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메시지(26)] 전두환 리더십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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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3-08 21:15 조회4,15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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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메시지(26)] 전두환 리더십 포인트
1. 엘리트 경영
해방 후 지금까지의 국가 경영에서 엘리트 경영을 한 대통령은 오로지 전두환 대통령 한 사람 뿐이다. 빨갱이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다 포퓰리즘, 대중영합주의 퍼주기식 독재를 했다. 독재라는 것은 빨갱이를 빨갱이라고 말하면 주사파 판사들을 동원해 감옥에 넣는 것을 말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스스로는 세계 지도자들 가운데 최고의 엘리트였지만 인재가 원체 없다보니 원맨플레이식 경영을 했다. 빨갱이 사상을 가진 국민이 80%였던 시기에 그가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은 기적 그 자체다.
그가 미국을 귀찮게 하면서 6.25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한미 방위조약을 체결한 힘은 그의 천재적 지혜와 외교력이었다. 김일성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그 역시 미국의 힘을 천재적으로 이용해 항일과 독립운동을 지휘해 왔다는 공적을 그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기에 그는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그 결과, 건국 초기단계부터 이 나라에는 반일정서가 확산-고착돼 왔다. 하지만 그가 1948.8.15. 건국하면서 미국의 손을 통해 받은 일본의 귀속재산 23억 달러는 당시 국부의 80%를 차지했다. 이는 아이러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은 건국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은 우리가 불구대천의 원수라고 여겼던 일본의 능력과 자산을 십분 활용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고, 우리보다 3배나 더 잘 살았던 북한을 멀리 따돌릴 만큼 남북 간의 위상을 역전시키고, 새마을정신, 새마을운동을 통해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강은 단지 서울의 대명사로 사용됐을 뿐이다.
전두환 대통령의 경영스타일은 엘리트에 의한 경영이고, 토의를 통해 지혜를 짜내게 하며, 모든 사업을 프로젝트화 하여 현장 합숙을 통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온 것들을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이런 경영스타일은 전무후무하다. 대중영합주의로 마구 퍼주는 자들에게 엘리트는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2. 일본에 방위세금 40억달러 물려
이 부분은 차라리 신화라 해야 할 엄청난 업적이요 쾌거다. 1980년 2월 2일, 레이건 대통령과의 대화는 모든 세계적 리더들 사이에 이루어졌던 그 어느 대화보다도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한 것이다. 이 대화내용은 [전두환 리더십] 제22쪽에 정리돼 있다. 그는 일본에 100억 달러를 통 크게 제안했지만 나카스네 수상은 전두환 대통령에 머리를 숙이며 40억달러가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최고의 금액이니 받아달라고 앙청했다. 전대통령은 이 돈을 받고도 1984년 9월 6일, 히로히토 천황으로부터 사상 전무후무한 최고의 사과, “진실로 유감”이라는 표현을 접수했다.
3. 한강을 예술의 앙상블로
전두환 대통령은 40억 달러 중 10억 달러를 털어 오물과 악취로 범벅돼 있던 한강을 오늘의 아름답고 기능성 있는 한강으로 개조했다. 전두환은 한강 양안에 55km어간에 트럭이 다니고도 남을 거대한 터널을 설치하고, 모든 오폐수를 정화시키는 시설을 건설했다. 210만평의 고수부지는 앞으로도 엄청난 문화시설을 조성할 수 있는 모태가 되어 있다.
4. 44.2% 인플레를 2%로 낮춰
박정희 대통령 말기, 외국은행들은 한강의 기적을 믿고, 서로 한국에 돈을 꾸어주겠다고 했다. 업체들은 서로 자존심 경쟁, 시기경쟁을 하면서 중복투자를 했다. 그러다보니 업체마다 가동률이 10%대로 떨어졌다. 물가는 44.2%로 올랐다. 하룻밤 자고 나면 물건값이 오르니 돈 있는 사람들은 사재기를 했다. 사재기를 하니 물가는 더욱 올랐다. 여기에서 공무원 봉급, 사원들의 봉들을 동결하는 것은 차라리 죽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두환은 모든 봉급을 동결했다. 100명의 공무원이 하던 일을 70명이 일하도록 구조조정을 해서 공공요금을 동결했다. 과잉투자한 기업들에 대해서도 과감한 구조조정을 했다. 물가를 주도하는 쌀에 대해서는 심리전 쇼까지 했다. 인플레가 심하니 저축이 제로였다. 저축은 없고 투자는 해야 하니 외채가 늘어났다. 미국이 개발한 예산제도를 도입해 정부예산을 대폭 줄였다. 사재기가 사라지면서 물가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허리띠를 조여매는 인기 없는 긴축을 단행함으로서 1986년에는 물가를 2.3%로 낮췄다. 이는 그가 2성 장군으로 보안사령관을 하면서부터 김재익을 비롯한 경제학자와 기업인들을 가정교사로 불러 경제공부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5. 국산화 애용이라는 국수주의 청산
국산품 애용이 애국인 시대가 있었다. 박정희 시대였다. 전두환은 이를 폐기했다. 남의 물건 사지 않으려면 우리 물건도 팔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무역장벽을 허물어 외국제품, 싸고 좋은 제품이 마구 들어오게 했다. 기업들이 죽는다 아우성을 쳐도, 국제경쟁에서 살아남는 기업만 살게 했다. 1991년 세계적으로 적용된 WTO를 미리 시행한 것이다. 예방주사를 미리 맞은 기업들은 개방의 쓰나미가 엄습한 1991년의 세계적 충격에도 끄떡없었다.
6. 반도체, 전자식교환기, 컴퓨터, TV, 핸드폰 미국보다 6년 먼저 IT강국으로 발진
1987년 미국에서 팔리는 모든 자동차에 대한 고객선호도 조사에서 일본차가 1,2,3등을 차지했다. 미국 차는 7위였다. 자동차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미국경제가 일본, 서독에 이어 3류 경제로 퇴락하고 있다고 야단들을 했다. 이에 레이건 대통령이 전국의 제갈공명들을 불러 모아 블루리본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미국의 생산기반이 일본을 따라가기 어렵다고 진단한 후 IT, BT(정보기술, 생명기술)로 방향을 선회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여기에서부터 미국경제가 활로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전두환 대통령은 이를 1982년부터 본격화했다. 각 기업, 정부부처의 과학기술자들을 합숙시켜가면서 미국보다 6년 먼저 IT강국을 향해 진두지휘를 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오늘날의 IT강국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7. 원자력 발전소
1948년 5월 14일 밤, 북한이 남한으로 공급하던 전기를 갑자기 중단했다. 대한민국이 겪은 최초의 에너지 쇼크였다. 미 군정이 에디슨 사의 발전함을 들여다 주요 처에만 공급을 했다. 대책을 묻는 이승만 대통령에 에디슨 사 사장 시슬러가 원자력 발전이라는 존재를 알려주었다. 이에 1958년 연구용 원자로가 도입됐다. 미국은 도입비용의 50%를 부담해주면서 100여명의 유학생을 교육시켜 주었다.
김신조의 계절 1968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연구단계에 있던 원자로를 직수입하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고리1~4호기, 월성1호기(중수로)가 속속 턴키베이스로 도입됐다. 아울러 박정희대통령은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만들고 싶어 하는 의지를 노골화했고 이는 미국의 경각심을 불러왔다.
전두환 대통령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세우면서 핵연료의 국산화와 원자로의 국산화를 시도했다. 한국 원자로계의 독보적 신화로 자리잡은 한필순 박사를 청와대로 불러 독자적인 한국형 원자로를 설계하라고 압박했다. 10년이 가도 어려운 과업이었다. 10년 이내에는 불가능하다는 한필순 박사에게 전두환은 한필순 박사가 박태준이 되든지, 박태준을 만들어내든지, 5년 이내에 개발하라고 압박했다. 역시 하면 되었다. 이병령 박사가 “제가 박태준이 되겠습니다”하고 나타났다. 그 결과 영광3~4호기가 한국형 표준원전의 시효로 건설됐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건설적인 마인드를 가진 대통령을 단 한명도 구경하지 못했다.
8. 야간 통행금지 해제
야간 통행금지, 밤 12시만 되면 자유가 무조건 차단되던 시기. 국민들은 그것이 안보목적과 범죄예방 목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전두환은 자유분방한 서구의 모델에 매력을 느껴 그야말로 엉뚱한 이단아가 되었다. 또한 국제 올림픽을 유치한 나라에서 야간통금이 있다는 것도 그림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통금 해제에 가장 놀란 사람들은 그의 참모들이었다.
9. 사상 처음으로 보이콧 없는 최대 규모의 올림픽
1979년은 IMF 문턱에 도달해 있었다. 물가가 44.2%, 감히 국제 올림픽을 유치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할 어려운 시기였다. 바로 이 1980년, 전두환은 1988년 열리는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겠다고 선언했다. 주위에서는 돌아도 한참 돌은 돈키호테라고 생각했다. 이래서 석두라는 말이 새어나와 전두환에 대한 왜곡과 음해의 대명사가 되었다. 1981년 9월 30일, 서독의 작은 도시 바덴바덴에서 사마란치 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서울 52, 나고야 27. 서울이 1988년 국제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음을 선포했다.
똥오줌의 강변, 끝 모르게 펼쳐진 수박 밭에 지금의 한강이 아름답게 태어나고 34개의 올림픽 경기장과 아파트촌이 세워지고, 올림픽공원이 들어섰다. 1982년 3월 사상 처음으로 체육부가 신설되고, 태릉에 선수촌이 들어섰다. 1972년 독일 뮌헨이 유치한 제20차 올림픽은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들이 이스라엘 대표자, 선수들을 인질로 삼아 피를 흘리게 했고,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21차 올림픽은 인종차별 문제가 불거져 아프리카 26개국이 불참했다. 1980년 제22차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미국과 서방국가들이 불참했고, 1984년 제23차 LA 올림픽에는 소련 등 공산국가들이 보이콧했다.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 동안 열린 제24차 서울올림픽에는 보이콧이 전혀 없이 세계의 모든 나라가 다 참가했다. 전두환의 외교력도 활발했지만 시대의 추세가 한 몫을 하였다. 올림픽으로 인해 많은 달러가 유입됐지만 그 달러는 빙산의 일각, 한국이라는 브랜드가치가 어마어마하게 치솟았다. 북괴를 이를 훼방하기 위해 금강산댐으로 서울을 수몰시키려 했고, 김현희로 하여금 KAL기를 폭발시켜,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서울에 가는 것이 위험하다는 공포감을 갖게 하려 했다. 그리고 끈질기게 사마란치 위원장을 통해 올림픽을 방해했다.
10. 평화의 댐 건설
1986년 4월 8일, 북괴는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200억 톤 저수량을 갖는 금강산댐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올림픽을 불과 2년여 남겨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큰 댐은 소양강댐, 29억 톤의 저수량이다. 200억 톤이면 거의 7배에 가까운 괴물 저수량이다. MBC등 당시 모든 언론들은 금강산댐을 열면 63빌딩의 3분의 2가 물에 잠긴다며 온 국민을 경악시켰다. 금강산댐은 1986년 4월부터 건설되기 시작했고, 평화의 댐은 같은 해 10월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86년 12월 모든 매체들이 국민성금을 독려했다. 평화의 댐이 건설되자 1987년 5월, 금강산댐 공사가 돌연 중지됐다. 올림픽을 저지시키기 위해 시작한 수공협박이 사라진 것이다.
1993년 9월, 김영삼과 감사원장 이회창이 평화의 댐을 국민을 사기 친 댐이라며 맹공격을 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졸지에 안보를 정권유지에 악용한 파렴치한 사기꾼으로 몰렸다. “정권안보용 댐”, “독재정권 유지를 위한 전시용 댐”, “국민을 기만한 사기극”…
그 후 10년, 2002년 5월 7일, 인공위성 사진에 금강산댐에 커다란 함몰 부분이 촬영됐다. 당시 금강산댐 저수량은 26억 톤이었다. 여기에 더 보태 북괴는 댐을 증축하기 시작했다. 김대중이 북에 통사정을 했지만 마이동풍이었다. 금강산댐의 둑은 점점 더 높아만 갔다. 이에 김대중은 다급하게 평화의 댐을 증축하기 시작했다.
2002년 9월 착공하여 2004년 12월까지 총 공사비 2,000억원을 투입해 노무현 시절인 2005년 5월, 저수량 26.3억 톤의 현 평화의 댐으로 증축했다. 전두환 때리기에 앞장섰던 조선일보는 “15년 동안 천덕꾸러기로 매도당했던 평화의 댐의 중요성 다시 부각”이라는 기사를 냈다. 이 엄청난 2단계 공사를 하면서도 김대중과 노무현은 쉬쉬 도둑공사를 했다. 그런데 지금은 평화의 댐을 김대중이 건설한 것으로 치장이 돼 있고, 전두환의 이름은 댐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11.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로 넓은 자유공간 제공
중고생들에 틀에 박힌 교복을 입지 않고 자유로운 복장을 입도록 했다. 교복이 주는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시킨 것이다. 연좌제까지도 폐지했다. 이는 국가의 안녕보다 자유를 상위의 가치로 평가한 실수였다고 생각한다. 해외유학의 자유, 해외송금의 자유, 해외 이주의 자유를 허용했고 격려까지 했다
12. 문명국에서 문화국으로
‘잘 살아보세’가 소원이었던 1960년대, 문화, 예술, 환경에 신경을 쓸 정신적, 물질적 여유가 없었다. IMF 선상에 있던 경제를 전두환 대통령은 경제 10위권으로 도약시키고 올림픽을 치룬 국가위상에 걸맞게 문화와 예술과 환경을 중시하는 분위기를 선도했다. 국립극장과 세종문화회관이 문화예술 공간의 전부였던 시대에, 예술의전당, 국립미술관, 국립중앙도서관, 국사편찬위원회, 학술원 등 국제급 고급공간을 마련하고 모든 지방자치단체로 하여금 지역문화를 적극 창달할 수 있도록 사회분위기를 이끌어갔다.
반면 김영삼은 문화재라 할 수 있는 총독부 건물을 폭파하고, 남산 외인아파트 두 채를 증발시켜 버린 후 아무것도 건설한 게 없다. 김대중은 김대중 도서관, 김대중 컨벤션센터, 아시아 문화궁전 등, 자기 자신을 신격화 하는 공간만 확충했다.
13. 평화로운 정권이양, 5년 단임제 전통 세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풍토의 전통을 세운 것이다. 당시까지는 이승만 대통령이 12년 장기집권을 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18년의 장기집권을 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단기 집권으로 정권을 순순히 내려놓을 것이라 믿는 국민은 극 소수였다. 하지만 그는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후계자를 골라 임기 중 훈련시켜 정권이양을 평화롭게 했다. 하지만 그가 고른 노태우는 생각이 모자라고 비열한 열등의식의 소유자였다. 결국 전두환 대통령은 믿는 도끼에 발이 찍혀 비운의 삶을 마감했다.
2023.2.25.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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