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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덕출신? 김영순에 대한 신문사항 (283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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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만원 작성일25-08-12 20:53 조회1,7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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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순에 대한 신문사항 (283광수)

 

* 탈북자 김영순은 오늘 3번째 법정 호출에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와서 얼마나 남한국민을 함부로 농락하여 자기를 신성화시킴으로써, 성금을 모으고 각자마다 세포조직을 만들어 가는지 국민은 알아야 합니다. 아래 질문서는 오늘 김영순에 할 질문이었는데 나오지 않아 공개합니다 *

   

프로필 요약

 

1. 증인이 남한에 와서 밝힌 증인의 이력을 보면, 증인의 부모는 경북 안동에 살다가 일제 때 중국 심양으로 이사하여 1937년에 증인을 생산했다. 증인에게는 1925년생인 친오빠가 있는데 친오빠가 혁명가였기 때문에 그 공로로 증인은 1945년 심양에서 평양으로 넘어와 평양 중심가에서 1%권에 해당하는 최상위층으로 살았다. 명문에 속하는 평양제2인민학교를 다녔고, 1950년 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전세가 밀리면서 영웅가족 대우의 일환으로 중국 동부 용안현으로 피난을 갔고, 학교들도 중국으로 이사들을 해서 휴전 전까지 중국에서 11년제 중학교를 다녔다. 중국 피난지에서 성혜림을 동창으로 만나서, 중학교로부터 평양예술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줄곧 성혜림과 동기동창이 되었다. 평양예술대학 무용학부 1기생으로 최승희의 가르침을 15년 동안 받았다. 1956년 예술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조선인민군 협주단에서 무용배우로 13년 동안 근무하다가 중위로 제대한 후 결혼을 했다. 이후 고관들만이 고객인 여행사 상점의 상업부장으로 임명받아 밍크코트를 입고 하루에 옷을 두 번씩 갈아입으면서 멋쟁이로 이름을 날리다가 1970년 단지 성혜림과 친하다는 이유 하나로 요덕수용소에 수용되었고, 성혜림이 고영희에게 김정일 부인 자리를 내준 1979년에 출소했다. 2001년에 탈북해서 2003년에 한국에 왔다. 이렇게 요약되는데 맞는가요?

 

가족관계

 

2. (111) 2009년 레이디경향에서 증인은 친오빠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하였고, (112) 2016년 통일신문에서는 오빠는 김일성과 함께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해방 후 철도경비대장을 맡았다. 그 덕에 우리 가족은 1960년대까지 평양에서 상류층으로 살 수 있었다.” 이렇게 말씀하셨네요? 1945(8)부터 1970(33) 요덕에 가기 전까지 25년 동안 줄곧 1%의 혁명가문으로 평양에서만 사셨다는 것이지요? 오빠가 장군이었나요?

 

3. 증인은 몇 남매였나요? 증인에게는 양부모와 양오빠가 있다고 했는데 생부모와는 언제 어떻게 헤어졌고, 양부모, 양오빠는 언제 어떻게 만났나요?

 

4. 증인은 언제 어떤 일을 하는 사람과 결혼했나요?

 

5. 증인의 친오빠는 언제 어디에서 부모를 떠나 북으로 가서 김일성과 함께 항일운동을 했나요?

 

6. 증인의 친오빠는 증인과 몇 살 차이인가요?

 

7. 증인은 8살 이전에 중국 심양에서 학교를 다녔나요?

 

8. 밍크코트를 입고 하루에 옷을 두 차례씩 갈아입고 멋쟁이로 이름을 날렸다는 시절이 ‘30였다면, 1967년이었는데 그때 중인은 인민군 협주단 여군장교 중위 시절이 아니었나요? 여군 신분으로 밍크 풍의 멋을 내고 살았다는 것인가요? (: 1945년부터 의무교육 11년을 보태면 19, 19세에 협주단에 입대해 13년 동안 군대 생활했으면 32세에 중위로 제대, 32세이면 1969, 1970에 요덕행)

9. 1967년에 여행사 상업소 중간간부 수준의 상업부장 지리에 있으면서 그 정도의 멋쟁이로 이름을 날렸다면, 당장 부르조아 행세한다고 벌을 받았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10. 증인이 요덕으로 수용될 때, 부모님은 연좌제의 대상도 아니었고, 생부도 아니었는데도 자식과 함께하기 위해 죽음의 지옥이라는 요덕수용소를 자청하였다고 했는데, 수용소`는 법적으로 죄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이 원한다고 함께 갈 수 있는 그런 곳인가요? 자식이 감옥간다고 부모가 함께 감옥을 따라간다는 것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을듯한데 어떤가요?

 

11. 자료들을 보면 연좌제는 부모, 자식, 손자 등 3대에 걸쳐 사돈의 팔촌까지도 적용이 된다고 하는데, 증인의 경우에만 연좌제가 밑으로만 적용이 되고, 부모에게는 적용이 안 된다 했는데 어떤가요?

 

학력관계

12. (110) 증인이 1945년 평양으로 올 때, 가족의 몇 분이 함께 왔는가요?

 

13. (122) 증인은 명문에 해당하는 평양제2인민학교에서 무용을 시작했다했네요? 이 학교는 몇 살부터 몇 살까지 다녔나요? 무용 과목이 인민(초등)학교에도 있나요?

 

14. 평양제2인민학교에 입학하기 전, 북한 정규 학제인 유치원을 1년 동안 다녔나요?

 

15. (110) 2012 코너스에서 증인은, “195010월 인민군이 전세에 밀리자 군 가족들이 중국으로 피난을 갔는데 증인의 일가들도 회령을 거쳐 흑룡강 동부 용안현에 머무르면서 거기에서 성혜림을 만났다 했네요?

16. 195010월에 증인은 무슨 학교 몇 학년이었나요?

 

17. 북한의 의무교육은 11년제 맞지요? 유치원 1, 인민학교 4, 중고등학교 6, 그러니까 6살 때 유치원을 시작하여 11년 의무교육을 다 마치면 17살이 되고, 남자는 그 나이에 군대에 갑니다. 맞지요? 증인은 8살 때인 1945년에 부모를 따라 평양에 와서 의무교육을 시작했기 때문에 평양의 다른 학생들보다 학교를 2년 늦게 시작했고, 그래서 증인이 고등학교를 마치면 19살이어야 하지 않나요?

 

18. (110) 2012년 코너스넷 등에서 증인은 평양종합대학 졸업 후, 19569월에황해북도 화성리에 위치한 조선인민군 협주단 무용부 전문배우로 입대하여 당대회 공연, 국가 연회 등 중요한 공연에 주로 참가하였다고 했는데 1956이면 증인 나이 19세이고, 19세이면 북한 사람들보다 2년 늦게 취학한 증인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이지 대학을 졸업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닌데 증인은 어떻게 19세의 나이에 평양종합대학을 졸업했다 했나요?

 

19. 평양종합예술학교는 고등학교 수준의 학교로 인터넷에 검색되지만, 평양종합예술대학은 검색이 되지 않는데 어떤가요?

 

20. (125) 증인은 더중앙등 많은 매체에서, 19569, 19세의 나이에 인민군 협주단에 배치됐다 했고, 거기에서 13년 복무하고, 1969, 32세에 중위로 제대했다고 했지요? 그런데 증인은 때로는 평양종합예술대학을 때로는 평양예술대학을 다니면서 최승희의 제자가 되었다고 했는데, 언제부터 언제까지 최승희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인가요?

 

21. 증인은 19458살에 중국에서 월북했고, 북한의 의무교육기간인 11년 동안 취학하여 19살 되던 해인 1956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인민군 협주단에 여군으로 입대해 13년 동안 무용수로 근무했고, 1969년 중위로 제대한 지 1년만인 1970년에 요덕에 간 것이 아닌가요?

 

22. 8살에 평양에서 취학했다면, 증인은 1950년에 중학교 1학년이었을 텐데, 평양의 어느 중학교를 다니다 중국으로 피난갔나요?

 

23. (122) 2011년 서울상대 강연 등을 보면 증인은 나남여자중학교 시절 6,25가 발발했다.195010월 말부터 북한 간부 가족들이 중국으로 피신함에 따라 나도 흑용강성 녹도촌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북한 학교들이 속속 문을 열었고, 1953727일까지 운영되다 귀국사업이 시작되자 평양으로 돌아왔다했고, (118) 증인의 저서 8쪽을 보면 나남을 출발해 강을 따라 무산령을 넘어 회령에 도착했다. 회령에서 빵통차(무개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길림을 거쳐 용안현으로 갔다고 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증인은 평양에서 중국으로 간 것이 아니라 청진에 있는 나남중학교에 다니다 중국으로 피난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24. 여기 나남중학교 사진이 있는데 기억나시나요? 중국 동남부지역인 흑룔강성으로 피란 가기 위해 회령을 거쳤다면 출발지는 평양이 아니라 청진이라야 지형적으로 아귀가 맞는데 어떤가요?  

 

 

25. 같은 책 80쪽 상단에는 또 전쟁이 나자 우리 나남여중에서는 전방의 군인들을 위해 수통주머니를 만들어 보냈다고 했는데, 이것을 보면 증인은 6.25때 평양에서 중학교를 다닌 것이 아니라 함경북도 나남여중을 다녔다는 기록인데 이는 평양에서 중국으로 피난 갔다가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는 이전 말과 다른 게 아닌가요?

 

26. 함경북도 소도시의 나남여중을 다녔다면 증인은, 증인이 늘 내세운 1%혁명열사가문이 아닌데 어떤가요?

 

27. (122) 2011.10. 북경기신문 내용입니다. “친오빠는 평양학원 출신으로 제3근위사단의 참모장으로 6.25전쟁에 참여했던 오빠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항일투쟁, 6.25참전 가족이므로 평양에서 우대받으며 1953년에 개교한 평양예술대학을 신청할 수 있었다. . 17살 때인 195311, 201의 경쟁을 뚫고 평양예술대학에 입학했다. 성혜림은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부터 11년제 중학교 과정부터 동창이었고, 전쟁 후 평양예술대학에서는 나는 무용을, 성혜림은 영화연극을 공부했다. 대학졸업 후나는 조선인민군 협주단에 입대했고, 성혜림은 조선예술촬영소에 배치됐다."는 내용이 있고, (122, 2) 2014kbs words에는 평양예술대학 무용학부 1기생인 김영순씨는 열일곱 살부터 서른한 살까지 15년간최승희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라는 내용이 있네요?

 

28. “17세였던 1953년에 201의 경쟁을 뚫고 평양예술대학에 입학했다는 말에 대해 질문하겠습니다. 증인은 195619세에 고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인민군 협주단 여군으로 가서 13년 근무했는데 어떻게 고2 나이인 17세에 201의 경쟁을 뚫고 평양예술대학에 입학했다는 것인가요?

 

29. “17~32세까지 15년 동안 최승희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질문하겠습니다. 증인은 17세에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19세에 인민군 협주단에 입대하여 13년 동안 근무하고, 32세인 1969년에 중위로 제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고217세로부터 군에서 제대하기 1년 전인 31세에 이르기까지 15년 동안 평양종합예술대학에 다니면서 최승희씨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인가요? 2로부터 고3때까지 2년 동안과 인민군 협주단에서 복무한 13년을 합친 15년 동안 내내 어떻게 최승희로부터 사사했다는 것인기요?

 

30. 위에서 증인은 성혜림은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부터 11년제 중학교 과정부터 동창이었고, 전쟁 후 평양예술대학에서는 나는 무용을, 성혜림은 영화연극을 공부했다. 대학졸업 후나는 조선인민단협주단에 입대했고, 성혜림은 조선예술촬영소에 배치됐다."며 성혜림과 동기동창이었음을 강조하셨는데, 성혜림은 증인과 동갑이긴 하지만 서울 풍문여중을 다니다가 6.25가 발발하자 월북하여 1951년에 평양여자중학교를 졸업한 뒤, 1951-54년에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평양종합예술학교를 다녔고, 1955년에 평양연극영화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1955년이면 증인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증인은 성혜림을 중국에서부터 같은 반이었다고 하지만 1951년에 성혜림은 평양여중을 다닌 반면, 증인은 함경북도 청진에 소재한 나남중학교를 다녔으며, 증인이 평양종합예술학교를 다녔다 해도 다닌 기간이 증인보다 2년 선배이고, 성혜림이 다닌 학교도 증인이 다녔다고 이야기 한 평양예술대학이 아니라, 평양연극영화대학입니다. 증인과 성혜림은 시간적으로나 지역적으로 동기동창이라고 인정할 만한 공동의 공간이 전혀 없는데 어떤가요?

 

친오빠

 

31. (115) 2018rfa에서 증인은 오빠는 안동 사나이로 25세 대령으로 포항에서 포 사격에 의해 전사했다고 했네요? 1950년에 25세였으면 오빠는 1925년생이고, 증인보다 12살 위네요?

 

32. (110) 2012 코너스넷에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용대에서 활약했던 오빠 김창수는 후에 김석천으로 이름을 바꾸고 인민군 창군 멤버로서 활약했다. 해방 직후 정치에 입성하라는 김일성의 제의를 거절하고 평양 철도경비대 대대장으로서 인민군에 남아 북한군 창설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오빠는 참모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사망하였는데 오빠가 공식적으로 북한 혁명열사와 내각 공로자 명단에 등록되게 되어 우리 일가는 혁명열사 유가족으로서 많은 배려를 받았다.” 는 내용이 있고, (122, 2) kbs worlds에는 오빠는 평양학원출신이었고, 3근위사단의 참모장으로 6,25전쟁에 참여했던 오빠는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항일투쟁, 6.25참전 가족이므로 평양에서 우대받으며 1953년에 개교한 평양예술대학을 신청할 수 있었다는 내용도 있네요?

 

33. 역사 자료들을 보면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의 지휘 아래 19381010일 중국 후베이성에서 창설한 지역단위 독립운동 단체로 연안파의 뿌리이며, 인민군 창설에 참여했지만, 이른바 증인이 말씀하는 종파사건으로 숙청되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조선의용대가 형성된 1938년이면 오빠 나이가 불과 13살인데 그렇게 어린 나이에 중국내륙 중앙에 위치한 후베이성에까지 가서 당시 40세였던 1898년생인 김원봉파에 가담했다는 것인가요?

 

34. 오빠는 비록 1950년에 전사했지만 연안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증인이 말하는 종파싸움에서 패배함으로써 부관참시에 의해 숙청이 되었을 텐데, 그 이후에도 1%의 상위계급을 유지했다는 것인가요? 1%의 상위 계급인데 어째서 증인은 대학도 가지 못하고, 여자중학교를 평양이 아닌 청진에서 다녔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인 19세로부처 13년 동안 인민군 중위에 이르기까지 여군생활을 했는가요?

 

35. 인터넷 자료들을 보면 평양학원2개월 교육과정으로 1946223일 개원했고, 졸업생들은 각 도 군 단위의 보안대, 인민위원, 철도보안대의 간부로 두루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평양학원은 장교만 양성하는 기관이 아니라 행정, 국회의정, 군사에 필요한 요원을 급성으로 조달하기 위한 초단기 과정인 것으로 해석됩니다. 증인 말씀에 의하면 이 2개월 과정에 오빠가 1946, 21살에 입교하여 2개월 교육을 받고 철도경비대에 보직되었다는 말인데, 임관 후 불과 4년 만에 철도경비대 출신이 전투부대 대령이 되었다는 말인가요?

 

36. 종합하면 오빠는 첫째, 일제시대인 13살의 어린 나이에 중국내륙 중앙지역인 후베이성에까지 들어가 조선의용대에 가담했고, 21세에 행정, 의정, 군의 간부를 양성하는 평양학원에서 2개월 교육을 받고, 철도경비부대에 배치된 후, 23세의 나이로, 194828일의 인민군 창설과정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고, 25세가 되던 6.25때 제3사단 참모장으로 참전했다가 낙동강에서 전사했고, 그 공로로 인해 가족이 혁명열사의 가족이 되어 1%에 해당하는 귀족 대우를 받았다는 것이지요?

 

37. (110) 2012년 코나스기사입니다. “휴전 전부터 김일성의 종파 숙청의 피바람이 노동당, 인민군, 예술계 등을 휩쓰는 동안 우리 가족은 의붓오빠 김석산 외에는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았다.” 여기에서 김석산이 증인의 의붓오빠라 했는데 의붓오빠는 어떻게 성립된 것인가요? 여기에서 증인은 증인의 의붓오빠 김석산이 친오빠와 같은 연안파라는 것을 이유로 1953년 이전부터 시작된 종파 숙청(연안파 숙청)에서 피해를 보았다 했는데 어째서 똑같은 연안파인 친오빠는 숙청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인가요?

 

38. 친부모는 어떻게 헤어졌고, 의붓부모와 의붓오빠는 어떻게 형성됐는가요?

39. 김일성은 1912년생이고, 인민군 전설이라는 리을설은 1921년생입니다. 이런 리을설도 19507월에 대령으로 북한군 제4사단 참모장을 했고, 19514월에도 대령으로 인민군 제15사단 제3연대장이었습니다. 한국군의 전설인 백선엽 대장도 1920년생인데, 6.25때 대령이었습니다. 리을설보다 4살이나 아래인 친오빠가 6.25때 리을설과 나란히 같은 대령을 달고 사단참모장을 했다는 것인가요?

 

성혜림과의 관계

 

40. (111, 119) 레이디경향에서 증인은 성혜림과 중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까지 줄곧 동기동창이고 친구였다고 했고, 증인의 수기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118, 80-81)에서는 ”195010월 전선이 밀려 북한의 간부 가족들 후퇴작전의 일환으로 회령에서 무개화차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 . 북한에서 피난 나온 학교들이 속속 개교를 했다. . 나는 영안현 송강성 11년제 중학교에 전입했다. 이때 동창으로 성혜림을 만났다.“고 했네요?

 

41. 11년제 중학교가 무슨 말인가요? 성혜림이 6.25, 남한에서 북한으로 갔다는 기록은 있어도 6.25때 중국으로 피난 갔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증인은 오빠가 혁명가 계급이었기에 군인 가족들을 중국으로 피난시켰다고 하지만, 성혜림은 월북자 가족으로 성분계급이 감시대상인 복잡계층에 속해 있어서, 군인가족 대우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으로 갈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중국에서 11년제 중학교 동기동창이 되었다는 것인가요?

 

42. (122) 증인은 2011년 서울상대 포럼에서 성혜림은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부터 11년제 중학교 과정부터 동창이었고,전쟁 후평양예술대학에서는 나는 무용을, 성혜림은 영화연극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 나는 조선인민군협주단에 입대했고, 성혜림은 조선예술촬영소에 배치됐다.”고 했는데 이 말이 사실인가요? 증인은 19세인 1956년에 고교를 졸업하고 여군에 입대하지 않았나요? (110) 2012년 코너스넷과 불루투데이 뉴스를 보면 증인은 예술종합대학 졸업 후에는 19569화성리에 위치한 조선인민군 협주단에 무용부 전문 배우로 입대하여 공연에 주로 참가하였다고 했는 데 1956년이면 증인이 겨우 고교를 졸업할 나이였는데 성혜림과 함께 예술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인가요?

 

43. 증인은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인민군 협주단에 간 것이 아니라 195619세 되던 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인민군 협주단에 입대한 게 아닌가요?

 

44. 황해남도 화성리에 있었다는 조선인민군 협주단은 300명 정도로 구성된 조선인민군 직속부대로 전시가요, 합창, 무용, 관현악, 연극,서커스등을 내용으로 하는 군인공연예술단체인데 그 중에서 증인은 무용팀에서 여군 신분으로 근무했다는 것이지요?

 

45. 무용을 하던 13년 동안에는 결혼도 임신도 할 수 없겠지요? 무용팀에서 13년 동안 근무하고 중위로 제대를 했다면 제대했을 때의 증인 나이는 32살이었고, 년도는 1969년이었겠네요?

 

46. 반면 위키백과를 보면 성혜림은 1951년 평양 제3여자중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기재돼 있고,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평양종합예술학교는 1951~54년 기간에 다닌 것으로 계산됩니다. 위키디피아에는 성혜림이 1955년에 평양연극영화대학에 입학했다고 기재돼 있습니다. 성혜림이 1955년에 대학에 입학했다면 졸업은 1959년에 했고, 성혜림이 대학교를 다닐 때, 증인은 인민군 공연단 무용 여군이었습니다. 증인이 19세였던 1956년에 나왔다는 학교는 고등학교이지 대학일 수가 없습니다. 성혜림과 증인이 중학시절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동기동창이었다는 증인의 말은 전혀 아귀가 맞지 않는데 어떤가요?

 

47. 증인이 1% 상위계급인 혁명가 가족이라서 평양의 명문학교인 평양제2인민학교를 다녔다고 했는데, 왜 중학교는 함경북도 청진지역의 나남중학교를 다녔나요?

 

[참고](110) “1989년 말에는 함경도 보위부 청사로 소환당한 일이 있었다. 평양 중앙보위부 고위간부인 반탐국장이 말을 했는데 그의 얘기를 듣던 중 드디어 나는 20년 만에 수용소에 끌려간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도 아니고 아들도 낳은 적이 없으며 그러한 유언비어를 듣거나 퍼뜨렸을 경우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옛 친구 성혜림을 안다는 것 하나만으로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갔던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고, (127) 자유북한운동연합에 게시한 증인의 탈북 수기에는 보위부 직원들은 내가 수용소에 끌려간 이유와 출소하게 된 배경을 전혀 설명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수용소를 나온 뒤 보위부에서 나를 관찰할 때 성혜림과 관련된 이야기에 유독 신경을 썼다. 고영희의 등장으로 내가 수용소를 나오게 됐다는 게 우연이 아님을 직감했다.”했고, (111) 2009년 레이디경향에서는 김 씨는 이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왜 요덕수용소에 끌려갔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 성혜림이 어느 날 저에게 5호댁에 시집간다고 말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거기 들어가면 이제 못 보겠구나라며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고, 그게 혜림이를 본 마지막이었어요.. 김씨가 수용소에서 풀려난 시점은 성혜림 이후, 고영희가 김정일의 부인이 된 시점과 비슷했다.

 

48. 증인은 성혜림을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요덕에 끌려갔고, 성혜림의 뒤를 이어 고영희가 김정일 부인으로 채택이 됐을 때에 비밀이 해제되어서 요덕에서 해방되었다고 믿고 있지요? 증인이 쓴 저서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는 이런 믿음에서 쓴 것이지요?

49. 증인이 성혜림의 친구라는 이유는 중학교시절에서부터 대학졸업때까지 동기동창이었다는 것에 근거하지요?

 

50. 위키자료 등에 의하면 성혜림1968년에 김정일 부인이 되어, 1971년 김정남을 생산한 후, 1973년에김영숙에 김정일 부인 자리를 내주었고, 김영숙1976년에 고영희에 부인 자리를 넘겼습니다. 따라서 성혜림이 물러난 시기는 증인의 말처럼 1979년이 아니라 1973년이었고, 그 뒤를 이은 부인이 고영희가 아니라 김영숙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증인이 요덕에서 풀려난 1979년은 성혜림과는 전혀 무관한 해인데, 어떤가요?

 

51. 설사 절친이라는 이유로 증인을 요덕에 가두었다 해도 성혜림의 절친들은 증인 말고도 수많은 동기동창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증인만 그런 혐의를 받았나요? 기록들을 보아도 증인은 대학을 다니지 않았고, 성혜림은 대학을 다녔습니다. 증인과 성혜림은 중학교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동기동창이라 추정할만한 기록이 전혀 없는데, 증인이 어째서 굳이 증인과는 동기동창이 될 수 없는 성혜림을 등장시켜, 중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증인과 절친한 동기동창이라고꿰맸는지 이해되지 않는데 어떤가요?

최승희와의 관계

 

52. 증인은 최승희 무용교육원원장이셨네요?최승희는 일제 강점기에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동양판 이사도라 덩컨이라 하지요?

 

53. (120) 증인은 2011년 세계일보에서나는 최승희의 제자였다. 평양예술대학 무용학부를 졸업했다. 1956년부터 13년 동안 인민군 중위로 인민군 협주단에 근무한 후 여행사 상점 지도원으로 일했다했고, 2011년 서울상대 포럼에서는 (122) “나는 클래식 발레는 러시아무용대학 발레학과를 졸업한 조성찬 선생에게, 한국무용은 최승희 선생에게 사사(師事)를 받았다. 1956(19) 졸업 후 공연을 통해 북한체제를 선전하는 선전선동부에서 13년 근무했고, 평양시 보통강구역 상점상업부 지도원으로 근무했다.”고 했고, (112) 2016년 통일신문 헤드라인에는 민족의 무용수 최승희 선생의 제자 김영순 북한민주화위원회 부위원장이라 쓰일 만큼 증인은 조선춤의 전설 최승희로부터 무용을 직접 사사한 제자라고 자신을 소개했고, 한국에서도 최승희 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데 이 모두가 다 사실인가요?

 

54. 증인이 20대에평양예술종합학교에서 최승희를 학부장과 제자 관계로 만나 무용을 배웠다했는데 증인은 20대에인민군 협주단에서 여군 무용수로 근무했는데, 어떻게 20대에 예술대학을 다니면서 최승희로부터 무용을 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인가요?

 

55. 결론적으로 증인은 세계적으로 센세이셔널하고, 북한판 영부인인 성혜림이 증인의 절친이자 동기동창인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했고, 최승희라는 또 다른 세계적인 거물로부터 직접 사사했다는 내용으로 본인의 위상을 격상시켰지만, 객관적으로 나타난 자료들에 의하면 위 두 인물은 시기적으로 보나 공간적으로 보나 증인과의 접촉이 있을 수 없는 존재들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남편의 정체

 

56. 증인은 언제 결혼했나요? 남편 김동명은 몇 년생이며 무슨 일을 했나요?

 

56. 증인은 2004.11.17.RFA에서 인민군 협주단 무용배우를 13년 동안 한 후 중위로 제대해 남편과 결혼하고 외국여행자 상점 관리원으로 일했했었다고 했네요?

 

57. 1956년에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13년 동안 인민군 협주단에서 근무한 후 결혼을 했다면 결혼은 1969년에 했다는 것인데요?

 

58. (123) 2011년 북경기신문에서 보위부는 나와 칠순의 아버지, 어머니, 자녀 4(10, 8, 6, 2)을 요덕수용소로 보냈다고 했고, 25225쪽에서는 큰딸이 196011월생이라 했네요? 그런데 1969년에 중위로 제대한 이후에 결혼했다는 증인이 어떻게 결혼 9년 전인 1960년에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인가요?

 

59. (111) 증인은 2009년 레이디경향에서 남편은 증인이 요덕수용소로 붙잡혀 가기 한 달 전에 실종됐는데, 나중에서야 탈북을 시도하다 잡혀서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했고, (113) 2009년 위클리조선에서는 남편은 신광수란 사람에 의해 간첩으로 밀고되었다했고, (114) 2009년 서울상대 포럼에서는 제 남편은 조선백과사전 편집장을 지낸 신광수가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제 남편을 밀고해서 잡혀간 것이라 했고, (124), 2011년 연합뉴스에서는 남편이 메구미 납치범인신광수, 당시 조선백과사전 출판사 1처장의 밀고로 1999년 조사를 받은 뒤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수용소에 끌려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네요?

 

60. 요약하면 남편이 (1) 탈북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도 했고, (2) 탈북하다가 수용소에 갔는데 생사를 모른다는 이야기도 했고, (3) 거물간첩 신광수가 남편을 간첩이라고 밀고해서 수용소로 끌려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모든 이야기들이 다 2009년과 2011년에 나온 이야기들입니다. 왜 남편의 이야기가 탈북하다가 걸렸다는 이야기에서 거물간첩에 의해 간첩으로 모함됐다는 이야기로 그 차원이 변천됐는가요?

 

61. ‘탈북하다 총살됐다는 말과 탈북하다 수용소로 갔다는 말도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고, 탈북하다 잡힌 것과 거물간첩 신광수의 모함에 의해 간첩으로 몰렸다는 이야기도 차원이 한참 다른 이야기입니다. 왜 말의 내용이 달라졌나요?

 

62. 증인의 이야기에 의하면 거물간첩 신광수는 1970년 전후에 증인의 남편과 함께 조선백과사전 출판사에서 근무했고, 그 때 신광수는편집장이자 1처장이었는데 그런 신광수가 같은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증인의 남편을 간첩으로 밀고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증인의 남편은 1970년 전후에 출판사에서 무슨 직책을 가지고 있었나요?

 

63. (117) 위키자료나 검색 자료들에 의하면 신광수는 1929년 일본에서 출생했고, 포항중학교, 보성고등학교를 나와 6.25때 월북하여 인민군에 입대했고, 1954.10.~1960.10. 사이에 루마니아 부카레스트공대 기계학부에 유학하고 돌아와 1970년까지 10년 동안 정무원 산하 과학원 기계공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한 후, 1971년부터 25개월 동안 인민무력부 정찰국 공작원 교육을 받고 1973년 일본으로 밀입국하여 1977, 13세의 메구미를 납치하는 등 납치공작을 하다가 1985.2. 서울에 잠입하였다 체포돼, 1988년에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20009월 김대중에 의해 사면되어 북송됐다.”고 하는데 대략 맞는가요?

 

64. 증인은 증인의 남편이 1970년경, 같은 출판사에서 근무하던 신광수에 의해 간첩으로 밀고되어 수용소에 갔다는 것이지요? 혹시 남편이 간첩으로 오해받을만한 행동을 한 사실이 있었나요? 남편은 출판사에서 무슨 일을 했나요?

 

65. 신광수는 루마니아에서 공학 학사로 양성되었고, 그래서 졸업과 동시에 북한의 기계공학연구소에서 196010월부터 1970년까지 근무했다는 것은 합리적인 경력관리라는 생각이 들지만, 유학까지 시켜가면서 양성한 공학학사를 출판사에 근무시켰다는 것은 북한식 인재 관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가요? 결론적으로 신광수는 남편이 실종됐던 해인 1970년 이전에 출판사에 근무하지 않았다는 것이 객관적 기록인데 어떤가요?

 

1차 탈북

 

66. 2009년 증인이 직접 쓴 탈북기 226쪽에는 (118226~227) “1997년 중국의 사촌을 만나려고 기차를 타러 나갔다. 식량난 때문에 먹을 것을 찾아 억지로 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보위원이 양팔로 기차 문을 막아섰다. 나는 그의 윗주머니에 돈을 찔러주고 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 기차를 탔다.기차 지붕에까지 사람들이 가득 찼다. 통로가 없어서 병사들이 사람들의 머리를 밟고 다녔다. 내 머리를 밟기에 항의했다. “이거 왜 이러나” “내가 갈 수 없으니 그렇잖나! 이 간나야!” 함흥을 출발한 기차는 가다서다 하기를 연속하여 3일 만에 무산역에 도착했다. 무산에서 칠성세관을 거쳐 잠덕이라는 곳을 통해 불법으로 국경을 건넜다. 워낙 굶주림에 허덕일 때라 중국 방문은 묵인되었다. . . 아들이 결심을 굳혔다. ’어머니, 남한에 갑시다. 우리가 살 곳은 남한이야. 부랴부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야기가 있네요?

 

67. 1997년에는 북한 당국이 탈북과 중국행을 방치했다는 이야기인데 다른 탈북자들의 경우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이민복은 “916월에는 북중국경 양쪽에 철조망이 2~3겹으로 쳐져있어서 온갖 고생과 위험을 무릅썼다고 했습니다. 강철환은 19928, 혜산의 조폭대장과 친해졌고, 그를 매개로 경비대 대장을 만나, 경비원들에 술을 왕창 먹여놓고 새벽 2시에 압록강을 건넜다고 했습니다. 장인숙은 19979월 당시에는 국경을 4m만 벗어나도 무조건 총살시키라는 명령으로 살벌했는데 자기의 브로커가 돈을 주어, 경비 중대장과 초소장이 경비를 서지 못하게 해주어서 3남과 4남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넜다 했습니다. 그런데 증인은 이와는 정반대로 1997년에 북 당국이 중국행을 얼마든지 허용했다고 하니 이해가 가지 않는데 어떤가요?

 

68. 탈북자들은 강을 무사히 건너갔다가도 예외 없이 모두가 다 중국 공안에 잡혀 북으로 송환되면서 고초를 겪었다고 하는데 증인은 1997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도강을 했고, 중국에서 오랜 기간을 머물렀으면서도 중국 공안에 대한 이야기기 없는데 왜 증인에게만 중국 공안이 문제가 되지 않았는가요?

 

69. “기차를 타려는데 보위원이 양팔로 기차 문을 막아섰다. 나는 그의 윗주머니에 돈을 찔러주고 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 기차를 탔다.기차 지붕에까지 사람들이 가득 찼다. 통로가 없어서 병사들이 사람들의 머리를 밟고 다녔다. 내 머리를 밟기에 항의했다. “이거 왜 이러나” “내가 갈 수 없으니 그렇잖나! 이 간나야!”라는 표현이 대단히 극적인데요, 기차는 하루만 운행되는 것이 아니라 열차 운행시간표에 따라 매일 운행이 됩니다. 수많은 차량들이 운행되고 있는 평상시기에 기차가 운행될 때마다 먹을 것을 찾아 그런 식으로 중국으로 몰려가면 1년만 해도 그 수가 대단했을 것인데 체면과 자존심을 유난히 따지는 북한당국이 이런 대규모 난민이 매일 수차례씩 엑소더스식으로 유출되는 현상을 좌시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고, 설사 북한이 허용한다 해도 중국이 이 엄청난 엑소더스 형태의 난민 유입을 방치할 수가 없다고 생각되는데 어떤가요?

 

70. 기차 지붕에까지 사람들이 가득 탔으면 터널을 수도 없이 지나는 동안 안전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드는데 어떤가요?

 

71. “통로가 없어서 병사들이 사람들의 머리를 밟고 다녔다. 내 머리를 밟기에 항의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객실 높이가 얼마나 높기에 병사가 사람들 머리 위를 밟고 다녔다는 것인가요?

 

2차 탈북

 

72. (123) 2011년 경기북부신문에서 증인은 연길에서 함흥에 돌아온 다음 모든 것을 팔아6만 원(북한돈)을 만들고, 아들과 함께 탈북을 결행하기 위해 준비에 착수했다. 1,400원을 주고 군부여행증을 구입했고, 남이 의심하지 않도록 좋은 옷을 구입했다. 300원을 주고 두만강1열차 침대칸을 타고 국경지대인 온성지역에 도착, 어두움을 틈타 얼어붙은 두만강을 도보로 건너 중국 도문으로 들어갔다. 도문에 도착하여 70원을 주고 택시로 연길로 들어갔다.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일한 지 26개월 만에 드디어 탈북을 돕는 브로커를 만나 탈북을 시작했다.”라고 했네요?

 

73. 증인은 모든 가산을 팔아 북한돈 6만 원을 마련했다고 하는데, 6만 원이면 일반 노동자 월급의 600배가 아닌가요?

 

74. 가산 중에 값나가는 물건들이 무엇이었나요? 쓰던 중고품 살림을 거래하는 벼룩 시장이 2001년에 함경북도에도 있었나요?

 

75. 증인은 1,400원이나 주고 군부여행증을 샀다고 했는데 민간인인 증인에게 왜 군부대에서 발행하는 군부여행증이 필요했는가요? 보위부 요원들이 여행증을 검사할 때 민간인이 군부여행증을 보여주면 통과가 되던가요?

 

76. 증인에게 돈이 많아서, 주민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해 여행증을 까다롭게 발행하는 보위부 간부들까지 뇌물로 다 매수할 수 있었다면, 증인은 왜 북한에서 가장 구하기 어려운 국경연선지대 특별통행증을 구하지 않고, 민간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위법한 물건인 군부여행증을 구했나요?

 

77. (25) 2016몰랐수다, 북한수다’tv에서 증인은 “TV를 팔아 돈을 준비해가지고, 여행증을 1,000원에 샀는데, 아들은 노동자, 증인은 노무자 가족으로 위장한 후, 보위지도원에게 500원 뇌물 주고, 한상 차려 먹였더니, 보위지도원이 전지불 들고 탈북을 호위해주어서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군부여행증이 아니라 일반여행증을 샀다고 했고, 여행증 야매값도 1,400원이 아니라 1,000원이라 했습니다. 말할 때마다 여행증의 종류도 다르고 야매한 값도 다른데 왜 그런가요?

 

78. 보위지도원에게 500원의 뇌물을 주고, 한 상 차려 먹였더니, 보위지도원이 전지불 들고 탈북을 호위해주었다 했는데 보위부 소위 한 사람이, 김정일의 엄명에 따라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국경경비부대를 그렇게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는 것인가요?

 

79. 침대칸도 300원이고, 여행증도 1,400원에 샀다면서 강을 건너는데 전지불로 안내까지 해준 보위원에게는 겨우 500원 뇌물만 주었다는 것인가요?

 

80. 보위원에게 한상 차려주었다는 그 한 상은 어떤 상인가요?

 

81. 1997년 탈북할 때는 군인들이 사람 머리 위를 밟고 다녔고, 차량 지붕에까지 사람들이 타고 다녔다 했는데 불과 4년 후에는 침대칸 표를 사서 누워갔다는 것인가요?

 

82. (118. 227) 증인이 직접 쓴 책입니다. “아들이 탈북 경로를 눈여겨보았다. 부랴부랴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만들어 두었던 옷을 팔아 조선돈 6만 원 정도를 마련했다. 집은 일본제 열쇠로 채웠다. 1,400원을 주고 군부여행증을 샀다. 겉으로 표시나지 않게 하기 위해 몸단장을 최고급 수준으로 했다. 준비를 마친 후 보위원(국정원)을 찾아갔다. 적어도 15일 동안은 우리를 뒤쫓지 않도록 만들어 놓았다. “지난번에도 다녀왔던 중국의 사촌에게 먹을 걸 구하러 갑니다. 다녀오면 좋은 일이 있을 테니 보름만 시간을 주십시오.” “그러시오. 요즘 식량 사정이 안 좋다보니 . . 하여튼 빨리 다녀 오시오.” “우리 반 담당인 안전원(경찰)에게도 잘 말했다. 아들이 잘 아는 보위지도원(국정원) 소위를 만나 앞으로의 뇌물을 약속한 후 보위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 했네요?

 

83. (118,228~229), 증인이 쓴 책입니다. “2001131, 함경도 겨울밤은 매서웠다. 부족한 식량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기차는 복잡했다. 우리 두 사람의 주머니에는 3백 원을 주고 산 침대권이 들어 있었다. 두만강1열차는 밤 9시 넘어 출발했다. 밤늦게 청진에서 갈아탄 기차는 이튿날인 31일 밤이 돼서야 남양에 도착했다. 남양역에 도착하자마자 뒷문으로 우회해서 나온 후 아들이 지난 번 국경을 넘을 때 도와주었던 보위지도원(국정원)을 만나러 갔다. 그의 당시 계급은 소위였다. “10일 후에 돌아올 테니 안심하고 보내주시오. 더 푸짐하게 챙겨 오겠소.” 두만강이 꽁꽁 얼어붙었다. 1210, 도문에서 온성쪽으로 1백 미터 가량 거슬러 올라가 보위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얼어붙은 강을 건넜다“.

 

84. 앞부분에서는 보위원에게 15일 동안만 봐주면 좋은 일 있을 거라 했고, 뒷부분에서는 “10일 후에 돌아와 푸짐하게 대접하겠다했습니다. 앞 이야기와 뒷이야기가 서로 다릅니다. 보위부 소위가 불과 500원의 뇌물을 받고, 돌아오면 푸짐하게 대접하겠다는 말을 믿고, 플래시를 들고 직접 강을 건너게 안내까지 해줄 만큼 북한의 감사체제가 허술했다면 증인은 왜 이날보다 29년 전인 1970년에 뇌물을 쓰지 않고 죽어서야 나온다는 요덕에 갔는가요?

 

85. 위에서 살핀 것들을 종합해 보면, 증인은 19458세 때 월북하여 유치원으로부터 시작되는 11년간의 고등학교 과정을 1956, 19세로 마쳤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6살부터 유치원 과정을 시작하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17세가 돼서 군에 입대했지만, 증인은 학교를 8살에 시작했기 때문에 19세인 1956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에 입대하여 무용수로 근무했습니다. 증인이 입대한 군은 인민군 직속의 조선인민군협주단이며, 협주단의 활동 내용은 전시가요, 합창, 무용, 관현악, 연극, 서커스등인데, 증인은 무용팀이었으며, 증인의 이야기들에 의하면 증인은 19세로부터 13년 동안 무용팀에 근무하다가 13년 후인 1969년에 중위로 제대하였고, 증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 다음 해인 1970년에 남편은 A수용소로 갔고, 증인은 그 뒤를 이어 B수용소로 갔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무용팀에서 무용을 하는 동안, 여군은 결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증인의 말을 빌리더라도 증인은 13년 근무 후에 결혼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치에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증인이 1969년에 결혼을 했는데 증인의 첫 따님이 1960년생이고 그 아래로 아들이 3명 더 생산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증인은 예술대학을 다녔다고 늘 언론에 설명하지만, 증인은 예술대학을 나오지 않았습니다. 증인은 성혜림과 중학교로부터 대학 졸업 시까지 동기동창이라고 늘 설명해왔지만, 이 역시 사실일 수가 없고, 최승희로부터 대학교에서 조선춤을 사사했다고 강조해 왔지만 이 역시 사실일 수가 없으며, 증인의 남편과 거물간첩 신광수 사이에는 겹치는 이력이 없습니다. 성혜림, 최승희, 신광수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거물들입니다. 증인은 이들 거물들과의 관계를 창작해 증인의 위상을 치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증인 탈북스토리의 핵인 오빠의 신분도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오빠의 혁명열사 신분으로 증인이 1%의 상위층에 속했다면 증인은 함경북도 나남여중을 다닐 리가 없었고, 대학을 가지 못하고 고등학교 수준의 예술학교를 나와 인민군 연예단 무용팀에 입대하여 13년 동안 근무하고, 중위계급으로 제대하는 지극히 평범한 경력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오빠의 신분, 증인의 신분, 성혜림과의 관계, 최승희와의 관계, 거물간첩 신광수와의 관계, 친오빠의 신분, 모두가 다 증인이 창작한 소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한 국민들은 증인의 거짓말에 농락당해왔다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탈북자들이 탈북자에 대한 우리국민의 감상적 감정을 악용하여 탈북자들이 이렇게 속여도 되는지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렇게 허술하게 거짓말을 만들어내 가지고 국민을 속인데 대해 국정원으로부터 지적받으신 적이 있는가요?

 

86. 아래 사진은 1980년 전남도청 앞에서 두 명의 건장한 장정이 보여주는 [사망자 명단], 남녀노소의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기획사진으로 보입니다. CIA에서 안면인식 분야에 근무하였다는 필명노숙자담요가 이 사진 속 인물 50여 명을 탈북자로 인식하여 광수로 발표하였고, 광수로 지정된 이 50여 명의 탈북자 중에 증인 등 이 사건 고소인 12명이 들어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87. 안면인식 전문가라는 노숙자담요는 증인의 얼굴에 점을 찍고 선으로 연결하여 도면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2025.8.12. 지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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