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89)] 지만원 족적[5] 2. 장경순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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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6-03 01:56 조회11,17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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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메시지(89)] 지만원 족적[5]
2. 장경순과 나
앰배서더 호텔로 찾아온 장경순
광주로 끌려가기 8개월 전인 2002년 4월 5일, 나는 장충동 앰배서더 호텔에서 라이온스클럽이 초청한 조찬 강의를 마치고 나왔다. 강의실 문을 나서자 정준이라는 사람이 다가왔다. 1층 커피숍에 장경순 의장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시니 잠시 시간을 내 달라고 했다. 나는 장경순 의장이라는 분이 누구냐고 물었다. 이에 정준 씨는 장경순 같은 거물을 모르고 있느냐는 표정으로 설명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5.16혁명을 주도했고, 농림부 장관과 국회 부의장까지 하시고 현재는 헌정회 회장을 하고 계신다고 했다. 나는 헌정회는 또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옛날에 국회의원을 했던 예비역들이 구성한 모임인데 장경순 씨가 의장이고 자기는 그를 보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박사, 시국선언문 좀 써 주세요
커피숍으로 가니 덩치가 우람한 사람이 일어서면서 악수를 청했다. 그는 어제 미국에서 급히 달려왔다면서 나라가 위태롭게 돌아가고 있으니 자기가 나서서 시국선언이라도 해야겠다며 선언문을 작성해 달라고 했다. 왜 하필 그런 일로 저를 찾으시느냐고 물었더니 지박사님 말고는 쓸 사람이 없다고 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제가 쓰는 글은 너무 강해서 아무도 그대로 발표할 사람이 없습니다. 공연히 저만 수고하게 만들지 마시고 다른 사람 찾아보십시오.” 이에 장경순씨는 글자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발표할 것이니 꼭 써달라고 간청했다.
남의 세미나장을 시국선언장으로
나는 자료창고에서 사실 자료들을 꺼내 김대중의 역적 행위를 적나라하게 편집했다. 선언문을 전해드릴 테니 사람을 보내라 했더니, 이틀 후의 오후 시각에 잠실 재향군인회 로비로 오라고 했다. 로비에 도착하니 정준씨가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대강당으로 안내했다. 500명~600명이 수용될 수 있는 대강당이 만석 상태에 있었다. 다른 모임이 주도했던 세미나가 끝나가고 있었다. 질문 시간이 시작되자마자 장경순씨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 질문 하나 있소.” 진행부는 예우를 각별히 갖추면서 그를 무대 위로 부축했다. 마이크를 잡은 장 의장은 “내가 할 말이 좀 있소. 나 대신 지만원 박사가 발표 할거요.” 이 한마디만 하고 부축받으며 내려갔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의외의 돌발 장면에 장내는 잠시 뒤숭숭했다. 내가 단상에 오르자 수군대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지만원, 지만원이 앞장서라 환호
나는 준비한 내용을 또박또박 낭독했다. 눈과 얼굴들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낭독이 끝나자 청중석이 요동쳤다. “지만원, 지만원이 앞장서라.” 한동안 환호성들이 이어졌다. 가장 흥분된 사람은 아마 장경순씨였을 것이다. 장경순씨는 정준씨의 건의에 따라 단체 이름을 ‘자유 수호 국민운동’이라 지었다. 그리고 김성은 전 국방부 장관을 포함해 육군과 공군 4성 장군 등으로 8인 위원회라는 원로 모임을 구성했다. 이 중 1명의 유명한 장군은 며칠 후 자기 이름을 빼달라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처자식이 있어서”라고 했다. 이에 8인 멤버 중 한 사람인 이대용 장군이 한마디 했다. “누구는 처자식이 없습니까?” 불과 몇 사람들만 알고 있는 유명 장군의 이 부끄러운 족적은 그가 살아온 인생에 커다란 오점이 될 것이다.
장경순, 지만원 대통령 후보 선거 대책 위원장 자임
장경순씨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낼 5단 광고 문안을 작성해 달라고 했다. 광고문에 대해 사람들은 엄청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광고문은 촌철살인, 간단하게 핵심만 찔러야 해” 하지만 김대중의 반역 행위 자체를 일반 국민이 인식하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몇 줄의 문장만으로 국민 의식을 계몽할 수 있겠는가? 자연 칼럼 형태의 광고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세 차례의 광고가 나가자 전국적으로 성원이 대단했다. 당장 미국에 가서 바람을 일으키자고 했다. 미국에 가기 직전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이제는 나서야 한다.”라는 내용을 녹음테이프에 대량 복사하여 1개당 1만 원에 팔았다. 전국 택시 기사들이 이 테이프를 틀고 다니면서 손님들에게 틀어주었다. 관광버스 기사들도 손님들에게 이 테이프를 틀어주었다. 미국에까지 테이프가 건너가 교포들 사이에 인기품이 되었다.
여권을 급히 발급받고 비자를 4시간 만에 초고속으로 받아냈다. 미 CIA 요원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비자 신청문서는 지만원을 차기 대통령(2002년 12월 대선) 후보로 하고 장경순을 선거 대책 위원장으로 하고 이대용 장군과 장택상 따님 등 5명을 수행원으로 하는 문서였다. 방문처는 미국 의회와 헤리티지 재단, 그리고 전직 주한 미 대사들의 모임 등이었다. 떠나기 전 장경순씨는 이 모임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오랫동안 박정희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셔 왔던 사람이오. 박정희 대통령의 발상과 용기에 늘 감탄했던 사람이오. 그런데 지박사를 보니 박대통령께서 갖고 있지 않은 능력들을 많이 갖추고 있소. 나는 이제 내 마지막 인생을 지박사를 대통령으로 만들어내는 일에 바치고 싶소.”
미국에서 일으킨 회오리바람
미국에서 만난 인물 중 가장 소득이 있다고 생각되는 인물은 미 하원 국방분과 위원장이었다. 그는 자기 측 통역을 통해 60분 이상에 걸쳐 내 얘기를 경청했다. 그리고 동감을 표시했다. 미국에서 만난 인물 중에는 김대중 지지자들도 있었다. 릴리 전 주한 미 대사와 헤리티지 재단의 한국계 여성 공무원이었다. 이들과는 심한 공방이 이루어졌다. 당시 워싱턴 D.C 교포 사회에는 라디오 방송만 있었고 TV 방송은 없었다. 교포 방송에서 연락이 왔다. 20분 동안 방문 목적을 이야기해 달라는 것이었다. 방송을 마무리하려는데 갑자기 2시간을 더 해줄 수 없느냐고 했다. 방송을 듣던 교포들이 흥분한 나머지 다른 프로들을 생략하고 내 이야기를 더 해달라는 전화가 빗발쳤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NY 한인 사회에서도, LA에서도 재현됐다. LA에는 방송국이 여러 개라 여러 번 출현했고 특히 대형 공간을 마련해 연설도 했다. 바람이라는 게 참으로 대단하다는 것, 그리고 정치인에는 대중연설이라는 게 참으로 중요한 자산이라는 사실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었다. LA에서는 장경순씨 큰 따님 저택에서 기거했다. 20미터 정도 높이의 동그란 독립 고지 하나를 통째로 소유하고, 그 위에 3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기르는 개가 50여 마리나 되었다. LA에서는 유지급이었다. 내가 피곤해하니까 자기 침대를 내주면서 이 자리가 가장 편한 자리라 했다. 시내 사무실에서는 한의사를 불러 침도 놔주게 했다. 두 자매는 미국 사회에서 인맥이 상당했고, 특히 큰 따님은 워싱턴 D.C에서 일행을 위해 전속 통역을 여러 날 동안 해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한국에 가시면 사람들이 꼬여 들 것이고, 그들 중에는 박사님을 우리 아버지와 이간시키려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귀가 많이 얇아요.”
장경순씨의 맹세
나는 일행이 모두 모여있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다들 정치는 조직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조직으로 하는 정치는 부패합니다. 패거리 정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볼 때 정치는 바람입니다. 바람이 일면 돈과 조직은 저절로 생깁니다. 히틀러는 언론이 미약했던 시기인데도 연설 능력 하나로 불과 22개월 만에 총통이 되고 막강한 조직을 거느렸습니다. 우리도 고국에 가면 여기에서처럼 바람몰이에 집중해야 합니다. 고국에 가면 사기꾼들이 천사의 얼굴을 하고 달려들 것입니다. 그들이 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의장님과 저 사이를 갈라놓는 일일 것입니다. 이런 일이 시작되면 저는 이 모임에서 미련 없이 떠납니다. 저는 인간 공해를 가장 싫어합니다. 그래서 삼성 취직자리도 마다했고, 장관 자리도 거절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나가면 이제까지의 노력과 과실이 모두 날아가고 우리를 기대했던 수많은 국민이 허탈해할 것입니다.
이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장의장이 화답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지요. 아암~ 그러면요. 그건 안 됩니다.“
우리 일행이 이렇게 강행군하면서 김정일과 김대중 사이의 음모를 호소하고 다닐 때인 2002년 5월 중순, 박근혜는 김정일이 북경으로 보내준 위원장 전용기를 타고 평양으로 날아갔다. 북한 최고의 숙소라는 백화원 초대소에서 3박 4일간 머무르면서 세계의 그 어느 누구도 누려보지 못한 호강을 누리고 있었다.
삼천포로 빠진 장경순
돌아오자마자 국회 대회의실에서 강연했다. 500만원 봉투들이 줄을 이어 장경순씨에게 안겨졌다. 미국에서 만났던 하원 국방분과 위원장이 북한과 연결이 됐다며 31명의 하원의원 대표단을 이끌고 하야트호텔에 투숙했다. 나는 이들 31명을 호텔 공간에 모아놓고 또 같은 내용을 전파했다. 이 사실을 모니터링한 김대중은 그 다음날로 계획되어 있던 이들 31명을 위한 청와대 만찬을 돌연 취소하고 적대적 감정을 드러냈다. 북에서도 이들의 방문을 취소했다.
한국에서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하자 예상했던 대로 쉬파리 떼가 날아들었다. 허문도를 필두로 하여 여러 명이 장경순씨에 접근했다. “저희의 불찰로 연세 드신 어른을 일선에 서시게 해드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동안 장경순씨는 툭하면 새벽 3시~4시에 내게 전화를 걸었다. 나라 걱정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다며 빨리 자기 숙소로 오라고 했다. 안양에서 잠을 자다가 평창동 구기터널 앞 그의 빌라로 달려갔다. 결론은 광고 문안을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작성된 광고 문안이 10여 회, 모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실렸다. 그런데 마지막 광고 문안이 광고에 나가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우물쭈물하면서 ”지박사에 대해 말이 좀 많으니 잠시 뒤로 물러나 있어 달라“는 말을 했다. 미리 예견됐던 일이라 즉시 모임에서 나왔다. “그 사람들하고 일하십시오. 저는 떠납니다.“
2023.5.27. 부처님 오신 날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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