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메시지 493] 탈북자 이민복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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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5-01-17 22:05 조회1,06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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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원 메시지 493]
탈북자 이민복 분석
이민복은 누구인가?
276광수로 지정된 이민복은 1957년, 황해도 서흥에서 월북자인 부친 이포구 (1927-1985)가 생산한 5남매 중 장남이었다. 1990년 11월 제1차 탈북에 실패한 후 91년 6월 압록강을 건너 옌벤에 있다가 92년 6월 러시아로 가서 2년 8개월 있다가 1995년 2월 18일 한국에 도착한 것으로 밝혔다. 대북전단이 한국에서의 생업이다.
부친에 대한 이민복의 설명(2020.8.31. 중앙일보 증 74)
부친은 전북 익산시 함라면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5형제 중 유일하게 초등학교를 졸업하여 똑똑하다는 평을 들었다. 부친은 '남로당 골수 빨갱이'로 6.25때 인민군이 들어오자 익산군당 선전부장으로 발탁돼 23세에 지프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벼락출세"를 했다 한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가족을 죽이는 것과 같다며 죽이지 못하게 했고, 주민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다"고 설명한다. 인민군이 퇴각하자 부친은 6사단을 따라 태백산맥을 타고 월북하여 황해도 서흥에 정착해 재혼을 했다 한다. 23세에 이미 익산에서 결혼을 했다는 의미다. 서흥에서 원유공급소 사람으로 일하면서 5남매를 생산했다. 1967년, 부친 나이 30살 때 남한 방송을 듣다가 간첩 혐의를 받고, 이후 출셋길이 막혔다. 1985년 어느 날 새벽, 끝없이 감시를 받던 부친은 사망했다. 이민복이 28세 되던 해였다.
참고사항: 북한에는 성분-계층 제도가 있다. 이 계급은 17살 때 부여되며 부친의 성분과 계층을 그대로 세습 받는다. '기본계층'은 혁명가 가문으로 인구의 25%를 점하고, 평양에 살 수 있다. '복잡계층'은 50%, '의거 입북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적대계층'은 간첩, 기업가, 상인, 종교인, 친일파 등이다. '복잡계층'은 대학도 군대도 갈 수 없다. 이대로라면 이민복은 북한에서 군대도 갈 수 없어야 했고, 대학도 입교할 수 없어야 했다. 그런데 이민복은 수많은 언론과 유튜브 방송을 통해 대학을 다녔다고 하기도 했고, 때로는 다니지 않았다는 말도 섞어서 했다.
대학 학력 및 근무에 대한 본인 이야기들
1. 1974년, 김일성종합대학을 가려다 김책공업대학 반도체 공학부에 갔다. 김책공업대가 김일성종합대학보다 더 훌륭하더라. 입학생의 60~70%가 다 제대군인이었고, 나만 17살. 제대군인들은 다 나보다 10살씩 많았다.(2018.3.30.
이민복tv 증 33. 1쪽)
2. ‘쌀은 공산주의다’라는 김일성 교시에 감동해서 공대 대신 평남 '은산농업 전문대'를 나와 1979년(22세)에는 남포농대 연구소에, 1982년(25세)에는 국가농업과학연구원 옥수수 연구소에서 깜부깃병 전문가로 일했다(2020.8.31. 중앙일보, 증 74) 1985~91년(28~34세)사이에 양강도 김정숙군 협동농장 경영위원회 연구원으로 일했다.
3. 1990년 5월(33세)에 김일성이 직접 받아보는 1호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은 개인농이 집단농에 비해 작황이 5배나 높으니 개인농 체제로 전환해 달라는 것이었다. 중앙당 간부가 내려와 '고집부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 갔다.
참고: 공산주의 체제의 핵심인 집단농을 개인농으로 바꾸라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로 가라는 것인데 나이 33세에 아버지가 탄압받던 모습을 지켜봤던 머리 좋은 청년이 감히 자본주의로 가자는 편지를 썼는데도 주의만 주었다면 이 나라는 북한이 아닐 것이다.
또한 집단농과 개인농의 작황을 비교하려면, 한 개인에게 땅을 떼어주고, '이 땅의 수확은 모두 네가 가지라‘는 당의 명령이 있기 전에는 실험 자체가 불가능하다. 겨우 나이 33세의 연구원이 윗사람들이 층층시하인데 이런 자본주의 실험을 하게 내버려뒀다는 것도 황당한 이야기다.
4. 2015년 12월 18일자 통일신문 인터뷰 내용은 또 위와 많이 다르다. 1974년(17세) 김책공업대학에 입교하자마자 '사회주의 대건설장 동원' 현장에 2년 동안 나갔다. 이것이 너무 싫어 자진사퇴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1976년순천농업전문학교와 남포농업대학을 졸업하고, 남포대 대학연구소에서 일했다. 다시 순천으로 돌아와 1982년부터 농업과학원에서 일했다.(증 85)
참고: 김책공대 엘리트 대학생을 2년씩 노동 현장에 투입한다는 이야기도 생소하고, 노동이 싫어 대학을 자기 마음대로 중단하고 농업전문대와 농업대학을 연이어 졸업하려면 줄잡아 4년 걸린다. 1976+4=1980년에 농대를 졸업한 사람이 어떻게 1979년 남포대 연구소에서 일할 수 있는가? 앞의 제2항에서는 김일성 교시 '쌀이 곧 공산주의'라는 말에 감동해서 김책공대를 포기하고 곧장 은산농업전문대를 갔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노동이 싫어 김책공대를 자퇴하고 순천농업전문대와 남포농대를 졸업했다고 한다. 순천전문대와 은산 전문대를 혼동해서 발언했다.
탈북 동기에 대한 본인 이야기들
1. 1990년 8월, 강원도 철원에 갔다가 남한 전단을 보았다. 북에서 배운 것들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탈북을 결심했다. 남한에 가서 진실을 알리는 삐라를 북으로 보낼 생각을 했다. 바깥 세상을 알기 위해 북-중 국경지대를 몰래 넘어가 중국이 잘사는 모습을 목격했다. 남한을 방문했던 조선족으로부터 남한의 발전상을 생생하게 들었다. 남한은 식후에 과일을 먹고 산에는 녹음이 우거졌더라는 말을 들었다.(2020.8.31. 중앙일보, 증 74)
참고: 남한의 삐라 한 장에 마음이 금방 바뀌어 탈북을 결심한 사람이 곧장 중국으로 가서 중국의 발전상을 관찰하고 조선족들로부터 남한의 풍요로움을 자세히 전해 들었다면, 왜 곧장 탈북을 하지 않고 다시 북으로 돌아가 있다가 3개월 후인 90년 11월 1차 탈북을 했다가 체포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북∙중 국경을 8월에 넘은 것은 탈북이 아닌가?
2. 김일성에 보낸 1호 편지가 거부되는 것에 실망을 느껴, 북한에서는 더 이상 살 의미를 잃었다. (2003.10.28. 탈북 수기)
참고: 전단지를 보고, 속았다는 생각에 중국에 건너가 남한이 더 잘 사는 것을 확인하고 1차 탈북을 시도했다는 제1항 내용과, 개인농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실망하여 탈북을 시도했다는 것은 그 동기가 다르다.
탈북 이야기
1. 1990년 11월 1차 탈북에 실패하고 91년 6월에 압록강 건너 옌벤에 1년 지낸 후 92년 6월 러시아로 갔다가 2년 8개월 만인 95년 2월 18일에 한국에 왔다. (2020.8.31 중앙일보, 중 74)
2. 탈출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사선은 국경선 돌파였다. 중국 국경은 최근 탈북자 증가로 감시병을 수배나 증강한 삼엄한 상태였다. 천신만고 끝에 국경을 돌파했지만 중국 경방대(국경 경비대)에 잡혔다. 중국 장백시에 구금되었다가 압록강 친선다리를 건너 북한 양강도 혜산 감옥에 수감되었다. 나의 감옥살이는 1호 편지로 인해 김정일의 비위를 거스른 데에서 비롯됐다. 감옥에서 기적이 발생했다. 조사를 받던 중 조사관들이 상부의 지시를 받은 내용을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말을 들었다. "너무 많이 잡아들여 적을 많이 만들지 말며, 또 세계 인권운동의 표적이 되고 있으니 될 수 있으면 근로 단체 조직들을 교양 개조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국제 엠에스티라는 인권단체들의 평양을 방문하고, 북한 당국자에게 정치범 사실 여부를 물었다고 합니다. 이때 북한은 정치범이 단 한 명도 없다 하면서 내적으로는 이러한 지시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풀려났고, 나 역시 과거 충성심을 인정받아 풀려날 수 있었죠“
수용생활을 마치고 3개월 동안 몸을 추스린 후 다시 탈출을 시도했다. 차라리 러시아로 탈출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강에는 철조망이 없었지만 화경(탐조등)이 비치고 있었다. 하필이면 날을 보름날로 잡았다. 달빛이 훤하니까 화경을 비추지 않았다. "얼마나 떠내려 갔을까, 눈을 뜨니 몸은 벌써 국경을 넘어서고 있었다. 러시아에 들어서서는 모스크바 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도움을 받았다. 모스크바에서 신학대학도 다녔다. 이후 겁 없는 생활을 했다. 너무나 당당하니까 나를 잡으러 온 러시아 군인들도 나를 잡아가지는 못했다. 위에서 돌봐주는 거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내가 UN 난민 1호였다. (2003.10.28. 탈북 수기)
3. 첫 탈북을 1996.11.29. 야밤에 했다. 중국 장백현에서 중국 변방대에 체포되어 북송됐다. 보위부 집결소에 수감되었을 때 나는 '농작물 종자를 구하러 갔다'고 강변해 3개월 만에 석방됐다. 1991년 6월에 다시 탈북해 중국 연길에서 1년 떠돌았다. 어느 조선족의 도움으로 동녕현 흑룡강을 따라 러시아 쪽으로 4일간 걸었다. 몇 개의 국경초소를 무사히 넘어 러시아로 들어섰다. 하바롭스크로 가서 모 선교사를 만났더니 10일 동안 대접을 잘해주었다. 그 후 비행기로 모스크바에 갔다. 모스크바에서 신학원을 다녔다. 3년 동안 여러 지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유엔난민기구를 접속해 난민 1호로 인정받았다. (2015.12.18. 통일신문, 증85)
4. 1990년대 과학자가 넘어갔다는 건 커다란 문제였다. 중국의 기술을 훔쳐다 공화국을 발전시키려 탈북했다고 말했다. 나를 잡아넣으면 국가연구 과제가 없어지는 거야. 옥수수 깜부기병 육종 병리 연구는 나 하나뿐인 거야. 이놈을 잡아넣으면 국가연구가 무너지는 거야. 그래서 11월에 잡혔는데 2월 16일 요때 나온 거예요. 풀려나온 다음의 교훈은 브로커, 조선족을 끼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거예요. 중국을 한 1년 동안 돌아다녔는데 아무도 나를 안 도와주는 거야. 결국 나 혼자 갔지요. 지도를 가지고 수분하라는 강, 흑룡강 동련현으로 흘러 우스리스크, 블라디보스톡쪽으로 사흘 동안 튜브를 타고 헤엄쳐서 갔다. 매우 추웠어요. (2023.11.25. 유튜브 유미카. 증 89)
주: 이민복은 북중 국경을 사선이라 했고, 탈북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관문이라 했다. 그런데 1990년 8월, 강원도 철원에서 남한 삐라를 보자마자 그 사선(死線)을 넘어가 중국을 견학하고, 한국이 잘산다는 조선족들의 말을 듣고 다시 돌아와 그해 11월에 1차 탈북을 하다가 중국에서 체포돼 복송되었다고 했다. 체포된 지 불과 3개월 만에 풀려났다는 데 대한 이유도 말할 때마다 달랐다. ①UN 엠네스티가 문제 삼고 있어서 기적적으로 풀려났다고도 했고 ②중국의 농산물 종자를 구하러 갔다고 변명해서 풀려났다고도 했고 ③자기는 옥수수 깜부기 연구의 유일한 과학자이기 때문에 자기를 가두면 국가연구가 무너지기 때문에 풀어주었다고도 한다. 말할 때마다 내용이 달랐고, 세 가지 이유 모두가 이솝우화급 정도로 현실성이 없다. 2차 탈북은 91년 6월부터 95년 2월까지 3년 8개월 동안 진행이 되었는데. 그 여정이 말할 때마다 중구난방이다.
①중국으로 먼저 갔다가 중국에서 러시아로 갔다는 말이 있고, ②곧바로 러시아도 갔다는 말도 있다. ③브로커와 함께 중국에서 러시아로 갔다는 말도 있고 ④브로커 없이 혼자서 지도를 가지고 갔다는 말도 있다. 두만강 동해 근방의 북∙러 국경선을 넘을 때는 한동안 표류하다 눈을 떠보니 러시아 땅이었다고도 했고 ⑤브로커와 함께 중∙러 국경초소를 여러 개 통과해 하바롭스키까지 갔다고도 했고 ⑥중국에서 수분하라는 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톡쪽으로 가는데 튜브를 타고 사흘 동안 헤엄을 쳤다는 말도 있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경찰이 아니라 군인이 여러 번 잡으러 왔다가 이민복의 당당한 위세에 눌려 돌아가기를 여러 번 했고, 하바롭스크에서 선교사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를 갔다는 말도 믿기 어렵다. 비행기를 타려면 여권이 있어야 하는데 여권도 없는 처지의 탈북자가 무슨 수로 공항 검색대를 통과할 수 없었겠는가? 북한의 최북동 지점에서 강에 몸을 던져 눈을 떠보니까 러시아 땅이라고도 했고, 중국 동편에서 브로커와 함께 국경초소 여러 개를 통과해서 러시아로 갔다고도 했고, 튜브를 타고 흑룡강을 3일 동안 헤엄쳐서 건넜다고도 했다.
법정 증인신문 내용 요약
탈북자 이민복도 다른 탈북자들처럼 법원의 증인출석 요구를 두 차례 무시했다. 벌금 300만 원을 부과하자 세 번째 출석 명령에 응했다. 이전의 탈북자 증인들 역시 증인출석 명령을 무시했다. 그래서 재판장은 이들 불출석자들에 벌금을 부과했다. 피고인에게 중벌을 내려 달라고 고소장과 법정 진술에서 요구하는 사람들이 증인신문을 꺼려하고 있는 기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2024.4.11. 이민복의 증인신문 녹취서에서 특기할 만한 것들을 아래에 요약한다.
문: 증인은 피고인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답: 군사전문가로 아주 유명하신 분으로 알고 있다. 나쁜 감정은 하나도 없고 존경해 왔습니다.
문: 피고인이 증인을 광수로 지정한 것이 악감정이 있어서였다고 생각하나요?
답: 악감정은 아니고 착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증인은 왜 군대에 가지 않았나요?
답: 아버지가 월북자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신분이 나쁘면 군대도 못 가요.
문: 출신성분이 나빠서 군대를 못 갔다 이거네요?
답: 예, 모든 게 그래요. 결국은 대학도 못 갔구요. 실력은 있었지만.
문: 출신성분이 나쁘면 김일성종합대학 못 가지요?
답: 2등을 해서 김일성 종합대학에 갈 자격이 있었는데 문건 불합격당했어요. 선생님들이 항의하니까 김책공대를 보낸 거예요. 김책공대에도 시험은 합격했지만 아버지 출신 때문에 문건 불합격되어 못 갔어요.
(주: 김일성종합대학이나 김책공대는 쌍벽을 이루는 학교로 기본계층만 갈 수 있고, 군대를 필해야 갈 수 있다. 시험 자격은 서류심사에서 합격된 자에게만 주어진다. 시험부터 보고 서류 검사한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앞의 언론들에서는 김책공업종합대학을 다녔다고 두 차례에 걸쳐 이야기했는데, 법정에서는 김책공대를 가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문: (아버지 사진과 이민복 사진을 나란히 보여주면서). 증인과 부친이 닮았나요?
답: 얼굴과 목소리 다 닮았죠
문: 어디가 닮았나요?
답: 입술이나 모든 면에서 닮았죠.
문: 남들한테 닮았다고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답: 모양 보면 알죠.
문: 6.25때 아버지 덕에 익산에서만 학살자가 없었나요?
답: 예
문: 6.25때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바뀌어 인민군이 후퇴했는데 6사단이 태백산맥을 따라 후퇴했나요?
답: 예
문: 태백산맥은 험하고 길이 없어서 여러 개의 사단이 후퇴할 수 있는 경로가 아닌데요?
답: 피고인이 잘못 판단하고 있어요. 기록에 나와 있어요.
문: 후퇴하는 인민군 사단이 아버지가 따라간 6사단 하나뿐만 아니라 수십 개 사단인데, 수십 개 사단이 다 태백산맥을 따라 북으로 후퇴했다는 건가요?
답: 6사단이 그리로 갔다면 간 거죠.
문: 태백산맥으로 차 끌고 포 끌고 가면, 갈 수도 없지만 굶어 죽지요.
답: 벌판으로 가면 다 잡혀 죽지요. 6사단이 그리로 갔다면 간 거지요.
문: (중앙일보 기사를 보여주면서) 증인은 1990년 8월 삐라를 본 후 곧바로 북∙중 국경을 넘어 중국이 잘 사는 것을 목격하고, 조선족을 중국에서 만나 남한이 잘 산다는 이야기도 듣고 돌아와 90년 11월 1차 탈북을 했다고 했는데. 1차 탈북 이전에 이미 중국을 갔다 돌아왔다는 건가요?
답: 김정숙군 부근에 압록강이 있으니까 넘어가서 확인할 수 있는 거죠.
문: 중국의 개혁 개방한 모습을 견학하려면 한동안 다녔겠네요?
담: 뭘 한동안 다녀요. 강 옆인데 가서 보고 오면 되지요.
문: 조선족들도 만나 남한이 잘 산다는 말을 들었고, 탈북 결심은 90년 8월에 이미 했다면, 그냥 그 순간 탈북하고 말 일이지 뭐 때문에 다시 돌아갔다가 3개월 후인 11월에 탈북해서 체포됐는가요?
답: 아이참, 이거 가지고 왜 자꾸 따져요? 이거하고 광수하고 무슨 상관있어요? 상관없어요.
문: 김책공대는 귀족학교인데, 당 서열이 높은 사람들만 가는데인데, 증인이 입학하자마자 2년 동안 노동을 시켰다는 건가요?
답: 기자가 거짓말 썼어요. 기자는 그렇게 쓰는 거에요.
문: 증인이 나왔다는 전문대는 그때 노동을 안 시켰나요?
답: 거기는 좀 괜찮았어요.
문: 그러면 김책공대만 노동을 시켰나요?
답: 예, 그때 바람이그렇게 됐어요.
문: 그러면 김일성종합대학도 노동을 시켰겠네요?
답: 아마 그때는 다 그랬을 거예요.
(전문대는 노동을 시키지 않고, 귀족 자녀들만 노동을 2년씩 시켰다는 말은매우 이상함)
문: "달빛이 훤하다 보니 경비병이 화경을 안 켜고 있더라고요. 얼마나 떠내려 갔을까 눈을 뜨니 몸은 벌써 국경선을 넘고 있었습니다"라는 표현은 증인의 탈북스토리 내용인데, 그 추운 강물에서 눈을 감고 떠내려갔다는 건, 몸을 맡기고 표류했다는 게 아닌가요?
답: 고개를 들었다고 할 말을 기자가 잘못 쓴 거예요.
문: 앞의 4가지 보도 내용을 보면 중국에서 러시아로 건너간 시기가 1992.6.월인 것은 일치하는데, 동녕현에서 직선거리만 해도 457km 북쪽에 있는 흑룡강으로 걸어가 초소를 피해 러시아로 갔다고 하는 얘기도 있고, 흑룡강을 사흘 동안 헤엄쳐서 하바롭스크로 갔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수리스크는 동녕현의 바로 동쪽에 있고, 흑룡강은 북쪽으로 직선거리 450km 떨어져 있는 곳이고, 하바롭스크는 직선거리 북쪽으로 1,000km 떨어져 있는데 증인은 말할 때마다 이들 지역들이 마치 한 지역에 있는 것처럼 혼돈시켰습니다. 경로는 단 한 개뿐일 텐데 왜 경로가 말할 때마다 다른가요?
답: 기자들이 다 잘못 쓴 거에요.
문: 증인은 1차 탈북 후 걸리면 3년은 징역 살아야 하는데 3개월만 살고 풀려난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를, 증인은 과학자기 때문에 3년을 가두면 연구소 연구가 중단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맞는가요?
답: 그것도 왜곡이에요. 깜부기 전문가는 저 혼자이기 때문에 깜부기 연구가 막힌다는 거지요.
문: 증인이 하는 깜부기 연구도 막히고, 연구소 자체가 막힌다고 증인이 직접 말한 내용인데요?
답: 정확히 들어보세요. 깜부기 연구만 막힌다고 했을 거에요.
문: 3년짜리를 3개월로 축소시킨 이유가 세 가지인데요, 깜부기 연구가 멈추기 때문이라고도 했고, 농작물 종자를 구하려고, 중국에 갔다고 하니까 풀어주었다고도 했고, UN 엠네스티가 인권 관련 압력을 넣어 조기에 풀어주었다는 등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왜 말할 때마다 이유가 다른가요?
답: 침 웃긴 분이네. 그건 기자들이 그러는 거고, 아니 사람 표현이라는 게 이렇게 저렇게 얘기할 수 있는데 그거 가지고 따진다면, 정말 웃긴 사람이네. 진짜.
문: 증인이 감옥에서 취조를 받는 동안 조사관들이 자기들끼리 속삭이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데, 취조를 할 때 중인 한 사람 놓고, 여러 조사관이 조사실에 함께 있으면서 증인 옆에서 속삭였고, 증언이 그 긴 얘기를 다 들었다는 것인가요?
답: 그럴 수 있죠. 그 사람들이 얘기하는 걸 들을 수 있죠.
문: 중국의 감옥장이 증인을 직접 심문했다는 것인가요?
답: 예
문: 감옥에는 간부들도 많고 교도관들도 많을 텐데 감옥장이면 구치소 소장일 텐데 증인을 직접 1대1로 신문을 했다구요?
답: 예.
문: 2023년 12.1. 증인은 유튜브 The spoi(증88)에서 두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지만 발은 묶이지 않아서 감옥장을 딱 거꾸려뜨렸는데 감옥장이 귓방망이를 때렸다고 말했지요? 어떻게 거꾸려트렸는가요?
답: 감옥장을 왜 때려눕힐 수밖에 없느냐 하면요, 내 물건을 검사하잖아요. 그 물건 중에는 내가 북한에 넘어가면 가장 불리한 아버지 사진이 있었어요. 보위부가 문익점처럼 종자씨 가지러 중국에 간 놈이 아버지 사진은 왜 가져가? 아버지가 남조선 출신이지? 너 남조선 가려고 했지? 이럴 거 같아서 사진을 치워야 하겠다. 근데 11월 19일인가엔 장백현이 추웠어요. 난로가 있어요. ”화장실 좀 가겠다“ 하고 벌떡 일어나 사진을 화로에 집어넣었어요. 그런데 한 장이 더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가려고 하니까 귓방을 때리더라구요. 그래서 저거 치우지 않으면 나는 죽거든요. 그래서 발로 사타구니를 걷어찬 거예요. 그다음에 사진을 꺼내 난로에 집어넣었지요. 근데 이 얘기는 빼놓고 어떻게 무조건 거꾸려트렸다고 그래요.
문: 난로에 뚜껑이 없었나요? 뚜껑을 열어야 사진을 던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답: 옆으로 구멍이 나 있었는데 뚜껑이 없었어요.
문: 중국 변방대는 탈북자는 체포했으면 소지품부터 빼앗아 따로 보관하지 않고 조사실까지 가방을 가져가게 했나요?
답: 저분이 왜곡해도 보통 왜곡하는 게 아니네요. 책상 위에 있다 했지 언제 옆에 놓았다 했어요.
문: 증인이 소지품에서 두 차례씩이나 사진을 꺼내서 난로에 넣었다면 책상과 증인과 난로가 다 가까이 있었던 거 아닌가요?
답: 여기하고 저기하고가 옆이에요? 참 이상한 분이네. 진짜 내가 알고 보니까 진짜.
문: 탈북자 한 사람을 체포했는데 감옥장이 1대1로 조사실이 아니라 감옥장실로 바로 불렀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가고, 감옥의 장을 다리로 차서 거꾸러트렸다고 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고, 무협지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가요?
답: 피고인만 이해가 안 갈 거예요.
문: 부하도 안 시키고, 감옥장이 한 탈북자를 자기 방으로 불러 불도 쬐게 해주고..
답: 어디에 불을 쬐게 했다고 써 있어요
문: 난로가 있으면 불을 쬐는 게 아닌가요?
답: 아니 이렇게 확대하니까 광수로 사람을, 그렇게 말하죠, 어디 불을 쬐게 한다고 했어요. 어디
문: 증인은 대학을 나왔나요, 전문대를 나왔나요?
담: 나는 검정으로 해서 남포농업대학 나왔어요. 그건 더 설명하지 마세요. 제발 북한사람 말 좀 들으세요. 대학 나온 사람은 예비역 소위입니다.
문: 증 22의 161쪽을 보면, 왈가왈북에서 말하기를 증인을 집단농장의 농민 15명 정도를 인솔하는 '분조장'일 것이라 하는데 아닌가요?
답: 그거는 북한이 왜곡해서 한 말을 왈가왈북이 그렇게 떠든 거예요.
(주: 북한이 이민복을 비난할 때 이민복은 북에서 '집단농장 분조장'이라 발표했다는 사실을 이민복이 시인한 것임.)
문: 대학교 나오면 전부 예비역 소위인가요?
답: 두말하지 마세요. 대학 나온 사람은 다 예비역 소위입니다. 자꾸 그러지 마세요. 왜 자꾸 그래요? 북한에서 살아봤어요? 북한에서 살아봤어요? 안 살아 봤어요? 다른 걸로 넘어가세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문: 군대도 안 간 사람한테 예비역 소위를 줬다고 하니 이해가 안 돼서 묻는 겁니다.
답: 대학생들은 6개월씩 교도 훈련이라는 걸 받기 때문에 군사훈련 다 받은 사람입니다.
(주: 앞에서는 대학은 갈 수 없었다고 하기도 했고, 검정으로 해서 대학을 졸업했다고도 한다. 북에도 검정고시 제도가 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북에서는 고교졸업하면 반드시 10년 동안 군을 필한 다음, 당에서 그다음 직책을 부여한다. 군을 필하지 않고 대학에 가는 경우는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 없다. 더구나 아버지 출신성분이 복잡계층 또는 적대 계층인 이민복은 북한 제도에 의하면 대학도 군대도 갈 수 없다.)
문: 북한에서는 결혼과 이혼을 당의 허가 없이는 못하지요?
답: 허가라는 게 없어요. 이혼이 좀 어려울 뿐이지 이혼제도가 있어요.
문: 합의이혼이 가능한가요?
답: 그럼요. 좀 어렵지만 가능해요.
문: 보도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합의이혼은 없고, 오로지 인민재판소에서 관할하는 재판을 거쳐야 하고, 이혼은 불명예로 인식되는 데다 비용도 많이 들고 시일도 많이 걸린다 하던데 어떤가요?
답: 더 설명하지 마세요. 북한사람 보고 설명하지 마세요. 제발 살아보지 않았으면 가만히 좀 계세요.
문: 합의이혼이 폐지되었다고 하는 데 아닌가요?
답: 좀 어렵긴 하지만 거기도 합의이혼이 있습니다. 그거 가지고 더 얘기하지 마세요.
문: 북한에는 연좌제가 있어서 증인이 탈북하면 모친, 부인, 자식, 그리고 증인의 5남매 가족 모두 반역자 처벌을 받기 때문에 증인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합의이혼을 했다고 말씀했는데. 설사 이혼을 했다 해도 부인만 안전할 수 있지 나머지 가족은 다 피해를 입는 게 아닌가요?
답: 그냥 실종한 것처럼 없어졌어요.
(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실종된 것처럼 사라졌다면 남한에 와서 보도에 많이 오를 정도로 공개적인 대북 삐라 활동을 할 수 없어야 이치에 맞는다)
문: 증인이 남한 삐라를 접한 시기는 1990.8월이고, 1차 탈북을 감행한 때가 그해 11월이면 3개월 동안인데 이 3개월 안에 합의이혼 재판을 끝냈다는 건가요?
답: 그럼요.
문: 합의이혼이기 때문에 3개월 내에 재판이 끝났다는 건가요?
답: 예.
문: 하바롭스크에서 모스크바까지 비행기로 갔다 했지요?
답: 예, 유영길 목사가 한국 대사관에 저를 데려다주고 갔어요.
문: 탈북자 처지에서는 몰래 숨어서 다니는데 증인은 떳떳하게 비행기를 타고 갔다는 것인가요?
답: 예, 이거 가지고 묻지 마세요. 유영길 목사가 주변 전도사들 여권 하나 빌려가지고, 비행기 표 사서 모스크바 한국대사관에 데려다주었어요.
문: 증인은 여권이 없었지 않나요?
답: 다른 전도사 여권 빌려 갖고 갔어요.
문: 공항에서 사진 대조 안 하나요?
답: 러시아 사람들은 동양 얼굴 잘 구분 못해요.
총 평
이민복에는 탈북스토리가 없어 보인다. 국정원이 기획 탈북시킨 것으로 법정에서 드러나 있는 탈북자가 두 사람이다. 5.18때 전남도청 앞에 질서 있게 정돈되어 단체 사진을 찍은 사람들 중 50명이 탈북자들이다. 이 중 12명이 나를 고소했고, 그중 2명이 국정원이 탈북시킨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이 12명의 탈북스토리들 중 합리적인 이야기나 말할 때마다 일관성 있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꾸며낸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왜 거짓말로 탈북스토리를 지어냈을까? 국정원이 북과 짜고 기획적으로 데려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민복은 법정에서 90분가량 신문을 받았다. 북∙중 국경이 삼엄하다는 말을 하면서도 실짝 넘어가 중국의 발전상도 보았고 조선족들을 만나 남한이 식후 과일을 먹을 만큼 잘산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즉시 탈북하지 않고 다시 북으로 돌아가 3개월 후에 1차 탈북을 했다가 체포되었다고 했다. 3년 형을 받아야 하는데 3개월 만에 풀어줬다는 이야기도 황당하고 그나마 말할 때마다 다르다. 강물에 눈을 감고 표류하다가 눈을 떠보니 러시아 땅이라고도 했고, 중국 감옥장을 수갑을 찬 채 다리로 사타구니를 차서 거꾸러트렸다는 이야기는 이솝우화 이상의 우화다. 둘러대는 수준이 학력 미달로 평가된다. 그런데도 그는 남한 국민들에게 그가 깜부기에 대한 유일한 과학자였다고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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