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센진 빠가야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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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11-26 16:58 조회5,17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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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센진 빠가야로 (2)
민족문제연구소가 2012년 11월 대선을 위해 제작한 40분짜리 역사 다큐 [백년전쟁]은 순 거짓으로 꾸며진 다큐 영상물이다. 이 다큐는 ‘시민방송’이 줄곧 방송해 200만 명이 보았다고 한다. 이승만을 하와이 깡패, 성금횡령자, 성범죄자, 친일파, 독재자로 묘사했고, 박정희를 뱀 같은 인간으로 묘사했다.
2013년 7월 방송통신위원회는 이 시민방송에 중징계를 내렸고, 시민방송은 이것이 부당하다며 소송(제재조치명령 취소소송)을 했지만 1,2심 모두에서 패소했다. 그런데 2019년 11월 21일, 대법원은 이것이 정당한 작품이라고 판결했다. 역사에는 다양한 시각이 수용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5.18에는 어째서 다양한 시각이 수용될 수 없는 것인가? 이 판결에서 대법원장 김명수가 6:7의 캐스팅보드로 작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은 박근혜가 2016년에 임명한 김재형 때문이라 한다. 박근혜가 빨갱이 대법관을 임명한 것이다.
김재형
이승만과 박정희를 부관참시한 존재는 누구인가?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이다. [백년전쟁] 내용은 증명된 게 하나도 없다. 그냥 마구잡이로 하는 것이다. 지금은 사실이 무엇이고, 정의가 무엇인지 소용없는 세상이다. 빨갱이냐 파랭이냐가 문제다. 빨갱이는 5.18과 4.3을 민주화운동이라 하고, 파랭이는 이 두 개를 공산폭동이라고 한다. 빨갱이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부관참시하고 싶어하고, 파랭이는 이 두 인물을 영웅으로 숭배한다. 그렇다면 이승만-박정희를 부관참시한 인간 임헌영은 어떤 인간인가? 이승만 박정희 엄지발톱에 낀 때만도 못한 오물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은 누구인가?
1941년 1월생이다. 임헌영(본명 임준열)의 부자는 다 빨갱이다. 임준열의 아버지 임우빈은 빨갱이 집단인 보도연맹 가입으로 처형되었고, 임준열 자신은 문인간첩단 사건과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남민전에 가입할 때까지 37세가 되도록 변변한 직장도 없던 이른바 놈팽이었다. 남민전에 가입한 당시의 직업은 문학평론가, 당시 주소는 은평구 녹번동, 본적은 경북 의성군 금성면, 구연리, 남민전 가명은 한미정, 필명은 임헌영인이다. 박헌영을 흉내 낸 이름인 것이다.
임준열은 임우빈의 2남, 그의 부친 임우빈은 본적지인 의성군 금성면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처형당했다. 이 나라에 한이 맺힐 만한 사람들인 것이다. 임준열은 1959년 3월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한과 동시에 소문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이듬해인 1960년 12월에 사임하고 1961년 3월-1965년 3월간 중앙대 국문학과를 졸업함과 동시에 동 대학원에 입학하여 1968년 3월에 동 대학원을 이수했다.
1969년 10월 경향신문 주간경향 기자로 재직하다가 1970년 10월, 월간 ‘다리’지 주간으로 전직하여 여기에 근무하면서 1972년 3월 중앙대 강사를 겸직하다가 1974년 1월 ‘문인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되자 동직을 사임하고, 1976년 7월 대법원에 의해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75년 4월부터는 ‘태극출판사’ 기획부장으로 있으면서 1978년 6월부터는 월간 ‘독서’ 주간으로 재직하다가 1979년 8월부터 도서출판 ‘상황사’를 설립하여 경영해 왔다. 그는 1976년 남민전에 뛰어들어 1심에서 징역 15년, 2-3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이 형량은 이제오와 동일하다.
남한 최대의 간첩조직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핵심요원
남민전은 1976년 3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3인에 의해 발기한 후 박대통령이 서거하신 1979년 10월에 일망타진되었다. 일당 73명이 재판을 받았고, 임준열의 피고인 번호는 72번, 참고로 이재오는 60번, 암호명은 한국주였다. 남민전은 1960년대 인혁당, 통혁당사건 관련자들이 출감 후 노동자·농민·청년학생 등 각계각층을 규합, 북한과의 연계 속에 결성한 지하공산혁명조직이다. 이 사건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간첩사건으로 관련자만도 100여 명이 넘었다.
남민전은 안용웅(38) 등이 월북, 김일성에게 사업보고서를 제출하는 등 북한으로부터 구체적 통제를 받아왔고, 남한 내에서 북한이 요구하는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할 경우 게양할 붉은 별이 그려진 대형 ‘전선기(戰線旗)’까지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 이들은 공작금을 마련하기 위해 혜성대(彗星隊)라는 조직을 만들어 재벌집에 들어가 강도질도 했다. 김정익 씨는 자신의 책 ‘수인(囚人)번호 3179’에서 “남민전 조직원들은 교도관연락책까지 동원, 교도소 내외에 비밀지령을 주고받으며 조직을 강화시킬 정도로 치밀했다”고 적었다.
“계급적인 적들을 증오하라. 철저히 증오하라. 남조선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나면 최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은 이 사회의 민족반동세력을 철저하게 죽여 없애야 한다. 그 숫자는 2백만 정도는 될 것이다. 그래야만 혁명을 완전하게 완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재판결과 사건의 총관련자 가운데 1심과 2심에서 39명이 석방됐으며 남민전 사건 연루자들은 지난 1989년까지 모두 만기, 특사로 출옥했다. 특히 작가 홍세화(洪世和)는 79년 당시 남민 사건으로 프랑스에 망명, 공소시효가 만료된 이후인 99년 한국에 돌아와 한겨레 신문 편집국 부국장으로 재직했었다.
임헌영의 남민전 가입
임헌영(본명 임준열)은 1976년 11월 하순, 15:00시 경, 필동 소재 근무지인 태극출판사 사무실로 찾아온 이재오로부터 “민주화투쟁의 핵심 조직”(민투)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자마자 이를 쾌히 승낙하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20:00경 서대문구 냉천동 소재 이재오의 집에서 이재문이 주재하고, 이재오가 사회를 보는 비밀회의에서 [민투]의 강령과 규약을 선서하는 의식을 치렀다.
수일 후 20:00경 은평구 홍은동 4거리 중국집에서 이재문과 접선하여 ’민주화운동‘에 대한 교양을 받았고, 12월 초에도 같은 음식점에서 이재문과 접선하여 점조직에 대한 교양을 받았다.
1979년 1월4일 20:00 이재오의 집에서 이재문과 접선하여 [민투]의 첫 활동으로 삐라를 뿌려야 하니 삐라 문안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고, 익일인 1월 5일, 22:00시 삐라 문안을 작성했다. “오늘 박정희 1인 학정은 군대와 경찰의 사병화 . . 한국 민주투쟁국민위원회를 결성하여 박정희 1인폭정과 무제한 투쟁할 것을 . .” “인권을 유린한 박정희 1인 폭정을 타도하기 위하여. .”그리고 이를 이재오에게 전달했다.
임헌영은 이재오가 포섭하여 키운 빨갱이
1월 중순 20:00시 임재오, 임기묵,(10년에서 3년으로 확정) 최석진(1,2심 사형에서 무기로 확정) 등과 4인 1조가 되어 삐라 살포를 위한 수개지역 사전답사를 했다. 이재오가 삐라를 살포하다가 구속되자 이재오의 영치금, 변호사 문제를 이재문과 논의하고, 이재오가 맡고 있던 민투책을 승계했다. 이후 수회에 걸쳐 자금을 전달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포섭하여 남민전 조직 확대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1977년 9월 16일, 김일성에게 보내는 서신 초안을 작성했고, 동년 9월말에는 권오헌의 집 안방에서 안재구가 준비해온 남민전기를 걸어놓고 안재구가 가져온 단도를 임준열과 함께 세 사람이 거머세우고 강령, 규약, 선서문을 낭독하는 의식을 치렀다.
그가 박정희를 친일파로 몰아간 것은 국가-사회에 대한 아버지의 원한과 그 자신이 치룬 재판들과 감옥생활에 대한 보복심리 그리고 그가 심취했던 사회주의 서적들에 의해 형성된 공산주의 사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가 심취했던 책들은 “1981년 10월 20일, 발간된 ‘좌익사건실록’ 746-747쪽에 수록돼 있다.
남민전 구성원들은 열등아들의 집합소
남민전은 1976년 3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3인에 의해 발기한 후 박대통령이 서거하신 계절인 1979년 10월에 일망타진되었다. 일당 73명이 재판을 받았고, 이재문과 신향식은 사형, 안재구, 이해경, 최석진은 무기, 그다음부터는 15년형, 7년형, 5년형 . . 집행유예로 모두가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들 73명의 프로필을 조사해 보니 무직이 19명이고, 직업이 있다 해도 좌익계 단체를 전전하고나, 사회적 저변직업들을 전전하거나, 문인협회, 역술가, 위안부, 가정부, 행상, 노동, 강도. 학원강사, 교원, 대학생(9명), 목공, 정비공, 미싱공, 용접공 등 그야말로 사회에 불만을 가진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73명의 피고인들 중 60번을 달고 있는 이재오는 5년형을 받았다. 그는 당시 중앙대학 경상대학 농촌사회개발과에 다니다가 6.3 데모로 제적되고, 군복무 기간에 국민대학도 다니고 일동에서 중학교 교사도 하는 등 불가사의한 경력을 가졌다.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되어 교사직을 사직하고 ‘상황극단’에서 연출생활을 하다가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고, 1979년 6월부터 엠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으로 있다가 반공법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나서, 다시 긴급조치9호를 위반하여 1년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은 후 남민전에 가담했다.
남민전 73명의 본적을 보니, 경북 17, 전남 17, 서울 14, 경남 10, 경기 6, 전북 4, 충북 2, 충남2, 강원 1로 분포돼 있다. 총 주모자 이재문은 1934년생으로 경북 의성군 옥산면이고, 이재오는 경북 영양군, 성보면이다.
남민전 가족들에는 1가족 3명이 관련돼 있는 경우도 있다. 이원X와 전수X는 부부이고, 이들의 장남이 이해경인데 이해경은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고, 전수X는 3년형을 언도받았다. 이재문은 1934년생, 그의 내연녀인 이문희(7년형)는 53년생이다. 이재문은 그의 친족인 이원X(신림동)을 찾아가 그 집에서 아지트를 정하고 그의 막내딸인 이문희를 내연의 처로 만들었다.
남민전은 혼숙을 예사로, 공생활이 사생활 지배한다
남민전 강령 중에는 “사생활은 공생활에 예속된다”는 항목이 있다. 이 강령 때문에서인지 이 집단에는 난잡한 관계들이 드러나 있다. 1975년 7월, 이재문, 신향식, 전수X(가정부, 3년형)은 전수X명의의 당산동 강마을 아파트에서 동거생활을 하면서 한동안 그곳을 아지트로 하였고, 1976년 2월, 같은 아파트에서 비밀단체 이름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이라 명했다.
1976년 4월 26일, 이재문은 용산구 후암동에 그의 내연의 처 이문희의 이름으로 방을 얻어 한동안 아지트로 삼았다. 1978년 12월 21일, 이재문은 잠실시영 아파트 11동 408호로 거점을 옮겨 이수X(15년형)과 함께 3명이 살았다. 이웃에는 이문희와 이수X를 부부로 위장하고, 이재문은 이수X의 처삼촌으로 위장했다. 이들은 위안부 김문X 집에서도 한동안 아지트를 정하고 수많은 포섭자들에게 선서를 시켰다.
이재오는 1976년 ‘상황극단’ 사무실에서 신향식 등에 의해 포섭되었고, 10월 3일, 20;00시에 주부인 전수X 집에서 이재문, 신향식, 이해경 앞에서 남민전의 깅령, 규약 등을 읽고, 선서문을 낭독한 후 조직 가명 한국주를 부여받았다.
여기에서 강조돼야 할 것은 사생활을 공생활에 예속시킨다는 강령 아래 남남인 남녀가 한방에서 합숙생활을 하고, 자기 내연의 처를 동지의 부인으로 위장하고, 자기는 내연의 처의 삼촌으로 위장까지 하는 집단에서, 그리고 동지가 혈육보다 더 상위의 개념으로 자리하고 있는 특수집단에서 국가전복활동을 수행했다.
이학영(민주당 의원)의 정체
검찰의 '좌익사건실록'에 나타난 이학영의 이력을 요약해 본다.
이학영은 1952년 4월 16일 전북 순창군 풍산면 유정리, 빈곤한 농촌에서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고생하다가 1971년 전남대 국문학과에 입학하여 4학년이 된 때에 1974년 4월 8일 민청학련에 가담한 일로 제적당했다.
1974년 8월 긴급조치 4호를 위반한 죄로 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진주교도소에서 복역 중 어찌 된 일인지 1975년 2월 15일, 형집행정지조치로 출소하여 커피행상으로 일하다가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다.
1977-78년에는 돈암동 제일복장사에서 재단보조공으로 일하면서 한미직업훈련소에서 선반공 과정을 이수한 후 선반공으로 일하다가 1978년 10월 6일에 남민전 민투에 가담하여 암호명 조선택으로 활약했다. 세운상가 등에 “격! 몰아내자 박정권, 모이자 민투” “기미항쟁의 불길을 박정희 타도의 횃불로!” 등의 제목으로 된 삐라를 수없이 살포하는 것으로 민투의 범행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남민전은 조직 자금난을 해소키 위해서 1978년 9월 29일 이재문, 안재구, 신향식, 이해경 등 핵심조직원이 흉기를 사용하여 부정축재자, 악덕재벌을 대상으로 폭력적 방법으로 재물 등을 탈취하기 위해 ‘혜성대’라는 강도단을 창설했다. 이들은 범행장소에 대한 약도를 그려놓고 칼 등 범행도구를 마련한 후 범행 절차와 도망가는 절차 등에 대해 수차례 예행연습을 했다.
혜성대는 봉화산작전(1978.12.5 가정집 강도), G.S작전(1979.3.25 금은방강도), 땅벌1호작전(1979.4.27 동아건설 사장집 강도) 등 떼강도 행각을 잇 따라 자행했다. 이학영은 1979년 3월 25일 종로2가 소재 보금장 금은방을 대상으로 한 ‘G.S 작전’에 김남주(작고, 시인)와 최석진(환경운동, 승 법륜의 친형)등과 범행에 가담했고, 이어서 ‘땅벌1호작전’ 떼강도 사건에 가담했다.
1979년 4월 27일 동아건설 최원석 사장 집에 침입했다가 경비원에게 발각되자 경비원에게 중상을 입히고 도주한 죄 등으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았다.
이학영은 출소 후 28년간 YMCA 등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YMCA의 대부'로 불려오다가 2011년 12월, 문재인, 문성근, 김두관 등 친노·시민단체가 만든 시민통합당에 참여한 여세를 몰아 민주통합당 예비경선을 통과하고 대표경선에까지 나서게 되었다.
왕재산 간첩들이 간첩행위를 진행하고 있는데도 정부가 그 간첩들에 민주화 유공자 자격을 부여하고 보상금까지 주는 마당이니 어찌 국가가 걸레조각으로 갈갈이 찢어지지 않겠는가?
2019.11.26.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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