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김창수),츠치다 조스케(土田讓亮) 격살(때려죽임)건 취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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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제갈윤 작성일19-10-22 22:37 조회4,583회 댓글6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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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거 김창수(金昌洙) 당년 21세
초초(初招)
[문] 그대가 행한 일은 이미 이화보(李化甫)가 명백하게 고한 바 있으니 사실대로 말하라.
[답] 내가 금년 정월 24일 용강(龍崗)으로부터 안악(安岳)으로 가던 도중에 평양 사람 정일명(鄭一明)과 함경도 정평(定平) 사람 김장손(金長孫)과 김치형(金致亨)을 만나 같은 배를 타고 치하포(?河浦)에 와서 점주(店主) 이화보를 찾아가 저녁을 먹고 그곳에 투숙하였다. 이튿날 밝은 새벽에 조반을 마치고 길을 떠나려 하였는데, 점막(店幕)의 법도가 나그네에게 밥상을 줄 때 노소(老少)를 분별하여 그 차례를 마땅히 지켜야 하는데도 손님 중에 단발을 하고 칼을 찬 수상한 사람이 밥상을 먼저 요구하자 여점원이 그 사람에게 먼저 밥상을 주므로 마음으로 심히 분개하였다. 그래서 그 사람의 근본을 알아본즉 일본인이므로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라고 생각이 되자 가슴의 피가 뛰었다. 그러한 때 그 일본인이 한눈을 팔고 있는 틈을 타서 발길로 차 거꾸러뜨리고 손으로 때려 죽여서 얼음이 언 강에 버렸다. 그러고 나서 동행한 세 사람은 약간의 현금을 가져다가 점주에게 8백금을 맡기고, 그외의 돈은 세 사람의 노자로 쓰기로 했다. 그리고 본인은 일본인의 환도(環刀)를 탈취하여, 당나귀 한 마리를 일흔 다섯냥으로 사서 단기(單騎)로 재령(載寧)으로 향했다가 동년 3월에 집으로 돌아왔다가 해주(海州) 순사에게 체포되어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건양(建陽) 원년 8월 31일
인천항 경무관 김순근(金順根)
죄인 김창수(金昌洙)
김창수 재초(再招)
[문] 그대는 동당 몇 명과 이화보(李化甫)의 집에서 함께 유접(留接)하다가 일본 사람을 죽였는가?
[답] 처음 평양 남문 밖에서 초면인 상민(商民) 세 사람을 만나 동행하여 이화보의 집에서 함께 지새다가 일본 사람을 죽일 때 그들 세 사람은 도망했다.
[문] 그대는 동행 세 사람과 이화보(李化甫)의 집에 도착하여 그대가 한 말 가운데 동당 몇 백명이 곧 뒤따라 도착할 것이니 짚신(草鞋) 등의 물품을 미리 준비하라고 하였다는데 이는 동당이 있음을 뜻하지 않는가?
[답] 당시는 각처에 도적들이 봉기하기로 그런 허세를 부림으로써 점주를 현혹케 하려던 것이다.
[문] 그대는 일본사람을 죽인 뒤 의병이라 자칭하고 일본인이 배에 가지고 있던 금품을 탈취하였으니, 그것은 그가 배 안에 돈을 가지고 있음을 미리 알고 재물을 탐하여 일본인을 죽인 것이 아닌가? 사실대로 바로 말하라.
[답] 일본인을 죽인 뒤 그의 배에 돈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동행 세 사람과 함께 배 안으로 들어가 현금을 가져왔다.
[문] 가져온 돈이 몇 냥이나 되며 무엇에 쓰려고 한 것인가?
[답] 금액량은 잘 모르게, 동행인의 노자로 얼만가를 주고, 당나귀 한 마리를 엽전 일흔 다섯냥에 사서 타고 왔으므로 대략 전액은 엽전 백냥 가량으로 안다.
[문] 그대는 처음 공술에서 8백냥을 이화보(李化甫)의 집에 맡겼다고 하였는데 지금 와서는 엽전 백냥 뿐이라고 하니 대체 어떻게 된 까닭인지 사실대로 바로 말하라.
[답] 처음 공술은 갑자기 생각이 안나 잘못 말하였으나, 이제 자세히 생각해 보니 8백냥을 맡긴 사실은 없고, 동행 세 사람의 노자와 당나귀 한 마리 값 일흔다섯냥 뿐이었다.
[문] 일본인을 때려죽일 때에 쓴 흉기는 무엇이며, 동행 세 사람도 함께 협력하였는가?
[답] 처음은 돌로 때리고, 다시 나무로 때리자 그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 도망가기에 강변까지 쫓아 따라가서 몽둥이로 거듭 구타하여 죽인 뒤 시체를 끌어다가 얼음판에 버렸으며, 동행 세 사람은 이 일에 관계한 바가 없다.
[문] 이화보(李化甫)의 공술 가운데 그대는 동행 세 사람과 함께 합세하여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는데 그대는 단독으로 행하였다 하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사실 있었던 그대로 말하도록 하라.
[답] 일본인을 죽일 때 부근 사람들도 놀라 도주하였거늘 점주 이화보가 감히 어떻게 참관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이화보 자신이 꾸며낸 말이나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문] 배 안의 돈을 가져 올 때 근처의 부락민들도 혹 참가한 일은 없는가? 그리고 사건이 있기 전에 그대는 어디에서 왔는가?
[답] 그때 동민들은 모두 도망하고 참가한 바 없으며, 동행 세 사람과 선원 몇 사람은 돈을 가져올 때 참가한 바는 있다. 그리고 본인은 단발을 피하여 안주(安州)로 가서 체류하다가 단발령이 정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치하포(?河浦)에 있는 이화보의 집에 유숙하다가 이 일을 감행하였다.
[문] 그대는 자칭 중국에서 출첩(出帖)한 좌통령(左統領)이라 하였다는데 진실로 중국에서 출첩한 것인가, 그러지 않으면 스스로 자칭한 것인가?
[답] 그것은 가칭이 아니라 중원(中原=중국대륙) 사람 서경장(徐敬章)의 하첩(下帖)을 받았으며, 이밖에는 할 말이 없다.
건양(建陽) 원년 9월 5일
기초(起草) 서기 진정진(秦貞鎭)
경무관 김순근(金順根)
죄인 김창수(金昌洙)
김창수(金昌洙) 삼초(三招)
[문] 그대는 본래 해주 사람인가?
[답] 해주에서 생장하였다.
[문] 그대의 양친은 생존하고 있는가?
[답] 생존하고 있다.
[문] 몇 형제인가?
[답] 형제는 없고 7대독자이다.
[문] 그대의 행위는 이미 초초와 재초에서 파악하였거니와 무슨 불협(不協)한 마음이 있어서 이토록 인명을 상하였는가?
[답] 국민 된 몸으로써 국모의 원수를 갚고자 원한을 품었으므로 이 거사를 행한 것이다.
[문] 그대는 신민 된 자로서 통분한 심정이 있었다고 하나, 지방관은 법을 장악하고 있는데 그대 임의로 일본인을 죽이는 것은 방자스러운 처사가 아닌가?
[답] 자신이 생각컨대 비록 지방관에 고한다 하여도 실시치 않을 것이므로 이 거사를 착수하였다.
[문] 그대의 1, 2회 공술에서 돌과 몽둥이로 일본인을 타살하였다고 했는데 그때 일본인도 칼을 차고(佩刀) 있었으면서 왜 대적하지 않았는가?
[답] 일본인을 발로 차서 넘어지게 하자 그때 그가 칼을 빼려하므로 돌로 때려 땅바닥에 쓰러지게 하고 즉시 칼을 빼앗아 버린 뒤 동행 세 사람과 방안에 있던 여러 행인들이 모두 분기를 띠고 힘을 합해 타살하였다. 그런 뒤 여러 사람들이 사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그 조처를 걱정하므로 내가 그들에게 시체는 매장하지 말고 얼음이 언 강에 버리라고 하였더니 그렇게 한 것이다.
[문] 그대와 동행한 세 사람의 이름은 무엇인가?
[답] 이미 앞서 한 조서에서 모두 밝혔다.
[문] 그대는 1, 2회 취조 때에는 단독으로 범행하였다고 하여 놓고 지금은 여러 사람들과 힘을 합해 사살했다고 하니 앞뒤 말이 같지 않음은 어찌된 일인가?
[답] 내가 먼저 일을 저지르고 나서 나중에 여러 사람들이 합세한 것이므로 내 자신이 여러 사람들을 끌어들인 결과가 되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일을 도모한 것은 아니므로 그렇게 공술한 것이다.
[문] 그대는 이화보(李化甫)와 전부터 서로 알고 있었는가?
[답] 그 상점에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인데 어찌 전부터 알고 있었겠는가.
[문] 이화보는 점주로써 그대가 사건을 일으키는 것을 목도하였는가?
[답] 이화보는 겁에 질려서 피신하고 없어서 사람을 보내 불러왔었다.
[문] 그대가 이 사건을 일으킨 것은 재물을 탐하여 한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왜 재물을 탈취하였는가?
[답] 동행한 세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갈 노자를 달라고 애걸하므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돈을 줘서 보내고 난 뒤 나머지 돈 8백 냥은 점주에게 맡겼다.
[문] 그대가 처음 사건을 일으킨 뒤 여러 사람들이 합세하여 타살하였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데 그것은 일을 일으킨 책임을 면하려고 이렇게 공술하고 있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대답하라.
[답] 나는 이미 혈분(血忿)으로써 손을 씻은 즉 어찌 감히 다른 사람들에게 죄른 씌워 내 자신이 모면하고자 하겠는가. 당장 모든 사람들을 지휘하여 일본인을 타살하고 무슨 딴 수작이 있겠는가.
죄인 김창수(金昌洙)
건양 원년 9월 10일
인천항재판소 판사 이재정(李在正)
일본영사관 경부 신곡청(神谷淸)
인천항재판소 주사 김창건(金昌鍵)
안악군 치하포(?河浦)점주 이화보(李化甫) 년 48 초초(初招)
[문] 일본인 토전양량(土田讓亮) 피고 건에 점주는 김창수(金昌洙)의 행동을 틀림없이 자세히 보았을 것이니 조금도 감추지 말고 사실대로 고백하도록 하라.
[답] 제가 본토의 점주인데 본년 정월 24일 밤에 이름 모를 일본인 한 사람이 통역하는 아이 하나와 와서 저녁밥을 사 먹은 뒤 휴식을 취하고 있을 즈음에 비도 김창수(金昌洙)가 일당을 거느리고 용강(龍崗)으로부터 나루를 건넜는데 그때 행인 13명도 그들이 올 무렵에 도착하여 저녁밥을 청하므로 밥을 지어 주었더니 일본인은 선원들과 함께 유숙하려고 선박처로 나아가고 통역하는 아이 하나와 선원 한 사람만 저희 여인숙에 투숙케 되었읍니다. 그런데 김창수의 일행도 투숙을 하고 날이 밝자 조반을 재촉하여 그들이 먹으려 할 즈음에 일본인도 다시 돌아와 아침밥을 먹은 뒤 그냥 앉아 있었읍니다. 그런데 조금 뒤 통역하는 아이가 급히 달려와 싸움이 벌어졌는데 매우 위급하니 속히 와서 구원해달라고 하였읍니다. 그래서 몹시 놀라 달려가 본즉 김창수가 일본인을 붙들고 마구 때리고 있기에 만류하려 하였으나 벌써 일본인을 죽여서 끌어다 강변에 버리고 환도 한 자루를 탈취하여서는 자기가 차고 당나귀 한 마리를 사서 타고 떠났읍니다. 그러므로 그가 간 곳은 알 수 없으나 일본인을 살해한 것은 김창수가 분명합니다.
건양(建陽) 원년(元年 8월 31일)
인천항 경무관 김순근(金順根)
죄인 김창수(金昌洙)
이화보(李化甫) 재초(再招)
[문] 당초 김창수가 일행 누구 누구와 당신 집에 투숙하다가 일본인을 죽였으며, 그리고 당신은 전부터 김창수와 알고 있었는가?
[답] 치하포진(?河浦津)을 건너 올 때 그의 동행이 17명이더니 나루를 건넌 뒤 13명은 다른 곳으로 가고 김창수와 세 사람이 함께 저의 집에 도착하여 투숙하다가 일본인을 죽였으며, 본인은 김창수와 알지를 못합니다.
[문] 김창수가 거사를 할 때 동행 세 사람도 힘을 합하였으며, 그때 범행에 쓴 기구는 무엇인가?
[답] 김창수가 범행을 저지를 때 동행 세 사람도 같이 덤벼들기에 말리려고 하자 김창수가 달려와 때리고 그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저놈도 때려죽이라고 고함을 치므로 무서워 도망하였읍니다. 그 당시는 캄캄 밤중이라 지척을 분별하기 어려웠으므로 범행에 쓴 물건이 무엇인지를 분간하기는 어려웠읍니다.
[문] 김창수가 자칭 의병이라고 말한 것은 일본인을 죽이기 전인가 죽이고 나서인가?
[답] 일본인을 살해한 후에 좌통령 김창수라는 명함을 내보였습니다.
건양 원년 9월 5일
기초서기 박영래(朴永來)
인감 전보(仁監電報)
범부 김창수 옥안 이화보(李化甫)를 속히 판결하여 곧 석방하여 돌아가게 하심을 기대합니다.
건양 원년 10월 2일 상오10시
인감(仁監) 이(李)
답전(答電)
김창수 안
이화보의 공술에 의하여 무죄 방면함.
10월 2일 법부
댓글목록
우익민주청년님의 댓글
우익민주청년 작성일감사합니다.
우익민주청년님의 댓글
우익민주청년 작성일살인/강도 두 단어로 요약 됩니다.
proview님의 댓글
proview 작성일김창수(김구)진술이 취조할때 마다 다르니 거짓의 달인은 여전합니다 거짓말의 달인이 되지 못하면 좌파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읍니다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어떠한 모함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이승만이 귀국해서 단독정부 수립하자 김구 할아버지와 똑같은 행동을 했읍니다 김구 할아버지 김자점은 청나라에 길을 열어주어 병자호란을 맞았고 김구는 대한민국을 북한 김일성한테 바치려고 방문하지 않았나? 분석해 봅니다
proview님의 댓글
proview 작성일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때 부터 같이 존재했읍니다 항상 좌파들의 위협적인 존재가 있다면 빨갱이들이 밀착 감시하는 경우가 많읍니다 시스템클럽 초창기에도 박사님의 주변에 빨갱이가 많았으니 이승만도 그러했읍니다 오늘날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김구 == 조갑제 동일한 부류의 생각도 드네요
proview님의 댓글
proview 작성일김구가 죽지 않았다면 이승만이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미군정의 보호하에 있었으니 말입니다
proview님의 댓글
proview 작성일하나 더 추가적으로 말씀 드리면 황해도 지역이 옟부터 산적과 도적들이 출몰하는 지역이라 합니다 김구 또한 그런 환경에 자랐다면 안봐도 비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