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소설] 전두환 (8) 5.18 - I(수정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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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2-14 23:12 조회12,10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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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소설] 전두환 (8) 5.18
5.18과 김대중과 전두환
1979년 12.12사태 이후 1980년 5월 17일까지 김대중이 주도한 람보행위는 분명 ‘여적 음모’사건으로 보였다. 적장과 합세하여 국가를 전복시키려 한 범죄행위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정보판단은 김대중이 김일성과 손을 잡고 김대중은 전국봉기를, 김일성은 남침을 감행하려 했다는 점에 이르지 못하고, 김대중의 내란음모만 독립시켜 범죄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당시 김대중의 죄는 ‘내란음모죄’였다. 만일 5월 17일 김대중을 구속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여적사건이 현실화되어 제2의 6.25 참변이 발생했을 것이다. 따라서 김대중이 5월 17일, 거사 5일 전에 체포된 것은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신의 역사하심이 아닐 수 없다.
5.17로 인해 전민봉기가 무산됐고, 전민봉기가 무산됨에 따라 김일성은 전략을 바꾸었다. 전민봉기 일정을 4일 앞당겨 5월 18일 광주에서 ‘의용군 봉기’를 일으키고, 그것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방법으로 ‘전민봉기’를 일으키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김일성은 광주 시위가 4개 광역도시로 확산되면 의용군 이름으로 북을 초대하는 방법으로 남침하겠다는 방침을 명령으로 하달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네 통상의 생각과 김일성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에 대해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이 세상에 ‘적국의 땅’에 전투 특공부대 1,200여명을 보내 국민 의용군을 가장한 폭동을 일으킬 마음을 먹는 지도자가 과연 있을까? 그런 사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은 상식에 구멍을 뚫고, 1,200여명의 원정대를 남파시켰다. 사람들은 철통방어를 입버릇처럼 말한다. 하지만 물샐 틈 없다는 철책선을 북괴 인민군은 마음대로 넘어다닌다. 노크귀순이 얼마나 많았는가? 2005년 530GP에서는 북괴군이 우리 내무반에 들어가 GP요원 전원을 사살하고 나갔다. 쉬 쉬, 노무현 시대의 일이었다.
김일성은 당시 이런 발상을 어떻게 했을까? 2008년 7월 4일, 연합뉴스를 비롯한 많은 매체들이 보도한 내용이 있다. “1965년 모택동은 김일성에게 남한에 무장 게릴라 봉기를 일으키라고 적극 권했다. 이에 김일성은 인도네시아에서 공산당이 일으킨 무장봉기가 실패한 사실을 예로 들면서 거절했다. 하지만 그 후 생각이 바뀌어 특수군을 양성하여 해외에 수출했다. 용병이었다. 1968년 1월 21일, 청와대에 김신조 특공조를 보냈고 그해 말, 울진 삼척에도 120명의 무장게릴라를 보내면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광주에 보낸 특수군은 비행기까지도 몰 수 있는 만능 맥가이버들이었다. 1980년 5월 20일, 광주 시민들이 MBC 2층에 불을 지르려고 화염병 수백 개를 던졌지만 실패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변전소에 불꽃을 일으켜 순식간에 건물 전체를 불태웠다. 이 기술자는 광주 시민이 아니었다. 막대기 공격, 돌멩이 공격이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다. 살인기계로 광주에 보낸 전투 특공조 600명, 이 숫자는 남북한 문헌 여러 곳에 활자화 돼 있는 숫자다. 판단한 숫자가 아닌 것이다.
이들은 대추방망이처럼 몸이 꼿꼿하고, 민첩하며, 눈에서 레이저 광선이 발산되기 때문에 어디에 가든 주목을 받는다. 그래서 도시게릴라에서는 이들을 가족신분으로 위장해 줄 수 있는 노인, 부녀자, 아동들이 필요하다. 실제 전쟁을 할때는 노인과 부녀자들을 총알받이로 앞세우고 전투요원들은 뒤에서 포복을 해 접근한다. 낙동강 전투가 그랬다. 광주 현장 사진을 보면 엄격한 통제를 받으면서 통일된 행동을 하는 민간인 그룹들이 많이 관찰된다. 당시 광주시민들은 날아다니는 총알에 맞는다면서 문을 걸어잠그고 숨어있었다. 어린 아이들도 많이 보인다. 업힌 아이, 안긴 아이, 손에 잡힌 아이, 심지어는 세 살 난 장금송, 장성택의 딸이 보이고 김경희가 보인다. 김경희는 김일성의 여동생이자 장성택의 부인이다. 사진들을 종합해 추산해보면 이런 민간인 규모 역시 600명 내외로 보인다.
5.18은 ‘시위’가 아니라 ‘군사작전’이었다. 600명의 맥가이버 부대가 광주에서 수행한 작전은 세계 군사전문가들이 불가사의로 평가한 이스라엘의 엔테베 작전보다 더 불가사의했던 고난도 작전이었다. 이스라엘 국민이 많이 탄 여객기가 납치범들에 의해 아프리카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억류된 것을 이스라엘 군이 침투해서 구해온 작전이다. 이스라엘과 우간다 공항은 공중급유 없이는 도달할 수 없다는 거리였다. 공중급유를 하면 기도가 탄로 난다. 그 어려운 조건의 작전을 뭇 군사전문가들의 상상을 깨고 성공시킨 것이 엔테베 작전이다. 이에 비하면 김일성이 1,200명씩이나 적대국에 침투시켜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공수부대를 마음껏 농락하고 공수부대를 광주시로부터 추방시키기까지 보여준 눈부신 군사작전은 ‘불가사의’에 여러 제곱을 해도 모자랄 듯한 신기한 작전이었다. 이렇듯 엄청난 능력을 거침없이 발휘한 도깨비들인데, 왜 뜻을 접고 중도에 사라졌을까? 계엄군의 진압에 못이겨 사라진 것이 아니라 김일성의 오판으로 인해 600명 중 475명을 잃고, 동력이 상실되어 5월 24일 정오경 줄행랑을 친 것이다.
5.18이 순수한 광주시민들이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국민저항 차원의 시위였다는 것이 상식화 돼 있는 현실에서 상식인들에게 과연 위와 같은 사건의 프로필이 수용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국민도, 법관도, 군인도, 정치인도 김일성이 저지른 불가사의를 감히 그들의 상상력 안에 수용할 수 없었다. 1981년의 대법관들에도, 1997년의 대법관들에도 북한이라는 변수는 판단범위에 있지 않았다. 1981년의 대법원은 5.18을 김대중의 내란음모 사건이라고 판단했다. “김대중은 10.26 이후의 국가체제 공백기를 악용하여 북한 측 불순분자들과 연합하여 최규하 정권을 무너뜨리고 정권 찬탈을 목적으로 내란을 음모하였고, 이어서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을 통해 자금을 살포하고 선동케하여 방화, 파괴, 살인, 강도 등의 행동을 저지르게 함으로써 광주를 무정부상태로 만들고, 계엄군에게 총격까지 가하는 폭동을 저지르게 했다.” 북한과의 관련성은 ‘불순분자’와 연합하였다는 수준에서 그쳤고, 감히 김일성의 남침 계획과 연결돼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1997년의 대법원은 5.18을 어떻게 판단했는가? “5.18은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해가지고, 최규하 대통령을 위압하여 권력을 행사하면서 내란을 목적으로 광주학살을 자행하였다.”
모든 사실은 수사기록에 있다. 수사기록은 1981년에나 1997년에나 변함없이 그대로다. 그런데 판사들의 이념에 따라 해석이 180도 달라졌다. 5.18사건 하나에 대해 두 개의 대법원 판결이 공존해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국민이 다 함께 꼭 짚어야 하는 것은 1997년의 대법원이 일사부재리 원칙을 위반했다는 사실이다. 1981년의 기판력을 뒤집으려면 ‘재심’절차를 밟아야한다. 그런데 재심 요건 여러 가지 중 유일하게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이 ‘새로운 증거의 발견’이었는데 새로운 증거는 최근에야 70여개가 발견돼있다. 1997년의 대법원은 ‘재심’을 진행 할 조건이 없었기 때문에 기상천외하게도 ‘특별법’을 만들어 ‘재심’절차를 회피하고, 편법을 써서 다시 재판한 것이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자면 1997년의 판결은 법적 정당성(Legitimacy)을 상실한 억지에 해당한다. 김영삼의 막무가내 식 밀어붙이기에 국회와 사법부가 곡법아세한 불순물인 것이다.
1997년 판결의 핵심은 12.12를 쿠데타로 몰아간 것에 있다. 12.12가 과연 쿠데타였는가? 쿠데타였는데 어떻게 최규하는 12.12 이후 9개월여에 걸쳐 대통령을 했는가? 전두환이 최규하 대통령을 위압했는가? 전두환이 5.18에 관여했는가? 5.18 소요기간에 전두환은 광주에 가지 않았다. 지휘계통을 보나 상황으로 보나 갈 수 있는 처지도 입장도 아니었다. 반면 광주에 직접 내려가 광주시 재진입작전을 직접 명령한 사람은 최규하였다. 5월 25일,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 전교사(전투교육사령부)로 날아갔다. 대통령이 직접 학생들과 얼굴을 맞대고 설득하겠다고 했다. 문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 ‘위험하다’며 장군들이 일제히 막고 나서서 눈물로 호소했다. “각하, 그건 절대 불가합니다. 위험합니다.” 다시 주저앉은 최규하 대통령, 작전참모에 물었다. “작전참모, 광주 시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빨리 수복해야 할 텐데, 수복작전을 하면 피해가 어느 정도 예상되겠는가?” 계엄사 작전참모 김재명 소장, “줄잡아도 150명은 넘을 것 같습니다.” 그의 맘속에는 수백 명이었지만 그렇게 답할 수는 없었다. 공수부대 1,000여 명을 쥐 잡듯 몰아가고 포위 섬멸시키기 직전 상황까지 몰아쳤던 그동안의 저력이 그대로 유지돼있다면, 탱크를 몰고 들어가 소총사격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랬다면 쌍방피해가 많았을 것이다. 150명이라는 말에 최규하 대통령은 조금 뜸을 들인 후 작전개시를 명했다. “광주 시민들이 생필품이 고갈되고, 범죄가 기승을 부린다니 속히 진압하시오” 작전참모는 5월 24일, 민간인을 포함하여 700여 명이 광주시를 떠나 북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여기에서 700여 명이라 하는 것은 특수군 125명과 민간집단 600여 명을 합한 숫자다. 그리고 광주에 염탐꾼 정보원들을 투입시켜 저항세력이 별로 없다는 것만 다행으로 여기고 핀센트식 소부대 특공작전을 계획했고, 다행히 17명의 피해로 탈환작전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수사기록이 이러한데 어떻게 전두환이 광주사태를 진압했다는 것이며, 어떻게 광주시민을 학살했다는 말인가? 도대체 판사들은 어떻게 이런 마구잡이식의 인민재판을 할 수 있었을까? ‘그 누가 훗날 이 복잡하고 귀찮은 사건을 조사하겠어?’, ‘그 누가 지나간 사건에 관심을 갖겠어?’ 분명 이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5.18은 정치사건이 아니라 군사작전
관찰은 과학의 어머니다. 열 사람을 인솔하여 같은 견학코스를 보여주었는데 각자가 본 것이 다 달랐다. 각자는 머리에 든 것 만큼만 본 것이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본 사람들은 아주 많다. 그런데 그것에서 만유인력의 법칙, 즉 지구 중심에서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을 숫자로 계산해낸 사람은 뉴턴 뿐이었다. 5.18에 대해서도 누가 관찰하느냐에 따라 발견물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정치인이 보는 시각 다르고, 기자가 보는 시각이 다르고, 군사전문가가 보는 시각이 다르다. 그런데 지금 일반에 투영된 5.18의 그림은 누가 그려주었는가? 정치인들이었고, 기자들이었고, 법관들이었다. 모두가 군사문외한들이었다. 5.18은 정치시위가 아니라 군사행위였다. 군사전략과 전술이 지배하는 군사행위의 덩어리였다. 군사전문가들이 해석해야 하는 역사를 문외한들만 대들어 선무당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5.18이 발생한 지 44년째인 지금, 반세기가 지난 사건을 어떻게 관찰할 수 있는가? 기록이다. 활자기록도 있고, 사진기록, 영화기록, 증언기록이 있다. 이 모든 기록에는 군사작전의 실체가 투영돼 있다. 이런 군사기록들을 문외한들이 이제까지 세도를 가지고 독점해 온 것이다. 세도가들이 전문분야를 월권하여 가로채가는 행위는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허용되는 악행이다. 결국 야만이 5.18역사를 독점하여 왜곡시킨 것이다. 세계적 세기적인 비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 남한에는 어떤 기록이 있고, 북한에는 어떤 기록들이 있는가? 5.18은 남한의 사건인데 이에 대한 기록은 어째서 북한에 더 많이 생산돼 있는가? 기록이 많은 쪽이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겠는가.
남한에는 어떤 기록이 있는가? 두 가지 기록이다. 계엄군 상황병들의 기록과 광주시민들의 현장목격 기록이다. 계엄군 상황기록은 무엇인가? 현장에 있는 무전병이 중대단위 상황병에게 불러주는 내용을 기록한 딱딱한 내용들이다. 광주시민의 목격담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5.18연구소 기록자들에 진술한 내용들이 80만 쪽이나 된다. 이들은 두 군데 보관돼있다. 하나는 5.18기념재단에 있고, 다른 하나는 유네스코에 있다. 5.18기념관 자료는 불리해질 때마다 변조시키지만 유네스코에 등재된 기록은 변조할 수 없다. 이 유네스코 기록을 가지고 재미 역사학자 김대령 박사가 4부작의 [역사로서의 5.18]을 저작했다. 광주시민들의 증언을 종합해 본 결과 5.18은 군사작전이었고 외지인의 소행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예를 들면, 땅끝마을에까지 복잡한 갈래 길을 곧장 달렸던 군용트럭 운전자가 돌아올 때는 길을 물었고 광주 유동삼거리에 와서도 “유동삼거리가 어디냐?”고 물었다는 목격담도 있었다. 20대 전후의 아이들을 트럭에 잔뜩 싣고 여러 장소에 몇 명씩 내려주면서, 철모와 M1소총과 카빈총을 주었다 한다. 한 사람이 두 자루씩의 총을 들게 해놓고 계엄군에 대항하라고 하니 총이 무거워 행동이 굼떠서 멀리 가지 못하고 자리를 지켰다. A지점에 있던 아이들은 B지점에 슬쩍 슬쩍 보이는 철모 쓴 아이들을 계엄군으로 인식하고 총을 쏘았고, B지점 아이들이 응사를 했다. 광주 아이들끼리 서로 쏘라는 고도의 전략이 목격담에 담겨있다. 한국 측에는 이렇듯 현장에 있는 병사의 목격내용과 현장에 있던 광주시민의 산발적인 목격담이 있을 뿐 현장사진도 없고, 동영상도 없고, 현장의 움직임을 동태적으로 묘사한 현장 스토리도 없다. 이 한국에 없는 것들이 북한에는 다 있다. 그렇다면 현장의 캡틴은 어느 쪽인가? 북한인가, 남한인가?
북한이 촬영하여 확산시킨 사진에는 어떤 정보가 있는가? 사진들을 보면 백마디 천마디 말할 필요 없이 누구라도 사진 속 주역들이 북한 게릴라 특수군이라고 인식할 것이다. 그 누구라도?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5.18의 성역을 지키는 총사령관이다. 2017년 10월 12일, 그 총사령관 김양래가 증인석에 섰다. 피고인 측이 광주 현장사진을 환등기에 보여주면서 사진에 담겨있는 모습을 묘사해 주었다. “여기에 광주 현장을 촬영한 사진 열두 매가 있습니다. 단련된 몸매에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총을 북한식으로 거꾸로 메고, 지휘체계가 확립돼 있고, 유니폼을 똑같이 입고, 무전기들을 들고, 총기의 격발기능을 검사하고, 수류탄을 고르고, TNT폭탄을 조립하고, 북한식 제식동작을 하고, 부대를 인식케하는 비표식을 하고, 장갑차를 몰고, 군용트럭 보닛에 타이어를 얽어매 요새를 만들고, 그 위에 중기관총을 설치하고 시내를 질주하는 사진들입니다. 이 사진의 주역들은 광주의 10대 20대 구두닦이나 껌팔이들이 아닌데 어떤가요?” 이에 5.18성역화 총사령관 김양래는 “광주시민이 아닙니다. 게릴라 부대입니다. 전두환이 투입시킨 편의대(게릴라)가 아닌지 새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광주시민이 아니라는 말은 외지인이라는 말이고, 게릴라 부대라는 말은 곧 북한 특수군이라는 말이었다. 이런 증언 내용이 공개되자 김양래 상임이사 측 변호인단은 공개된 내용이 자기의 증언을 짜깁기하여 왜곡하였다며 고소를 했지만 서울지검과 고검은 불기소 처분을 내렸고, 서울 고법에서도 재정신청을 기각했다. 이로써 그는 광주의 드센 5.18단체들로부터 아마도 엄청난 공격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인지 그는 젊은 나이로 최근에 사망했다.
북한이 현장을 촬영한 동영상은 ‘조선기록영화촬영소’가 1980년에 편집한 ‘5.18항쟁기록영화’에 담겨있다. 총을 던지면 잽싸게 받는 장면, 몸을 날려 차량에 오르는 장면, 눈을 반짝이며 긴장하는 장면, 지휘자가 한 손으로 좌측 차량을 멈추게 하고, 우측 차량에게 빨리 빨리 우회전하라고 유도하는 모습, 그 모션들이 얼마나 빠르고 긴장감 돌게 하는지 보는 순간 숨이 멎을 정도다. 아마도 교도소를 공격하러 출동하는 순간을 촬영한 것 같았다. 북한에는 광주의 곳곳에서 벌어졌던 전투과정을 스토리텔링 식으로 눈으로 본 듯이 정리한 서사들이 수록된 문헌들도 많다. 북한 문헌에는 군사용어, 이를테면 ‘전투서열’, ‘단대호’, ‘역포위’, ‘지휘본부’, ‘통신중계반’ 등과 같은 군사용어들이 등장하고 전술과 전략 그리고 교훈들이 실려있다. 이런 것들이 남한 기록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마치 문화재의 진가를 문화재 전문가가 감식해야 제대로 하듯이, 위와 같은 기록들을 가장 잘 감식하는 전문가는 군사전문가다. 광주에 이르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부근에는 작은 내를 건너는 ‘군분교’라는 교량이 있다. 군 상황일지에는 상황이 간단히 기재돼 있다. 그런데 최근 일간지 스카이데일리에 의해 당시의 군분교가 군사작전 용도로 이용된 사진들이 발굴됐다. 상황일지와 사진을 연결하니까 감식의 질이 향상됐다.
북 특수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20사단이 광주시내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광주시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은 겨우 1,000명, 20사단은 14,000명이다. 20사단이 광주로 오려면 철도열차와 고속도로다. 14,000명이 광주에 오려면 철로와 고속도로를 둘 다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두 개의 접근로를 차단시켜야만 했다. 이런 전략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군의 고급지휘관이지 양아치계급이 아니다. 300명으로 구성된 A조는 고속도로를 차단했고, 또 다른 300명의 B조는 광주역을 장악했다. A조가 펼친 군분교 작전은 가히 천재적이고 대범했다. 군분교는 광주IC로부터 광주시로 가기 위한 길목이었다. 중장비 불도저를 가져다 몇 개의 길목에 해당하는 도로를 깊게 절단했다. 차가 건너갈 수 없게 깊이 판 것이다. 어떤 길목에는 대형 트럭과 버스로 바리게이트를 치고, 목자재와 시멘트 덩어리를 날라다 높은 담을 쳤다. 고기를 가두리장으로 몰아넣듯이 20사단 병력을 몰아넣기 위한 가두리장을 만든 것이다. 많은 중장비들이 동원됐다. 그 후 아마도 동원된 중장비 기사들은 비밀보호를 위해 흔적도 없이 살해됐을 것이다. 행불자 82명 중에는 이 지점에 동원됐던 중장비 기사들도 끼어있을 것이다.
A조 300명은 간첩으로부터 5월 21일 08시에 20사단 차량부대가 톨게이트를 통과한다는 극비 정보를 획득했다. 300명은 여기에 매복했고, 또 다른 노인과 청년으로 이루어진 수백명의 군중이 손을 흔들며 환영하는 척 하면서 군 차량들을 가두리장으로 유도했다. 군 탑승원들은 손을 흔들며 답례를 하다가 모두 가두리 공간에 갇히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게릴라전의 묘수인 것이다. 300명의 북 특공조는 몽둥이와 낫으로 20사단 병력을 습격했다. 실종도 되고 부상도 입었다. 이 300명은 사단장 지프차 등 14대의 지프차와 트럭, M16소총과 여러 대의 무전기를 탈취하여 작전에 사용했다. 그리고 09시에는 B조 300명과 인근 자동차 군납업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합세하여 600명이 되었다. 이 600명은 경비가 철저한 아시아자동차공장을 접수해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374대를 몰고, 일부는 시내작전에 투입되었고, 일부는 전남지역 17개 시군에 위장돼있는 44개 무기고를 예행연습하듯이 불과 4시간만에 털어 5,403정의 총기를 탈취했다. 이 기록과 이 사진은 절대로 변조되지 않고, 5.18이 무엇인지를 입증하는 증거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군사작전을 수행했다거나 지휘했다는 지휘자가 광주에는 없다. 행적은 남았는데 행위자가 단 1명도 없는 것이다. 이 ‘군분교 사건’을 놓고, 그 누가 이를 민주화운동이라 평가하겠는가?
폭동작전 10일의 구성도
국민 대부분은 5.18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영화 화려한 휴가와 택시 운전사의 내용이 사실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전두환이 공수부대에 전라도 씨를 빨리라며 발포 명령을 내렸고, 공수 대원들에게 환각제를 빼갈에 타서 마시게 하여 짐승처럼 보는 대로 찌르고 때리고, 도청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난 시민들을 무차별하게 쏘아서 도청 앞 바닥을 피바다로 만들었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계엄군이 삼삼오오 돌아다니며 여성들을 희롱하고 성폭행했으며 광주에서 죽은 사람이 2천 명 또는 3천 명 정도 된다고 알고들 있을 것이다.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고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 중 맞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대검은 탄소강 제품이라 날이 예리하게 갈리지 않는다. 이는 적과 백병전할 때, 마지막 단계에서 적을 찌르기 위한 것이다. 병사들 간의 안전사고를 염려해 날이 서면 안 된다. 그래서 사과 껍질도 벗길 수 없다. 이런 대검으로 살을 도려낼 수도 없고 살에서 피가 나게 할 수도 없다.
광주에서 죽은 사람은 모두 166명이고, 이 중 12명은 북한 시체였다. 154명, 이태원 사망자 159명보다 5명이 더 적다.총에 맞아서 죽은 사람은 116명, 이 중에서 카빈총 등 무기고에서 나온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85명, 그 75%가 시위대가 쏜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북괴군이 쏘아서 죽여 놓고 그 덤터기를 공수부대에 씌워 남남 전투를 유도한 것이다. M16 소총에 의해 죽었다 해서 모두가 공수부대가 쏜 것은 아니었다. 5월 21일 총소리 향연이 시작되었을 시점에는 공수부대 장비인 M16 10정 이상이 시위대(북한군)에 넘어가 있었고, 실탄도 많이 넘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소문이 나 있는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사망한 사람이 겨우 154명이라는 데 대해 광주는 쪽팔려한다. 그래서 2천 명이 넘는 시체가 어딘가에 암매장되어 있다며 괴담을 뿌리고, 매년 정부예산을 타내서 고용을 창출해 가며 땅 파는 시늉을 해 온 것이다. 이래서 5.18을 광주의 먹거리 산업이라 손가락질하는 것이다. 암매장을 당한 사람의 수가 2천이면 실종자로 인정되는 가족이 2천 명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44년 동안 접수하여 실종자로 인정받은 수는 겨우 82명뿐이다. 계엄군이 삼삼오오 대열을 이탈하여 돌아다니면서 광주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것도 악의적 괴담이다. 당시에 계엄군 대열을 이탈했다면 그들은 성난 군중에 의해 사자 밥이 됐을 것이다. 군대 생활을 해보지 않은 군 기피자들이 이런 괴담을 지어냈고, 이런 괴담을 퍼뜨리는 것이다.
깊이 분석하지 않아도 북한이 주역
2024년 첫날, 스카이데일리는 5.18의 진실을 찾아내는 30개의 추적 기사와 언론, 예술, 종교, 문화, 정치, 교육계 등에 포진해 있는 5.18 유공자의 85%가 가짜라는 사실을 추적한 기사 5개를 [5.18 특별판] 40쪽에 걸쳐 집대성했다. 이 30개의 추적 기사 중에는 따져 볼 필요조차 없이 “5.18은 북한 소행”이라는 감탄사가 나올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중 7개만 추려 본다.
[5.18 특별판] 제 19쪽에는 제20사단장 박준병 소장의 양심을 의심케 하는 놀라운 사건이 있다. 1980년 5월 15일, 중앙정보부는 신안 앞바다에 북한 공작조가 침투했다는 긴급정보를 군 수뇌부에 건넸다. 계엄사 명령에 따라 박준병 제20사단장이 수색 중대를 신안 앞바다로 급파했다. 수색 중대는 통상 130명, 일반 중대보다 체력과 지능이 우수한 병사들로 구성돼 있다. 군용트럭 한 대에는 1개 분대 9명씩 승차한다. 그렇다면 수색 중대는 최소 13대의 트럭에 타고 거여동에서 출발해 송정리 쪽으로 달렸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간첩이 있었던지 송정리 길목을 지키고 있던 어깨 부대가 수색 중대를 습격하여 총기도 다 뺏기고, 으슥한 데로 끌려가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고 3주씩 단체 입원했다가 복귀했다. 팔팔한 병사들 130명을 외진 곳으로 끌고 갔다면, 끌고 간 사람들은 몇 명쯤 되었을 것이며, 얼마나 무술 능력이 출중했겠는가? 300명 단위로 움직이는 A조일 것이다. 이들이 바로 5월 20일 밤과 21일 새벽에 군 분교 작전을 수행한 부대였을 것이다. 이들 말고는 광주에서 집총한 20사단 130명을 요리할 만한 집단이 없다.
이는 엄청난 사건이다. 그런데 군 상황기록에는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사실이 그대로 보고되면 사단장이 문책 될 수 있는 엄중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사단장이 이를 숨기고 쉬쉬한 것이다. 박준병 소장은 12.12에도 관련되어 있었다. 경복궁 수경사 30단 단장실에 있었던 9명의 장군 중 한 사람이었다. 훗날 보안사 사령관도 하고 4성 장군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김영삼이 신군부를 때려잡아 감옥에 보낼 때 오로지 박준병만 빠졌다. 이는 장군 세계에서 지금까지도 불가사의로 회자되고 있다. 신군부 모두가 다 빗자루에 쓸려 감옥에 갔는데 왜 유독 그 한 사람만 제외했을까?
[5.18 특별판] 제 26쪽에는 김일성이 광주 침투 지령문을 내렸고, 공작조 남파는 이로써 팩트가 되었다는 명확한 결론이 나 있는 기사가 있다. 광주 봉기가 4개 도(읍)로 확산될 때 남침하라는 지령문이 있었고, 이 지령문이 국정원에 보존돼 있었는데 김영삼과 김대중 시대에 전량 폐기했다는 장군급 증언을 확보했다.
[5.18 특별판] 제 15쪽에는 광주의 운동권이 5.18을 국가전복 내란 폭동으로 사전 계획한 문서가 공개돼 있다. 사태 발발 1주일 전인 5월 11일,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장인 송선태가 직접 기록한 이른바 [자유 노트] 기록이다. 송선태의 글씨로 쓰인 내용에는 ‘죽창으로 방송국과 공공기관을 접수하고, 무기고를 탈취하고, TNT를 준비하고, 무기를 획득한 다음 도청을 접수한다.’라는 내용과 19일 2시~6시 사이에 북동 성당으로 진출할 것이며, 카톨릭 농민회, 카톨릭 청년회, 카톨릭 기도회 등과 연결한다는 내용들이 기재돼 있는데, 실제 이 기재 내용 그대로 5.18 작전이 진행됐다는 것이다. 이 계획을 1주일 전에 송선태 손으로 기록했다면 광주 폭동은 저들의 선전대로 자연발생적으로,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사전에 기획된 것이다. 그러면 당시 전남대 복학생 신분에 불과한 송선태가 이런 어마어마한 것을 기획하였을까?
자유 노트 모임에는 한상석, 정동년, 김상윤, 송선태가 있었다. 이 중에 5.18을 사전 기획할 만한 인물은 없다. 가장 그럴듯한 추측으로는 광주의 운동권 대부라는 윤한봉이 광주시민들을 작전에 동원하기 위해 ‘앞으로 이렇게 진행이 될 텐데 이 일정에 맞춰 광주의 단체들을 동원하라’는 뜻에서 말해 준 것을 송선태가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면 윤한봉은 5.18을 사전에 기획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는가? 아니다. 그가 광주 운동권 대부라는 말도 허명에 불과했다.
윤한봉은 누구인가? 스스로 구술한 내용이다. 광주 1고에서 땡땡이치고, 1년간 절간에 가서 지내고, 산과 냇가를 다니면서 낮잠 자고, 군에나 가자 생각해서 병참 군수과에서 근무하던 중 성격이 꼬장꼬장하여 자주 쌈질하고, 고교 출신이라고 멸시받는 것이 쪽팔려서 전남대 축산학과에 들어가 껄렁대다 민청학련에 관련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이어서 국보법 위반으로 또 형을 받고 반 박정희, 반 양키 운동에 나섰다가 형사가 잡으러 온다는 바람에 아기 업은 여동생을 부인으로 가장시켜 도망을 다니다가 여동생 똥가방을 버스에 두고 내리는 등 서울로 도망해 왔다가 미국행 화물선을 몰래 타고 도미했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무슨 5.18 내란 폭동을 기획할 능력이 있었겠는가? 정동년 역시 형의 양복점 시다로 있다가 학원 선생도 했다가 뒤늦게 복학하여 김대중으로부터 김상현을 통해 300만 원을 받았지만, 5월 17일 체포됐다. 광주의 좌경 단체들을 섭외할 수는 있었겠지만, 5.18 내란 폭동을 기획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면 송선태는 누가 말해 준 것을 기록했을까? 훗날 자유 노트에 있는 내용을 윤한봉이 구체화해 발언한 바가 있었다. 아하~ 그거다. 윤한봉은 증심사를 왕래했던 인물이다. 증심사는 남파 간첩,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한 머리 좋은 전라도 출신 간첩 손성모의 작전 지휘기지였다. 손성모는 비전향 장기수 유낙진의 딸 류소영과 함께 광주시민 동원에 대한 모의 등 광주 작전을 지휘했다. 이 손성모만이 사전에 5.18작전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 결국 가장 가능성이 있는 과정은 손성모가 윤한봉에게 작전 개요를 말해 주었고, 윤한봉이 송선태에 구술을 해준 것을 송선태가 기록해서 인력 동원을 구체화해야 하는 광주 운동권 회의에서 참석자들에 설명해 주었을 것이라는 그림이 그려진다.
간첩 손성모는 누구인가? 그의 모습은 광주 현장 사진 여러 곳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양손을 허리에 얹은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2021년 4월 30일, 탈북 1호 박사 안찬일은 ‘안찬일TV’에서 손성모를 특별히 소개했다. “손성모는 승려로 위장해 5.18 시민군 활동의 근거지인 ‘증심사’에서 비전향 장기수 류낙진(배우 문근영의 외조부)의 딸 류소영과 함께 5.18 공작을 주도했고, 현장 활동 등을 사실상 기획하고 지휘했다는 공적으로 북한 최고의 훈장인 ‘공화국 영웅 훈장’과 ‘1급 국기 훈장’을 받고, 김정일의 총애를 받으며 간부집단에 다니면서 무용담을 전파하는 일약 유명 명사가 되어 있다.”
[5.18 특별판] 제 18쪽에는 1980년 5월 14일, 광주 지역 군수지원사령부(군지사) 장교단 70명이 체육 단련 차원에서 무등산에 올라갔다가 증심사 옆길로 내려오는 도중 살기를 뿜어내는 음산한 청년 집단 100여 명을 마주쳤다고 증언했다는 기사가 있다. “장발에 남루한 옷을 입고, 몸매가 늘씬늘씬하게 빠졌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에 눈이 예사롭지 않게 반짝이면서 살기를 뿜어냈고, 말투가 전라도 말투가 아니었고, 장교단을 만나자 안절부절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5월 14일에 증심사에서 특수군 100명을 보았다는 것이다.
[5.18 특별판] 36쪽에는 “개수작 말라우” 북한 말씨 쓰는 청년에 던진 돌에 무릎을 맞아 평생 불구가 된 당시 예비군 중대장의 증언이 실려있다. “화순 소재의 무기로를 관리하던 예비군 중대장이 무기를 다른 곳으로 감추는 도중, 청년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이러면 안 된다.”라며 설득하자 멀리서 오고 있던 한 청년이 “개수작 말라우” 하면서 돌을 던져 무릎을 명중시켜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라고 증언한 내용이 기사화돼 있다.
[5.18 특별판] 제 35쪽에는 북 특수공작조가 5·18 이전에 전주와 논산에 맞물려 있는 대둔산(878m)에 은신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는 기사가 있다. 대둔산은 지금도 간첩의 소굴로 알려져 있다.
[5.18 특별판] 제 29쪽에는 1980년 5월 23일 새벽, 서울역에서 잡힌 이창용에 대한 추적 보도가 실려 있다. 이 사실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우선 그의 소지품에 200만 원이나 되는 큰돈이 있었고, 환각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관심을 끈다. 당시 200만 원이면 강남 아파트 30평형의 가격이다. 엄청난 공작금이다. 또한 간첩을 그렇게 많이 잡았어도 환각제를 소지한 간첩은 그가 유일했다. 환각제는 광주 유언비어의 핵심이다. 이 환각제는 아마도 사살한 공수 대원의 주머니에 넣어 놓고, “이 봐라, 공수대 주머니에 환각제가 있지 않느냐.”라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가져왔을 것이다. 공작금은 왜 가져 왔을까? 광주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에 광주 단체들을 포섭하여 인원을 동원하기 위한 공작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광주로 5·18 이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23일 새벽 서울역에 와서 서성거리다가 신고당해 붙잡혔을까?
이창용은 당시 46세로 본명은 홍종수, 고향은 경기도 양주였다. 그는 전남 보성군 득양면에 상륙하여 5월 20일 새벽 2시, 2명의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순천에서 하룻밤을 자고 광주시로 진입하다가 검문에 막혀 피한다는 것이 얼떨결에 서울행 열차를 탔던 모양이다. 서울역에 내려 이리저리 배회하는 것을 수상히 여긴 여관집 내외가 경찰에 신고해 붙잡혔다. 그런데 그는 왜 뒤늦게 광주로 왔을까? 5.18은 5월 22일 전민 봉기 계획을 갑자기 변경하여 4일 앞당겨진 사건이다. 이창용은 거사일을 5월 22일에 맞추어 북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광주로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광주 폭동이 예정대로 5월 22일에 발생했다면 이창용은 넉넉히 환각제와 공작금을 간첩 손성모에게 전달했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5월 22일 거사에 대해 김일성과 김대중이 내통해 있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10일 작전의 구성
5.18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인가? 먼저 윤곽부터 알아보자. 1980년 5월 18일 오전 9시, 250명의 공수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전남대를 북한 특공대원 300명이 학생으로 위장하여 찾아가 돌멩이 공격을 가하는 시점에서 시작됐고, 5월 27일 오전 5시 23분, 주영복 국방장관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시가 수복되었음을 보고한 순간에 종결됐다. 이 10일간의 폭동이 바로 5.18이었다.
첫날인 5월 18일은 어떤 작전이 전개됐는가? 가방에 돌멩이를 메고 온 북 특공조 300명이 일요일인 이날 도서관에 가겠다고 시비를 걸고, 귀가를 종용하는 계엄군을 향해 일제히 돌멩이를 던져 7명의 공수부대원 얼굴에서 피가 낭자하게 만들어놓고 발발이보다 더 빠르게 금남로로 도주했다. 공수부대 대원들에게 광주의 젊은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갖도록 한 행위였다. 금남로에 가서는 파출소들과 차량들에 방화를 하여 검은 연기가 높이 올라가게 해서 멀리에 사는 광주시민들까지 끌어 모아 준비된 유언비어를 뿌렸다. 유언비어에는 전두환이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 씨를 말리려고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으로 광주에 보내 광주시민을 때려죽이고 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광주 시민들에게는 공수부대에 대한 적개심을 심어주었다. 이 유언비어를 믿게하기 위해 촬영 작전을 했다. 금남로 건물 옥상 등에 사진기사들을 미리 배치시켰다. 김대중의 꼬붕인 광주의 향토사단 31사단장 정웅으로 하여금 공수부대가 곤봉을 휘두를 수밖에 없도록 하는 비상식적인 명령을 공수부대에 내려놓고, 곤봉을 휘두르는 장면을 촬영케 했다. 이 사진들이 국내에는 물론 해외에까지 전파되어 공수부대를 살인부대로 모략하는 증거들이 된 것이다. 이 사진들이 광주 시민들에 전파됨으로써 광주 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 어느 광주의 두뇌가 이런 고단위 심리작전과 특공작전을 기획할 수 있을 것이며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5월 19일은 어떤 날이었는가? 공수부대를 지휘하라는 명을 받은 31사단장 정웅 소장은 전날 자정, 공수부대 대원들을 공격받기 쉽게 만드는 명령을 또 다시 내렸다. 36개 골목에 공수부대원들을 5~6명씩 찢어서 배치시킨 것이다. 숫자에서 압도당하게 만들어놓고 공수부대를 섬멸당하게 하는 작전명령이었다. 매타작 당하는 공수부대, 옥상마다 벽돌과 돌멩이, 화분을 쌓아놓은 광주 시민들에 맞아 피를 흘리는 공수부대원들이 늘어났다. 명령이고 뭐고 병사를 살려야하는 2명의 대대장은 흩어져 있던 병사들을 한군데로 모았다. 위에서는 실정도 모르면서 시민 피해가 없도록 선무활동만 하라하고, 10~20배가 넘는 시민들로부터는 갖가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공격은 당하고… 선무활동이라 해봐야, 200명 단위씩 두 곳에 집결해 있는 상태에서 대대장이 핸드스피커로 “시민여러분 귀가 하십시오” 이 말을 반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계엄군이 바보 행세를 하면서 얕보일 수밖에 없도록 행동한 것이다. 야스럽고 꾀 많은 시민군, 도끼와 낫, 가위를 가지고 차려 자세로 눈동자조차 굴리지 않고 마네킹처럼 서있는 계엄군 병사에게 실실거리면서 다가왔다. 도끼로 철모를 툭툭 치며 내려찍는 모션을 취하다 임팩트 순간에 갑자기 멈추고, 기다란 각목에 낫을 매달아 공수대원 목에 걸고, “이걸 당겨 말어” 농락하고, 가위를 양 눈에 조준하며 “이걸 찔러 말어”, 병사들은 목숨을 완전히 내놓고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눈동자를 굴리지 않고 차려 자세를 유지했다. 이런 자들이 한순간 물러나자마자 불타는 드럼통이 굴러왔다. 차량이 지그재그로 달려와 병사들을 덮쳤다. 병사들은 어미 잃은 고아 신세가 되었다. 농락당하고 수모당하는 한국군 최강의 공수부대!
5월 20일은 어떤 날이었는가? 북한군 고도의 작전과 전략이 두드러진 날이었다. 20사단은 14,000명, 이들이 광주에 오면 북한군은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20사단 병력이 공수부대가 지난 이틀 동안에 당했던 입장에 처하면 병사들은 자동으로 총을 발사한다. 총을 발사하면 광주시민은 다 도망간다. 북 특수군만 고립된다. 이러하기에 북한군 쪽은 사활을 걸고 20사단 광주진입을 막아야만 했다. 대규모 부대가 광주에 들어오는 군사 접근로는 철로와 육로뿐이었다. 특수작전에 이골이 나 있는 북 특수군, 600명을 지휘하는 현장 지휘관은 광주에서 줄곧 여장을 한 리을설 상장(3성)이었다. 그는 인민군의 전설이고, 게릴라전의 대가였으며 끝까지 원수계급을 달고 추앙받다가 2015년 사망했다. 그리고 민간인 600여명과 리을설을 통활하여 지휘하는 총 사령관은 대남공작부(통일전선부)의 현역 수장인 김중린이었다. 우리 같으면 현역 국정원장이 북한의 청주시 같은 도시에 직접 날아가 심리전, 모략전, 게릴라전을 총 지휘할 수 있겠는가? 우리같으면 서울대학 총장이 북한 청주시에 가서 특공조를 지휘하겠는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지낸 노동당 비서 황장엽이 특공조 여러명을 지휘하여 ‘북한 민간인 집단에 멋모르고 들어갔다가 잡힌 해남 사람 김인태’를 도청 안으로 연행해 총살을 시킨 사진이 있다. 김정일 여동생 김경희와 그 남편 장성택과 같은 신분을 가진 남한의 로열패밀 리가 북한 청진시에 가서 게릴라 심리전을 수행할 수 있겠는가?
600명은 300명씩 갈라져 대대 단위로 활동했다. A조와 B조, A대대와 B대대. A대대 300명은 고속도로 진입을 막기 위해 ‘군분교’에 방대한 차단벽을 설치했고, B대대 300명은 광주역을 지키는 3공수여단 5개 대대 1,000명을 포위압살 장면으로까지 몰고 갔다. 3공수가 이 포위망을 뚫고 나온것도 기적에 해당했다.
유명한 5월 21일, 이 날이 바로 영화 ‘화려한 휴가’로 악용된 날이다. 이날 아침에는 ‘군분교’ 습격사건이 있었다. 무기고 44개를 탈취했고, 금남로 옥상학살이 있었고, 계엄군이 완전 포위당해 광주시를 탈출하여 외곽으로 쫓겨난 날이었고, 북한군이 광주교도소를 5차례씩이나 야간 공격하다가 600명 정예 특공조 중 475명을 사살 당하게 한 고농도의 군사작전이 펼쳐졌던 화려한 날이었다.
5월 22일은 어떤 날이었는가? 계엄군이 광주에서 탈출하고 나자 광주시는 폭풍이 쓸고 간 폐허처럼 을씨년스럽고 황량했다. 거리는 온통 돌멩이와 벽돌뿐이었고 건물들은 불에 그을려있고, 깨진 유리들이 널려있었다. 그리고 도청은 북한군이 차지하고, 광주 시민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다. 다만 시체를 도청으로 나르는 무개념 청년들이 노역자 신분으로 감시를 받으면서 가끔 드나들고 있었다. 광주의 유지라는 사람들이 모여 수습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무기부터 반납하고, 계엄당국과 협상을 하자고 했다. 무기를 반납하자는 데에는 합의를 이끌어냈지만 협상조건에 대해서는 갑론을박, 의견들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졌다. 하지만 무기는 북한군이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주 유지들의 말이 먹힐 리 없었다. 반면 475명을 잃은 북한군 쪽은 초상집이었다. 극장식 회의실에 모여있는 북한 간부들의 얼굴이 어둡고 무거웠다. 이 사진에는 황장엽 얼굴도 있고, 김경희와 강명도 등 탈북자들의 얼굴도 보였다. 475명이라는 주력을 잃고 나니 옆구리가 시렸다. 계엄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협박하기 위해 도청 지하실에 TNT폭탄 2,100발을 조립해 쌓았다. 계엄군이 들어와 생포되는 날이면 김일성은 국제사법재판소에 전범국 수괴 신분으로 기소된다. 국제사회에 설 자리를 잃는다. 만일 계엄군이 다시 쳐들어오면 이들은 자폭을 해서 흔적을 없애야 한다. 너 죽고 나 죽는 게임이었다. 생존한 특수군은 겨우 125명, 지휘부를 지키는 인력만 빼놓고 거리로 나서서 마지막 선동을 했다. “광주 시민여러분, 너무 많은 시민이 죽었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딸이 죽었습니다. 모두 다 나와서 싸웁시다.” 여성을 고용해 방송을 하고, 전투력을 보여주기 위해 복면과 마스크를 쓰고 도시를 쓸고 다녔다. 기관총을 트럭 위에 설치하고, 트럭에는 폐타이어를 묶어 달리는 요새로 꾸몄다. 팔을 명치에까지 올려가면서 걷는 북한식 제식동작도 보여주었다. 걸음걸이가 몸에 배어있기 때문에 걷는 모습만 봐도 북한군이었다. 모두가 소총을 거꾸로 메었다. 북한은 총구를 땅으로 가게 메고, 한국군은 총구를 위로 향하게 멘다. 그런데, 이때는 광주 시민들에게 “속았다, 외지에서 온 불순분자들이다” 의심의 정서가 퍼져있었다.
5월 23일은 어떤 날이었나? 심리전의 날이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군대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나라다. 이런 나라는 지구에서 소멸시켜야 한다”는 정서를 남한 사회에는 물론 국제사회에 전파하기 위해, 대대적인 시체장사 쇼를 벌이고, 그것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촬영하는 잔칫날이었다. 이때는 광주의 노역자를 시키지 않고 그들끼리만 관을 메어다 도청 광장의 분수대 앞으로 나르고, 행여와 영구차를 꾸며가면서 사진들을 찍었다. 관을 잡고 손을 하늘로 치켜 올리며 통곡하는 장면, 관 앞에서 우는 여인들의 모습, 사망자 명단을 들고 다니면서 이를 집단으로 쳐다보게 하는 모습 등 실로 다양한 시체행사 장면들이 수많은 사진들에 찍혀있다. 이 사망자 명단을 바라보고 있는 집단에 탈북자 50명의 얼굴이 담겨있다. 여기에 모인 민간인 집단은 서로 얼굴을 아는 사람들로 그룹을 만들어 놓았다. 영화배우 그룹, 시인과 작가 그룹, 조각가 그룹, 외교계 그룹, 행정계 그룹 등이었다. 서로 얼굴을 아는데 낯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면 그는 북한 말씨를 들은 염탐자로 인정된다. 영락없이 도청으로 끌려가 사살 당했다. 현장 사진에는 4명의 청년이 어깨가 꺾여 도청으로 끌려가는 사진들이 있다. 이 4개의 사진 중에 황장엽이 검은 사제 단화를 신고, 한 손에는 무전기를, 다른 한 손에는 무거운 유탄발사기를 거뜬히 들고 왕초 노릇을 하고 있는 장면이 나와 있다.
5월 24일 정오, 북한 원정대가 도청을 버리고 사라졌다. 도청에 있던 모든 북한 집단이 빠져나가도록 트럭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엄호한 북한 용사는 제1광수, 훗날 농업부 장관(농업상)을 지낸 김창식이었다. 마지막으로 남긴 사진을 보면, 1호 광수의 총 끝 멀리에는 오래도록 가족의 안위를 모르고 발만 구르던 광주 시민들이 무질서하게 뚝뚝 떨어져 기관총을 바라보는 모습들이 들어있고, 김창식 1호 광수의 얼굴이 찍혀있다. 침통한 얼굴에 철모에는 하얀 찔레꽃 줄기가 둘러져 있었다. 하얀 찔레꽃은 북한의 조화다. 이 사진이 북한군 집단이 남긴 마지막 사진이다.
5월 25일부터는 비워진 도청에 개념 없는 아이들과 개념 없는 청년들이 들어와 서로 낯선 사람들끼리 모여 갑론을박하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혈기싸움을 하다가 25일 밤중에 강경파가 수습위원이 되어 ‘결사항전’을 선포하는 만용을 부리다가 27일 새벽 계엄군이 들이닥치자 살려달라고 손을 들기에 이르렀다. 이상이 간략한 5.18작전 10일간의 프로필이다. 각 일자별로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기 전, 몇 가지 의문을 풀고 갈 필요가 있다.
북한인력 1,200명, 어떻게 왔나?
전투조 600명은 어떻게 왔을까? 북한 잠수정 정원은 11명이다. 잠수정보다 안전한 수단은 태백산을 이용하는 도보 침투다. 태백산 통로로는 전문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10명, 20명, 50명 단위로 침투했을 것이다. 이들은 1979년 10.26 직후부터 광주 주변의 산과 마을의 아지트로 침투해서 양아치(넝마주의)등으로 위장하여 광주시 건물과 골목들을 숙지하고, 도시 게릴라전에 필요한 물적 준비와 전략을 짰을 것이다. 1997년 가을 황장엽이 내려왔을 때 그는 남한에 간첩이 5만이 넘는다고 했다. 간첩들이 이렇게 많이 있으면 600명을 돌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전남지역을 이들이 장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남한에 간첩들이 포섭해놓은 동조자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 노인, 부녀자, 어린이들 600여명은 어떻게 왔을까? 대형 여객선을 타고 유유히 들어왔을 것이다. 이 말에 대부분의 독자들은 너무 오버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탈북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당시 김정일은 호방한 자세로 말했다고 한다. “이 당중앙이 전라도를 어떻게 만들어 놓았는지 다들 가서 보고 오라우” 현장 사진에는 김일성의 사촌여동생 김정숙도 있다. 북한의 양강도에는 ‘김정숙군’이 있다. 김정일의 처형 성혜랑의 얼굴도 있고, 그 아들 이한영도 있다. 김정일 여동생 김경희와 남편 장성택, 그리고 세 살 난 그들의 딸 장금송도 강명도에 안겨있었다. 김정일의 첫 부인 홍일천도 왔다. 로열패밀리 7명이나 온 것이다. 얼마나 자신이 있었으면 이 많은 로열패밀리까지 왔겠는가? 그러면 대형 여객선은 어떻게 목포항으로 버젓이 들어올 수 있었을까? 당시 사상을 의심받던 합참의장 유병현 대장이 전남 해안을 지키던 모든 경계병력을 전라북도 변산반도 이북으로 이동시켰기 때문에 해안이 완전히 오픈돼 있었다. [유병현 회고록] 제453쪽이 이를 증명한다. “5.18 직전, 나는 간첩들이 전북 변산반도 이북으로 대거 몰려들 것으로 생각하여 해안 경비부대 전부를 변산반도 이북으로 이동시켰다.” 도대체 어떻게! 군 작전 총 사령관인 합참의장이 하필이면 5.18 직전에 이런 세작 행위를 할 수 있었는가? 그는 광주사태가 5월 18일이나 5월 22일에 발생할 것이라는 사실과 그때 북괴 특공조가 광주에 오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의심이 가게 한다.
군을 모르는 국민들은 어떻게 그렇게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간 4성 장군이 북과 내통을 할 수 있을까 의아해 할 것이다. 두가지 기막힌 사례를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다. 제주도 한라산 공비가 새로 건국된 대한민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여수에 있던 제14연대를 제주도에 증원시키기 위해 선박에 보급품을 싣고 출발시키려 할 때 연대 내 공산주의자들이 총구를 거꾸로 겨누고 연대병력을 사살하고, 여수와 순천을 그야말로 피바다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병력이 도착하자 이들은 백운산으로 도주하여 공비가 되었다. 이때부터 공비가 급증하여 공비토벌 사령부가 설치되었고 그 사령관을 송호성 준장이 맡았다. 6.25가 발발하고 6월 28일 오전 11시 중앙청에 인공기가 꽂히자 토벌사령관 송호성이 인민군 복장으로 갈아입고 인민군 부대를 지휘했다.
또 다른 사례를 보자. 군번 1번 이형근 회고록 제55~57쪽에는 6.25 직전에 국군을 간첩이 지휘했다는 증거 10개를 “10대 불가사의”라는 제목으로 정리해 놓았다. 6.25 발발 2주 전에 군 중앙요직과 전후방 연대장급 지휘관을 전부 교체하여 지형도 낯설고 얼굴도 낯선 상태에서 전쟁을 맞게 했다. 6월 20일에는 대대적인 부대이동을 단행하여 기껏 정비해놓은 전투준비 태세를 파괴하고, 모든 장교와 병사들을 낯선 지역으로 내보냈다. 6월 11일부터 발령돼 있는 비상경계령을 6월 24일 0시에 해제했다. 6월 24일, 50%의 장교와 사병을 외박으로 내보냈다. 6월 24일 전후방 중령급 이상의 장교를 육군본부 장교클럽에 불러 양주를 마음껏 마시게 하고 댄스파티를 열어주었다. 국군이 한강교를 건너기 전에 단 한 개밖에 없던 다리, 한강철교를 폭파시켰다. 군은 대포와 차량 모두를 버리고 소총만 들고 한강을 건넜다. 9만 명이었던 군이 다 흩어지고, 한강 남쪽 제방에 도달한 숫자가 겨우 2만 명이었다. 이런 조치를 취한 간첩이 도대체 누구였을까? 얼마나 어지럽고 어수룩했으면 그 역적의 이름도 모를까? 당시를 살았던 장군들은 입을 모아 한 사람을 지목하지만 증거가 없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는 영국 국적의 상선에서 기관장을 하다가 와서 군대의 ‘군’자도 모르는 사람이었고, 육군총장 채병덕은 일본육사를 졸업한 병참 보급장교 대위출신이었다. 167cm키에 몸무게가 136kg, 6.25 당시 겨우 35세였다. 당시를 잘 아는 장군들은 그 반역자를 장경근이라고 지목한다. 일본제국의 판사, 서울지방법원장, 내무부 차관을 거쳐 1950년에 갑자기 국방차관이 되었다. 10대 불가사의를 창안해내고 강력히 실행할만한 두뇌와 경력을 소유한 인물은 장경근 한 사람 말고는 달리 보이는 사람이 없다. 간첩! 지금은 대통령들이 간첩행위를 하고 있다. 군에는 얼마나 많은 간첩 장군들이 있을까? 이에 비하면 유병현 대장의 간첩행위는 상대적으로 매우 가벼운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까지를 보면 당시는 물론 지금도 북한은 전남지역을 전세내서 사실상 소유했을 것이라고까지 상상할 수 있다.
5월 24일, 북한이 버리고 간 도청에는 누가 들어갔는가? 조직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호기심 많은 아이들과 별 볼일 없이 떠돌던 무개념의 청년들이 하나씩 둘씩 들어갔다. 낯선 사람들이 만나 갑론을박 하기도 하고, 편으로 갈라져 싸우기도 했다. 운동권도 없고 대학생은 두 사람 뿐이었다. 대학생들이 판을 잡아 강경발언을 하다가 사회를 긴장시켰고, 그래서 조기진압 작전을 초래했다. 이들 모두는 5월 24일까지 꼭꼭 숨어 지냈다. 운동권은 사전에 다 도망갔다. 그러면 5월 18일에서 5월 21일까지 지축을 울렸던 주인공들은 다 어디로 갔다는 것인가? 계엄당국은 지축을 울린 쓰나미 피해에 대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했나? 참으로 황당했다. 북한이 보낸 게릴라 부대일 수 있다는 가정은 당시 계엄당국의 상상 밖에 있었다. 말로는 ‘오열’이니 ‘꺼진 불도 다시보자’느니 ‘간첩이 당신 옆에도 있을 수 있으니 경각심을 갖자’ 강조했지만 그들 역시 말 따로 행동 따로의 집단이었다. 결국 사라진 도깨비들이 저지른 데 대한 책임을 이들 피라미 족에게 뒤집어 씌울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덤터기를 쓴 피라미 신세였지만 세상이 민주화 세상으로 천지개벽을 하다보니 지금은 이들이 최상급 유공자가 되어있다. 2001년 전남대 출판사가 발행한 [5.18증언자료집] 제1권에는 이른바 [항쟁본부] 간부들이 솔직히 밝힌 그들의 5.18 행적이 기록돼 있다. 김창길, 김종배, 정상용, 허규정, 박남선 등이 스스로 밝힌 바에 의하면 그들은 모두 5월 25일에 도청에 들어왔고, 그 이전에는 내내 숨어 다녔으며, 무기고를 턴 사람들, 도청을 24일까지 점령한 사람들은 광주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이런 사람들이 5월 25일 자정 무렵에 자기들끼리, 너는 사령관이다, 나는 외무담당 부사령관이다. 너는 내무담당 부사령관하고, 너는 대변인하고, 너는 상황실장하고, 19살 너는 기동타격대장을 하라, 이렇게 정해진 직책에 따라 사형도 언도되고 무기징역형도 언도되었다. 시위는 지구촌의 쓰나미 급이었는데 그 행위자를 단 한사람도 잡지 못했다고 하면 대한민국 자체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사형과 무기형을 뒤집어 씌웠지만 불과 2-3년 안에 다 석방시킬 수밖에 없었다.
1심 재판을 받은 피고인 수는 357명, 10대가 20%, 20대가 60%, 중고학생이 23%였다. 직업 종류는 57종, 양화공, 광부, 목수, 미장공, 자개공, 행상, 구두닦이, 철가방, 구두공, 석공, 이발사, 블럭공, 도자기공, 재봉사 등이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5명, 정동년(37 복학생)이었고, 배용수(34 운전수), 박노정(28 인쇄공), 박남선(26 화물차 운전수), 김종배(26 학생)이었고, 무기형을 선고 받은 사람은 6명, 윤석루(49 구두공), 윤재근(28 공원), 허규정(27 학생), 정상용(30 사원), 하영일(31 공무원), 윤재근(28 공원), 서만석(36 상업), 홍남순(67 변호사)이었다.
이 황당하고 우스꽝스런 코미디 현상을 당시 수사 총책이었던 이학봉은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2008년 11월, 그는 5.18의 마무리 단계를 회상했다. “주모자들을 다 잡아놨다고 해서 광주에 내려갔다. 20사단을 기습하고, 무기고를 털고, 국군 최강의 공수부대를 사지로 몰아넣고, 교도소를 무장공격하고, 어마어마한 놈들을 잡아 놨겠구나 호기심과 기대에 부풀어 갔더니 겨우 식당보이, 구두공, 트럭운전수와 같은 하빠리 피라미들만 잡아놓고 보여주더라. 간첩들이 일 저질러 놓고 도망간 모양이더라. 북한에서 게릴라군이 왔다고 하면 오버한다고들 찍어 누를 거다. 그런 말 하면 또라이로 찍힌다. 사회 분위기가 그렇다. 나는 북한이 게릴라 부대를 보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김일성이 1968년에 33명의 암살조를 감히 청와대에 보냈고, 120명의 게릴라를 울진-삼척 지역에 보냈고, 아웅산에 까지 와서 대한민국의 내각진과 청와대 비서진을 폭살시킨 것은 두 눈으로 보았으면서 김일성이 차마 그런 살인족을 광주에까지 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까지는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당시 정보와 수사를 책임지고 있었던 실무총책까지도 북한군이 직접 와서 5.18을 주도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것을 놓고 어떻게 일반 국민들더러 믿으라 하겠는가?
고정관념! 고정관념이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소니의 신화를 창조한 모리타 아키오는 미국에 건너가 처음으로 TV판매망을 구축했다. 사원을 채용할 때 판매 경험이 있다고 쓰여진 이력서는 모두 폐기하고 경험 있다는 사람을 전혀 채용하지 않았다. 경험은 고정관념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새로운 증거가 넘쳐나고 있다. 아무리 새로운 증거가 탄생해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버린 전문가는 새 증거 자체를 알려 하지 않고 배척한다. 이런 고정관념 때문에 결국 5.18을 통해 국군 최강의 부대인 공수특전단은 살인마 집단이 됐고, 강간집단이 된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느 나라 국민이 국가를 지키고 국민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치는 국군을 향해 살인마다, 강간범이다, 군발이다 멸시하고 저주하겠는가? 이 자체로 5.18광주집단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것이다.
광주 계엄군의 지휘 체계
광주폭동을 진압한 계엄군 지휘 계통을 이해하는 것은 5.18역사를 이해하는데 필수다. 계엄 총 사령관은 육군대장 이희성이고 그를 보좌하는 작전참모는 김재명 소장(2성)이었다. 김재명 소장은 청렴결백한 인물로 알려졌고 88 국제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 지하철 공사를 조기에 창설한 인물이다. 계엄사령부는 서울 용산 소재의 육군본부였다. 그 다음의 지휘관은 육군대장 진종채, 대구에 소재한 2군 사령부 사령관이었다. 당시 군은 2군 사령부를 ‘계엄사무소’로 지정했다. 그 아래의 지휘관은 육군 중장(3성) 윤흥정 CAC사령관(전투병과 교육사령부 사령관)이었다. 당시 군은 전교사(CAC)를 ‘전남 전북 계엄분소’로 지정했다. 그 아래의 지휘관은 육군 소장(2성) 정웅, 광주지역에 소재한 31사 향토사단을 지휘하는 사단장이었다. 이 정웅 소장이 공수대대장 10명을 직접 지휘했다. 정호용 중장(3성)은 공수부대 총 사령관이긴 했지만, 그 휘하에 있는 공수대대들은 31사단장인 정웅 소장(2성)의 작전명령만 받게 돼 있었다. 이를 이해하려면 약간의 군대상식이 필요하다. 군 지휘계통은 ‘양병’ 지휘계통과 ‘용병’ 지휘계통으로 대별된다. ‘양병’은 예하부대를 먹이고 입히고 훈련시키고 사기를 올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용병’은 그런 예하부대를 배속 받아 전투 목적으로 사용하는 역할을 한다. 쟁기를 벼르는 사람이 따로 있고 쟁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다. 같은 4성 장군이라 해도 육군 참모총장은 양병 지휘관이고, 합참의장은 용병 지휘관이다. 당시 특전사령관 정호용 중장은 양병 지휘관이었고, 31사단 사단장 정웅 소장(2성)은 공수부대 10개 대대를 작전에 사용하는 용병 지휘관이었다. 이런 군대상식을 일반 국민들이나 판검사들, 정치인들이 모르기 때문에 정호용 장군을 5.18을 탄압한 원흉이라고 비난해 온 것이다. 천하의 뚝건달이라는 김영삼이 이런 군대상식을 알 리 없었다.
5.18 옹호 세력은 또 계엄사가 광주에만 특별히 공수부대를 집중 배치했다며 음모론을 펴왔다. 하지만 이는 사실을 정반대로 뒤집어 말한 것이다. 5월 17일 자정에 선포된 계엄확대명령에 의해 즉시 배치된 공수부대 배치 현황을 보자. 광주에 2개 대대, 전북에 1개 대대, 충남에 1개 대대를 제외한 모든 공수부대가 다 서울에 배치돼 있었다. 1공수여단의 4개 대대는 연세대, 서강대, 홍익대 교정에 배치됐고, 5공수여단의 4개 대대 모두가 고대 교정에, 11공수 3개 대대는 동국대 교정에, 13공수 2개 대대는 성균관 대학에, 9공수 3개 대대는 서울대, 중앙대, 숭전대에 배치됐다. 전북 금마에 주둔한 7공수여단 4개 대대는 조선대, 전남대, 전북대, 충남대에 각 1개 대대씩 배치됐다. 광주의 전남대와 조선대에 동원된 2개 대대는 소풍을 가는 기분으로 바둑, 장기, 배구공, 농구공 등 여가용품들을 가지고 밤중에 떠났다. 이와 동시에 광주의 31사단 소속의 96연대 제1대대를 광주MBC, KBS, 전일(전남일보)빌딩에 배치했다. 이것이 5월 17일, 자정에 내려진 배치명령이었다.
5월 18일 작전
7공수여단, 전북 금마에 주둔해 있고, 여단장은 신우식 준장, 장교와 사병의 40%가 전라도 출신들이었다. 33대대는 전주 출신 권승만 중령의 지휘로 5월 18일 새벽 01시에 전남대에 와서 천막을 쳤고, 35대대는 대구 출신 김일옥 중령의 지휘로 같은 시각에 조선대로 가서 천막을 쳤다. 전두환이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광주로 보냈다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어긋나 있다. 1개 대대는 병력이 250~300명 정도로 구성돼 있었다.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다. 계엄령이 선포된 첫 날이라 서슬퍼런 ‘예비검속’이 발동됐다. 공기가 얼어붙고 숨소리조차 멎었다. 젊은 사람이 경찰의 눈에 띄면 여지없이 잡혀가 문초당하고 폭행을 당했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전국이 다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런데 감히! ‘모습만 봐도 오금이 저린다는 공수부대’를 찾아간 어깨부대 300명이 있었다. 오전 9시, 배낭에 돌멩이를 지고 전남대 정문을 지키고 있던 공수대원들에게 찾아가 도서관에 가겠다는 엉뚱한 요구를 하면서 시비를 걸었다. 순진한 병사들은 “계엄령이 선포되어 모든 학교가 휴교 상태가 되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라.”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이 천진한 공수대원들에게 갑자기 수백 개의 돌멩이가 날아갔다. 수십 명의 대원들이 돌에 맞았지만 맨 앞에 있던 7명의 공수대원이 얼굴을 가격당해 피가 낭자했다. 공수대원들이 달려갔지만 공수부대원의 달리기 속도는 이들의 상대가 못되었다. 이때 공수부대 장병들에는 어떤 감정이 생겼을까? ‘광주의 젊은 놈들, 두고 보자’ 적대적 감정이 생긴 것이다.
공수대원들을 따돌린 어깨들은 금남로와 충장로로 달려가자마자 준비된 사람들처럼 일제히 경찰을 제압했다. 경찰들은 줄행랑을 쳤고, 파출소들이 일제히 비어졌다. 평소에 경찰들에 잡혀 매를 맞던 껌팔이, 구두닦이들이 한 세상 만났다며 파출소마다 다니면서 기물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자동차에 불을 지르니 타이어에 불이 붙어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았다.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자 멀리에 사는 시민들까지 구름처럼 몰려왔다. 사람들이 몰려오자 여기저기에서 준비된 유인물들이 뿌려졌고, 유인물에는 온갖 괴담이 들어 있어, 전두환과 경상도에 대한 분노를 자극했다. “전두환이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 씨를 말리려고 보냈다.”, “이틀씩이나 굶기고 술에 환각제를 타서 마시게 해 짐승처럼 나댄다.”, “벌써 40명이 죽었다.”, “전두환이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 명령으로 전라도 70%를 사살하라고 보냈다.”, “공수부대가 대검으로 여대생의 유방을 도려냈다.”, “전두환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공수대원이 여대생 세 명의 팬티와 브라자까지 찢어내고 대검으로 등을 찔러 죽였다.”, “공수대원이 수창초등학교 앞 전봇대에 산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학생들이 죽어 피바다가 됐다.”, “계엄군이 장갑차로 시민을 깔아 죽였다.”, “공수대가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시체를 트럭에 던지고 있다.”, “삼립빵 트럭이 시체를 실으려고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다.”, “부녀자들의 국부를 찌르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 참을 수가 없다.”
이런 끔찍하고도 저속한 유언비어를 광주시민이 지어냈을까? 광주에 공산주의자, 반골 반역자들이 많이 있다 해도 어떻게 5.18 첫 날 아침에 사용하려고 상상을 뛰어넘는 이런 괴담을 미리미리 창작해 놓았을까? 전문적인 심리전 공작의 냄새가 나지 않는가?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키겠다고 미리 계획한 북한이 이런 괴담 생산의 발원지가 아닐까? 그렇다. 바로 북한이 괴담의 발원지였다. 황해도 신천 박물관! 황해도 신천군은 인천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두어 북진할 때, 미군이 하루만 거쳐 간 곳이다. 6.25, 10주년이 되던 1960년 6월 25일, 김일성은 신천 박물관을 개관했다. 박물관에는 사진은 없고 그림과 조형물만 있다. 사진은 사실을 촬영한 것이고, 그림은 상상도다. 사실은 없고, 모략은 해야 하겠고, 그래서 상상을 해서 수많은 그림을 그려 걸은 것이다. 두 미군 병사가 미모의 여성을 묶어 놓고 유방을 도려내는 그림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두 미군 병사가 미모의 여성을 묶어놓고 피가 튀지 않도록 정수리에 백지를 올려놓은 후, 커다란 대못을 망치로 박고 있는 그림도 있다. 여성을 묶어놓고 시뻘겋게 단 철 막대기를 들이대는 그림도 있다. 한 남자를 땅에 엎어놓고 톱으로 머리를 가로로 자르는 사진도 있다. 세 명의 미군 병사가 여성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젖힌 후 우악스런 집게로 이를 뽑는 그림도 있다. 한 남자를 여러 명이 엎어 놓고, 팔을 뒤로 제낀 후 겨드랑이로부터 각을 뜨는 그림도 있다. 남녀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사냥개들을 투입시켜 물어뜯게 하는 그림도 있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찔러 죽이는 그림도 있고, 동굴에 마을 사람들을 몰아넣은 후 입구를 폭파시키는 그림도 있다. 이는 대표적인 그림 몇 개를 소개한 것이며 실로 다양한 시나리오를 그림으로 표현해 놓은 곳이 신천 박물관이다. 바로 이 그림들에 잉태돼 있는 모략수법이 20년 후인 1980년 광주에 유언비어로 나타난 것이다.
이 신천 박물관 입구에 세워진 거대한 조형물에는 [미 제8군 사령관 워커의 명령문]이 새겨져 있다. “닥치는 대로 죽이라, 설사 그대들 앞에 나타난 것이 어른이나 로인이라 할지라도 손이 떨려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조선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미국 군인으로서의 임무를 다 하라.” 워커 장군이 미군 장병들에 내린 바로 이 명령 때문에 그림들에서와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광주사태 20년 전, 김일성이 워커 장군을 이렇게 살인악귀로 모략했던 그대로 20년 후인 광주에서 이름만 전두환으로 바꾸어 모략한 것이다. 1980년 [김일성 훈장을 수여받은 조선기록영화 촬영소]가 편집한 기록영화 [군사 파쑈도당을 반대하는 광주인민항쟁]의 마지막 부분 내레이션에는 아래의 표현이 흥분한 어조로 낭독됐다.
“야수같은 인간 도살자 전두환은 광주시민 70%를 무조건 죽이라고 명령했다. 젊은 놈들은 무조건 죽여라. 관용과 인정은 군대의 금물이다. 괴뢰군 놈들은 환각제를 마시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조건 찌르고 쏘라는 살인명령을 받았다. 세 살 난 어린이, 로인들까지 가리지 않고 살육하고 임산부 태아를 꺼내 남판치는 치 떨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순진한 여학생들의 젖가슴을 도려내고 잔인성만이 군대의 길이라고 명령했다. 피로 물든 광주는 피의 목욕탕으로 변했다. 하루에 475명이나 도청 지하실에 끌어다 죽였다. 여학생들과 부녀자들을 생매장했다. 학살된 사람이 2천명을 넘고 부상당한 자가 1만 5천을 넘는다.”
어떤가? 1960년 신천박물관의 [워커장군 살인명령]과 1980년 광주의 [전두환 살인명령]이 똑같지 아니한가? 고장 난 유성기처럼 광주 사람들은 광주 사망자가 2천명이라고 외쳐왔다. 광주인들, 김일성이 기른 앵무새들이 아닌가?
유언비어가 빠른 속도로 광주 시민들에 전달되면서 보태지고 뻥 튀겨져 수많은 파생물들이 생산됐다. 광주 시민들이 한창 분노에 치를 떨고 있을 오후 2시 15분, 거수자(거동이 수상한 자) 정웅 31사 사단장이 500MD를 타고 전남대로 왔다. 33대대장 권승만 중령과 35대대장 김일옥 중령을 불러놓고 첫 명령을 내렸다. 한마디로 간첩과 짜고 내린 명령으로 밖에는 해석되지 않는 황당한 명령이었다. “지금 전교사 회의 갔다 오는 중이다. 오면서 보니까 광주시내가 난리가 났다. 경찰은 완전히 수세에 몰려있다. 33대대는 금남로 도청 쪽에서 유동 삼거리 방향으로 시위대를 몰고, 35대대는 금남로 골목골목을 다 막고 유동 삼거리 쪽을 차단하고 있다가 도망가는 시위대를 한 놈도 남김없이 전원 체포해서 31사단 헌병대에 인계하라. 죽음을 무릅쓰고 진압하라.” 금남로를 자루처럼 봉쇄해 놓고, 35대대는 자루가 새지 않게 모든 구멍을 틀어막고 33대대는 자루 입구에서 시위대를 몰아 한 놈도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여 목숨 걸고 전원 체포해 31사단 헌병대로 넘기라는 것이었다. 시위대 수는 수만 명인데 겨우 400명의 공수대원더러 그 많은 시위대를 모두 체포하라는 것은 곤봉을 사용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명령이었다. 해산시키라는 명령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병력에게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은, 내려서는 절대로 안 되는 명령이었다. 이 명령이 내려질 때 이에 금남로 건물 옥상들에는 수많은 촬영자들이 곤봉 휘두르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기 위해 미리 배치돼 있었다. 곤봉 장면들을 사진으로 보면 모두가 위에서 내려다보고 찍은 것들이다. 그리고 이 사진들은 즉시 인쇄되어 수많은 시위 군중에 전파됐다. 공수부대에 대한 적개심이 활활 타올랐다. 모든 게 조직적으로 사전에 기획된 것이었다. 남과 북의 커플링(Coupling)! 마치 시계 부품들이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정웅과 북한 작전조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갔다.
이날 밤 11시, 정웅은 또 비슷한 작전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19일 오전부터 실행해야 하는 명령이었다. 지도에 36개 길목을 붉은 구리스 펜으로 표시해 주면서 이 길목을 통과하는 모든 시위대를 한 놈도 빠짐없이 체포하라 명령한 것이다. 18일 날의 작전명령에는 금남로를 통 자루로 만들어 놓고 골목골목으로 새어나가는 시위대를 모두 체포하라한 반면, 이 날은 36개 골목에 공수대 병력을 10명 단위로 쪼개 배치하여 시위대 전원을 체포하라는, ‘보다 구체화된 명령’이었다. 공수부대를 살라미로 얇게 썰어 매타작 당하게 함으로써 섬멸시키려는 듯한 명령이었다. 정웅은 대한민국 장군이 아니었다.
그러면 당시 계엄사령부는 어째서 지휘 능력 없는 향토사단장에게 최정예 공수부대를 맡겼는가? 광주사태를 전투작전으로 본 것이 아니라 지방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한 작은 소요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안보는 민관군의 협동을 강조했다. 한 지역의 민, 관, 군의 기관장들이 가끔 회의를 열어 정보를 공유했고, 저녁이면 친목의 식사자리를 갖는 시대였다. 술잔을 가장 많이 받아 놓고 있는 기관장은 경찰서장이었고, 술잔이 한동안 비어있는 기관장이 우체국장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안보 시스템 하에서는 당연히 광주소요는 민, 관, 군이 모두 협동하여 진압을 해야 할 대상이었다. 낯이 선 외지인 장군이 끼어들기가 쉽지 않았다.
5월 19일
7공수여단, 장교와 사병 공히 그 40%가 전라도 출신인 400여 명은 5월 19일 정웅 소장의 명령을 받고 매타작을 당하려고, 아니 샌드백이 되어 주려고 금남로로 출동했다. 각 10명 내외의 조를 짜서, 36개 지점으로 흩어졌다. 옥상에서는 벽돌이 날아오고, 화분 통이 떨어지고, 돌멩이와 벽돌 공격이 이어졌다.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건물 밑에 방치되었고, 성한 병사들은 이리 뛰고 저리 피했다.
계엄사령부에 못 마땅한 점은 시위의 규모를 알았으면서도 병력을 찔끔찔끔 축차 투입했다는 사실이다. 초기에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을 보냈다면 광주시위는 5월 19일로 종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계엄사령부는 19일에 11공수 3개 대대, 20일에는 3공수 5개 대대, 21일에는 20사단을, 그것도 연대별로 끊어서 축차로 투입했다. 이는 전쟁 교훈에 어긋나는 방법이었다.
공수부대가 총을 지참한 것은 총이 신체의 일부분이었기에 지참한 것이지 시민을 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실탄도 없이 등에 X자 형으로 메고 다녔다. 부마사태에서나 사북탄광 사태에서는 폭도들이나 시위대가 공수부대의 베레모나 얼룩무늬만 보아도 저절로 해산했다. 그래서 광주에서도 그렇게 되려니 생각하고 소풍 오듯이 왔다가 매타작을 당하는 것이었다. 11공수 3개 대대 역시 오전 10시에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매타작을 당했다. 5명, 10명 단위로 쪼개져 대처하다 보니 모두 다 죽게 생겼다. 대대 단위로 집결할 수밖에 없었다. 집결하면 진압행위를 할 수는 없지만 매타작은 면할 수 있었다. 대대라 해야 실 출동인력은 200명 수준이었다. 200명 단위로 부동자세를 취한 후 그들을 에워 싼 시민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대대장이 손 스피커를 들고, “시민 여러분 제발 귀가해 주십시오. 이러면 안 됩니다.” 호소하는 것 뿐이었다. 시위대가 비웃었다. 바보같이 보였다. 도끼와 낫과 가위가 등장했다. “도끼로 머리를 뽀개 말어.” , “낫으로 목을 베어 말어.”, “가위로 눈을 찔러 말어.” 조롱을 했다. 공포의 극치였다. 그래도 대원들은 마네킹 자세를 유지했다. 심심했는지, 작전이었는지! 이들이 갑자기 커튼 열리듯 옆으로 흩어지더니 불타는 드럼통이 굴러 왔다. 지그재그로 방향을 알 수 없게 돌진하는 차량이 집합해 있는 공수부대 한 가운데를 덮쳤다. 화염병도 날아오고, 벽돌도 날아왔다. 공수부대가 맞이한 지옥이었다. 돌에 맞아 피 흘리는 병사, 차량에 다리가 깔린 병사를 인도에 뉘어 놓았지만 후송이 되지 못했다. “모두 죽겠습니다. 빨리 철수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상부에 호소하는 대대장들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오로지 한 마디 “선무활동을 계속하라.” “이 개새끼야, 네가 여기에 와 보라구. 우리 다 죽으면 네놈이 책임질래?” 오죽 다급하고 답답하면 중령이 대령에게 욕을 했겠는가?
경상도 번호판을 단 트럭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화물을 싣고 왔다가 군중에 잡혔다. 경상도 사람이라는 이유로 탑승자 모두가 끌려 내려와 벽돌로 가격 당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달려들어 때리고 밟았다. 울퉁불퉁, 얼굴에 주먹같이 피 멍진 혹들이 돌출되었고 이내 얼굴은 찐득거리는 피로 뒤덮혔다. 그리고 사지를 발발 떨면서 죽었다. 이 모습을 보고 박수치고 환호하던 시민들, 차에 불을 질러 소각했다. 화물 트럭으로 먹고 사는 사람만이 아니었다. 평소 광주 땅에서 가게를 운영하던 경상도 사람들이 같은 신세가 되어 사라졌다. 공수부대와 경상도 사람은 그렇게 죽여야 할 대상이었다.
5.18의 전설 윤상원
이날도 새로운 괴담들이 생산되어 뿌려졌다. 북조선 로열 패밀리라는 탈북자 강명도는 그의 저서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241쪽에서 “나의 친구 이화섭은 몇 주간 잠도 못자고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부추기는 대남선전 삐라를 만들었다고 말해주었다.”라고 증언했다. 이런 괴담 삐라 생산자는 광주에도 있었다. 좌익들이 5.18 최고의 영웅으로 떠 받드는 윤상원(본명 윤개원)이다. 그의 생가는 마치 만수산 궁전처럼 신격화 돼 있고, 기념관, 기념물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박노혜는 [윤상원 평전]을 저작해 바쳤다. 그를 신격화하기 위해 영혼결혼식이라는 이벤트를 만들어 전설로 포장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역대 대통령들까지도 광주에 가서 두 주먹 불끈 쥐고 턱 밑에서 명치까지만 바람을 가르면서 부르는 저음의 행진곡, ‘산자여 따르라’. 1982년 5월 18일, 5.18묘지에서 그의 애인이라는 박기순과의 영혼결혼식에서 처음 불렸다.
윤상원의 본명은 윤개원, 1950년 전남 광산군 임곡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살레시오 고교를 거쳐 전남대 정외과 재학 중 민청학련으로 15년 형을 살다가 특사로 풀려난 후 남한 최대 규모의 자생 간첩단 ‘남민전’에 관련하였다가 광주 최대의 불온서적 판매장인 ‘녹두서점’의 점원으로 취직했다. 녹두서점의 운영자인 김상윤, 김상집은 새빨간 좌익이었다. 그의 애인이었다는 박기순은 부산은행을 말아먹었다는 광주일고 그룹에 속했던 운동권 박모씨의 여동생으로, ‘들불야학회’을 주도했고, 여기에 윤상원을 끌어들여 함께 야학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1978년 12월, 박기순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홀로 사망했다. 이런 윤상원이 5.18에 남긴 업적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가 영웅이 되고 신격화되고 전설이 되었는가? 5.18 최고의 영웅, 5.18의 전설은 도대체 어떤 공적 위에 쌓아 올린 궁전이요 성역인가? 그의 공적 중 가장 뛰어난 것은 ‘투사회보’를 그 시대의 인쇄수단이었던 가리방(등사판에 걸고 잉크 묻힌 롤러를 밀어 복사본을 만들어 내는 방법)으로 인쇄하여 뿌린 것이다.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이 웬일입니까? 웬 날벼락입니까? 죄 없는 학생을 총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두들겨 트럭에 실어가며, 부녀자를 발가벗겨 총칼로 찌르는 놈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이제 우리가 살 길은 전 시민이 하나로 뭉쳐 최규하 유신잔당과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두환 일파와 공수특전단 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쳐부수는 길 뿐입니다. 죄 없는 학생과 시민이 수도 없이 죽었으며 지금도 계속 연행당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이 있는 한 동포들의 죽음은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글이 5월 18일에 뿌려진 것으로 보아, 그리고 그 내용이 북한이 생산해 낸 괴담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이 ‘투사회보’ 기재 내용은 5.18이전에 준비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전두환이 타도의 대상이라는 말은 전국에서 오로지 광주에서만 떠돌았다. 이 내용은 북한 여성잡지 [조선여성] 1990년 제3호 “광주는 잊지 않는다.”의 내용과도 유사하며 1982년 북한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590~591쪽 내용과 유사하다. “전두환이 내몬 공정대 놈들, 그들의 부모가 보는 가운데 발가벗기고, 젖가슴을 도려낸 다음 화염방사기로 불태워 죽였다. 무차별 학살의 잔학상은 어린이나 늙은이 임산부들의 만행에서 더욱 몸서리치게 드러난다.” 광주에만 있었던 윤상원이 도대체 어떻게 북과 똑같은 모략적 내용으로 전두환과 공수부대를 증오케 하는 괴담을 만들어 광주시민들에 뿌렸을까? 직간접으로 북과 내통했기 때문에 그가 5.18의 영웅으로 떠받혀 있지는 않을까?
투사회보 1-7회 말고, 그가 실제 5.18사태에서 수행한 공로는 무엇일까? 재미 역사학자 김대령 박사가 저술한 4부작 [역사로서의 5.18] 제3권, 331~332쪽에는 광주시민 김효섭 증언이 있다. “상원이 형이 무기를 개발하자고 했다. 깨진 보도블록을 가지고는 어림도 없으니, 철공소들에 다니면서 쇠토막하고 나사를 많이 가져오라 했다. 21일 새벽부터 계림동, 대인동을 다니면서 나사와 철근 토막들을 구해 녹두서점으로 왔다. 그걸 가지고 나가 땡겨 보았다. 쇠토막이 날카로워 손에 피가 났다. 이거 안 되겠다 생각하고 있는 순간 어디선가 모르게 총이 쏟아져 나와 버렸다. 수집한 쇠토막들은 소용없게 되었다.” 21일 총소리가 나자 윤상원은 동료들에게 각자도생하자며 보성기업으로 도망해 꼭꼭 숨었다. 그리고 5월 25일 오후 도청에 뒤늦게 들어와 김종배가 주도하는 과격파들에 의해 ‘수습대책 위원회’ 대변인으로 임명된 후 26일 오후 6시 어떤 외신 기자를 통해 ‘결사항전’을 선언했다가 다음 날인 27일 새벽 도청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계엄군에 잡히기 전에 아마도 비밀보장을 위해 내부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했을 것 같다. 이불에 감싸여 불에 타 있었다는 말도 있고, 칼에 찔려 죽었다는 설도 있다. 화려한 휴가에서는 계엄군과 용감하게 맞서 싸우다가 장열하게 죽었다고 묘사되었다. 이것이 그가 5.18 관련한 프로필의 전부다. 그런데 왜 그가 5.18 최상의 영웅이 되어 있을까? 그나마 윤개원 이상 가는 프로필을 가진 광주인이 없기 때문이다.
민주화는 문화공작의 산물
내세울 공적이 전혀 없는 5.18, 어떻게 화려한 민주화운동으로 하늘 드높이 떠 있을까? 순전히 문화공작이다. 영화, 드라마, 서적, 보도들이다. 이들 모두가 5.18을 사실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감성부터 자극하는 것들이었다. 우선 윤개원이라는 이름부터 바꾸었다. 그가 바꾼 것이 아니라 사후에 바뀌어 진 이름이다. ‘5.18영웅’의 이름이 ‘개원’이라 하면 “거시기 항께” 멋있는 이름 ‘상원’으로 바꾼 것이다. 미화원들은 보잘 것 없는 내용을 미사여구의 치장술로 감성을 자극했다. 역사학 연구소 연구원이자 노동자 교육센터 부대표인 박준성이 5.18에 바친 글이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투사회보를 돌리다 들키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일을 했던 이들은 투사회보를 하나라도 더 감춰 나르려고 몸빼 같은 옷을 입고 나온 21살, 22살, 23살의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 눈물샘이 자극될 것이다. 윤상원이 그의 ‘투사회보’에 쓴 것처럼, 사실이 전혀 아닌 괴담으로 군중심리를 자극하여 폭동을 조장한 것이 과연 민주화 운동인가?
그들 스스로도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고 했다. 박노해가 쓴 [윤상원 평전]에는 윤상원의 유언이 담겨 있다. “5.18은 국가 권력 타도를 위한 무장봉기였다.” 이른바 “항쟁본부‘ 총사령관이라 자칭했던 김종배(사형인도)는 수사기록과 공판정에서 당당히 말했다. ”5.18의 목적은 반체제 재야인사, 불순세력, 학생이 전국 규모로 들고 일어나 과도정부를 전복하는 것이었다.“ 7년 도피 7년 감옥으로 대변되는 국제 변호사 백태웅은 필명 이정노로 노동 잡지에 장문을 기고했다. ”5.18은 시민항쟁의 차원을 넘어선 반란이요 혁명이며 주권탈취의 한판 싸움, 실패한 무장봉기, 위대한 민족민주 혁명의 시도였다. 광주는 무장봉기의 도시요 권력을 일시적으로나마 민중이 직접 소유한 소중한 경험을 가진 혁명의 도시다.“ 군법 회의에서 12년 형을 선고받은 김성용 신부는 5.18을 천대받은 전라도의 한을 표출한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우리 전라도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천대를 받아 왔나, 최규하 정부가 퇴진할 때까지 싸우자. 나는 오늘 죽을 생각하고 목욕까지 하고 나왔다.“ 5.18을 신봉하거나 5.18에 직접 참여한 핵심 인물들이 다 같이 5.18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말하지 않고, 국가전복 폭동이었다고 말한 것이다. 결국 지금 현재까지 굳어진 역사를 보면 김일성의 말이 곧바로 대한민국의 역사로 굳어졌다. 1980년에 김일성은 12.12를 쿠데타라고 말했다. 이 말에 따라 1997년, 남한의 정치꾼들과 판사들이 김일성의 발언을 현실화 시켰다. 1980년 김일성은 5.18을 전두환이 일으킨 내란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 따라 1997년 남한의 정치꾼들, 국정원, 언론, 판사들이 달려들어 김일성의 말을 현실이 되게 만들었다.
북한군이 주도한 5월 19일 전투, 북은 어떻게 기록했나?
1982년, 북한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 576쪽이다. “이 때부터 투쟁의 양상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 적아간의 전투로 변하였다. 흉탄에 피 흘리며 쓰러진 로동자들이 그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짙은 연기 속에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던 버스 1대(광전교통 소속 전남 5에이 3706)가 가로수를 들어 박고 멈추어 섰을 때 <계엄군> 100여 명이 들이 닥치자 차 안에 있던 10명의 청년들이 결사적으로 맞서 싸웠다.”
1985년 노동당 출판사가 발행한 [광주의 분노] 22-29쪽의 내용을 일부 발췌해본다. “북쪽의 선전동으로부터 남쪽의 학동에 이르기까지, 동쪽의 우산동으로부터 서쪽의 상무동까지 시민들은 큰길가와 골목들에서 놈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5월 19일 시내 중심부인 금남로 1가로부터 류동까지의 거리에서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공정대 31련대 놈들과 폭동 군중이 맞붙어 육박전을 벌렸다. 공정대 놈들이 달려오면 골목골목으로 피하며 놈들을 분산시켰고, 그러다가는 100여 명이 일시에 달려들어 따라온 놈들을 때려 눕혔다. 금남로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천 명의 군중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달려드는 한 개 중대 가량의 공정대 놈들을 둘러싸고 돌벼락을 안기고 싸웠다. 인문 파출소, 역전 파출소, 양동 파출소를 점거하고, 림동 파출소는 놈들의 발악이 심하여 완전히 불태워 버렸다. 싸움은 계엄군 통신지휘소가 있는 카톨릭 센터에서도 격렬하게 벌어졌다. 4대의 승용차에 불을 달아 놈들의 저지선 안으로 몰아넣었다. 혼비백산한 놈들은 그것을 막을 엄두도 못 내고 황망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15대의 버스와 50대의 각종 차량들이 야밤에 일시에 조명등을 켜서 놈들의 앞을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면서 봉기 군중을 앞으로 전진시켰다.”
골목작전, 1988년 한국논단(월간지)에는 당시 광주에서 시민군 골목작전에 말려들어 두 다리를 잡혀 골목으로 질질 끌려가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공수부대 하사관들의 대담이 실렸다. 바로 위와 같은 북괴군의 골목작전에 당한 것이다. 이와 같이 구체적인 이야기는 계엄군 상황일지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참전한 공수대원들의 경험담에는 드문드문 드러나 있다.
5월 19일의 전투, 계엄군 상황일지에는 어떻게 기록됐는가?
31사단장 정웅 소장의 지휘 하에, 31사의 61대대와 7공수의 35대대는 광주의 동부지역에, 경찰은 도청 및 남부지역에, 31사단 96연대는 서부 및 북부지역에 투입되었다. 새벽 4시, 통행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정웅 사단장은 11공수, 3개 대대 모두를 광주시내 중심부로 배치했다. 전남 도지사는 “공공질서를 지킵시다. 냉정합시다.” 담화문을 발표했지만 유언비어에 성이 난 고교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희성 계엄 사령관은 전투교육 사령관 윤흥정 중장에게 명령을 내렸다. “호남 지역은 김대중을 우상화 하는 지역이다. 시민을 자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배후 조종세력이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유포시키고 있으니 전단지를 공중 살포하여 선무작전을 실시하라.” 시쳇말로 도지사나 계엄군 총 사령관이나 다 남의 다리를 긁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상황과는 동떨어진 조치였고 명령이었던 것이다.
아침 09시 30분, 상황은 완전히 원사이드 게임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윤흥정 중장은 이희성 사령관에게 공수부대 1개 여단의 증파를 건의했다. 이 건의에 의해 다음 날인 5월 20일에 3공수여단 5개 대대가 광주에 추가 투입되었다. 거리거리에서 난무하는 각목, 쇠 파이프, 돌, 보도블록, 화염병 세례, 경찰과 공수대원들은 일방적으로 매를 맞기 시작했다. 수에는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한 순간에는 계엄군이 악착같이 덤비던 청년들을 붙잡아, 일반시민과 구별 짓는다는 목적으로 상의를 벗겨 연행하기도 했지만 이런 연행을 그냥 허용할 군중이 아니었다. 피를 흘리고 다리가 부러진 전우를 본 대원들도 악에 바쳤다. 극렬한 공격자들을 건물 안까지 쫒아가 끌어내 꿇어 앉혀 보았지만 이 역시 순간이었다. 이러한 장면을 끝까지 추적하여 사진을 찍는 촬영자들이 즐비했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공사장 자재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휘발유 드럼통에 불을 붙여 계엄군을 향해 굴렸다. 충장로에 투입된 11공수 61대대, 최상규 하사의 다리가 부러지고 김영상 중위 등 6명이 한꺼번에 중상을 입었다. 거리거리에 파출소와 차량이 여러 대씩 불타고 있었다. 공용터미널, 한일은행, 광주고교, 광주소방서, 가톨릭센터에서 공수부대는 일방적인 매타작을 당했다. 요소요소에서 계엄군이 상의를 벗긴 모습, 꿇어앉힌 모습을 사진에 담은 간첩들이 상층부의 여론을 조종했다. “공수부대 진압이 너무 과격하다. 어느 나라 군대인지 의심이 간다.” 한 쪽만 공격하는 여론이었다. 이에 윤흥정 전교사사령관은 공수부대에 “가혹하게 다루지 말라”라는 단편적 명령을 내렸다. 100배가 넘는 과격군중에게 그나마 하지 말라면 서서 맞아 죽으라는 것인가? 하루 종일 정웅 사단장은 공수부대를 성난 군중이 많이 있는 곳에 계속 투입시켰다. 매 맞아 죽으라는 명령이었다. 도청과 금남로는 평소에도 일반시민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다. 서울의 명동이 바로 금남로 일대였다. 위험에 처하면서 공수부대는 최루탄을 쓰기 시작했다. 가톨릭센터에서는 31사단 병력이 포위당해 무기를 빼앗겼다. 승용차 4대를 불태웠다. 역전파출소, 누문파출소, 양동파출소, 임동파출소 등이 전소됐다. 31사 병력이 지키고 있던 MBC를 공격하여 M16소총과 실탄 15발을 탈취했다. 간첩의 역정보, 유인작전을 위한 허위정보가 공수대에 접수됐다. 오후 5시, “공수대원 시체가 여기 있다.”, 장갑차를 앞세운 63대대 병력 일부가 출동하자 동원 예식장 앞에서 수백 명의 시위대에 포위됐다. 당황한 장갑차가 방향을 잃고 보도블록의 턱을 받고 오도가도 못하자 시위대는 미리 준비한 볏 짚단에 불을 붙여 계속 장갑차 뚜껑 위에 올려놓았다. 열을 이기지 못한 소대장이 뚜껑을 열고 일어서 총을 쏘았다. 이 때 19세의 조대부고 3학년 김영찬이 대퇴부에 총상을 입었다.
오후 5시 30분의 가톨릭센터 앞, 천여 명의 군중이 장갑차를 포위했다. 병사들이 겁에 질려 도망했다. 계엄군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장갑차와 M16이 피탈 당했다. 불 붙은 화물차를 계엄군 대열에 돌진하게 해 놓고 차에서 뛰어내리는 공격방법이 새롭게 선을 보였다. 이 날 36세의 김안부가 전등부 열상으로 사망했고, 24명의 군경이 부상을 입었다.
가톨릭센터에서 31사단 병력이 M16 1정을 피탈 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정웅 사단장, 전교사사령관 윤흥정에 이 사실을 보고했다.
정웅 사단장 : “무기를 탈취 당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윤흥정 사령관 : “당신이 현장 지휘관인데 멀리 있는 내게 어찌 하오리까 하면 낸들 무슨 수가 있겠소?” 이 한심한 인물에게 공수부대 지휘를 맡겼으니 공수부대가 온갖 수모와 농락을 당하고 피해를 입은 것이다. 북한 특수군의 밥이 된 것이다.
이 날의 명품은 모란봉의 꽃 전옥주(본명 전춘심)였다. 리어카에 시체를 싣고 다니면서 애 끓는 목소리로, 북한 억양으로 대남방송을 하듯 시민들에 호소하는 방송을 하고 다녔다. 시민들에게는 분노를 자아내고, 계엄군 입장에서는 전율을 느끼게 하는 방송이었다. “광주시민 여러분, 여기 이 시체를 보십시오. 죄 없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공수대에 계속 죽어가고 있습니다. 공수부대가 전라도의 씨를 말리려 왔습니다. 빨리 나오십시오. 거리로 나오십시오. 우리를 도우려고 서울에서 연고대생 600명이 오고 있습니다. 빨리 나오십시오.” 공수부대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됐다. 분노도 솟았다. “중대장님, 제가 저 여자를 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저 여자 때문에 상황이 더욱 악화돼 가고 있습니다. 저 여자 죽여야 합니다.” 병사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하소연했다. 하지만 누구도 전춘심을 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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