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146)] (지만원 족적) 광주교도소 수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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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9-07 10:28 조회10,39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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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메시지(146)] (지만원 족적) 광주교도소 수감기
날벼락
2002년 10월 24일, 안양 평촌 소재의 아파트에서 광주 검찰에 의해 뒷수갑을 차고 압송당하는 순간에서 나는 극심한 문화충격을 받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를 야만적인 공산주의 집단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 것이다. 검찰 조사관 1명과 광주 서부경찰 3명(김용철, 이일남, 박찬수, 이규행)이 6시간 동안 나를 압송하면서 세상에서 들어보지도 못했던 험한 욕을 쉴 새 없이 쏟아냈고, 아비뻘 되는 나를 쉴 새 없이 번갈아가면서 구타했다. 광주 검사 최성필은 내가 검사실로 들어서자마자 오른 손주먹을 위로 올려 곧 내려칠 듯이 달려오며 노려보았다. “이 개새끼 뒷수갑 풀지 말고 밤샘 조사해~”
영장 실질 심사를 하는 1957년 함평산 정경헌 부장판사는 아비뻘 되는 광주인 변호인(이근우)을 향해, “변호인은 광주시민들로부터 무슨 욕을 들으려고 서울사람 변호를 받았소.”하면 노려보았고, 나를 향해서는 “그 입 닥치시오.” 하고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천년만년 기세등등하게 살 것 같던 그의 에너지는 겨우 50줄에 하늘로 증발하고 말았다.
어르신, 꼬옥 갚을 테니 돈 쪼깐 빌려주쇼잉
경찰서 유치장인 듯 여러 청년들과 며칠 밤을 보냈다. 젊은이들이 차례로 오면서 어르신 어르신하며 아양을 떨었다. 그리고 “꼬옥 갚을 탱께 돈 5만원만 빌려주쇼잉” 어떤 이는 3만원, 어떤 이는 6만원 빌려갔다. 나는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교도소에서 무슨 돈이 필요할까 싶어서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달라는 대로 주었다. 며칠이 지나자 나는 광주 교도소로 끌려갔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후진 감방이라고 했다. 한방에 12명이 수용됐다. 낮에는 하루 종일 벽에 등을 대고 기대 앉아 있어야 했다. 벽을 3면으로 둘러앉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틈이 없었다. 밤에 자려면 좁아서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했다. 바닥은 나무 바닥이어서 판과 판 사이에 틈이 벌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찬바람이 불어 왔다. 이력이 난 수용자들이 틈새를 종이로 메우긴 했지만 그래도 찬 겨울바람을 막지는 못했다. 수시로 간수들이 눈을 부라리며 감시를 다니기 때문에 늘 앉은 자세를 똑바로 해야 했다.
방장이 제왕
방의 왕은 방장이었다. 방장은 말발 꽤나 있는 고참이 차지했다. 방장에 찍히면 24시간 내내 심리적 괴롭힘을 당한다. 방장이 찍으면 찍힌 사람은 10여명으로부터 심리적 이지매를 당한다. 약삭빠른 전라도 사람들은 서로 방장 눈에 잘 들려고 아양 실력을 발휘했다. 인격이라는 것은 없었다. 감방은 그야말로 아양의 전시장이었다.
방안의 모두가 전라도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5.18을 비방했다는 죄로 들어온 것이다. 모두로부터 이지매를 당할 것이라고 예상한 나는 또 한번의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그들 모두가 내 편이 된 것이다. 그들은 5.18 단체들을 향해 모두 “양아치 깡패새끼”들이라고 일관되게 욕을 했다. 5.18은 양아치 잔치들이고 수상한 외지 도깨비들에 놀아난 폭동이었는데 일부 사기꾼 같은 조폭들이 5.18 단체를 만들어 광주 시민들을 협박하면서 돈을 뜯어내고 옳은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한다고 성토들을 했다. 5.18깡패 놈들 때문에 전라도 전체가 욕을 먹는다고 했다.
한 수용자는 자기 이웃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1톤짜리 트럭을 모는 이웃이 있었는데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여러 차례 달래서 집에다 쌓아 놓았다가 총에 맞아 죽었는데 5.18 유공자가 되어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했다. 경찰서에 한번 불려간 거 가지고 뻥튀기 하여 유공가자 돼가지고 으스대고 다닌다고도 했다. 5.18에 대해 만장일치로 성토들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학자라고 하니까 함부로 하지 않았다. 식사 때마다 퐁퐁 설거지를 했는데 그러려면 수돗물이 나오는 순간에 수세식 화장실에서 여러 개의 물동이에 물을 담아 방안으로 옮겨놔야 했다. 내가 힘이 약해 보이니까 방장이 그 일만은 내게 하지 말라고 배려를 해주었다.
방장으로부터 받은 특별대우
방장은 키가 175cm 정도 되고 군살이 없는 건강체였다. 그는 고급 사기꾼인데 2년형을 받고, 2심에서 부지런히 반성문을 써내고 있었다. 2심 재판장은 여성이었는데 그는 반성문을 통해 여성 재판장의 눈물샘을 자극해야 한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반성문에 대해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나를 대접하기 시작했다. 내 잠자리를 자기 옆으로 정해주었다. 모두가 모로 누워 칼잠을 잤지만 방장과 나만은 똑바로 누워 잘 수 있었다.
취침시간이 되면 그는 나에게 속삭속삭 이야기를 했다. 그의 주특기는 세 개나 되었는데 하나는 사기, 또 하나는 여자 사냥, 또 다른 하나는 바다낚시였다. 그는 사기를 쳐서 서울 압구정동에서 여인들 속에 파묻혀 살았다. 차를 타고 오가면서 눈에 띄는 여인이 있으면 말재간으로 사냥을 했다. 심지어 부친상을 당한 공직의 여인을 잠깐 얼굴만 보고 가겠다고 꼬셔내 모텔로 데려간 적도 있다고 했다. 돈도 사기를 치지만 수많은 여성을 사기쳐온 사람이었다. 그에게 여성 역사는 눈물과 사랑의 서정사가 아니라 육욕을 위한 무용담이었다. 그리고 그를 접했던 모든 여성들은 무용담을 위한 소모품들이었다. “이름 있는 여성 중에 누구 누구를 아세요? 다 나를 거쳐 간 여자들입니다.”
여성 재판장을 어떻게 녹일 것인가? 그는 그가 범한 죄에 대해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안됐다~” 이렇게 느끼도록 반성문을 구상했다. 문자에 의한 표현력은 없어도 표현 전략만큼은 천재였다. 그는 여성 판사의 모성애를 자극할 수 있는 대목에 초점을 맞춰 이리저리 그 표현을 바꾸어 가면서 최적의 표현을 뽑아냈다. 결국 그의 반성문은 눈물 나는 서정시가 되었다. 이렇게 작성된 최후의 반성문으로 그는 나보다 먼저 집행유예를 받고 나갔다.
한 여인의 종으로 사는 미남 조폭
이웃 방들에는 조폭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기이하게도 내 감방을 지날 때마다 창살 틈으로 들여다보면서 “우리 교수님 잘 모셔라~”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어떤 때는 여성용 로션도 바르라며 창살 틈으로 넣어주곤 했다. 조폭 사회인 교도소에 모처럼 이름 있는 교수가 왔으니 신분이 상승되었다는 생각에서였는지, 아니면 5.18 폭력배들 때문에 군소 조폭이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인지 그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어느 날 미남에다 체격도 좋은 조폭 A가 두꺼운 서류뭉치를 내게 건네면서, 그 내용을 가지고 판사에게 탄원서를 작성해 달라고 했다. 내용을 읽어보니 참으로 딱했다. 그는 조폭으로부터 이탈하고 싶어 서울로 가서 숨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속한 조폭이 싸움에 말려들어 경찰에 구속됐다. 구속된 조폭들이 A의 이름을 대면서 A도 관련됐는데 도망을 쳤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그 진술을 사실로 믿고, 서울에 있는 A를 수배하여 잡아왔다. 한번 조폭에 발을 넣으면 빠져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가 없었다.
어느 날 A는 약혼녀와 함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약혼녀가 있는데도 술집 주인 겸 마담이 A에게 눈짓을 하고,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약혼녀가 화장실에 간 틈을 이용해 마담이 접근하더니, “매우 중요하게 할 말이 있으니 애인을 보낸 다음 자기를 꼭 보고 가라”고 했다.
A는 약혼녀를 먼저 보냈다. 그리고 마담과 술을 마셨고,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마담은 수시로 A를 불러내 약혼녀와 만날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마담과 살림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담은 잘생기고 마음씨 착한 A를 늘 감시하고 협박했다. 협박의 약점은 조폭 전과 기록이었다. 마담은 경찰 한 사람과 단짝이 되어, A가 저항하면 ‘없는 일’을 ‘있는 일’로 꾸며 검찰에 송치하곤 했다. 일단 전과자로 낙인찍히면 그때부터는 팩트가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이 묶는 프레임이 작용했다.
결국 A는 술집 마담에 걸려들어 그녀의 노예가 되었다. 두 사람은 거미와 곤충의 관계였다. 세상에 참 희한한 운명도 다 있구나! 했다. 이 딱한 운명이 묘사된 탄원서를 받은 재판장의 마음도 많이 아팠을 것이다. 과연 어떤 도움을 주었을까?
3개월 11일 동안 나는 광주 교도소 밥을 먹었다.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2003년 1월에 출옥 하면서 나는 다짐했다. “5.18은 빨갱이 소굴이다. 붉은 말벌집이 틀림없다.” 10년이 가든 20년이 가든 반드시 진실을 파헤칠 것이다. 독하게 마음먹었다.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 수석 변호인 이양우 변호사로부터 전두환 내란사건 관련 18만 쪽의 수사 및 재판 기록을 빌려다 매일 연구하기 시작했다. 10.26 밤의 역사, 12.12 밤의 역사, 5.17 역사 그리고 5.18 역사를 수사기록을 가지고 연구한 사람은 이 대한민국에 오로지 나 한사람뿐이다. 내 연구에 정통성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10.26. 12.12, 5.17, 5.18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책들은 언론 기사 조각들을 짜깁기한 픽션에 불과했다.
감옥과 면회
나는 겨울의 한가운데 계절인 10월 말부터 이듬해 1월 초까지 광주교도소에 있었다. 그해에는 눈도 많이 내려 안양에서 가족이 면회를 오려면 새벽 4시, 눈 쌓인 길을 뚫고 칼바람을 맞으면서 오가는 택시를 애타게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광주 비행장으로 와서 또 택시를 타고 와야 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눈이 많이 쌓인 아주 추운 어느 겨울날, 그날이 내 환갑이었다. 집사람이 와서 5분인지 10분인지 얼굴을 보고 울면서 나갔다. 나 역시 눈물을 흘리며 돌아오다 갑자기 설움이 폭발해 인적 드문 복도에서 쪼그려 앉아 펑펑 울었다. 호송하는 교도관도 너무 안돼 보였던지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감옥과 편지
감옥에서 받는 편지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누구로부터 받든 편지는 사랑의 표시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도 전자편지 시스템이 있었는데 이를 이용한 분은 오로지 생면부지의 일본 교포 여성 한분뿐이었다. 지금은 이름도 편지 내용도 모두 다 잊었지만 그때 내가 받았던 감동은 매우 놀랍고도 대단했다.
당시 나의 마음은 거센 파도에 휩쓸린 한 편의 조각배였다. 동서남북이 분간되지 않았고, 어지럽고, 공포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자애롭기 그지없는 그 여성은 내 이 심경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상처를 치유해주려고 애썼다. 다정한 단어들과 미려하고 자상한 문장솜씨로 지면을 조각했다. 그 글은 인간의 글이 아니라 가장 자애로운 여신만이 쓸 수 있는 사랑의 서정시였다. 이런 편지를 여러 장 받았다. 하지만 소통은 언제나 일방통행이었다. 주소가 없으니 답장도 해드리지 못한 것이다. 그 글을 문화적 가치로 보존하지 못한 것이 꽤나 아쉬웠었다.
감옥에 갇힌 영혼은 언제나 답답함에 신음한다. 가슴이 뻥 뚫린 적이 없다. 일면식도 없는 분들로부터 나는 사랑의 편지를 받는다. 공교롭게도 그분들은 [뚝섬 무지개]를 상기시켰다. “이 순간을 무를 수만 있다면!” [뚝섬 무지개]속 표현이다. “베트콩 소굴인 바위산을 깔고 앉아 밤을 지새울 때 밤새내 괴롭혔던 갈증을 오줌으로 해결하려 애를 썼을 때, 베트콩과 조우하여 총소리가 귀를 찢었던 절체 정명의 순간에, 그리고 미국에서 박사 과정이 강요하는 3개의 지옥문 앞에 섰을 때, 박사님은 오죽 괴로우면 ‘이 순간을 물렀으면’ 하고 절규 하셨겠습니까? 지금은 참기만 하시면 되는 고통입니다. 고통은 지나가는 것이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분들이 스스로를 내 입장에 세워 ‘내가 이런 입장에 있다면 내 마음을 어떻게 달랠까?’ 하고 이런 편지를 보내신 것이다. 내 마음을 달래라고 책들을 보내주시는 분들도 계시다. 건강은 마음에 달려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글과 책들을 선물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나는 버틸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기회와 희망을 포착하려고 노력한다. 희망을 갈구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신앙심도 생겼다. 마음속 아름다움을 가꾸다 보면 이 고통도 지나갈 날 오겠지!
2023.09.03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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