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츠 페터의 붉은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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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thfinder12 작성일23-05-05 23:05 조회4,049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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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츠 페터의 붉은 행적
(나무위키와 부산대 김성진 교수의 이봉규TV 인터뷰 내용을 참고함)
힌츠 페터는 취재 시작 부터가 붉은 행적
힌츠 페터가 처음 한국을 방문한 때는? 손규태 성공회대 명예교수의 한겨례 신문 기고에 의하면 그는 독일의 파울 슈나이스 목사 소개로 1974년 9월 26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출범을 취재하기 위하여 처음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몇 차례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박정희 정권하의 여러 공안 사건들에 대한 기록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전 가택 연금 중이었던 김영삼과의 인터뷰를 녹화하는 등 다양한 취재를 하고 있었다.
힌츠 페터가 행사를 가진 훔볼트 대학은 동베를린의 대학교(동독)
2000년 후반쯤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동아시아학과 학생들이 개최한 광주민주화운동 세미나에 부인과 함께 참가
[* 부산대 김성진 교수의 말에 따르면, 이상하게도 힌츠페터의 출신대학을 찾을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대신 그가 참가한 광주 폭동 전시회가 훔볼트 대학 행사라는 점을 주목하고 있음]
5.18 당시 조선호텔 숙박과 김사복의 수상한 행적
서울로 도착한 힌츠페터와 루모어는 조선호텔에 숙박하고, 5월 20일 오전 외국인 전용 호텔택시 기사 김사복과 함께 당시 최고급 세단이었던 검정색 새한 레코드 로얄 택시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김사복은 호텔택시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이었지만 힌츠페터를 직접 안내했다.
힌츠 페터가 위독할 때 광주 안장 원해,
의외로 (위법과 탈법에 능한) 광주시는 불가 입장 천명
사선을 넘나들며 병세가 위중한 상태일 때도 꼭 "나를 광주에 안장해 달라"고 수없이 되뇌일 정도였으며, 그 자신은 물론 관련 단체들도 한결같이 그의 광주 망월동 안장을 원했다. 하지만 광주광역시청에서 외국인이 광주 시내의 국립/시립묘지에 안장되는 경우는 광주에서 사망한 이에 한한다는 시립묘지 관리 조례를 들며 "현재 조례상으로는 위르겐 힌츠페터를 시립 공설묘지에 매장할 수는 없다. 함.
힌츠 페터는 안장했지만, 김사복 아들은 아버지 이장 거부
결국 네티즌들의 주장 등으로 광주시는 힌츠 페터를 안장하기로 하고, 그의 사망 후 시신을 안장했지만 화장실 정화조 옆자리를 주어 그의 공적(?)을 빛냈다. 김사복의 아들은 거기에 아버지를 묻을 수는 없다며 이장을 거부하고 있다. (힌츠 페터가 안장되면 그 옆에 아버지를 안장하려고 했다고 함)
김성진 교수 인터뷰
https://www.youtube.com/watch?v=nvT4h_vgJV4
댓글목록
장여사님의 댓글
장여사 작성일
우리국민들이 남남갈등으로 싸우고있는 이시점에서
총선이 문제가아니라 5.18의 진실을 밝혀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