다면 우리는 지금 노예 신분을 벗어나 지금처럼 자유를 누리고 살 수 있을까? 저자는 생각한다. 일본과 미국이 아니었다면 조선인들은 지금처럼 개화돼 있지 못했을 것이라고.
오희문의 쇄미록 임진왜란 기록 (왜군이 쳐들어 왔는데, 아랫것들은 하나도 안 보이고... 오히려 일본군을 환영해줘서 걱정이다). 당시 일본군은 동네마다 양식을 나눠주며 환심을 사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평소 사람취급도 안 해주고 착취나 일삼는 양반네 편에 설 노예들은 아무도 없었다.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4일 계해 2번 째 기사. "적병이 얼마나 되던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하던데 사실인가?“
조선인들은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의혹만 가지고도 주리부터 틀고 갖가지 고문을 가했다. 1910년 일본에 병합되기 전까지 이러했다. 이것이 너무 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런데 조선역사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북한을 보자, 고사포로 고모부를 학살하지 않는가? 이씨조선보다 더 원시적이고 잔인한 곳이 바로 북조선이다.
반면 일본을 보자. 1887~89년의 3년 동안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은 일본제국 헌법제정을 주도했고, 그를 암살한 안중군은 현대적 재판제도(판사, 검사, 변호사)에 의해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을 뿐, 시뻘건 인두로 고문당하지도 않았고, 주리를 틀리지도 않았고, 엉덩이를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문을 당하지도 않았다.
이런 조선인들의 70%를 구성하고 있는 노예를 해방시켜 준 존재가 일본이었다. 양복을 입게 하고, 이가 북적대는 상투를 자르게 하고, 더러운 거리를 청소하게 만들고, 오염된 우물물 대신 수돗물을 먹게 했다. 더러운 거리를 청소시키는 일은 박정희 대통령도 시키지 않았던가.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에는 쓰레기가 넘치고 악취가 진동한다. 반면 오늘의 일본 땅을 가보라, 도로 배수로에 붕어를 키우고 있지 아니한가? 식민지 하에서의 일본 역할은 감정적으로 재단할 일이 아니라 팩트들을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
가정에서 동물 취급을 받으며 학대당했던 여성들이 대도시의 신여성을 동경하며 가정으로부터 탈출했다. 이들에게 대도시와 일본 땅은 로망의 대상이었다. 1919년 이광수가 처음으로 현대소설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무정]을 썼고, 수많은 소설들이 자유주의를 계몽했다. 당시 일본 땅은 여성에게만 로망이 아니라 젊은 청년들에게도 그랬다. 조선인들은 일본에 비해 열등한 종족이었지, 인종차별을 받는 종족은 아니었다. 일본은 교육이 없는 곳에 교육을 세웠고, 거짓말 하지 말라는 도덕교육을 가장 많이 강조했다. 일본인과 조선인과의 인종차별은 국가차원에서 없었다. 음습한 곳에서 자라는 독버섯들처럼 해방 후 이 땅에는 일본으로부터 탄압당한 공산주의자들과 그 후손들이 일본에 원수를 갚자며 음습한 공작들을 했다. 반일종족들이 꾸며낸 문화공작이었던 것이다.
1939년 9월부터 조선 청년들에게는 로망의 길이 열렸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항공모함을 만들어 하와이 미 해군기지를 초토화시킴으로써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렇게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느라 일본인 청년들이 대거 공장에서 군대로 징집돼 나갔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 12개국을 점령했다. 군대는 800만으로까지 늘어났다. 이들 800만 군대는 주로 일본 국민들로 충당됐다. 기업에서 일하던 청년, 취직하기 전의 젊은이들이 모두 일본군대로 징집되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 기업들에는 근로자가 고갈됐다. 기업들에 빈자리가 많이 생기자 비로소 조선청년들이 자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1939년 9월부터 무려 73만 일자리가 한국청년들에게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지원자를 뽑을 때에는 마치 1964년 서독광부를 선발할 때처럼 경쟁률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1964년 12월 10일 고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가 독일 함보른 탄광 지역을 찾아 파독 광부,간호사와 만났다. 고 육영수 여사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쳐내는 동안 눈물을 참으려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 박 전 대통령 모습이 인상적이다.(사진출처 청와대)
그래서 1939년 9월부터 해방을 맞을 때까지 6년 동안 73만 명의 근로자들이 일본에 간 것으로 보인다. 한국청년들은 일본에서 차별대우를 받지 않았고 퇴근 후에는 월급을 가지고 유곽과 술집을 찾을 정도로 자유로웠으며, 고국으로 돈을 보내 전답을 마련했다는 집들이 많이 있었다고도 한다. 특히 탄광에서 일하는 청년들은 일본 순사나 대학생 초봉의 몇 배나 되는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해방 직전의 조선청년들이 일본에 취직해 일본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는 데 대한 이야기다. 좌익들이 왜곡시킨 강제징용 사례는 탄광의 광부들에 대해서다. 좌익들은 조선광부들이 임금도 받지 못했거나 받았다 해도 일본인의 절반 정도였으며, 그 중 상당 부분은 공제돼 실제 받은 돈은 얼마되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혹사당해 갈비뼈가 돌출했고 자유도 없었다고 주장해왔다. 여기에 더해 민족적 차별을 받아 이유 없이 구타당하고 린치 및 감금을 당해기가 일쑤였다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왜곡은 사실과 다른 엉뚱한 사진들을 동반하여 교과서 등에 실렸다.
이에 대해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이우연이 제시한 임금표를 제시한다. 광산에 따라 일본기업이 한국인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들이 받은 임금은 광산에 따라 누가 더 높고 누가 더 낮은지를 분간할 수 없다. 때로는 한국노동자가 일본노동자보다 최고로는 30%나 더 높은 경우도 있다. 이는 숙달정도에 따라 임금이 책정됐고, 가족수당, 초과근로수당 등에 따라 다소의 차이기 있음을 짐작케 한다. 이우연은 “같은 탄광에서 5년 이상 장기간 근속한 일본인이 전체 일본인의 31%나 되지만, 조선인은 아무리 길어도 3년 미만”이라고 밝혔다.
또한 광부의 월급은 일본 초임순사 봉급의 3.67배이고, 서울남자교원의 4.56배나 되었다. 조선인 광부들은 기숙사에서 생활했으며, 어떤 광부는 술집도 다니고, 화투치고, 유곽에 다니다가 다음날 작업장에 결근하기도 했고, 그러나가 번 돈을 탕진한 경우도 있었을 정도로 자유를 누리고 지냈다 한다.
그런데 이런 자연스러운 현상이 왜 반일을 팔아먹는 종족들에 장사상품으로 등장했을까? 그리고 반일종족은 왜 생겨났을까? 1919년 레닌이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을 창설하고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팽배해지게 되자, 미국에도 일본에도 그리고 유럽에도 몽상가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는 현상들이 유행병처럼 번졌다. 공산주의를 모르면 인간 축에도 못 끼고, 지식인도 아니라는 선동용어들이 전 세계를 뒤덮었다. 일본도 미국도 이런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공산주의자들은 조선 땅에서도 생겼고, 일본 본토에서도 많이 생겼다. 일본경찰은 일본본토와 조선 땅에 범람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고 재판에 넘기면서 반공전쟁을 했다. 일본경찰이 빨갱이들의 선전 그대로 막된 사람들이었으면, 왜 지하에 꼭꼭 숨어 다니면서 움직이는 빨갱이들을 어렵게 잡았는데, 곧바로 총살을 시키지 않고 법정에 세웠겠는가?
1925년 안동출신 김재봉이 러시아의 코민테른(국제공산당)으로부터 밀명을 받고 서울에 와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이래 공산주의자들은 일본경찰로부터 끝없는 사냥을 당했다. 통계가 없는 지금, 그때부터 독버섯처럼 지하에서 자라 지금까지 확대된 공산주의자들의 숫자는 아마도 남한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오늘날 남북한 빨갱이들이 공동으로 일본을 증오하는 것은 바로 공산주의자들을 사냥한 일본경찰에 대한 복수심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런 인간들이 역사교과서를 장악하고, 문화를 장악하여 반일감정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해방 후 이승만 정부로부터 박정희 전두환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부가 공산주의자들을 사냥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들에 대한 원한을 수도 없이 쌓았다. 1946년의 9월 총파업, 10월 1일부터 46일 동안이나 지속된 대구폭동사건, 4.3반란사건, 여수순천반란사건, 6.25전쟁 등을 통해 빨갱이들은 많은 탄압을 받았다. 아마 수백만은 될 것이다. 이런 종족들과 그 후손들이 이 나라에 범람하기 때문에 이들은 이승만-박정희에 대들다가 급기야는 북한군을 광주에까지 불러들여 국가를 뒤엎으려 했다. 이런 종족들이 바로 [5.18종족]인 것이다. [반일종족]과 [5.18종족], 이들이 지어낸 거짓말은 그 성격이 100% 서로 닮았다.
[반일종족]과 [5.18종족]은 하나다. 하나의 종족이 일본을 모략했고, 하나의 종족이 전두환과 공수부대를 똑같은 매너로 모략한 것이다. 전두환과 공수부대는 곧 대한민국이다. 모략 당한 일본, 전두환, 공수부대는 무엇들이고 모략한 [종족]은 무엇인가? 전자는 피해자이고 후자는 가해자인 것이다. 전자는 우리에게 유익한 존재였고, 후자는 우리를 적화시키려는 악마들이다. [5.18족]은 공수부대를 모략하고 전두환을 모략했다. 공수부대원들이 삼삼오오 다니면서 강간을 일삼았다 모략했고, 대검으로 임산부의 배를 찔러 태아를 꺼내 임산부에 던졌다고 모략했고, 여성의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내고 대검으로 머리 가죽을 벗겨 전신주에 매달았다고도 모략했고, 구덩이를 파고 집단 암매장을 했다고 모략했다.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환각제를 마시게 한 다음 짐승처럼 광주 사람들을 학살했다고도 모략했다.
[반일종족]이 일본을 모략한 것이나 [5.18종족]이 전두환 및 공수부대를 모략한 것이나 그 성격과 매너가 정확하게 닮았다. [5.18종족]이 전두환과 공수부대를 모략한 내용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많은 애국자들의 노력으로 많이 인식돼 있다. 그러나 [반일종족]들이 교과서나 연속극 영화 등을 통해 세뇌시켜온 반일 모략내용들이 허위라는 사실은 이제부터 확산돼야 할 과제다. [5.18종족]들의 거짓말을 이해하는 국민들이 많아졌다. 이들 국민들은 [반일종족]이 세뇌시켜온 내용들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금방 이해할 것이다. 그렇게 이해시키려면 많은 계몽을 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국민들은 전두환도 억울하고 공수부대도 억울하고 일본도 억울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찍을 마침표가 있다.
1) 100년 전의 일본 굴지의 기업들을 일으킨 창업자들의 인격과 그들의 경영철학은 지금 이 나라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기업 수장들이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경지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근로자들을 매우 사랑하는 덕망 높은 사람들인 것으로 국제사회에 널리 인식돼 있다. 마츠시타 고노스케, 카이치로, 아키오 모리타 등 훌륭한 기업인이자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사상가요 교사들인 경영자들에게 강제노역이다, 학대다, 무임금 착취다 등의 언어들로 굴레를 씌우는 것은 우물 안 원숭이 족들이나 할 수 있는 저질행위다.
2) 극소수의 양반과 대다수의 노예로 구성된 조선민족의 구도는 이성계 이후 500년 동안 변하지 않았다. 1910년 순종이 조선에 대한 관리를 일본에 맡긴 이후 지금까지 109년이 흘렀다. 만일 일본의 통치가 없었다면 1910년부터 지금까지 109년 동안 조선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이조 500년은 일본이 없었던 기간이었고 발전이 전혀 없었던 기간이었다. 이조 500년은 극소수의 양반들이 대다수의 노예들을 부리는 재미에 푹 빠져 세월 가는 줄 모르게 인생들을 살았던 기간이었다. 만일 그런 조선이 지금까지 지속돼 왔다면 이 사회는 어떤 사회가 돼 있을까? 일본이라는 충격과 자극이 없었다면 이씨 조선은 609년 동안 지속돼 왔을 것이다. 500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데 109년 동안 무슨 변화가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도 한국여성은 조선여성 그대로 가슴을 노출하고 소수 양반들의 일-노예로 그리고 성-노예로 노동과 성을 착취당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극소수 조선양반들의 횡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뜻이었을 것이며 그 하늘은 이를 위해 일본과 미국을 동원했을 것이다.
조선 노예는 비참한 삶을 대를 이어 지속했으며 스스로 해방할 의지조차 없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동포를 노예로 부려먹고 갑질을 행사해온 인종은 오로지 조선족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로마의 시저, 프랑스의 나폴레옹, 몽고의 징키스칸, 아메리카 등은 피점령국으로부터 남녀를 데려다 노예로 삼았다. 하지만 조선의 양반들은 동족을 노예로 삼고 학대했다. 여성노예는 남성노예보다 더 지독한 학대와 착취를 당했다. 남한 사회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온 국민들은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수긍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의 북조선을 생각해 보면 저자의 설명을 이해할 것이다. 북조선은 조선의 전통을 이어온다는 정통성을 앞세운다. 김정은이 고모부 등 마음에 들지 않는 왕족들을 고사포로 쏘아 살점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여성들에 대해서는 동물처럼 끌어다 성적 욕구를 채운 후 헌신짝처럼 버린다. 지금도. 남성이 여성을 군화발로 짓이기고 임산부의 둥그런 배를 군화발로 짓이긴다. 바로 지금의 북조선이 600년 전의 조선인 것이다. 이 땅의 여성들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지배와 미국의 문화가 침투하지 못했다면 이 남조선 역시 북조선과 조금도 다름없이 꼬리 없는 원숭이로 절규하며 아비규환의 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대법원장 김명수의 대일전쟁 도전장
2018년 12월 4일, 대법관 12명이 전원일치로 일본 강제징용자에 대해 1인당 1억 원씩을 배상하라 판결을 내렸고, 그 배상금을 강제징수하기 위해 한국에 와 있는 해당 일본기업들의 유무형의 재산을 압류하고 경매로 매각하는 강제절차에 돌입했다. 이것이 일본을 지극히 자극한 것이다. 징용 노동력을 사용했던 일본 기업은 미쓰비시, 미쓰이, 스미토모, 신일철, 후지코시 등을 포함해 299개인 것으로 보도돼 있고, 이들에 고용됐던 징용자들은 14만 9천인데 이들에 대해서는 자식들에게도 소송자격이 있다고 한다.
15만 명이 수년에 걸쳐서 소송을 내고, 이들이 다 1억 씩을 받는다면 일본기업들은 15조를 배상해야 한다. 1965년 일본이 한국에 무상으로 제공한 배상금이 3억 달러, 이는 지금 환율로 계산하면 3천억 원, 일본이 생각하기에 이 대법원 판결은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을 것이다. 판사들은 시야가 매우 좁다. 외교에 관한 재판은 국내재판과는 달라야 한다. 이렇기 때문에 전 대법원장 양승태가 사건을 오랫동안 끌어온 것이다. 2012년 이 사건 손해배상을 최초로 인정한 대법원 주심이었던 김능환 대법관은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는 말을 남겼다. 반일 감정으로 판결문을 썼다는 이야기다. 지금 국내에 들어와 있는 일본기업은 395개, 미국기업 숫자와 막상막하의 숫자다. 총 투자액이 9천억이라 한다. 결국 대법원은 국내에 진출한 일본 기업 모두의 재산을 다 압수하겠다는 뜻이 된다. 이를 가만히 두고 볼 국가는 없다.
강제징용자, 한국정부로부터 이미 보상받아
조선일보는 2019년 7월 17일 “강제징용 보상은 1965년 청구권 협정에 포함, 노무현 정부 당시 민관 공동委서 결론 낸 사안”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이로 인해 조선일보는 청와대와 여타 언론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 조선일보는 왜 일본 편을 드느냐는 것이었다. 기사내용을 아래에 요약한다.
2019.7.17. 조선일보는 “강제징용 보상은 1965년 청구권 협정에 포함, 노무현 정부 당시 민관 공동委서 결론낸 사안”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부제는 “2005년 이해찬 총리가 위원장, 문재인 민정수석은 위원으로 참여, 피해자 7만2631명에 6184억 지급”.
2007~2015년에 72,631명에게 1인당 평균 810만원씩을 이미 배상받았다는 것이다.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문제는 2005년 8월, 노무현 정부 당시 ‘민관공동위원회’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반영됐다"고 발표했던 사안이다. . 당시 민관 공동위는 7개월여 동안 수만 쪽에 달하는 자료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한·일 협정으로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자금 3억 달러에 강제징용 보상금이 포함됐다고 본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1975년 우리 정부가 피해자 보상을 하면서 강제동원 부상자를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도의적 차원에서 보상이 불충분했다고 판단했으며, 이는 2007년 특별법을 제정해 정부 예산으로 위로금과 지원금을 지급하는 조치로 이어졌다. 민관 공동위에는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문재인 대통령이 정부 위원으로, 국무총리였던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위원장으로 참여했다.”
“민관 공동위의 결론은 ‘1965년 협정 체결 당시 제반 상황을 고려할 때 국가가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 권리를 소멸시킬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공동위는 강제징용과 관련해 "정부가 일본에 다시 법적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상 곤란하다"고도 했다. (신의성실의 원칙信義誠實原則 모든 사람이 사회공동생활의 일원으로서 상대방의 신뢰에 반하지 않도록 성의있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법원칙이다. 줄여서 신의칙(信義則)이라고 한다.) 개인 청구권은 살아 있지만 65년 협정에 따라 행사하기 어렵다는 취지였다. 대신 노무현 정부는 피해자 보상에 주력했다. 2007년 특별법으로 추가 보상 절차에 착수했고 2015년까지 징용 피해자 7만2631명에게 6184억원이 지급됐다. . "당시 발표로 강제징용 배상 문제는 끝난 것이란 인식이 굳어졌다. 우리 정부도 '강제징용 문제는 청구권협정으로 종료된 것'이란 입장을 유지했고, 법원도 관련 소송들에서 같은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이번에 문제가 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의 뿌리는 사실상 MB 정부 때부터다.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씨 등은 1997년 일본 전범 기업을 상대로 일본 오사카재판소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고, 2003년 일본에서 패소하자 2005년 국내 법원에 같은 소송을 냈다.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소했지만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2012년 5월 대법원(김능환 주심)이 처음으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한·일 협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개인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파기환송 판결이 나왔다. 당시 주심이었던 김능환 대법관은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고 했다.”
“이후 5년 이상 2심과 3심이 진행됐고, 김명수가 대법원장이 되면서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이 그 판결을 확정했다. 사법부와 행정부 판단이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외교적 협상을 요구하는 일본을 상대로, 정부는 '삼권분립에 따라 사법부 판단에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8개월의 '대치'는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이어졌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미국 등에서는 사법부가 외교 사안에 대해서는 행정부 입장을 듣고 신중한 판단을 내리는 '사법 자제'의 전통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그게 '사법 농단'이 됐다"고 말했다. "
박정희 정부가 이미 다 받았다
2005.1.17. 한겨레신문 보도는 아래와 같다. “공개된 5권의 문서에서 협상 당시 우리 정부가 징병, 징용 피해자 103만 2천 684명에 대해 총 3억 6천 400만 달러의 피해보상금을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 . 일본측으로부터 청구권 자금 성격으로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등 8억 달러를 받은 우리 정부는 70년대에 징용 사망자 8,522 명에 대해 사망자 1인당 그 유족에게 30만 원씩을 지급했고 일본 정부 발행의 유가증권에 대해서도 약 9천 700여건에 1엔당 30원씩으로 환산해 지급하는데 그쳤다. 이 때문인 지 벌써부터 태평양희생자유족회 등은 정부를 상대로 한 보상요구를 본격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속 좁은 판결의 후유증
2005년 공개된 외교문서에 의하면 우리 정부는 일본에 “징병,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액을 계산해 3억 6,400만 달러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이 중 우수리를 깎아내고 3억 달러를 준 것이다. 그 후 정부는 이들 징용자들에게 배상을 여러 차례 해주었지만 이들은 그 액수가 적다며 다 달라고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정부는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추가로 1인당 평균 8,100만원을 배상했다. 이에 따라 일본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에 대해 법원은 기각판결을 냈다. 그러나 대법관을 포함해 사법부에 좌익 판사들이 들어차 있게 되자 2012년 김능환이라는 대법관이 사고를 쳤고, 김명수라는 좌익이 대법원장이 되면서 오늘의 대일전쟁에 단추를 눌렀다.
1980년대에 한국은 아시아의 4마리 용중에서 가장 높은 경제성장 속도를 자랑했다.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화려한 경제지표에 만족해하며 한국경제가 곧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며 들떠 있었다. 지금의 문재인 종족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한국경제가 일본경제에 탯줄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문재인을 꼭두각시로 부리고 있을 검은 간첩세력은 한국경제가 곧 IMF외환위기보다 더 비참하게 추락할 것이란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일본이 경제적 탯줄을 끊으면 한국경제는 수개월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1980년대 후기였다. 한국 경제학자들이 지표 경제에 들떠있던 바로 그때 미국의 어느 한 시스템학자는 한국이 머지않아 용의 그룹에서 탈락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예언은 미국 LA 심포지엄에서 발표됐고,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예언은 당시 한국 경제학자들의 상황판단과 정반대였다. 그리고 한국경제는 그가 예언했던 코스 그대로 추락해왔다. 한국경제는 1980년대가 끝나면서 용의 그룹에서 탈락했고, 지금은 더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다.
그런데도 경제학자들은 입버릇처럼 한국경제의 기초 즉 펀더멘탈이 튼튼하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 학자들은 한국경제의 기초가 취약하다고 말한다. 같은 학자들인데 와 선진국 학자들과 한국학자들의 경제진단이 이토록 정반대일까? 한국경제학자들은 경제를 지수와 추세로 판단했고, 선진국 학자들은 시스템을 분석했다. 그래서 판단이 정반대인 것이다. 1950-60년대의 한국경제는 매우 비참했다. 사회 전체가 미국의 원조로 연명했다.
앞이 캄캄했던 한국경제가 1970-80년대에는 눈부신 성장을 이룩한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서양 학자들이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960~1970년대에는 분명 엘리베이터 식 수직 상승이 있었다. 한국 학자들의 분석방법에 따른다면 한국경제는 설사 상승하는 길을 걸어왔다 하더라도, 엘리베이터처럼 수직상승하지 않고 에스컬레이터처럼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을 것이다. 그것이 추세분석이고 거시경제 치수 분석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경제는 박정희 시대에 엘리베이터 식으로 수직상승했다.
한국경제가 용의 그룹에서 탈락할 것이라는 예언을 한 미국 학자는 경제성장의 엔진을 보았다. 다른 3마리의 용, 즉 싱가포르, 홍콩, 대만은 "두뇌기술"에 의해 경제성장을 주도하고 있지만 한국은 기능공의 "손끝기술"에 의해 경제성장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두뇌기술은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술이다.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야 국제시장에서 제값을 받을 수 있고, 새로운 제품이 끊임없이 나와야 일자리가 계속적으로 창출된다. 그러나 손끝기술은 남이 설치해준 공정에서 남이 가르쳐준 방법을 손끝에 익혀 기계를 돌릴 수 있는 기술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부가가치를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일자리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기존 기술로 먹고 살다보니 한국시장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중국 등 미개한 시장에 나가 싼 임금으로 연명하다가 중국으로부터 발가벗겨 추방당하는 신세들이 되었다.
1980년대 후반의 그 미국학자는 폐쇄됐던 한국시장이 개방되고 한국의 임금 이 선진국 수준에 육박하는 순간부터 한국에는 대량 실업사태가 찾아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한국이 이러한 딜레마를 비켜갈 수 있는 길은 하루 빨리 OEM 체제 즉 "선진국 제품을 원숭이 식으로 생산해서 납품하는" 하청 생산체제에서 벗어나 독자기술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 후 지금까지 나는 한국 경제학자들 중에서 이런 구조적 진단을 하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다. .
이러한 OEM 생산체제를 일본 오마에 겐이치 박사는 "통과경제"(transit economy)라고 표현했다. 한국경제학자들은 그의 표현에 서운함을 나타내지만 그의 표현은 100% 옳다. 한국은 아직도 20년 전에 어느 한 미국인 학자가 내렸던 정확한 처방과, 어느 한 일본인 학자가 가르쳐 준 정확한 진단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의 많은 경제학자들은 몇 개의 거시경제 수치만을 가지고 한국경제가 곧 일본경제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이 오늘날의 경제를 어떻게 일으켜 세웠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일본을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이유를 몇 가지만 알아보자.
첫째, 일본인들은 역사로부터 배우고 자타의 잘못으로부터 배울 줄 알지만, 한국인들은 5천년 역사만 자랑했지 어제의 문제들로부터 배울 줄 모른다. 일본인들은 묻혀있는 문제를 발굴해 내려고 노력하지만, 한국인들은 스스로 솟아난 문제들까지도 은닉하려 한다. 일본인들에게 어제의 문제는 곧 오늘의 지혜요 교훈이지만, 한국인들에게 어제의 문제는 곧 처벌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둘째, 일본인들은 세계에서 설계에 가장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민족이지만, 한국인들은 설계에 돈을 쓰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설계에 투신하면 밥을 먹지 못하기 때문에 머리 좋은 학생들이 법대를 선망한다. 설계는 가장 높은 부가가치를 낳는다. 그래서 설계에 돈을 쓰지 않는 민족에겐 희망이 없다.
셋째, 일본은 1946년도부터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품질관리 거장들의 지휘를 받아가면서 과학적 품질관리에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일본은 지금세계 제1의 품질 1등국이 돼 있다. 한국인들은 그런 노력들을 생략해왔다.
넷째, 기술에는 '문서에 담긴 기술(paper technology)'과 '생산기술(production technology)'이 있다. 미국인들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문서에 담아 놓으면 일본인들은 그것을 가장 먼저 생산기술로 전환하여 돈을 번다. 이는 엄청난 기술 소화력이다. 그러나 한국은 독자적인 생산 기술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 남이 만든 제품을 원숭이식으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핵심 기술이 담긴 부품과 소재는 대부분 수입한다.
다섯째, 일본의 기업들은 ‘개선’(Kaizen)을 목표로 한다. 이윤은 개선의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들은 이윤을 극대화시키려 한다. 그래서 일본 기업은 과학화를 통해 이윤을 얻지만 한국기업들은 속임수와 정경유착 등의 파행경영을 통해 단기 이윤을 얻고 있다.
여섯째, 일본 기업은 모든 의사결정을 수리공학팀의 분석에 의존하지만, 한국에서는 기업주의 후각에 의존하고 있다.
일곱째, 일본 기업들은 치열한 국내 경쟁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배양하지만, 한국기업들은 정치적 연줄을 가지고 몸집을 키우기에 집착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공정한 경쟁시스템으로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다.
여덟째, 일본에는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훌륭한 경영인들이 많다. 그러나 한국에서 가장 큰 몸체를 가지고 있는 기업인들은 사회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기업인들을 위한 배움의 모델이 없는 것이다.
아홉째, 일본 기업인들은 경영을 통해 훌륭한 경영 후계자들을 길러내지만, 한국 기업인들은 후배들을 몸종으로 부리며 퇴화시키고 있다.
열째, 일본은 누가 뭐래도 세계 제1의 품질국가요 신용국가다. 미국도, 영국도 일본의 품질관리 노력을 배우고 있다. 일본은 지난 100여 년간의 끈질긴 노력과 창의력으로 일본 고유의 품질 이론과 시스템을 창조해 냈지만 한국인들은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있다.
우리 경제가 일본을 쉽게 따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일본과 한국과의 이러한 차이점들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극복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음미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경제정책에는 수학적 깊이와 논리가 없다. 경제정책을 주도하는 핵심관리들은 어린 나이에 공무원 사회에 들어와 일생을 묻은 사람들이다. 시스템적으로 보면 한국 공무원 조직은 사람의 능력을 진화시키기는 게 아니라 퇴화시키는 조직이다. 그래서 공직의 연륜이 높으면 높을수록 고정관념의 벽도 높아진다. 이론적 체계 없이 경험만 많이 쌓으면 그 경험은 매우 위험한 고정관념으로 타락하기 쉽다. 그래서 소니사의 모리타 아키오 회장은 절대로 경험 있다는 사람을 뽑아 쓰지 않았다.
한국 경제를 시스템적으로 진단하기 위해서는 수학적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첫째, 한국경제의 위기는 국제경쟁력 차원의 위기다. 둘째, 국제경쟁력을 길러줄 수 있는 유일무이한 토양은 선진국형의 시장경제 시스템이다. 아담스미스의 가격이론이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기초 시스템이 한국에는 없다. 시스템 황무지인 것이다. 셋째, 시장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바로 이러한 과학적 접근방법이 없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일본을 따라 잡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2020.1.17.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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