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숫자는 일본여성 중국여성 그 다음에 점령국 11개국 여성들의 혼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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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19-09-24 14:53 조회4,64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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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수는 20만규모 아니라 3,500명 규모
정대협은 일본 헌병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 숫자가 20만 명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많은 연구자들의 추산에 의하면 위안부는 1937년 일중전쟁으로부터 시작되어 8년 동안만 존재했으며, 1945년 8월 15일까지 많아야 연 인원 3,500 명 정도라고 한다. 일본군위안부에서 숫자가 가장 많은 것은 일본 여인들이었고, 그 다음이 중국여인, 점령당한 나라의 현지 여인, 조선여인, 기타의 순이라 한다.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진 위안부에 대한 키워드는 1) 강제연행, 2) 무리한 성폭행 3) 조롱과 학대 4) 대가없는 착취 등이다. 그러나 연구들에 의하면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대구 처녀 일행 20명 중 한 명으로 버마에 송출됐다는 위안부 문옥주의 경우를 보면 위안부들은 일본병사들과 사랑에 빠졌다. 버마 위안부들은 일본군으로부터 규정돼 있는 화대를 받았고, 그 이외에도 두툼한 팁까지 받았다. 특히 문옥주는 20세로부터 22세까지 불과 3년 만에 31,000엔 이상을 벌어가지고 고향인 대구에 돌아와 가세를 일으켜 세웠고, 22세로부터 또 다른 28년 동안 대구 화류계의 신데렐라가 되어 생을 즐겼다.
화류계의 대스타 문옥주
위안부 출신 문옥주는 2005년에 회고록을 냈다. 제목은 ‘버마전선의 일본군 위안부’. 아래는 그 책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한 것이다. 문옥주는 1924년 대구 대명동에서 출생하여 12세 때 일본으로 팔려가 17세가 될 때까지 요정 등에서 심부름을 했다. 당시 일본은 기율이 엄격해 17세 미만의 여아들을 성접대 현장에 내보내는 것을 금지했다. 17세가 되어서야 문옥주는 비로소 ‘권번’에서 기생수업을 받고 버마 유곽으로 갈 수 있었다. 기생이 되려면 ‘권번’ 즉 기생협회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다.
1942년 7월 그녀는 대구 여성일행 20명의 일원으로 부산-사이공-싱가포르를 거쳐 버마의 랑군에 갔고, 랑군 주재 일본군 방패사단 장병들의 파트너 개념으로 위안부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상냥하고 남을 잘 배려하고 노래를 잘해 인기인이 되어 있었다. 가족을 떠나 언제 죽을지 몰라 슬퍼하는 일본군 병사들을 매우 가엽게 여겼고, 그래서 성행위 이외에도 노래도 불러주고 친구처럼 따뜻한 언행으로 위로해 주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다가 일본군 병사 ‘야마다 이치로’와 사랑에 빠졌으며, 그 사랑이 너무나 깊어 그와 헤어진 지 51년 후인 1993년에도 그를 그리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 그와 함께 위안부 생활을 했던 대구 여성들 거의 모두가 일본군을 애인으로 갖고 있었고, 그 중 한 여인 ‘히토미’는 일본군 병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의 아이를 잉태한 채 귀국해, 한국에서 그 아이를 귀하게 키웠다고 한다. 그녀는 한마디로 끼가 있었던 모양이다. 노래 솜씨가 출중하고 사교적이고 배려심이 깊어 그 부대 장병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렸고, 그 결과 팁을 많이 받아 악어백도 사고, 다이아몬드도 사고 화려한 레인코트도 사는 등 쇼핑을 즐겼다고도 한다. 이영훈 교수 등이 저작한 ‘반일종족주의’에 의하면 방패사단의 위안소 운영에는 기율이 있었고, 화대표가 있었다.
위안소 준수사항
1) 이용 시 연대본부가 발생한 허가증을 영업자에게 제출해야 한다.
2) 위안소 내에서는 음식을 들일 수 없다.
3) 위안부 및 영업자에 대해 난폭한 행동을 금한다.
4) 이용시간을 엄수하고 타인에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5) 영업자 기타 위안부 여급 등에 대한 일체의 대차 관계를 엄금한다.
6) 위안부들은 정기적으로 성병 검진을 받아야한다
이용시간과 요금
1) 병은 10시부터 17시까지, 30분에 1원, 1시간에 2원.
2) 하사관은 17시부터 22시까지, 30분에 1원 20전, 1시간에 2원 40전
3) 준사관 이상은 22시부터, 1시간 3원, 24시 이후는 10원.
4) 사쿠(콘돔)는 영업자가 부담한다.
5) 황군 의외의 자는 접객을 금한다.
6) 영업자는 매월 초 5일까지 위안부별 영업 상황을 보고한다.
문옥주는 하루에 30~40원을, 때로는 그 2배를 넘는 70~80원을 벌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위안부들이 요금표대로만 받은 것이 아니라 넉넉한 팁을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대구 화류계의 프리마돈나가 된 그녀는 차례로 남성들과 동거를 하기도 하고 복잡한 인연으로 재산을 탕진한 상태에 있다가 정대협 측의 강력한 권유로 위안부 등록을 하게 되었다 한다. 그가 그녀의 과거를 공개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녀와 인연이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창피하다며 그녀로부터 싸늘하게 등을 돌렸다 한다.
조선의 부모가 딸들을 위안부로 내몬 대표적 사례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제1권에는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소정희 교수의 논문이 실렸고, 여기에 문필기, 이득남, 이상옥, 김옥실, 배족간, 송신도의 증언들이 소개돼 있다. 이 6명의 위안부들은 견디기 어려운 가정폭력으로부터 탈출하여 신여성의 꿈을 선동하는 브로커들에 속아 위안부로 간 케이스에 해당한다.
1) 문필기: 정대협이 매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주최하는 시위에 늘 참가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1943년 후반부터 2년 동안 만주의 군위안소에서 일했고, 1992년 6월에 위안부로 공식 등록했다. 그녀는 1925년, 2남 9녀를 둔 구멍가게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것이 공부였다. 아버지는 “가시내가 공부하면 여우밖에 될게 없다”며 화를 냈다. 어머니가 몰래 쌀 한 말을 팔아 보통학교에 넣어주었다. 일주일 안 돼서 아버지가 딸을 교실에서 끌어내고 책을 불태워 버렸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딸을 죽어라 패고 집에서 쫓아내 버렸다.
큰 집에 가 있다가 다시는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된 상태에서 9살부터 집에서 살림하고, 밭일도 하고, 목화밭을 매고, 물레질도 했다. 구멍가게에서 파는 고구마도 쪘다. 농사일을 할 때마다 밥을 지어 들로 날랐다. 그러던 1943년 가을 어느 날, 마을에 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는 50대 정도의 아저씨가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겠다 해서 따라나섰다. 18세였다. 그 남자와 일본인 순사가 그녀를 곧장 차에 태워 부산으로 데려갔다. 긴 머리를 자르고 치마저고리를 벗기고 원피스를 입혔다. 그리고 다른 네 명의 여인들과 함께 곧장 만주로 이송됐다. 이 여인이 매주 수요일 12시에 일본 대사관 앞에 나와, 일본이 자기를 강제로 연행해 가서 위안부로 삼았다며 사죄와 피해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2) 이상옥: 이 위안부의 아버지는 경상북도 달성군 달성면 면장이었다.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짓는 부농이기도 했다. 9살에 학교에 들어갔지만 오빠가 “계집애를 학교에 보내서 어디다 쓰느냐”며 학교를 못 가게하고, 책을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렸다. 그래도 학교에 가려 하자 죽인다고 협박했다. 옆집 언니가 학교에 다니는 게 너무 부러운 나머지 그해 어머니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울로 도망갔다. 고모가 학교를 보내주었지만 오빠가 고모에게 집요한 압력을 넣었다.
고모집을 나와 소리개라는 집에 들어갔다. 9명의 처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 의해 팔려왔다고 했다. 15세인 그녀가 가장 어렸다. 이 여인들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 보니, 시모노세키였다. 그들을 인솔한 군속이 열 명의 처녀들을 넘긴 곳은 바로 조선인 부부가 운영하는 군 유곽이었다. 그들은 이들 처녀들과는 아무 관계없이 돈을 주고받았다. 이 여인은 일본말을 한다는 것 때문에 일본 군병원에 일하면서 봉급도 받았다. 일본 군의관이 그녀를 가엽게 여겨 조선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그날 폭격을 맞아 허사가 됐다. 이 여인 역시 여성에 대한 가정 폭력으로 인해 유곽으로 떠밀린 게이스였다.
3) 이득남: 이 위안부는 1918년생이다. 그녀는 1939년부터 3년은 중국에서, 또 다른 3년은 수마트라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주정꾼이자 노름꾼으로 이유 없이 마구 때렸다. “집에 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17세에 시집을 가라 했지만 그녀는 이를 팔려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웃 친구와 함께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을 찾기 위해 기차를 타고 인천 방직공장으로 갔다. 그게 위안부로 가는 길이었다.
4) 김옥실: 이 위안부는 1926년 평양시내에서 10리 떨어진 촌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공부하려는 딸에게 가혹한 매질을 했다. 11세 때, 동네친구 하나가 한글도 가르쳐주고 노래도 배워준다는 데가 있다 해서 같이 가서 며칠 있다가 아버지에 들통이 났다. “에미나이 새끼가 글 배워서 어디에 쓰갔네, 연애편지질이나 하려구 그러나!” 매를 든 아버지가 무서워 할머니 뒤에 숨었지만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린다며 때렸다. 그 후 아버지가 보기 싫어 집을 나왔다. 하루는 아주머니들로부터 평양에서는 기생이 최고라는 말을 들었다. 고운 옷 입고, 고운 가마 타고 다닌다는 기생이 되고 싶어 기생집으로 가서 양녀가 됐다. 불과 일주일 만에 아버지에 들켰다. “이 에미나이가 조상 망신, 동네 망신은 다 시키고 돌아다닌다”며 매를 맞고 집으로 압송돼 왔다. 다시 양말 공장으로 뛰쳐나갔다. 거기에서 3년, 담배공장에서 4년 일하다가 드디어 인신매매단에 걸려들었다.
5) 배족간: 이 위안부는 1922년생이다. 이 여인은 자살까지도 기도했을 정도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광목공장에서 일하게 해주겠다는 동네 구장의 거짓말에 속아 집을 나간 것이 곧 중국행이 되었다. 중국의 여러 위안소들을 떠돌았다. 1946년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냉담했다. 어머니가 임종할 때 딸을 찾았지만 그녀는 가지 않았다.
6) 송신도: 이 위안부는 1922년생으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16세 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수많은 잡직들을 전전하다가 좋은 직장 구해주겠다는 이웃의 꼬임에 빠져 중국으로 갔다가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일본인 병사가 결혼하자고 하여 일본으로 동행했지만, 그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버렸다.
일제하 여성의 삶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제1권 2부(2006)에는 ‘식민지 하의 여성의 삶’이라는 주제가 있다. 여기에는 일본의 오사카산업대학 후지나가다케시 교수, 미 시카고대학 최경희 교수,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의 소정희교수, 이 3인의 글이 방대한 분량의 논문으로 실려 있다. 이 세 편의 논문을 보면 우리 정대협의 주장들이 얼마나 허황된 것들인가를 낱낱이 알 수 있다. 아울러 논문이 인용한 근거자료들을 보면 일본인들의 조사가 매우 많은 반면 한국인들의 조사가 매우 빈약하다. 국내학자들은 이 분야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고, 정대협은 객관성이 결여된 감정적 주장을 해왔기 때문에 오히려 이 분야를 연구하는 수많은 국제인들에게 망신스러운 결과만 초래했다는 게 이들 자료에 시사돼 있다.
식민통치의 마지막 10년(1935-45)은 조선의 산업혁명 시기였다. 농민들이 토지로부터 추방되고, 노동계급이 태동하고, 인구의 유동성이 증대하고, 도시 사회가 폭넓게 확산됨에 따라 여성계에서는 소위 신여성에 대한 선망이 확산됐던 그런 시기였다. 1917년 이광수의 소설 '무정'이 신문에 연재되었다. 신문명의 보급서였다. 서구의 신문명이 유입되고, 개화사상이 확산되고, 신청년과 신여성들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청춘남녀의 로망인 연애과정을 조각한 신소설이었다. 1935년 심훈의 상록수도 나왔다.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농촌을 계몽하기 위한 계몽서였다. 당시의 농촌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고루하고 원시적이었는가가 적나라하게 묘사됐다. 위안부 역시 이러한 개화기 시대의 산물이었다. 190명의 위안부를 조사했더니 88%에 해당하는 168명이 바로 탈농촌 시기인 1937-44년 사이에 위안부가 되었다. 도시를 흠모하는 일종의 골드러시가 한창이었던 시절에 가정을 뛰쳐나온 여식들이 인신매매단의 좋은 먹잇감이 된 것이다.
181명의 위안부를 조사한 결과 그중 4분의 1 이상이 이미 가족과 떨어져 식모, 공장노동자, 식당 및 기생집 접대부 등으로 일하고 있다가 위안부가 되었고, 그 중 66% 정도가 만주, 대만, 중국 등으로 이송되어 갔다. 위안부로 가는 경로는 가정을 이미 탈출해 있던 여성에게만 열려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가정에서 부모나 오빠들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있던 어린 여식들이 가정의 폭력을 피해 달아났다가 곧장 인신매매단의 덫에 걸려들기도 했고, 배움의 신기루를 찾아 넓은 세상으로 도망쳐 나온다는 것이 곧 인신매매단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당시 인신매매단의 앞잡이는 대부분 조선인들이었고, 군대 위안부를 경영하는 사람들 중에는 조선인들도 꽤 있었다.
위안부로 가는 길은 두 가지 경로였다. 가정-노동시장-위안부업소로 가는 과정이 있었고, 곧바로 가정-위안부업소로 가는 과정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촉진한 매개체가 인신매매단이었다. 인신매매단에 걸려들 수 있었던 환경은 곧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과 학대 그리고 배움에 대한 선망을 무조건 억압하는 무지몽매한 조선 가정의 여성비하 문화 때문이었다. 아래는 위안부를 모집하는 광고다. 강제로 체포해간 것이 아니라 광고를 내서 희망자들을 모집해 간 것이다. 위안부들 중에는 아버지에 의해 팔려온 이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심미자 할머니의 경우
심미자 할머니는 2004.11.29. 일본 대법원에서 진짜 ‘일본군위안부’로 판결 받은 분이다. 이 할머니를 위해 법정투쟁을 해준 변호사들은 한국인 변호사가 아니라 일본인 변호사들이었으며 ‘우스끼’상과 ‘히라다’상이라 한다. 1940년 황해도 모 학교 5학년 때였다. 그녀는 자수를 잘 놓았다 한다. 한국지도에 무궁화 꽃이 만발한 자수를 놓았더니 선생님이 교실 벽에 붙여놓았다. 이를 본 일본 선생이 일본 지도에 꽃을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심할머니는 일본 지도에 나팔꽃을 수놓아 주었다. 하루는 일본 순경이 잡아다 심문을 했다. 일본 꽃은 사꾸라 꽃인데 왜 하루살이 꽃인 나팔꽃을 놓았느냐는 것이 트집이었다. 일본 순사에게 강간을 당한 후 고진 고문을 당했다. 등과 다리, 손톱에 심한 고문을 당해 아직도 고문자국이 깊게 패여 있다며 보여주었다.
‘일본군위안부’가 되어 일본 땅에 갔는데, 마침 얼굴이 예쁘고 지적으로 생겨서 일본헌병대장 스즈끼의 애인이 됐다. 신임을 얻은 할머니는 유곽생활은 면하게 됐다. 스즈끼 헌병대장의 부인이라는 증명서까지 받았다. 당시 한용운과 김마리아가 찾아와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다. 엄마와 할머니한테 가는 게 소원이라 했더니 그러면 독립운동에 자금이 필요하니 자금을 대라고 했다한다. 심 할머니는 그게 정말인 줄 알고 일본군 장교들의 빨래를 해주고, 뜨개질도 하고, 하나마끼라는 허리에 차는 돈지갑을 만들어 20원씩에 팔아 자금을 댔다고 한다. 독립군이 와서 여행증명서를 해달라고 부탁하면 스즈끼 대장에게 친척이라고 말해 '자유통과' 효력을 가진 강력한 여행증을 만들어 주기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일본에는 나쁜 순사도 있지만 착한 헌병들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일본군 헌병대장의 애첩이라는 사실을 안 당대의 독립군 명사들은 심미자 할머니로부터 돈을 뜯어가기도 했고, 헌병대장이 발행하는 강력한 ‘자유통과’ 통행증을 구해가기도 했다. 심지자의 케이스 역시 문옥주, 문필기 케이스 등과 같이 정대협의 모략내용들과는 그 내용이 사뭇 다르다. 심미자는 정대협의 모략내용에 반기를 들어 위안부 모임의 초대회장 자리에서 물러났고, 정대협이 주도하는 위안부 모임에서도 영구 이탈했다.
2019.9.2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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