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 (51)] 한국군, 항재 전장이냐 항재 골프장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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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4-03 17:53 조회7,24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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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메시지 (51)] 한국군, 항재 전장이냐 항재 골프장이냐
연평도 포사격 사건
연평도가 북괴의 포사격을 받고 보복 다운 보복을 하지 못했다. “적이 쏘는데 어찌 막을 도리가 있느냐?” 아마 모든 장교, 장군들이 이렇게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번 포격은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막지 못한 이유는 장교들과 장군들이 ‘항재전장 의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항재전장’, 무슨 일을 하든 어느 곳에 있든 군인은 늘 전쟁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대응책을 상상하면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교, 장군들에 당시 연평도에 항재전장의 의식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면 155미리 자주포가 북괴의 대포를 맞지 않았다는 뜻이다.
연평도에는 북괴의 관측반이 있었다.
155미리 해병대 자주포는 북괴가 보기에 산의 후사면(후면)에 있었다. 첫발에 명중될 수가 없었다. 첫발이 빗나가면, 한국군의 155미리 자주포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북괴의 관측장교(간첩)가 좌로 200, 줄이기 100, 이런 식으로 북괴 포반에 무전을 해야 한다. 이렇게 3~4번 해야 명중탄이 날아갈 수 있다. 당시 신문을 보아도 첫탄은 바다에 떨어졌다. 그리고 포탄이 이리저리 날아가더니 명중탄이 여러 발 집중됐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효력사’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즉시 ‘시스템 클럽’에 빨리 연평도를 봉쇄하고 북괴 관측반 요원을 체포하라는 글을 썼다. 맞은 건 이미 맞은 것이고, 연평도에 스며든 포사격 유도 간첩을 잡으라는 것이었다. 이 글이 나가자 인천지역 경찰에서 나에게 협박전화가 왔다. 혹세무민죄로 다스리겠다 했다. 경찰도 간첩이었다. 그러면 예방은 할 수 있었을까?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연평도는 작은 섬이다. 동네에는 동네 마이크가 있다. 첫발이 떨어지고 3~4회의 조정 포탄이 떨어지고, 명중탄이 떨어지려면 적어도 5~10분이 소요된다. 첫 탄이 떨어질 때 마이크를 통해 “주민 여러분 지금 여기에는 포탄을 목표에 명중시키기 위한 북괴 간첩이 와 있습니다. 수상한 사람을 신고해 주십시오.” 하고 방송을 하면, 이 방송을 들은 북괴의 관측반은 살기 위해 도망을 치고, 포사격을 유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순발력을 가진 장교가 없다는 것은, 장교들이 평시에 전쟁 시나리오에 대해 상상하는 생활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평도에서 당시 해병 장교들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후방 지휘부 장군들 마음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골프장이 있었을까, 룸싸롱이 있었을까.
늘 전쟁 시나리오를 가정하는 장군은 백전백승한다.
지금 한국군 장군들에 물어보면 아마 100%의 장군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전쟁의 승패는 싸워봐야 알 수 있다.” 이런 장교, 이런 장군이 병사들의 목숨을 값없이 날려버린다. 베트남에서 전과가 가장 많은 중대는 아마도 투이호아 지역 백마 28연대 3중대일 것이다. 3중대에서 가장 많은 전과를 올린 소대가 1소대장이었다. 1소대장은 전투를 앞두면 늘 병사들을 인솔하여 모래밭으로 갔다. 거기에 작전지역의 특징들을 표시해 놓고, 그 지역에서 베트콩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병사들에게 아이디어를 내라고 한다. 각개의 가정이 도출되면, “우리는 그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고 묻는다. 병사들은 상상력을 동원하여 아이디어를 낸다. 이런 과정에서 순발력이 길러지고, 병사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는 방법을 학습하게 된다. 이것이 이기는 방법이다. 이 1소대장이 하는 일은 다른 소대는 하지 않고, 병사들에게 푹 쉬어두라며 잠을 재웠다.
베트남 전에서 나는 이렇게 했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20고지, 베트콩으로부터 박격포가 날아왔다. 병사들의 눈이 공포 그 자체였다. 내가 부임한 첫날 당한 공격이었다. 병사들은 다른 기지에 있다가 많은 포사격을 받고 새로운 기지로 왔기 때문에 포사격에 대한 공포가 대단했다. 벙커도 없고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3면이 다 밀림의 산인데 포가 어디에서 날아오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내일 또 다시 공격이 있을 수도 있었다. 높은 분들은 운에 맡길 수밖에 없으니 빨리 벙커를 지으라고만 했다.
나는 생각했다. “문제 있는 곳엔 반드시 해결책이 있다.”라고, 그리고 이내 무릎을 쳤다. 특히 야간에 작열하는 포탄이 주는 공포는 상당하다. 나는 이점을 생각해냈다. 박격포 사거리는 최대가 4km, 나는 1~4km 원을 지도에 그려 사방 2km의 바둑판 격자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바둑판 격자의 교차점마다 동시에 포탄을 날리도록 했다. 바둑판 격자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도 사방 1km 안에서 폭탄이 작열하면 정신병에 걸릴 정도로 혼비백산할 것이다. 다음날 나는 낮에도 그 격자에 포탄을 날리고 밤에는 격자를 조금씩 이동시키면서 사격을 하게 했다. 적이 사격 시간을 예측하지 못하게 아무 때나 쏘았다. 그토록 극성맞던 베트콩의 박격포가 내 재임 기간인 12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때는 내가 29세로 임시 대위를 달고 포대장(포병 중대장)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 이전 나는 25세의 신참 중위로 같은 지역 포병(30포병) 상황실 사격지휘를 했었다. ‘사격 지휘 장교’라는 보직을 맡았던 중위 시절이었다.
베트콩 문서, 한국군 포에는 눈이 달렸다.
날마다 미군으로부터 베트콩 소재와 교전 상황이 정보 계통으로 하달된다. 비행기가 날면서 암모니아 가스가 측정된 곳들도 하달된다. 이전의 장교들은 ‘정보 상황일지’에 기록만 하고 덮어버렸다. 나는 시간대별 상황판을 만들어 A급, B급, C급 정보를 컬러로 지도에 점을 찍으라 했다. 10일 동안만 찍어도 시간대별 베트콩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래서 그 시간대에 베트콩이 있는 곳에 포를 날렸다. 훗날 베트콩 문서에는 “한국군 포에는 눈이 달렸다”라는 첩보가 실려 있었다. 전쟁을 해야 하는 장교들은 언제나 전쟁을 상상하고, 가정하고, 대응책을 상상하는 것을 습관으로 해야 한다.
전략, 전술 개발을 업으로 하는 두뇌, 왜 없나?
우리는 늘 비정규전을 전쟁수단으로 하는 북괴에 마주하고 있다. 세월호를 북괴가 저지른 것이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한국군과 국정원은 “그럴 수도 있겠다.” 이렇게 덤벼들어야 한다. 사실이 아니라도 좋다. 북괴가 저질렀다면 어떤 식으로 했을 것이냐?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마치 백마 28연대 3중대 1소대장이 부하들과 함께했던 것처럼! 학습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얼마나 훌륭한 가설이고 훌륭한 표본인가? 한심하다. 학습이 없는 대한민국이!
2023.3.29.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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