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의미(9)역사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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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4-03-27 19:51 조회16,24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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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역사왜곡
지금도 하멜이 본 조선시대
일본과의 갈등은 순전히 대한민국에 의한 역사왜곡과 비과학적이고도 원시적인 역사해석으로 인해 야기됐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 알고있는 현대사는 거의 모두가 왜곡된 것이고 잘못 해석된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이완용이 조선을 일본에 팔아넘긴 매국자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한마디로 무식한 해석이다. 국가는 시스템에 의해 경영된다. 모든 사회현상은 시스템의 산물이고, 한 개인은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이는 과학적 이론이다. 시스템의 산물을 제어할 능력을 가진 개인은 이 세상에 없다.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것은 일본 시스템이 조선 시스템을 압도적으로 능가했기 때문이다. 이씨 성을 가진 27명의 왕들이 518년 동안 조선을 노예 시스템으로 운영해오면서 쌓고 또 쌓은 적폐를 마지막 왕인 고종인들 어찌하겠으며 순종인들 어찌하겠는가? 하물며 고종과 순종으로부터 신임을 받던 이완용인들 어찌 되돌릴 수 있었겠는가? 90%가 노예인데 누가 군인이 될 것이며 그 어느 노예에게 국가의식이 있어서 목숨 걸고 적과 싸웠겠는가? 그래서 2,000년 동안이나 중국의 지배를 받았고 중국보다 더 강한 일본이 나타나자 왕실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땅과 백성을 일본에 내준 것이다. 왕의 경호 세력마저 없어서 러시아 공관으로 피난을 가서 거기서 집무를 보고, 미국 공관으로 또 피신하려다가 실패한 후 일본에 경호를 부탁한 것이다. 왕에게, 국가는 노예공간에 불과했고 자신의 안전과 영달만이 전부였다. 이것이 어째서 한 개인인 이완용의 탓이란 말인가? 대한민국 국민, 머리가 비었는가?
이완용이 팔아먹었다고 가정해보자. 오죽 나라가 걸레같고, 왕이 병신같았으면 한 사람의 대신이 나라를 팔아먹겠는가? 이완용이 팔아먹었다고 역사책에서 말하니까 그런 줄로만 아는 국민들에 묻고싶다. 일개 대신이 팔아먹을 수 있는 나라라면 그게 무슨 나라인가? 그런 걸레 나라라면 백 번도 천 번도 팔아넘기고, 바둑이도 고양이도 다 하나씩 팔아먹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선진국들은 역사로부터 배운다. 선진국 국민은 어제를 분석해서 교훈을 얻는다. "조선은 이완용이 팔아넘긴 나라다" 이런 역사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나? '나쁜 자식, 역적 자식, 지옥에나 가라' 이런 저주밖에는 배울 게 없다. 반면. "당시 조선은 왜 망할 수밖에 없었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수많은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것이 역사로부터 배우는 길이다.
사고가 터졌을 때 선진국 국민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찾아내고 연구해서 교훈을 얻어내고, 유사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한국 국민들은 누구를 처벌하고 누구를 희생양으로 선정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검찰이 칼을 들고 나서서 설친다. 이런 자세에서는 천년이 가도 사고로부터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바로 이런 조선인 습관 때문에 조선인은 역사의 중요성을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것은 가장 큰 단위의 사고다. 이 엄청난 사고에 대해서도 조선인은 무엇이 잘못이 있는가를 연구하지 않고 누구를 희생양으로 삼을 것이냐만 생각했다. 못 말리는 고질병인 것이다. 그래서 찾아낸 희생양이 이완용과 일본인 것이다. 삼풍백화점 사고의 희생양은 건설회사 김 씨이고, 페리도 침몰의 희생양은 기관사 박 씨고, 조선호 침몰의 희생양은 이완용과 일본인 것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나라, 부끄러운 국민성이 아닐 수 없다. 1630년생 하멜, 가장 원시적이고 잔인한 조선인의 멍석말이를 '한 사람을 땅에 묻어놓고 오가는 사람들이 목에 나무톱질을 한 번씩 하고 가는 것'으로 묘사했다. 1865년생인 윤치호 선생은 '멍석말이'가 조선인들의 특징이라 했다. "한 사람이 멍석말이를 당하면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고 다 함께 달려들어 무조건 몰매를 때리고 본다"고 한탄했다. 이런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마녀사냥 의식을 가지고 쓴 역사가 조선의 역사이고 대한민국 현대사다. 이런 잔인성과 마녀사냥 의식과 문화를 깨끗이 청소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젠틀맨 국가가 아니다.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는 그야말로 체신 없는 고릴라족들이 서로 물고 뜯고 이빨을 성클게 내보이며 피 흘리고 뒤엉켜 싸우는 야수 사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835년에 출생한 후쿠자와 유키치, 우리에게 영-한 사전의 기초를 만들어준 일본의 위인은 조선사람들을 잔혹하고 몰염치하고 오만방자한 요마악귀들이라 묘사했다.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가 바로 요마악귀들이 물고 뜯는 지옥 사회인 것이다. 이들이 반성할 날이, 이들이 거울에 비친 자기들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날이 과연 있을까?
김구는 왜 영웅인가? 일본 중위 스치다 조스케를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윤봉길과 이봉창에게 폭탄을 주고, 대한민국이라는 반쪽 나라를 세우려는 이승만에 반대하고, 김일성에 가담했기 때문에 영웅이고, 상해 임시정부를 장악해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렸기 때문에 영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스치다 조스케는 사랑하는 처자식을 일본에 두고 황해도에서 행상을 하던 젊은이었다. 그의 돈이 탐나 그를 돌멩이와 몽둥이로 때려눕혀 죽여놓고 금품을 훔쳐, 주체를 못해 주막에 일부를 맡겨놓고 튀었다가 감옥에 갇혀 사형 언도까지 받았다. 그리고 감옥에서 탈출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영웅이고 대한민국의 간판이라고 하니 젊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살인강도 짓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많이 배워서, 배운 것만큼 이 국민에게 살길과 살 터전을 열어준 이승만은 지난 50여 년 동안 친일 독재자로 매도되고 북한 김일성에 충성하고, 김일성이 보낸 간첩 성시백 앞에서 무릎 꿇고 충성을 맹세한 김구를 이 땅의 영웅이라 하는 대한민국 국민들, 도대체 언제까지 무식무도한 마녀사냥 멍석말이의 조연들로 행동할 것인가? 이 날이나 돈 벌어 돌아올까, 저 날에나 돈 가지고 돌아올까 목을 빼고 기다리던 스치다 조스케의 아낙이, 그 남편을 돌멩이와 몽둥이로 때려죽인 자가 대한민국 영웅이 되어있다는 이 기막한 사실에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상상해보자. 한 인생을 구하면 세상을 구하는 것이고, 한 사람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세상을 울게 하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역사왜곡
일본군 위안부 문제, 식민지 말기,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규모가 가장 컸던 4년 동안 일시적으로 운영되었던 일본군 제도였다. 이 세상 모든 전쟁에서 위안부는 필수 요소였다. 일본군은 위안소만 운영했고, 위안부 조달은 민간업자들이 담당했다. 일본군 헌병이나 경찰이 위안부를 모집했다는 증거는 없다. 6.25 때 한국군 역시 일본군 위안소 시스템을 그대로 본떠서 한국군 위안소를 운영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전 사회적으로 공식화하여 홍등가 지역을 지정해주고 치안과 질병을 관리해주었다. 이는 자연 현상이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문제로 만들어낸 존재들이 바로 주사파, 대한민국을 찍어내리는 도끼족인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의 40%는 일본 여성이었다. 그다음이 중국이고 그다음을 조선, 버마,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피점령국들이 채웠다. 일본 여성 다음에 동참한 여성이 중국 여성, 1940년이었다. 조선여성은 1941년 처음으로 20명 단위로 위안소에 들어왔다. 조선 여성은 통상 2년간 일본군 위안소에서 생활하다 돈을 벌어 귀국했다. 위안부의 전형인 문옥주가 자서전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를 밝혔다. 한 여성은 일본군 병사의 애인이 되었고, 애인을 잊지 않기 위해 일본군 병사의 아이까지 잉태해 대구에 와서 잘 키웠다. 문옥주는 죽기 3년 전까지도 일본군 병사가 그리워 눈물지었고, 두둑한 팁을 받아 대구 중심가에서 부자로 떵떵거리고 살았다. 그동안 주사파 도끼족들에 확산시킨 위안부 신세와는 정반대가 아니던가? 정대협의 주장과 당사자였던 문옥주의 자서전 내용 중 어느 말이 맞는가?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군 위안부 시스템을 그대로 본떠서 설치했던 홍등가, 혐오의 공간이 아니다. 여타의 여성들에 대한 치안과 정조를 지켜주는 보호막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확산되고 있는 성범죄와 살인범죄의 상당 부분은 홍등가의 부재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강제징용? 강제징용 문제도 주사파 도끼족들이 사회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위안부 문제와 함께 창조해낸 모략물이다.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일 청구권 협정' 제2조 및 제3조에는 일본 통치 시대에 발생한 모든 피해에 대한 보상은 이 협정으로 모두 해결된 것이며 더 이상의 개별적 집단적 보상요구를 하지 않기로 한다는 것이 명시돼 있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정부는 강제징용자의 배상을 대한민국 국가가 지급하기로 정책을 세우고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청구자 72,631명에 대해 6,184억을 지급했다. 1인당 평균 810만 원을 배상한 것이다.
그런데 왜 또 일본에 징징거리는가? 문제는 이명박이었다. 이명박의 출생지는 오사카이지만 1964년 반일운동인 6.3사태의 주모자가 되었고, 2012년에는 돌출적으로 독도를 방문해 일본 천황이 직접 사과하라는 주장을 하여 데모 근성을 또 한 번 과시했다. 그야말로 체신 없는 행동을 한 것이다. 그래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이춘식 등이 1997년 일본 기업을 상대로 오사카 재판소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가 2003년에 기각당했다. 2005년, 국내 법원에 같은 소송을 냈다. 1심과 2심은 모두 이 청구를 기각했다. 이 기각된 것을 대법원장 김명수와 대법관 김능환이 2012년 5월, 전격적으로 뒤집어 파기환송시켰다. 다시 5년에 걸쳐 2심이 열리고 3심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의 판결을 확정했고, 이에 일본을 자극하기 위해 한국에 투자한 일본 기업의 자산을 강제집행하는 절차를 확정했다. 이에 일본이 무역 보복에 나섰고 GSOMIA 군사정보협정을 파기할 것을 선언했다. 이는 순전히 북에 충성하는 문재인과 한패가 되어 움직이는 김일성 추종 판사들의 만행일 뿐 대한민국 국민의 뜻이 아닐 것이다. 문재인은 일본을 자극하기 위해 2019년 8월 25일, 매우 유치한 쇼를 벌였다. 이른바 '독도방어 훈련', 7,600톤급의 세종대왕함이 처음으로 동원됐고, 울릉도에는 특전사 부대가 배치됐다. 해군 및 해경 함정 10여 척, F-15 등 전투기 10여 대를 동원해 일본을 자극했다. 김정은의 화력쇼를 모방한 것이었다. 이에 미국 국무부가 화를 내며 문재인에 경고하면서 최후통첩을 보냈다. "한국이 최근 실시한 독도 방어훈련은 한·일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과 한국의 최근 갈등을 생각하면 지난 25~26일 실시된 한국 독도방어 훈련의 타이밍, 메시지, 규모 등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비생산적이다. 독도는 무인도(리앙쿠르트)다. 문정부는 지소미아가 종료되는 11월 22일까지 원상복구하기를 바란다." 강제징용자 에 대한 돌출적 판결과 일본기업체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 행위도 문재인이 주도한 것이고, 독도를 가지고 장난질친 것도 문재인의 반국가 소행이었던 것이다. 그 피해를 고스란히 국민과 대한민국이 본 것이다.
독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도 실용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바위 위에서 장기간 생활하는 국민의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독도라는 바위가 귀중한가 그 사람의 일생과 삶의 질이 귀중한가? 독도가 우리에게 지금 무엇을 주고 있고 미래에 무엇을 줄 것인가? 이제까지 독도는 김일성주의자와 철 지난 국수주의자들이 일본을 자극하는 데에만 악용돼왔다. 일본을 자극하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 잃는 것뿐이다. 미래가 생산할 양국 공동의 시너지를 소멸시킬 뿐이다. 또한 독도에 국민을 상주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이 얼마나 인권을 경시하고 있는가에 대한 부끄러운 상징이 될 것이다.
독도 수역은 1999년 1월, 이미 신한일어업협정으로 한·일 공동수역이 됐고, 그로 인해 우리는 이미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하루아침에 쌍끌이 어선들을 포함해 3,000여 척의 어선들이 폐업을 했고 어구 생산업체들이 망연자실 직업을 잃었다. 공동수역 안에 있는 두 개의 바위가 왜 두 나라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야 하나? 독도 수역뿐만 아니라 독도까지 공동 관리하여 거기에 근사한 시설을 만들어 한.일 간 열리는 세미나 등 공동행사들을 유치하여 교류와 만남의 공간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일 것이다. 천년만년, 일본은 자기 땅이라 주장하고 우리는 우리 땅이라고만 하면, 거기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한 단계 더 나아가 미국을 유치하여, 한.미.일 문화교류의 공간으로 승화시키면, 안보 체제의 밀접화에도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수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세미나에 참석하고, 일본사람들이 한국에 오지 않고라도 독도에서 세미나를 열 수 있고, 한.미.일 안보회의도 독도에서 열릴 수 있을 것이다. 독도 활용에 대한 신사고들이 많이 나와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욱일기는 일본의 것이다. 우리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다. 이 또한 쌈 걸기, 찜짜붙기의 수단일 뿐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일본의 문제다. 여기에 이장된 7명의 A급 전범은 미국 침략에 앞장섰던 일본의 우두머리들이었다. 미국이 가만있는데, 중국이 침묵하고 있는데, 가장 많은 피해를 본 필리핀까지 침묵하고 있는데 왜 유독 나설 자격조차 없는 한국인들만 나서서 소란을 피우는가? 이것이야말로 앉을 자리 설 자리 분수를 모르고, 체신만 깎는 행동이 아니겠는가?
'일제 강점'이라는 단어도 누워서 침 뱉는 자기 비하의 표현이며 사리에 맞지 않는 표현이다. '강점'이라는 말은 무력 충돌 즉 전쟁을 통해 강제로 점령당했다는 뜻이다. 독일군대가 나폴레옹 군대에 패해서 독일이 프랑스에 점령된 것은 강점이라 표현할 수 있지만, 독일은 그런 쪽팔리는 자학적 언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독일은 패전국이었지만, 조선은 일본과 싸우지도 않고 왕이 왕실의 안전을 담보로 하여 일본에 넘겨졌던 존재다. 일본은 '조선인구 90%를 노예로 학대하고 미개한 상태로 방치하는 조선 왕정 시스템'을 붕괴시켰다. 조선 백성을 교육시켜 일본시민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동등한 기회를 주었다. 평양과 신의주 서울 거리를 일본의 도쿄 거리와 유사하게 현대화시켰고, 산업화시켰다. 서양 열강들의 식민정책과 일본의 조선 정책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서양 열강은 식민지를 개화시키고 문화의 동질성을 추구하는 대가로 많은 식량과 자원을 취했지만 일본은 '내선일체' 라는 모토를 내걸고 동질화와 동등화의 정책을 추구했다. 일본이 서구 열강에 비해 달랐던 것은 조선의 일본화였다. 마치 지금의 하와이가 미국의 주인 것처럼. 오사카 현이 일본의 땅인 것처럼, 조선도 일본의 땅으로 흡입한 것이다. 단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일시적 신분 차이가 있었던 것은 환경 여건과 개인 능력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본에서 출세한 조선인들이 매우 많았고, 해방 후 민주주의 국가를 경영할 공무원 역시 일본에서 교육받고 출세했던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게 짐 지던 사람이 갑자기 장관을 할 수는 없는 일 아니 겠는가?
식민지 정책에서 일본이 서양의 열강들과 달랐던 것은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달랐는가? 1853년 7월 8일,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이 도쿄만 요코스카 앞바다에 증기선 2척과 범선 2척을 이끌고 나타나 일본에 개항을 요구했다. 선진국의 기술능력에 압도당한 일본인들은 개항을하여 서구문물을 열심히 배워 근대화에 성공했지만, 조선은 개항을 끝까지 거부해 일본에 흡수됐다. 이후 일본은 영국, 네덜란드 등에도 개항하여 유학생들을 보내고, 견학팀을 보냈다. 1835년에 태어난 후쿠자와 유키치는 1861년 유럽을 1년간 견학했고, 미국의 물질문명에 압도당했다. 그는 돌아와 1866년 [서양사정]이라는 제목으로 영국과 미국의 역사, 정치, 조세, 화폐, 기업, 외교, 군사, 교육제도, 도서관, 신문, 병원 등 많은 분야를 소개해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1872년에는 [학문의 권장]이라는 책을 써서 370만 부나 읽혔다한다. 이때 조선에는 글도 없었고 인쇄기도 없었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개인의 독립 없이는 국가의 독립 없고, 개인의 독립은 학문에서 나온다. 모든 인권은 평등하다.” 는 요지의 책이었다. 그는 해외 유학파들을 이끌고 옥스포드 영영사전을 영-한문사전으로 전환했다. 이 영한문 사전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도 없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덕분이다. 일본의 의식을 일깨운 후쿠자와는 일본을 영국이나 미국처럼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터를 잡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1840년에 태어난 시부사와 에이치는 '일본식 자본주의'의 창시자가 되었다. 영국과 미국 등 서양 선진국들에서는 기업의 목표가 '이윤극대화'였다. 하지만 시부사와 에이치는 '일본의 모든 기업은 주관을 공자의 도덕율 아래서 두라"고 가르쳤고, 이 도덕적 자본주의가 오늘날 일본을 산업계의 1등국이 되게 했다. 후쿠자와는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태어났다는 미국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전파했고, 시부사와 에이치는 도덕율을 국민정신으로 계몽했다. 이 시대의 조선에서는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강화도령이 강화에서 돌아와 철종이 되었다.
오늘날 일본이 산업계의 일등국인 것도 사실이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깔끔한 환경과 정중한 매너를 가진 국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도 것도 사실이다. 이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시부사와 에이치가 선도한 결과라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1983년부터 2023년까지 40년 동안 일본은행권 최고액인 1만엔권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이 있었고, 2024년부터는 시부사와 에이치 초상화가 대신한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무조건 '일본은 원수다'하고 감정적으로만 나가는 것은 본인의 발전이나 나라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제 강점'이라는 고착된 언어, 이는 의식적으로 지워야 할 자기 비하, 국가비하의 쪽팔리는 언어다.
공산주의자들의 횡포
한국에서는 몇 개의 성역이 존재한다. 일본 관련해서는 위안부, 징용, 정대협이고 북한 관련해서는 5.18이다. 이 4개의 영역을 침범하면 무조건 민-형사 소송을 당하고, 사건이 배정되면 예외 없이 붉은 이념을 가진 판사들에 배달된다. 특히 위안부와 정대협과 윤미향은 동의어가 되어있다. 2015년 5월 13일 자 미래한국신문에는 정대협이, 2011년 12월, 김정일 서거를 애도한다는 요지의 조전을 보낸 사실, 윤미향의 남편이 1994년에 남매간첩단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 정대협의 대외협력위원장이 40여 차례 방문했고, 통진당을 옹호했다는 사실 등이 기사화돼있고, 이를 정리한다는 요약 기사가 실렸다. "요약하면 정대협 실행 이사 11명 중 상임대표 윤미향을 포함한 3명의 주요 임원 배우자가 간첩혐의로 기소되거나 국보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정대협 실행이사 본인들의 좌파 활동가적 전력과 운동 역량도 배우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대부분은 다른 좌파단체의 주요임원을 겸직하며 정치·사회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이 기사를 보고 두 사람의 육사출신 반공활동가들이 각기 인용하여, 정대협이 위안부를 위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이탈해 정치활동, 이념활동을 한다는 요지의 글을 인터넷에 게시한다. 이 사건은 1987년 KAL 858기를 폭과시킨 주역은 북한이 아니라 한국 국정원이고, 김현희는 가짜라는 주장에 앞장섰던 변호사였다.
윤미향이 민·형사소를 제기했다. 서울북부지방검찰청은 이 두 반공인사가 게시한 글은 죄가 되지 않는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고, 서울고등검찰청 역시 같은 처분을 내렸다. 그런데 심재환 변호사가 서울고법에 재정신청은 낸데 대해 김용빈 부장판사가 검찰에 기소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서울북부지법에서 1심, 2심이 열렸고, 1, 2심 결심공판에서 공히 검사는 구형하지 않겠다고 저항했지만 1심 판사 박현배, 2심 판사 홍창우는 공히 실형을 선고했고, 대법원 (권순일, 김선수, 이기택, 박정화)이 이를 확정했다. 검찰이 불기소했고, 검찰이 구형하고 싶지 않다며 구형을 포기할 만큼 죄가 되지 않는 사건이 주사파 판사들을 만나면 중죄로 선고되는 것이다. 판결요지가 매우 무섭다. “정대협은 공정과 도덕과 준법을 존립 정신으로 하는 고귀한 애국단체인데, 피고인들이 신문기사의 진위를 확인하는 노력 없이 기사를 사실로 단정하여 정대협을 국가 사회적으로 위험한 집단이라는 취지로 명예훼손하였다. 피고인들이 지적한 정대협의 행위는 모두 정당했다”는 것이었다.
5.18을 민주화 운동으로 여기지 않는 사관(역사관)을 표현하면 5년 이하의 실형과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는 이른바 국민재갈법(5.18 특별법 개정)이 실행되고 있다. 전두환을 동정하거나 지지하는 역사관을 가진 사람은 '국민 눈높이'라는 잣대로 모든 공직에서 추방된다. 국민눈높이? 여론이 잣대라는 인민재판인 것이다. 소수의견이 탄압받는 국가는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던가? 1996~97년에 전격 이루어진 전두환 내란 관련 사건의 2심 재판장 권성은 “이 사건에 적용될 법은 헌법도 아니고 일반 법률도 아니다. 자연법이다. 자연법은 국민인식법이다” 이렇게 판결문을 썼다. 여론재판, 인민재판이라는 것이다. 결국 전두환은 여론재판, 인민재판, 국민 눈높이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법조인 출신들로 구성된 집권 공간에서, 1948년 건국이래 75년 동안이나 자유민주주의'를 외쳐온 사회에서 도대체 '국민 눈높이'라는 잣대로 인격과 직위를 심판하고 있다? 이 어인 날벼락인가! 이래서 대한민국이 들쥐 공화국이란 평가를 받는 것이다. 수많은 식자들이 '위컴'대장의 이 발언을 모욕적 발언이라 욕을 했다. 하지만 반성하는 식자는 보지 못했다. 반성하자는 소리를 내면 그는 즉시 멍석말이 당하는 사회였기 때문이었다.
멍석말이! 1980년, 박정희 대통령 말기. 국가경제는 IMF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한일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한 전두환 대통령은 나카소네 수상으로부터 4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매우 싼 저리(低利)로 받았다. 그중 10억 달러를 헐어 오염되고 악취 진동하는 한강을 오늘의 아름다운 환경으로 바꾸었다. 국제올림픽을 유치해 국제올림픽 역사상 동⸱서 양 진영과 아프리카 국가들까지 대거 참여하는 가장 성대한 올림픽을 치렀다. 흑백 문화를 컬러 문화로 바꾸고, 야간통행금지를 없애고, 연좌제까지 폐지했다. 해외 유학, 해외 송금, 해외여행, 해외 이주를 완전 자유화시키고, 수입도 자유화시켰다. 대한민국 역사상 지금까지 통틀어 자유의 공간을 가장 많이 넓혔다. IT 산업, 컴퓨터, 통신, 반도체, 전자산업, 원전산업 등 오늘 우리의 먹거리 산업을 육성시켰고, 당시 세계 최고의 경제 성장율을 기록했다. 7년 동안의 업적이었다. 이런 그를 한국의 좌익들이 불개미 떼처럼 달려들어 지옥의 악마로 둔갑시켰다. 이것이 대한민국 주사파들의 멍석말이 음모의 실력이다. 전두환의 죄? 12.12로 정권을 잡고, 5.18 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임기 7년 내내 내란을 획책했다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죄다. 이렇게 몰아가게 된 동기를 세계인들이 알면 포복절도할 것이다. 5.18은 김대중의 작품이다. 5.18이 김대중의 내란 음모사건이었다는 결론은 1981년 1월 23일 대법원 판결로 확정됐다. 그런데 김영삼은 이를 재심 과정 없이 다시 재판하여 전두환 내란 사건이라고 뒤집었다. 어제의 충신과 역적이 오늘 뒤바뀐 것이다. 이렇게 충신과 역적이 뒤바뀌는 것은 국가의 정체성이 바뀌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따라서 충신 전두환이 역적이 되고, 역적 김대중이 충신이 되는 순간,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이미 ‘역적의 공화국’으로 바뀐 것이다. 이 체제 변경의 도구가 바로 김영삼이었다.
코미디 재판! 1995년 10월 19일, 당시 야당인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비자금 4,000억 원을 폭로했다. 6일 후인 10월 25일, 김대중은 30여 명의 평민당 의원들과 가신들을 이끌고 중국에 가서 사회과학원 연구원들과 세미나를 했고, 1주일 동안 중국 공산당 서열 2위로부터 8위까지 그들의 사무실을 방문해 교류를 했다. 10월 27일, 김대중은 중국 영빈관 '조어대'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나는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 이는 그의 정적인 김영삼을 압박하기 위한 발언이 었다. 여론은 김대중이 의도한 대로 김영삼에 꽂혔다. "노태우가 정적인 김대중에게까지 20억 원을 주었다면 노태우 밥상머리에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몇천억은 받았을 것이 아니냐? 실토하라" 이때 김영삼은 노태우로부터 3,000억 원을 이미 받은 상태였다. 과연 김영삼의 양심이 이 사실을 고백할 수 있는 양심이었을까? 고백하자니 정치생명이 위태롭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니 여론은 시시각각으로 따가워지고, 진퇴양난이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공중으로 점프하는 길뿐이었다. 자기에게 쏠린 화살을 군사정권으로 돌렸다. 당시 '군사정권'이라는 단어는 동네북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저놈들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광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한 놈들이다. 반인륜적 범죄자들을 처벌하자." 이른바 '신군부'의 언론 통제에 의해 해직된 좌파언론인과 사이비 언론인들이 들고일어났고, 좌익 언론들이 들고일어나 전두환 노태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995년 말, 두 전직 대통령들은 죄상도 밝혀지기 전에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5.18특별법'을 급조해 공소시효가 지난 혐의에 대해 소급입법을 했다. 물론 소급입법은 위헌이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무시하면서 재심 절차도 밟지 않고 5.18을 다시 재판했다.
일단 감옥에 가두기는 했지만, 두 전직 대통령에 뒤집어씌울 범죄 혐의가 없었다. 노태우에는 4,000억 비자금이 혐의였지만, 전두환에는 혐의가 없었다. 그 혐의를 만들어내기 위해 김영삼 및 김현철의 개라고 지탄받던 안기부장 권영해가 공작을 주도했다. 권영해는 육사 15기, 전두환 측근으로 가장 많은 혜택을 입었던 권정달도 육사 15기, 이 두 사람은 하나회에 대한 열등의식과 분노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 두 사람이 야합하고, 홍준표를 도구로 하여 검찰과 함께 삼정호텔 1110호에서 5회에 걸쳐 전두환에게 뒤집어씌울 범죄 시나리오를 썼다. 이른바 '집권 시나리오', 집권을 위한 매스터 플랜을 세워 쿠데타를 했고, 이에 항의하는 신성한 광주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총으로 진압하여 7년 동안 내란을 했다는 것이 공작의 요지였다. 이 시나리오는 100% 기계적으로 대법원 판결에 통째로 반영됐다. 전두환이 7년 동안 대통령이 되어 통치한 것도 내란이고, 1980년 12월 22일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한 것도 내란으로 규정했다. 1980년 5월 16일, 김대중이 국가를 상대로 하여 선전포고를 한 행위에 놀란 최규하 정부가 5월17일, 확대 계엄을 선포한 것도 내란으로 규정했고, 이 계엄령 선포를 가결한 국무회의도 내란으로 판결했다. 최규하는 전두환에 의해 자아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최규하가 대통령으로서 서명한 것은 모두 다 전두환의 책임이라는 판결까지 했다. 2성 장군에 불과했던 정보기관의 수장 전두환이 계엄사령관인 4성 장군도 제치고, 대통령도 제쳐놓고, 하나회라는 비선조직을 통해 5.18 진압작전을 지휘했다는 판결도 했다. 근엄하게 보이는 법 가운을 입은 판사들이 그야말로 요마악귀였고, 법이라는 건 마음대로 쭈구릴 수 있는 음모의 도구였다. 결국 모양새를 보면 전두환은 ‘김영삼이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하기 위해 이용한 소모품’에 불과했다! 수사기록은 1980년에나 1995년에나 동일했다. 판사들의 해석만 다른 것이다. 어제의 충신과 역적이 오늘 뒤바뀐 것이다. 이는 국가 체계가 바뀌기 전에는 있을 수 없다. 국가 체계가 민주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전환된 것이다. 전두환의 7년 업적과 김영삼 5년의 파괴업적을 비교해 보자. 전두환의 7년 업적과 김대중의 대북지원 업적을 비교해보자. 이 대한민국이, 이 대한민국 역사가 더럽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처럼 공산주의자들은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그리고 미국 등 해외에서 힘을 합하여 대한민국과 일본과 미국을 격하하고 파괴하는데 필요한 엄청난 조직과 노하우를 활용하여 암약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조총련 등 일본 내의 친북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제압하고, 대한민국은 현존하는 붉은 반국가 세력을 상대로 이념전쟁을 벌이는 동시에 그들이 세뇌시킨 오욕의 붉은 역사를 세척하는 역사운동, 문화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해야 할 것이다.
9. 역사왜곡
지금도 하멜이 본 조선시대 그대로
일본과의 갈등은 순전히 대한민국에 의한 역사왜곡과 비과학적이고도 원시적인 역사해석으로 인해 야기됐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 알고있는 현대사는 거의 모두가 왜곡된 것이고 잘못 해석된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이완용이 조선을 일본에 팔아넘긴 매국자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한마디로 무식한 해석이다. 국가는 시스템에 의해 경영된다. 모든 사회현상은 시스템의 산물이고, 한 개인은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이는 과학적 이론이다. 시스템의 산물을 제어할 능력을 가진 개인은 이 세상에 없다.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은 것은 일본 시스템이 조선 시스템을 압도적으로 능가했기 때문이다. 이씨 성을 가진 27명의 왕들이 518년 동안 조선을 노예 시스템으로 운영해오면서 쌓고 또 쌓은 적폐를 마지막 왕인 고종인들 어찌하겠으며 순종인들 어찌하겠는가? 하물며 고종과 순종으로부터 신임을 받던 이완용인들 어찌 되돌릴 수 있었겠는가? 90%가 노예인데 누가 군인이 될 것이며 그 어느 노예에게 국가의식이 있어서 목숨 걸고 적과 싸웠겠는가? 그래서 2,000년 동안이나 중국의 지배를 받았고 중국보다 더 강한 일본이 나타나자 왕실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땅과 백성을 일본에 내준 것이다. 왕의 경호 세력마저 없어서 러시아 공관으로 피난을 가서 거기서 집무를 보고, 미국 공관으로 또 피신하려다가 실패한 후 일본에 경호를 부탁한 것이다. 왕에게, 국가는 노예공간에 불과했고 자신의 안전과 영달만이 전부였다. 이것이 어째서 한 개인인 이완용의 탓이란 말인가? 대한민국 국민, 머리가 비었는가?
이완용이 팔아먹었다고 가정해보자. 오죽 나라가 걸레같고, 왕이 병신같았으면 한 사람의 대신이 나라를 팔아먹겠는가? 이완용이 팔아먹었다고 역사책에서 말하니까 그런 줄로만 아는 국민들에 묻고싶다. 일개 대신이 팔아먹을 수 있는 나라라면 그게 무슨 나라인가? 그런 걸레 나라라면 백 번도 천 번도 팔아넘기고, 바둑이도 고양이도 다 하나씩 팔아먹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선진국들은 역사로부터 배운다. 선진국 국민은 어제를 분석해서 교훈을 얻는다. "조선은 이완용이 팔아넘긴 나라다" 이런 역사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나? '나쁜 자식, 역적 자식, 지옥에나 가라' 이런 저주밖에는 배울 게 없다. 반면. "당시 조선은 왜 망할 수밖에 없었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수많은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것이 역사로부터 배우는 길이다.
사고가 터졌을 때 선진국 국민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찾아내고 연구해서 교훈을 얻어내고, 유사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한국 국민들은 누구를 처벌하고 누구를 희생양으로 선정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검찰이 칼을 들고 나서서 설친다. 이런 자세에서는 천년이 가도 사고로부터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바로 이런 조선인 습관 때문에 조선인은 역사의 중요성을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것은 가장 큰 단위의 사고다. 이 엄청난 사고에 대해서도 조선인은 무엇이 잘못이 있는가를 연구하지 않고 누구를 희생양으로 삼을 것이냐만 생각했다. 못 말리는 고질병인 것이다. 그래서 찾아낸 희생양이 이완용과 일본인 것이다. 삼풍백화점 사고의 희생양은 건설회사 김 씨이고, 페리도 침몰의 희생양은 기관사 박 씨고, 조선호 침몰의 희생양은 이완용과 일본인 것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나라, 부끄러운 국민성이 아닐 수 없다. 1630년생 하멜, 가장 원시적이고 잔인한 조선인의 멍석말이를 '한 사람을 땅에 묻어놓고 오가는 사람들이 목에 나무톱질을 한 번씩 하고 가는 것'으로 묘사했다. 1865년생인 윤치호 선생은 '멍석말이'가 조선인들의 특징이라 했다. "한 사람이 멍석말이를 당하면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보지도 않고 다 함께 달려들어 무조건 몰매를 때리고 본다"고 한탄했다. 이런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마녀사냥 의식을 가지고 쓴 역사가 조선의 역사이고 대한민국 현대사다. 이런 잔인성과 마녀사냥 의식과 문화를 깨끗이 청소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젠틀맨 국가가 아니다.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는 그야말로 체신 없는 고릴라족들이 서로 물고 뜯고 이빨을 성클게 내보이며 피 흘리고 뒤엉켜 싸우는 야수 사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835년에 출생한 후쿠자와 유키치, 우리에게 영-한 사전의 기초를 만들어준 일본의 위인은 조선사람들을 잔혹하고 몰염치하고 오만방자한 요마악귀들이라 묘사했다.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가 바로 요마악귀들이 물고 뜯는 지옥 사회인 것이다. 이들이 반성할 날이, 이들이 거울에 비친 자기들의 본질을 깨닫게 되는 날이 과연 있을까?
김구는 왜 영웅인가? 일본 중위 스치다 조스케를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윤봉길과 이봉창에게 폭탄을 주고, 대한민국이라는 반쪽 나라를 세우려는 이승만에 반대하고, 김일성에 가담했기 때문에 영웅이고, 상해 임시정부를 장악해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렸기 때문에 영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스치다 조스케는 사랑하는 처자식을 일본에 두고 황해도에서 행상을 하던 젊은이었다. 그의 돈이 탐나 그를 돌멩이와 몽둥이로 때려눕혀 죽여놓고 금품을 훔쳐, 주체를 못해 주막에 일부를 맡겨놓고 튀었다가 감옥에 갇혀 사형 언도까지 받았다. 그리고 감옥에서 탈출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영웅이고 대한민국의 간판이라고 하니 젊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살인강도 짓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많이 배워서, 배운 것만큼 이 국민에게 살길과 살 터전을 열어준 이승만은 지난 50여 년 동안 친일 독재자로 매도되고 북한 김일성에 충성하고, 김일성이 보낸 간첩 성시백 앞에서 무릎 꿇고 충성을 맹세한 김구를 이 땅의 영웅이라 하는 대한민국 국민들, 도대체 언제까지 무식무도한 마녀사냥 멍석말이의 조연들로 행동할 것인가? 이 날이나 돈 벌어 돌아올까, 저 날에나 돈 가지고 돌아올까 목을 빼고 기다리던 스치다 조스케의 아낙이, 그 남편을 돌멩이와 몽둥이로 때려죽인 자가 대한민국 영웅이 되어있다는 이 기막한 사실에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상상해보자. 한 인생을 구하면 세상을 구하는 것이고, 한 사람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세상을 울게 하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역사왜곡
일본군 위안부 문제, 식민지 말기,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규모가 가장 컸던 4년 동안 일시적으로 운영되었던 일본군 제도였다. 이 세상 모든 전쟁에서 위안부는 필수 요소였다. 일본군은 위안소만 운영했고, 위안부 조달은 민간업자들이 담당했다. 일본군 헌병이나 경찰이 위안부를 모집했다는 증거는 없다. 6.25 때 한국군 역시 일본군 위안소 시스템을 그대로 본떠서 한국군 위안소를 운영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전 사회적으로 공식화하여 홍등가 지역을 지정해주고 치안과 질병을 관리해주었다. 이는 자연 현상이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문제로 만들어낸 존재들이 바로 주사파, 대한민국을 찍어내리는 도끼족인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의 40%는 일본 여성이었다. 그다음이 중국이고 그다음을 조선, 버마,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피점령국들이 채웠다. 일본 여성 다음에 동참한 여성이 중국 여성, 1940년이었다. 조선여성은 1941년 처음으로 20명 단위로 위안소에 들어왔다. 조선 여성은 통상 2년간 일본군 위안소에서 생활하다 돈을 벌어 귀국했다. 위안부의 전형인 문옥주가 자서전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를 밝혔다. 한 여성은 일본군 병사의 애인이 되었고, 애인을 잊지 않기 위해 일본군 병사의 아이까지 잉태해 대구에 와서 잘 키웠다. 문옥주는 죽기 3년 전까지도 일본군 병사가 그리워 눈물지었고, 두둑한 팁을 받아 대구 중심가에서 부자로 떵떵거리고 살았다. 그동안 주사파 도끼족들에 확산시킨 위안부 신세와는 정반대가 아니던가? 정대협의 주장과 당사자였던 문옥주의 자서전 내용 중 어느 말이 맞는가?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군 위안부 시스템을 그대로 본떠서 설치했던 홍등가, 혐오의 공간이 아니다. 여타의 여성들에 대한 치안과 정조를 지켜주는 보호막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확산되고 있는 성범죄와 살인범죄의 상당 부분은 홍등가의 부재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강제징용? 강제징용 문제도 주사파 도끼족들이 사회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위안부 문제와 함께 창조해낸 모략물이다.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일 청구권 협정' 제2조 및 제3조에는 일본 통치 시대에 발생한 모든 피해에 대한 보상은 이 협정으로 모두 해결된 것이며 더 이상의 개별적 집단적 보상요구를 하지 않기로 한다는 것이 명시돼 있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정부는 강제징용자의 배상을 대한민국 국가가 지급하기로 정책을 세우고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청구자 72,631명에 대해 6,184억을 지급했다. 1인당 평균 810만 원을 배상한 것이다.
그런데 왜 또 일본에 징징거리는가? 문제는 이명박이었다. 이명박의 출생지는 오사카이지만 1964년 반일운동인 6.3사태의 주모자가 되었고, 2012년에는 돌출적으로 독도를 방문해 일본 천황이 직접 사과하라는 주장을 하여 데모 근성을 또 한 번 과시했다. 그야말로 체신 없는 행동을 한 것이다. 그래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이춘식 등이 1997년 일본 기업을 상대로 오사카 재판소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가 2003년에 기각당했다. 2005년, 국내 법원에 같은 소송을 냈다. 1심과 2심은 모두 이 청구를 기각했다. 이 기각된 것을 대법원장 김명수와 대법관 김능환이 2012년 5월, 전격적으로 뒤집어 파기환송시켰다. 다시 5년에 걸쳐 2심이 열리고 3심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의 판결을 확정했고, 이에 일본을 자극하기 위해 한국에 투자한 일본 기업의 자산을 강제집행하는 절차를 확정했다. 이에 일본이 무역 보복에 나섰고 GSOMIA 군사정보협정을 파기할 것을 선언했다. 이는 순전히 북에 충성하는 문재인과 한패가 되어 움직이는 김일성 추종 판사들의 만행일 뿐 대한민국 국민의 뜻이 아닐 것이다. 문재인은 일본을 자극하기 위해 2019년 8월 25일, 매우 유치한 쇼를 벌였다. 이른바 '독도방어 훈련', 7,600톤급의 세종대왕함이 처음으로 동원됐고, 울릉도에는 특전사 부대가 배치됐다. 해군 및 해경 함정 10여 척, F-15 등 전투기 10여 대를 동원해 일본을 자극했다. 김정은의 화력쇼를 모방한 것이었다. 이에 미국 국무부가 화를 내며 문재인에 경고하면서 최후통첩을 보냈다. "한국이 최근 실시한 독도 방어훈련은 한·일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과 한국의 최근 갈등을 생각하면 지난 25~26일 실시된 한국 독도방어 훈련의 타이밍, 메시지, 규모 등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비생산적이다. 독도는 무인도(리앙쿠르트)다. 문정부는 지소미아가 종료되는 11월 22일까지 원상복구하기를 바란다." 강제징용자 에 대한 돌출적 판결과 일본기업체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 행위도 문재인이 주도한 것이고, 독도를 가지고 장난질친 것도 문재인의 반국가 소행이었던 것이다. 그 피해를 고스란히 국민과 대한민국이 본 것이다.
독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도 실용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바위 위에서 장기간 생활하는 국민의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독도라는 바위가 귀중한가 그 사람의 일생과 삶의 질이 귀중한가? 독도가 우리에게 지금 무엇을 주고 있고 미래에 무엇을 줄 것인가? 이제까지 독도는 김일성주의자와 철 지난 국수주의자들이 일본을 자극하는 데에만 악용돼왔다. 일본을 자극하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 잃는 것뿐이다. 미래가 생산할 양국 공동의 시너지를 소멸시킬 뿐이다. 또한 독도에 국민을 상주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이 얼마나 인권을 경시하고 있는가에 대한 부끄러운 상징이 될 것이다.
독도 수역은 1999년 1월, 이미 신한일어업협정으로 한·일 공동수역이 됐고, 그로 인해 우리는 이미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하루아침에 쌍끌이 어선들을 포함해 3,000여 척의 어선들이 폐업을 했고 어구 생산업체들이 망연자실 직업을 잃었다. 공동수역 안에 있는 두 개의 바위가 왜 두 나라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야 하나? 독도 수역뿐만 아니라 독도까지 공동 관리하여 거기에 근사한 시설을 만들어 한.일 간 열리는 세미나 등 공동행사들을 유치하여 교류와 만남의 공간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일 것이다. 천년만년, 일본은 자기 땅이라 주장하고 우리는 우리 땅이라고만 하면, 거기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한 단계 더 나아가 미국을 유치하여, 한.미.일 문화교류의 공간으로 승화시키면, 안보 체제의 밀접화에도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수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세미나에 참석하고, 일본사람들이 한국에 오지 않고라도 독도에서 세미나를 열 수 있고, 한.미.일 안보회의도 독도에서 열릴 수 있을 것이다. 독도 활용에 대한 신사고들이 많이 나와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욱일기는 일본의 것이다. 우리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다. 이 또한 쌈 걸기, 찜짜붙기의 수단일 뿐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일본의 문제다. 여기에 이장된 7명의 A급 전범은 미국 침략에 앞장섰던 일본의 우두머리들이었다. 미국이 가만있는데, 중국이 침묵하고 있는데, 가장 많은 피해를 본 필리핀까지 침묵하고 있는데 왜 유독 나설 자격조차 없는 한국인들만 나서서 소란을 피우는가? 이것이야말로 앉을 자리 설 자리 분수를 모르고, 체신만 깎는 행동이 아니겠는가?
'일제 강점'이라는 단어도 누워서 침 뱉는 자기 비하의 표현이며 사리에 맞지 않는 표현이다. '강점'이라는 말은 무력 충돌 즉 전쟁을 통해 강제로 점령당했다는 뜻이다. 독일군대가 나폴레옹 군대에 패해서 독일이 프랑스에 점령된 것은 강점이라 표현할 수 있지만, 독일은 그런 쪽팔리는 자학적 언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독일은 패전국이었지만, 조선은 일본과 싸우지도 않고 왕이 왕실의 안전을 담보로 하여 일본에 넘겨졌던 존재다. 일본은 '조선인구 90%를 노예로 학대하고 미개한 상태로 방치하는 조선 왕정 시스템'을 붕괴시켰다. 조선 백성을 교육시켜 일본시민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동등한 기회를 주었다. 평양과 신의주 서울 거리를 일본의 도쿄 거리와 유사하게 현대화시켰고, 산업화시켰다. 서양 열강들의 식민정책과 일본의 조선 정책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서양 열강은 식민지를 개화시키고 문화의 동질성을 추구하는 대가로 많은 식량과 자원을 취했지만 일본은 '내선일체' 라는 모토를 내걸고 동질화와 동등화의 정책을 추구했다. 일본이 서구 열강에 비해 달랐던 것은 조선의 일본화였다. 마치 지금의 하와이가 미국의 주인 것처럼. 오사카 현이 일본의 땅인 것처럼, 조선도 일본의 땅으로 흡입한 것이다. 단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일시적 신분 차이가 있었던 것은 환경 여건과 개인 능력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본에서 출세한 조선인들이 매우 많았고, 해방 후 민주주의 국가를 경영할 공무원 역시 일본에서 교육받고 출세했던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게 짐 지던 사람이 갑자기 장관을 할 수는 없는 일 아니 겠는가?
식민지 정책에서 일본이 서양의 열강들과 달랐던 것은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달랐는가? 1853년 7월 8일,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이 도쿄만 요코스카 앞바다에 증기선 2척과 범선 2척을 이끌고 나타나 일본에 개항을 요구했다. 선진국의 기술능력에 압도당한 일본인들은 개항을하여 서구문물을 열심히 배워 근대화에 성공했지만, 조선은 개항을 끝까지 거부해 일본에 흡수됐다. 이후 일본은 영국, 네덜란드 등에도 개항하여 유학생들을 보내고, 견학팀을 보냈다. 1835년에 태어난 후쿠자와 유키치는 1861년 유럽을 1년간 견학했고, 미국의 물질문명에 압도당했다. 그는 돌아와 1866년 [서양사정]이라는 제목으로 영국과 미국의 역사, 정치, 조세, 화폐, 기업, 외교, 군사, 교육제도, 도서관, 신문, 병원 등 많은 분야를 소개해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1872년에는 [학문의 권장]이라는 책을 써서 370만 부나 읽혔다한다. 이때 조선에는 글도 없었고 인쇄기도 없었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개인의 독립 없이는 국가의 독립 없고, 개인의 독립은 학문에서 나온다. 모든 인권은 평등하다.” 는 요지의 책이었다. 그는 해외 유학파들을 이끌고 옥스포드 영영사전을 영-한문사전으로 전환했다. 이 영한문 사전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도 없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덕분이다. 일본의 의식을 일깨운 후쿠자와는 일본을 영국이나 미국처럼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터를 잡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1840년에 태어난 시부사와 에이치는 '일본식 자본주의'의 창시자가 되었다. 영국과 미국 등 서양 선진국들에서는 기업의 목표가 '이윤극대화'였다. 하지만 시부사와 에이치는 '일본의 모든 기업은 주관을 공자의 도덕율 아래서 두라"고 가르쳤고, 이 도덕적 자본주의가 오늘날 일본을 산업계의 1등국이 되게 했다. 후쿠자와는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태어났다는 미국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전파했고, 시부사와 에이치는 도덕율을 국민정신으로 계몽했다. 이 시대의 조선에서는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강화도령이 강화에서 돌아와 철종이 되었다.
오늘날 일본이 산업계의 일등국인 것도 사실이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깔끔한 환경과 정중한 매너를 가진 국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도 것도 사실이다. 이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시부사와 에이치가 선도한 결과라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1983년부터 2023년까지 40년 동안 일본은행권 최고액인 1만엔권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이 있었고, 2024년부터는 시부사와 에이치 초상화가 대신한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무조건 '일본은 원수다'하고 감정적으로만 나가는 것은 본인의 발전이나 나라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제 강점'이라는 고착된 언어, 이는 의식적으로 지워야 할 자기 비하, 국가비하의 쪽팔리는 언어다.
공산주의자들의 횡포
한국에서는 몇 개의 성역이 존재한다. 일본 관련해서는 위안부, 징용, 정대협이고 북한 관련해서는 5.18이다. 이 4개의 영역을 침범하면 무조건 민-형사 소송을 당하고, 사건이 배정되면 예외 없이 붉은 이념을 가진 판사들에 배달된다. 특히 위안부와 정대협과 윤미향은 동의어가 되어있다. 2015년 5월 13일 자 미래한국신문에는 정대협이, 2011년 12월, 김정일 서거를 애도한다는 요지의 조전을 보낸 사실, 윤미향의 남편이 1994년에 남매간첩단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 정대협의 대외협력위원장이 40여 차례 방문했고, 통진당을 옹호했다는 사실 등이 기사화돼있고, 이를 정리한다는 요약 기사가 실렸다. "요약하면 정대협 실행 이사 11명 중 상임대표 윤미향을 포함한 3명의 주요 임원 배우자가 간첩혐의로 기소되거나 국보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정대협 실행이사 본인들의 좌파 활동가적 전력과 운동 역량도 배우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대부분은 다른 좌파단체의 주요임원을 겸직하며 정치·사회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이 기사를 보고 두 사람의 육사출신 반공활동가들이 각기 인용하여, 정대협이 위안부를 위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이탈해 정치활동, 이념활동을 한다는 요지의 글을 인터넷에 게시한다. 이 사건은 1987년 KAL 858기를 폭과시킨 주역은 북한이 아니라 한국 국정원이고, 김현희는 가짜라는 주장에 앞장섰던 변호사였다.
윤미향이 민·형사소를 제기했다. 서울북부지방검찰청은 이 두 반공인사가 게시한 글은 죄가 되지 않는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고, 서울고등검찰청 역시 같은 처분을 내렸다. 그런데 심재환 변호사가 서울고법에 재정신청은 낸데 대해 김용빈 부장판사가 검찰에 기소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서울북부지법에서 1심, 2심이 열렸고, 1, 2심 결심공판에서 공히 검사는 구형하지 않겠다고 저항했지만 1심 판사 박현배, 2심 판사 홍창우는 공히 실형을 선고했고, 대법원 (권순일, 김선수, 이기택, 박정화)이 이를 확정했다. 검찰이 불기소했고, 검찰이 구형하고 싶지 않다며 구형을 포기할 만큼 죄가 되지 않는 사건이 주사파 판사들을 만나면 중죄로 선고되는 것이다. 판결요지가 매우 무섭다. “정대협은 공정과 도덕과 준법을 존립 정신으로 하는 고귀한 애국단체인데, 피고인들이 신문기사의 진위를 확인하는 노력 없이 기사를 사실로 단정하여 정대협을 국가 사회적으로 위험한 집단이라는 취지로 명예훼손하였다. 피고인들이 지적한 정대협의 행위는 모두 정당했다”는 것이었다.
5.18을 민주화 운동으로 여기지 않는 사관(역사관)을 표현하면 5년 이하의 실형과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는 이른바 국민재갈법(5.18 특별법 개정)이 실행되고 있다. 전두환을 동정하거나 지지하는 역사관을 가진 사람은 '국민 눈높이'라는 잣대로 모든 공직에서 추방된다. 국민눈높이? 여론이 잣대라는 인민재판인 것이다. 소수의견이 탄압받는 국가는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던가? 1996~97년에 전격 이루어진 전두환 내란 관련 사건의 2심 재판장 권성은 “이 사건에 적용될 법은 헌법도 아니고 일반 법률도 아니다. 자연법이다. 자연법은 국민인식법이다” 이렇게 판결문을 썼다. 여론재판, 인민재판이라는 것이다. 결국 전두환은 여론재판, 인민재판, 국민 눈높이 재판을 받고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법조인 출신들로 구성된 집권 공간에서, 1948년 건국이래 75년 동안이나 자유민주주의'를 외쳐온 사회에서 도대체 '국민 눈높이'라는 잣대로 인격과 직위를 심판하고 있다? 이 어인 날벼락인가! 이래서 대한민국이 들쥐 공화국이란 평가를 받는 것이다. 수많은 식자들이 '위컴'대장의 이 발언을 모욕적 발언이라 욕을 했다. 하지만 반성하는 식자는 보지 못했다. 반성하자는 소리를 내면 그는 즉시 멍석말이 당하는 사회였기 때문이었다.
멍석말이! 1980년, 박정희 대통령 말기. 국가경제는 IMF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한일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한 전두환 대통령은 나카소네 수상으로부터 4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매우 싼 저리(低利)로 받았다. 그중 10억 달러를 헐어 오염되고 악취 진동하는 한강을 오늘의 아름다운 환경으로 바꾸었다. 국제올림픽을 유치해 국제올림픽 역사상 동⸱서 양 진영과 아프리카 국가들까지 대거 참여하는 가장 성대한 올림픽을 치렀다. 흑백 문화를 컬러 문화로 바꾸고, 야간통행금지를 없애고, 연좌제까지 폐지했다. 해외 유학, 해외 송금, 해외여행, 해외 이주를 완전 자유화시키고, 수입도 자유화시켰다. 대한민국 역사상 지금까지 통틀어 자유의 공간을 가장 많이 넓혔다. IT 산업, 컴퓨터, 통신, 반도체, 전자산업, 원전산업 등 오늘 우리의 먹거리 산업을 육성시켰고, 당시 세계 최고의 경제 성장율을 기록했다. 7년 동안의 업적이었다. 이런 그를 한국의 좌익들이 불개미 떼처럼 달려들어 지옥의 악마로 둔갑시켰다. 이것이 대한민국 주사파들의 멍석말이 음모의 실력이다. 전두환의 죄? 12.12로 정권을 잡고, 5.18 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했고, 임기 7년 내내 내란을 획책했다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죄다. 이렇게 몰아가게 된 동기를 세계인들이 알면 포복절도할 것이다. 5.18은 김대중의 작품이다. 5.18이 김대중의 내란 음모사건이었다는 결론은 1981년 1월 23일 대법원 판결로 확정됐다. 그런데 김영삼은 이를 재심 과정 없이 다시 재판하여 전두환 내란 사건이라고 뒤집었다. 어제의 충신과 역적이 오늘 뒤바뀐 것이다. 이렇게 충신과 역적이 뒤바뀌는 것은 국가의 정체성이 바뀌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다. 따라서 충신 전두환이 역적이 되고, 역적 김대중이 충신이 되는 순간,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이미 ‘역적의 공화국’으로 바뀐 것이다. 이 체제 변경의 도구가 바로 김영삼이었다.
코미디 재판! 1995년 10월 19일, 당시 야당인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비자금 4,000억 원을 폭로했다. 6일 후인 10월 25일, 김대중은 30여 명의 평민당 의원들과 가신들을 이끌고 중국에 가서 사회과학원 연구원들과 세미나를 했고, 1주일 동안 중국 공산당 서열 2위로부터 8위까지 그들의 사무실을 방문해 교류를 했다. 10월 27일, 김대중은 중국 영빈관 '조어대'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나는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 이는 그의 정적인 김영삼을 압박하기 위한 발언이 었다. 여론은 김대중이 의도한 대로 김영삼에 꽂혔다. "노태우가 정적인 김대중에게까지 20억 원을 주었다면 노태우 밥상머리에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몇천억은 받았을 것이 아니냐? 실토하라" 이때 김영삼은 노태우로부터 3,000억 원을 이미 받은 상태였다. 과연 김영삼의 양심이 이 사실을 고백할 수 있는 양심이었을까? 고백하자니 정치생명이 위태롭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니 여론은 시시각각으로 따가워지고, 진퇴양난이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공중으로 점프하는 길뿐이었다. 자기에게 쏠린 화살을 군사정권으로 돌렸다. 당시 '군사정권'이라는 단어는 동네북이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저놈들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광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한 놈들이다. 반인륜적 범죄자들을 처벌하자." 이른바 '신군부'의 언론 통제에 의해 해직된 좌파언론인과 사이비 언론인들이 들고일어났고, 좌익 언론들이 들고일어나 전두환 노태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995년 말, 두 전직 대통령들은 죄상도 밝혀지기 전에 감옥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5.18특별법'을 급조해 공소시효가 지난 혐의에 대해 소급입법을 했다. 물론 소급입법은 위헌이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무시하면서 재심 절차도 밟지 않고 5.18을 다시 재판했다.
일단 감옥에 가두기는 했지만, 두 전직 대통령에 뒤집어씌울 범죄 혐의가 없었다. 노태우에는 4,000억 비자금이 혐의였지만, 전두환에는 혐의가 없었다. 그 혐의를 만들어내기 위해 김영삼 및 김현철의 개라고 지탄받던 안기부장 권영해가 공작을 주도했다. 권영해는 육사 15기, 전두환 측근으로 가장 많은 혜택을 입었던 권정달도 육사 15기, 이 두 사람은 하나회에 대한 열등의식과 분노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 두 사람이 야합하고, 홍준표를 도구로 하여 검찰과 함께 삼정호텔 1110호에서 5회에 걸쳐 전두환에게 뒤집어씌울 범죄 시나리오를 썼다. 이른바 '집권 시나리오', 집권을 위한 매스터 플랜을 세워 쿠데타를 했고, 이에 항의하는 신성한 광주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총으로 진압하여 7년 동안 내란을 했다는 것이 공작의 요지였다. 이 시나리오는 100% 기계적으로 대법원 판결에 통째로 반영됐다. 전두환이 7년 동안 대통령이 되어 통치한 것도 내란이고, 1980년 12월 22일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한 것도 내란으로 규정했다. 1980년 5월 16일, 김대중이 국가를 상대로 하여 선전포고를 한 행위에 놀란 최규하 정부가 5월17일, 확대 계엄을 선포한 것도 내란으로 규정했고, 이 계엄령 선포를 가결한 국무회의도 내란으로 판결했다. 최규하는 전두환에 의해 자아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최규하가 대통령으로서 서명한 것은 모두 다 전두환의 책임이라는 판결까지 했다. 2성 장군에 불과했던 정보기관의 수장 전두환이 계엄사령관인 4성 장군도 제치고, 대통령도 제쳐놓고, 하나회라는 비선조직을 통해 5.18 진압작전을 지휘했다는 판결도 했다. 근엄하게 보이는 법 가운을 입은 판사들이 그야말로 요마악귀였고, 법이라는 건 마음대로 쭈구릴 수 있는 음모의 도구였다. 결국 모양새를 보면 전두환은 ‘김영삼이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하기 위해 이용한 소모품’에 불과했다! 수사기록은 1980년에나 1995년에나 동일했다. 판사들의 해석만 다른 것이다. 어제의 충신과 역적이 오늘 뒤바뀐 것이다. 이는 국가 체계가 바뀌기 전에는 있을 수 없다. 국가 체계가 민주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전환된 것이다. 전두환의 7년 업적과 김영삼 5년의 파괴업적을 비교해 보자. 전두환의 7년 업적과 김대중의 대북지원 업적을 비교해보자. 이 대한민국이, 이 대한민국 역사가 더럽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처럼 공산주의자들은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그리고 미국 등 해외에서 힘을 합하여 대한민국과 일본과 미국을 격하하고 파괴하는데 필요한 엄청난 조직과 노하우를 활용하여 암약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조총련 등 일본 내의 친북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제압하고, 대한민국은 현존하는 붉은 반국가 세력을 상대로 이념전쟁을 벌이는 동시에 그들이 세뇌시킨 오욕의 붉은 역사를 세척하는 역사운동, 문화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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