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대통령의 업적, 박정희 대통령에 못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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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2-11-04 23:09 조회3,71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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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의 업적, 박정희 대통령에 못지 않다.
전두환 리더십은 시스템 리더십
1931년 1월 18일~2021년 11월 23일, 전두환 대통령은, 90년 동안 이 땅을 밟고 갔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는가? 우리 사회에 비친 그는 쿠데타를 해서 정권을 잡은 사람, 철권통치자,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악마였다. 과연 그러한가? 그는 제11대 및 12대 대통령을 했다. 제11대 대통령은 1980년 8월 27일~1981년 2월 24일, 최규하 대통령의 잔여임기를 채우는 대통령이었다. 제12대 대통령은 유신헌법에 의해 선출되었고, 재임기간은 1981년 2월 25일부터 1988년 2월 24일까지였다.
레이건-전두환-나카소네 시대 열어
1981년 1월 20일, 레이건이 취임했다. 11대 대통령 집권 4개월이 갓 지난 시기였다. 하지만 전두환은 1979년 말부터 9개월 이상에 걸쳐 보안사령부, 중앙정보부, 국보위를 지휘하면서 최규하 대통령을 보필하는 과정을 통해 국가경영에 대한 비전과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런 상태였기에 그는 레이건이 당선되자 그를 빨리 만나고 싶어 했다. 레이건이 취임하면 인의 장막에 싸일 것이라는 생각에, 레이건이 당선자 신분에 있을 때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와 친했던 베시 전 초대 한미연합군 사령관을 통해 레이건 측근 ‘알렌’을 움직이기로 했다. 그 결과 레이건은 그가 취임하자마자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자고 했다.
대공산권 매파인 레이건은 카터가 어지럽혀 놓은 동맹관계를 복원시키는 일을 우선시했다. 동맹의 아이콘은 단연 한국이었다. 수많은 미국의 동맹국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가 한국이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시도와 레이건의 동맹 정책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에 전두환은 1월 28일, 비행기에 올랐고, 2월 2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항간에는 김대중을 사형시키지 않는 대가로 첫 번째 정상회담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낭설이다.
무임승차하는 일본에 안보세금 물려
1981년 1월 28일, 전두환은 공식 수행원 11명, 비공식 수행원 15명을 태우고 미국으로 떠났다. 2월 2일 오전, 60분 동안 정상회담을 했다. 그는 레이건에게 미국에 온 목적이 두 가지라고 말문을 열었다. 정상회담의 화제를 선점한 것이다. 시작 단계에서부터 궁금해 하면서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전두환이 말문을 열었다. “첫째 목적은 미합중국 대통령 당선을 축하드리기 위한 것이고 두 번째 목적은 레이건 대통령 각하를 도와드리려는 것입니다.”
건국 이래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을 만나면 도와달라고만 했지 도와준다고 한 적은 없었다. 한국 대통령이 미국을 도와주다니? 모두가 놀라 귀를 세웠다. 전두환이 레이건에 질문을 했다. “레이건 대통령 각하, 죄송하지만 LA의 연간 GNP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레이건 측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LA의 연간 GNP는 800억 달러입니다. 각하, 혹시 한국의 GNP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레이건 진영에서는 이를 아는 사람이 또 없었다. “각하, 한국의 연간 GNP는 600억 달러입니다. 그 중 6%를 국방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 회담장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나라의 GNP가 그리 작아?
전두환의 말이 이어졌다 “각하 일본의 GNP는 1조1,600억 달러입니다. 한국의 20배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국방비를 0.09%만 사용합니다. 한국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와의 전쟁에서 최일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 덕을 일본이 톡톡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불공정합니다. 한국은 지금 경제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한국이 쓰러지면 세계는 공산화됩니다. 도와주십시오. 저는 미국에 손을 벌리는 것이 아닙니다. 각하께서 일본의 무임승차 행위를 일깨워 한국에 안보차관을 넉넉히 주라 하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돈으로 미국으로부터 전투기와 탱크를 살 것입니다. 전에는 일본에서 경제차관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안보차관입니다.” 레이건을 포함해 모두가 눈이 동그래지면서 전두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일본의 돈으로 미국 장비를 사겠다하니, 이 얼마나 신선한 아이디어인가. 레이건이 물었다. “얼마면 되겠습니까?”, “각하, 일단 일본에 각하의 방침만 전해주십시오. 그러면 액수는 실무선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일본도, 우리 각료도 수군수군
우리 측 수행원들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엉뚱한 말을 꺼냈다며 수군댔다. 엉뚱해도 너무 엉뚱하다는 것이다. 정상회담을 한 지 2개월여인 1981년 4월 22일, 전두환은 외무부를 통해 일본 정부에 100억 달러를 내라는 청구서를 보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일본은 한국 각료들보다 더 놀랬다. 무례하고 엉뚱한 요구였다. 일본 외무성은 “혹시 실수로 0을 하나 더 붙인 것 아니냐?” 질문해 왔다. 이에 전두환은 0이 두 개라고 확실히 전하라 했다. 스즈키 내각은 미친 소리라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전두환 주변에서도 수군대기만 했다.
1965년엔 8억 달러, 1983년엔 40억 달러
1982년 1월 27일 나카소네가 수상에 취임했다. 나카소네는 관례에 따라 레이건 대통령을 예방했다. 레이건이 일본의 안보 무임승차는 비도덕적이며 한국에 방위 차관을 제공하라고 말했다. 이 레이건의 지적에 합리주의자인 나카소네가 수치심을 느꼈다. 1983년 1월 11일, 나카소네가 다급한 심정으로 한국을 방문해 2차례에 걸쳐 전두환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그동안 일본은 사실 한국에 미안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제가 최소한 60억 달러는 마련해 보려고 백방 노력했는데, 60억을 마련하려면 제 위치가 흔들립니다. 제가 최대한으로 마련한 것이 40억 달러이니, 수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엄청난 횡재였다. 1965년 박정희가 일본으로부터 얻어낸 배상액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3억 달러, 총 8억 달러였다. 이로부터 17년 후인 1983년 1월, 전두환은 그 5배나 되는 40억 달러의 차관을 얻어냈다. 이제까지의 차관은 ‘경제차관’이었지만, 전두환은 ‘안보차관’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이다. 40억 달러면 당시화폐로 5조 원이었다. 시궁창이었던 한강을 오늘날의 한강으로 가꾸는 데 그는 1조를 사용했다. 이 엄청난 차관이 있었기에 전두환은 그가 하고 싶어 하는 봉사를 대한민국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이런 차관이 제공됐다면 어떠했을까?
40억 달러 얻어내면서 최고급 환대받아
사실, 1980년을 전후하여 미국의 전문 국방저널과 국제정치 저널에는 ‘일본의 ’무임승차‘(Free Ride) 문제가 뜨겁게 제기되었다. 여기에 더해 일본은 석유 수송 등 무역항로에 대한 안전까지도 미국에 의존했다. 지금까지도 해적을 제압하는 미국의 비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1980년을 전후해, 미국의 안보 전문가들은 일본이 일본 땅으로부터 1,000해리까지의 해상교통로를 보호해야 한다고 난리들을 쳤다. 전두환의 100억 달러 차관 요구는 생뚱맞은 요구가 아니라 이러한 국제정세의 흐름에 타이밍 있게 올라탄 재치 있는 발상이었다. 이 엄청난 차관을 졸지에 얻어내고도 전두환은 일본 천황으로부터 엄청난 예우를 받았다. 일본의 신, 천황이 고개 숙여 일본의 ’사과 역사‘상 처음으로 사과 수위가 가장 높은 [유감]이라는 표현을 한 것이다. 이런 역사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나카소네는 전두환보다 13살 연상이다. 그런데 전두환과 나카소네는 의기가 투합하여 친형제와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한 감정으로 우정을 쌓았다. 우정이 있었기에 나카소네는 전두환 대통령이 임기를 마친 후 또 다시 10일 가까이 초대해 현역 대통령과 똑같은 예우를 갖추며 우정을 나누었다. 그렇게 사이좋게 지내는 동안 전두환은 천안에 ‘독립기념관’을 건설했다. 정상끼리 친한 것은 친한 것이고, 역사는 역사였다. 아래는 일본 천황 주최 만찬에서 히로히토가 읽은 만찬사의 일부다.
히로히토 천황 만찬사
1984.9.6 도쿄
이번에 대한민국 대통령 각하께서 國務多端(국무다단)하심에도 불구하고 영부인과 함께 국빈으로서 우리나라를 방문해 주신 데 대해 본인은 충심으로 환영의 뜻을 표합니다. 대통령 각하의 내방은 귀국 원수로서는 최초의 공식방일이며 양국의 관계사상 획기적인 일로서, 양국의 우호증진을 위해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 . . 회고해 보면 귀국과 우리나라와는 一衣帶水(일의대수: 한 줄기 좁은 냇물)의 이웃나라로, 그간에는 옛날부터 여러 분야에 있어서 밀접한 교류가 행해져 왔습니다. . .
우리나라는 귀국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예를 들면, 기원 6,7세기에 우리나라가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을 당시에는 귀국의 사람들이 많이 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학문, 문화, 기술 등을 가르쳤다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오랜 역사에 걸쳐 양국은 깊은 이웃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계에도 불구하고 금세기의 한 시기에 있어서 양국 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진실로 유감스러운 일로서,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 얼마 전의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귀국 선수들의 활약은 귀국의 國運(국운)이 융성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충심으로 축하를 드리는 바입니다. 4년 후에는 서울에서 평화의 祭典(제전)인 올림픽을 개최하시는 것으로 듣고 있읍니다만, 그 성공을 기원합니다. . .
전두환 대통령의 업적 요약
42%의 물가를 2.3%로 낮췄다. 천재적 발상과 종교적 신념이었다. 개미허리 중산층을 맹꽁이배처럼 불렸다. 중소기업 육성은 그의 종교였다. 기술자들을 합숙시켜가면서 한국은 불가능하다는 전자식 교환기를 개발하여 통신 일등국을 만들었다. 레이건보다 10년 앞서 IT, 반도체, 컴퓨터산업을 진두지휘했다.
1980년에 88올림픽 유치권을 따냈다. 그의 참모들조차 IMF직전인 상황에서 무슨 올림픽을 개최하느냐며 걱정들을 했다. 하지만 사상 처음으로 동서가 다 참가하는 완전한 올림픽을 치렀다. 기업을 국제시장으로 내몰아 체질을 강화시켰다. TV시장, 핸드폰시장, 반도체 시장을 우리가 장악한 건 우연이 아니다. 야간통행금지도 없앴다. 교복과 두발도 자유화 심지어는 자유를 억압한다며 연좌제도 없앴다. 원전 연료를 국산화하고 한국형 원자로를 개발한 것은 무용담의 대상이었다.
코끼리 밥솥을 능가하는 밥솥을 만들었고, 그가 개발시킨 손톱깎이는 당시 세계시장의 50%를 점령했다. 자상한 리더였던 것이다. 예술의 전당, 국립미술관 등 현존하는 문화공간 모두는 그가 만들었다. 박정희는 문명국을 만들었고, 전두환은 문화국을 만들었다. 그가 없었으면 박정희도 없었고, 박정희가 없었으면 전두환도 없었다.
전두환은 엘리트들과 토의를 하면서 토의가 뽑아낸 지혜로 국가를 지휘했다. 미국육사 교과서로 공부한 최초의 엘리트, 그는 독서와 학습과 사색의 화신이었다. 이 세 가지가 있었기에 그는 특출했다. 전두환 이후에는 그 넓어졌던 자유공간이 축소-봉쇄돼 왔다. 그는 진정 자유화의 아버지, 민주화의 아버지였다.
2022.11.4.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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