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단어 만든 사람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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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10-20 20:34 조회8,6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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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단어 만든 사람 누구인가?
(사진생략)
1443년 세종시대에 최초로 만들어진 훈민정음은 지금의 <한글>과 너무도 차이가 많다. 아래 사진은 세종이 만들었다는 ‘훈민정음’이다. 이 글씨를 보면 지금의 한글과 너무나 다르다. 어떤 과정을 통해 훈민정음 글자가 지금의 한글글자로 진화했는지 설명한 글들이 별로 없다. 몇 사람들이 내놓은 설들만 있을 뿐, 과학적 설명이 없는 것이다. 1446년에 세종이 반포한 훈민정음은 한글이 태어나기 전까지 문자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채 사장돼있었다.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한 시기는 1928년이었다. 일제가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탄압했다는 좌익들의 주장이 허위라는 사실,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이 시기의 조선학자들은 왜 우리글을 ‘훈민정음’이라고 부르지 않고 ‘한글’이라고 불렀는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경제’ ‘문화’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누가 만들어 준 단어들일까? 세종은 이런 문자와 이런 단어 만들어내지 않았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이 단어들은 누가 만들어 주었는가? 놀라지 말자. 일본이 만들어 주었다. 1835년생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만들어 준 것이다. 이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일생을 바쳤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려면 언어가 통해야 했다. 수많은 제자들을 동원했다. 그리고 영영사전을 해독하여 그 뜻을 한자단어로 전환했다. 이런 대업이 완성되지 않았다면 일본의 개화도 없었다. 그는 이 한자단어집을 조선의 개화파들에 내주었고, 조선인들은 그 한자단어들을 한글로 표기했다. Democracy를 民主主義로 전환한 사람은 유키치였고, 民主主義을 ’민주주의‘로 표기한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이었다.
처음에 그는 ‘Democracy’를 下剋上(하극상)으로 번역했다. ‘Democracy’를 백성이 감히 왕에게 대들었다는 의미로 이해했던 것이다. 갑론을박 끝에 다시 民主主義로 바꿨다한다. 모든 단어가 이런 과정을 통해 창조됐으니 그와 그 휘하 지식인들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겠는가? 이어서 Civilization을 文明으로, Right를 權利로, Society를 社會로 번역했다. 조선인들은 이를 한글발음으로 표기만 했을 뿐이다. 복식부기, 보험, 학교, 시간, 경제, 문화, 문명, 사상, 연설, 계급, 법률, 자본, 토론, 종교, 이성, 철학, 감성, 주관, 의식, 과학, 물리, 화학, 분자, 원자, 질량, 공간, 이론, 문학, 미술, 비극,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런 단어를 한문단어로 만들어 준 사람이 바로 후구자와 유키치였던 것이다.
이에 관련한 한 에피소드가 있다. 중국이 일본의 기술을 로열티도 지불하지 않고 함부로 도용한 사실에 대해 일본이 ‘지적재산권’을 침해했다고 항의했다. 이에 중국은 “그렇다면 일본이 지금까지 우리가 만든 한자를 무료로 사용해왔으니 그에 대한 로열티를 내놔라” 이렇게 대꾸했다. 이에 다시 일본은 “좋다, 그럼 중국이 지금까지 일본이 만들어 낸 한자단어집을 중국이 무단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 응분의 사용료를 내놔라” 이렇게 받아쳤다 한다. 그럼 조선은 무엇을 했나? 한자도 공짜, 한자사전도 공짜인 나라다. 무임승차(Free Rider)의 나라이고 꼽사리만 끼어 온 나라인 것이다. 유키치 이전에는 ‘학교’를 校라 했다. 다리를 橋라 했고, 가르치는 것을 敎라 했고, 상대방과의 교류하는 것을 交라 했다. 이는 ‘글자’였지 의사를 교환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스승은 교를 건너 교에 가서 교하고 하루 종일 교한 학생들은 밤늦도록 교했다”고 한글로 쓰거나 말하면 누구도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말은 한문을 배운 소수의 양반들끼리만 종이와 붓을 통해 소통됐다.
유키치는 수많은 조선 청년들을 제자로 삼았다. 그들 중 뛰어난 사람들이 유길준(1856~1914), 주시경(1876~1914), 최현배(1894~1970), 김옥균, 윤치호 등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에는 언문이다, 암클이다 천시 받던 훈민정음이 [후쿠자와 유키치]에 의해 한글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이 엄연한 사실은 그동안 반일적인 사회적 정서에 묻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그동안 우리는 배은망덕한 존재였던 것이다. 유키치는 유길준 등 조선 제자들을 통해 일본글처럼 한자와 한글을 섞어서 글을 쓰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 후 국한문이 섞인 글을 사용했다. 일단 한글말 사전이 만들어 진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한문표기가 어렵다며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한글을 전용케 했다. 국한문겸용 시대를 한글전용 시대로 전환시킨 것이다.
많은 식자들이 박정희의 한글전용 정책을 비판한다. 이들은 지금도 한글전용이 국민을 미개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한글전용을 지지한다. 관찰한 결과 저자는 두드러진 현상을 발견했다. 국한문겸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국내 토종파들이다. 반면 한글전용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대개 유학파들이다. 훈민정음 실용화 과제를 맡았던 집현전 학자들은 노예들이 쉬운 언문으로 자기들끼리 함부로 소통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토종파들도 바로 집현전 학자들과 똑같은 멘탤러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글로 그리고 구어체로 글을 쓰면 의사전달이 잘 되는 데도, 이들은 간단한 내용을 길게 쓰고 거기에 더해 한문까지 넣어야 남들로부터 지식인으로 인정받는다고 생각한다. 성경말씀이 외식하는 자들을 꾸짖어 온지가 벌써 2,000년을 훌쩍 넘겼는데 아직도 국한문혼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에는 외식하는 버릇이 있는 듯하다. 헤밍웨이가 노벨 문학상을 탄 것은 ‘노인과 바다’라는 단편소설 때문이었다. 노벨평화상이 높게 평가한 것은 단문의 구어체였다. 그런데도 토종파들은 지금도 문장을 명주실처럼 길게 늘어뜨려 쓰면서 현학적(Pedantic) 분위기를 낸다. 다르게 말하자면 학자연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사실이 있다. 긴 문장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짧은 구어체 문장은 누구나 쓸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글전용에는 두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문맹률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한문은 한글에 비해 우선 어렵고 배우는 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한문을 배울 능력과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은 문맹이 된다. 그러면 사회로부터 이탈되고 불필요한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사회병리를 촉발한다. 둘째, 한문을 배우는 시간에 그만큼의 영어를 배우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다. 우리는 어차피 영어를 통해 신문물을 받아들인다. 한문을 배운 사람도 영어를 공부해야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세상에서 한문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중국인들은 어째서 영어를 배우는 것이며, 어째서 기술발달이 한국보다 더 후진돼 있는 것인가? 한문은 그것을 취미로 하는 사람, 고사를 연구하는 사람만 배우면 되는 것이다. 북조선에서는 ‘한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조선어 조선글이라고 부른다.
한글 띄어쓰기 주도한 영국 목사 존 로스(John Ross)
가두리 농장에 불과했던 조선에 수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왔다. 알게 모르게 그들은 미개한 조선인들에게 서양이라는 발전된 세상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가르쳐 주었다. 한글 발전을 도와준 서양인도 있었다. 한글문장에는 띄어쓰기가 없었다. 오른쪽 위부터 아래로 내려 쓰는 세로쓰기 방식이었다. 그럼 띄어쓰기는 언제 처음 나왔을까? 최초의 한글 띄어쓰기는 1877년 영국 목사 존 로스(John Ross)로부터 시작됐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그가 외국인을 위해 편찬한 ‘조선어 첫걸음'(Corean Primer)에서 처음으로 띄어쓰기가 나타난 것이다. 국립국어원에서 제공한 자료를 보면 한글 문장이 먼저 나오고 그 아래 발음과 영어단어를 차례대로 대응시켜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인물로서의 후쿠자와 유키치(Yukichi Fukuzawa, 1835~1901).
후쿠자와 유키치는 1835년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가 되었다. 일본화폐 최고액권인 1만 엔 권에는 1984년부터 그의 초상이 인쇄돼 있다. 그는 일본 만이 아니라 중국과 조선이 다 함께 참여하는 ‘동양의 문명개화’를 주창했다. 그는 또 그가 개척해놓은 한자사전을 조선제자들에게 내주었다. 그는 그가 운영하는 신문사설을 통해 일본이 한국을 영토적으로 삼키는 것은 절대 안 되며, 상호 독립자존의 원칙 아래 ‘교역의 이득’을 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한론’도 부정하고.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881년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학생들이 파견됐다. 유키치는 조선인 유학생 유길준, 박영효, 윤치호 등을 자주 만나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이들이 귀국한 뒤에도 유키치는 꾸준히 이들과 연락을 유지했다. 독립신문 등 신문과 언론에 종사하던 윤치호에 대해서는 언론 경영에 대한 조언을 많이 해 주었다. 성금도 모아 주었다. 유길준에게는 국한문을 혼용해 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혹독한 형벌과 연좌제를 보고 유키치는 비분강개하여 당일 하루 식음을 전폐했다. 그는 아까운 인재들을 잃었다며 대성통곡했다. 이어 ‘조선독립당의 처형’이라는 글을 발표해 조선의 야만적인 형벌을 비인도적이라고 강력 규탄했다. 그리고 곧바로 탈아입구론(脱亜入欧,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을 제창했다. 그가 남김 휘호가 유명하다고 한다.
직역하면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창조하지 않으며, 사람 밑에 사람을 창조하지 않는다"는 글이다. 일본에서는 “인간은 모두 평등해서, 신분의 상하 귀천, 가문, 직업 등에 차별이 없다.”고 해석하고, 우리사회에 퍼져 있는 말로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뜻이었다. 그는 1835년에 태어나 66세인 1901년에 타계했다.
탈아입구론 (1885) 원문(번역)
"서구화의 바람이 동양을 향해 불어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모든 국가는 서구사회와 더불어 이 운동에 동참하여 문명의 열매를 맛보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문명은 홍역과 같지만, 여러 이로운 점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홍역보다는 이롭다. 그러므로 국가는 문명에 거역할 수 없으며 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문명화 과정에서 보수적인 정부(도쿠가와 막부)는 걸림돌일 뿐이며 이를 뒤집어야만 일본에서 문명화를 이룰 수 있다.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얻는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시아를 벗어나는 것'(脫亞)이다. 비록 일본이 이미 정신적으로는 아시아를 벗어났지만, 이웃의 두 나라(한국과 중국)는 개혁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들의 유교적 가르침은 모두 위선적이고 뻔뻔할 뿐이다. 중국과 일본의 개혁이 실패한다면, 이들은 곧 세계 열강에게 나라를 빼앗길 것이다. 서구인들은 언제나 일본, 중국, 한국을 같은 문화를 가진 비슷한 나라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일본에게 걸림돌이 될 뿐이다. 나쁜 친구를 사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마찬가지로 나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일본은 이웃의 나쁜 아시아 나라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 『時事新報』1885(明治18)年3月16日
갑신정변은 1884년 12월 4일에 발생했고, 탈아입구론은 1885년 3월 16일에 발표되었다. 그는 왜 아시아를 야만의 상태에서 문명의 상태로 변화시키려 했을까? 많은 이들이 미국과 유럽 제국의 자원쟁탈 차원에서 해석한다. 그러나 저자는 좀 다르게 해석한다. 우선 그는 그가 사랑하는 조선의 제자들이 숙청당하는 데 분개했다. 그래서 그는 종전의 비개입 원칙론에서 현실론으로 발을 옮겼을 것이다. 조선 사람들을 무능한 폭군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조선왕조를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조선을 탈출하여 도망 나온 조선인 개화파들 30여 명을 보호해주고 먹여주었다. 특히 김옥균은 10년 이상 돌보아 주었다. 역사는 사실과 해석으로 구성된다. 정한론은 조선을 정벌하자는 것이었고, 유키치는 조선과 중국을 개화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은 실제로 조선과 중국을 다 점령하여 두 나라를 개화시키다 미국을 침공하는 바람에 꿈을 접어야 했다. 아마도 유키치에게는 이런 생각이 있었을 것 같다. 만일 일본이 조선과 중국을 개화시키지 못하면 아시아는 미개한 조선과 중국 때문에 서양으로부터 점령당할 것이며, 조선과 중국이 점령당하면 일본은 고립화되어 자연 소멸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조선경제의 초석을 깔아준 ‘시부사와 에이이치’
일본은 교육 문화 측면에서만 조선에 초석을 깔아준 것이 아니라, 경제 측면에서도 초석을 깔아주었다. 초석을 깔아준 주인공은 ‘후쿠자와 유키치’와 쌍벽을 이루었다는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다. 그는 일본의 독특한 자본주의문화를 창조한 사람이다. 당시 유럽과 미국의 경영철학은 오로지 주판이었다. 그런데 시부사와는 “한 손에는 도덕을 다른 한 손에는 주판을 들라”고 가르쳤다. 그가 말한 도덕은 공자였다. 똑같은 공자로부터 일본은 ‘도덕’이라는 잣대를 실용화 측면에서 활용한 반면, 조선은 유교를 만들어 ‘앉아서만 따지는 관념론’에 매몰됐다. 일본이 받아들인 공자는 무엇이었는가? “이윤을 추구하지 말고 개선을 추구하라, 이윤은 개선에 열리는 열매다” “기업인은 정신적 귀족이기를 추구하라, 이윤은 자동적으로 따라온다.” 1920년대의 마츠시타 고노스케를 비롯한 수많은 일본 굴지의 기업가들이 이를 따랐고, 이는 일본 전체의 문화가 되었다.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면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제6장, ‘일본은 배울 게 많은 나라’를 정독해 주기 바란다. 그의 경영사상을 이어받은 사람들 중 유명한 한 사람이 그보다 54년 후에 태어난 1894년생 ‘마쓰시타 고노스케’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서구로 넘어가 있는 조선 철도부설권을 매입해 경부철도, 경인철도, 중앙선 등 세기적인 대공사를 완성했다. 조선에 ‘제일은행’을 창설했다. 1902년부터 1904년에 걸쳐 무거운 엽전대신 지폐를 인쇄해 유통시켰다. ‘제일은행권’ 지폐인 1원, 5원, 10원 권에는 ‘시부사와’의 초상이 박혀있었다.
경부철도 주식회사는 이미 1901년 6월에 창설됐다. 일본은 36년 동안 조선을 통치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일본은 조선을 36년 통치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 45년간 조선을 개화시킨 것이다. 그리고 조선 땅에 구축한 52억 달러의 고정자산을 모두 남겨두고 맨몸으로 돌아갔다. 일본이 빼앗기고 간 자산은 박정희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 엽전! 이 단어는 ‘조선인들이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종족이냐?‘를 대표하는 자학적 단어였다. 1960년대에도 저자는 신당동 거리에서 “엽전이 뭐 별 수 있겠어?” 라는 자조의 말들을 늘 들으면서 걸었다. 이제 이 책을 쓰기 위해 자료들을 찾아보니 조선은 참말로 엽전이었다.
결론적으로 일본은 조선에 1) 학문과 문화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고, 2) 경제의 초석을 마련해 주었고, 3) 조선으로서는 감히 엄두조치 내지 못했던 52억 달러의 고정자산과 대기업들을 남기고 간 나라다. 조선이 핍박을 받았다는 것들은 알고 보면 대부분 모략물들이다. 조선인들이 일본을 평가하는 표현들에는 구체성이 없다. 그냥 막연히 악독한 쪽바리라는 것이다.
2019.10.20.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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