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지지 않는 임진왜란의 이면 (봄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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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봄맞이 작성일19-09-04 09:07 조회5,033회 댓글4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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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의병장이 남긴 '쇄미록'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왜군이 쳐들어 왔는데, 아랫 것들은 하나도 안 보이고 오히려 일본군을 환영해줘서 걱정이다."
아예 대놓고 일본군에 가담한 조선 백성들도 적지 않았으니 당시 선조는 윤두수(尹斗壽)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 왜군의 절반이 조선 백성이라고 하는데 그게 사실인가?" (선조실록 25년 5월4일)
선조는 “내부(內附·요동에 가서 붙는 것)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라고 거듭 만주로 도망갈 의사를 밝혔다.
임진왜란이 끝나갈 무렵
강항이 쓴 "간양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적선 6,7척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고, 각 배에는 조선인과 왜병이 반반씩 차지하고 있었다"
1607년, 1617년, 1624년에 조선통신사들은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을 데려오겠다는 취지로
'쇄환사(刷還使)'를 파견하다.
쇄환사는 6000명 가량을 조선땅으로 데리고 돌아왔으나,
이는 전체 포로 숫자의 10%도 안되는 수치였다.
조선인들 스스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던 것도 커다란 이유였다.
전쟁이 끝난지 10년, 20년이 지나
이미 일본 땅에서 정착해 살아가던 조선인들에게는 오히려 거부감만 들었던 것이다.
이런 자료는 우리 나라 문헌에도 많이 남아 있다.
1617년(광해군 7년)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이경직은
'부상록'이라는 문서를 통해 놀라움을 전했다.
"돌아가자고 하면 얼른 따라올 줄 알았던 사람들이 당최 나서려 하질 않았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 중에서 양반의 수는 10% 남짓으로 적었고
나머지는 조선으로 돌아가도 다시 천대받는 노비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이와 비슷한 기록은, 당시 일본 통신사로 간 강홍중의 '동사록'에서도 나온다.
"일본에 붙잡혀 온 사람들은 처음에는 맨손으로 왔지만, 십년 가까이 지내면서 재산을 축적하고 생활이 편해져서 좀처럼 돌아가려는 이들이 없었다."
임진왜란이 끝난후 조선의 통신사가 일본에가서 끌려간 도자기공들에게 조선으로 귀향을 설득하지만 대부분의 도공들은 귀환을 거부합니다.
조선사회는 소위 말하는 "사농공상" 이라고 하여 도자기 생산을 포함한 모든 공업 장인들을 하대하고 소위 권력을 잡고있던 세력만이 득세하던 사회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일본도 농공상의 계급체계와, 계급간 분리가 뚜렷하였으나 일본에서의 계급분리는 차별이 아닌 분업의 개념이였으며, 도자기 장인들도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 장인들은 막부의 지원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할수 있었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봐야 자신들을 하대하는 양반들을 위해 도자기를 만들어내야 했기 때문에 조선으로의 귀향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조선은 도자기 문화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일본은 아리타 자기를 포함한 자기 산업으로 서양국가와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일본의 도자기 마을 아리타에는 조선출신의 도공 이삼평(가나가에 산베이)을 기리는 이시바신사가 있습니다.
일본 아리타 마을 신사
또 도조(陶祖)고개를 오르면(5분 정도) 아리타야키 도조 이삼평의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도자기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아리타의 사가막부는 다른 막부를 무너뜨리는 힘을 얻었고 이삼평에게 가장큰 명예인 도조의 칭호를 부여하게 됩니다.
임진왜란이 종결(1598년)된 지 불과 29년 후
북방의 후금(後金)이 밀고내려오는 정묘호란(1627년)이 발생한다.
양반 사대부들이 의병을 모집했지만 농민들은 선뜻 가담하려들지 않았다.
인조는 결국 강화도로 도주해야 했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란을 가야 했다.
이것은 양반 사대부들의 군포 부과 대상 제외와 농민들에게만 공납을 요구하는 불합리한 조세제도의 결과가 맞물린 사태였다.
댓글목록
샤론의장미님의 댓글
샤론의장미 작성일
그랬군요.
학교에서 국사를 배웠지만 위와 같은 내용은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조선은 선량한 피해자이고, 일본은 무자비한 가해자라는 것을 실제보다 부각하여 학생들에게 심어주다 보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반일감정이라는 것이 국민감정으로 자리잡게 되었나 봅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하는말 이라면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따질 필요도 없이 입에 게거품 무는 습성이 생기지 않았나 쉽습니다.
부끄럽지만 우리민족은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줄도 모르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어리석은 종족이 맞는 것 같습니다.
똑같은 외침을 930여회나 반복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콩미님의 댓글
콩미 작성일좋은 내용입니다. 페북에 공유합니다. 이런 역사적 진실글. 많이 많이 올려주세요~
newyorker님의 댓글
newyorker 작성일
처음 보는 좋은 자료입니다.
덕분에 역사의 진실에 많이 눈을 뜨게 되네요.
왜군의 절반이 조선인이었다!?
고사연님의 댓글
고사연 작성일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 때문에.....좋은 물건, 무기 등을 만드는 뛰어난 전통기술들이 있었지만 가혹한 착취로 기술을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하지 않을 정도로....기술이 좋으면 좋을수록 착취를 많이 당하게 되고...이러니 전통기술 맥이 다 끊겨....당시 시대적으로는 산업혁명을 해서 부국강병을 해야 하는데(국가의 永續性을 위해 어느 시대나 항상 부국강병 해야 하지만. 즉 정치인이 정치하는 목적이 바로 부국강병하는 것)....조선후기에 실학을 바탕으로 산업혁명을 했으면 안 망했을 텐데....산업이라는 게 생겨날 수도 없어. 나라가 망할 수밖에. 탐관오리 세금 매기는 구조가 (원래 세법대로의 세금 + 관리 지 삥땅 칠 거 + 단계별로 상납할 거).....대략 이런 식이겠죠.....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지만 도망가자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질러 태워버려(바로 이 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