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문서 해제로 밝혀진 6.25전쟁의 진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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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빛이비추길 작성일22-08-17 14:06 조회1,94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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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를 해임하기 위한 웨이크섬 회동
트루먼이 웨이크섬에서 맥아더와 회동하고자 했던 것은 중공군의 참전 위협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이 압록강을 겨냥하여 북진해도 좋다는 사실을 맥아더에게 승인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트루먼은 이 부분과 관련하여 맥아더의 권고안을 그대로 수용하여 의사를 결정한다는 인상을 풍기고자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한반도전쟁이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는 경우 그 책임과 관련하여 맥아더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웨이크섬으로 떠나기 직전 트루먼은 새로 임명한 미 중앙정보국 국장 월터 스미스가 정리해준 중국과 소련의 참전 가능성에 관한 최신 정보판단서를 휴대하고 있었습니다. 트루먼은 웨이크섬에서 맥아더에게 그 정보판단서 자료를 거론하면서 중공군의 참전이 “1950년에는 가능성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트루먼은 본인이 맥아더에게 말해주었던 중공군 참전에 관한 미 중앙정보국의 판단 내용을 맥아더에게 직접 듣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트루먼은 맥아더로부터 본인이 듣기를 원했던 부분을 듣지 못했습니다.
트루먼은 한반도전쟁에 중공군이 참전하는 경우 맥아더가 중공군 참전에 관해 자신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며 비난할 예정이었습니다. 웨이크섬을 방문하기 이전과 이후에서의 트루먼의 일기장이 보여주고 있듯이 트루먼은 맥아더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이미 중국은 유엔군이 38선 이북 지역으로 진격하는 경우 중공군이 한반도전쟁에 참전할 것이라고 위협했고 트루먼은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맥아더와 트루먼은 1시간 정도 진행된 회동 이후 공동회견을 위해 마련된 또 다른 장소에서 대략 1시간 30분 동안 나머지 인사들과 합류했습니다. 회견이 시작될 당시 트루먼의 언론 비서 찰스 로스는 맥아더의 보좌관 라우레느 벙커 대령이 대화 내용을 기록하자 기록을 중지시켰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을 수행했던 7명은 대화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심지어 맥아더는 웨이크섬 회동에 도쿄의 기자단을 수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트루먼 주변 사람들은 이 같은 요구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웨이크섬 회동 당시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뒤집어씌울 답변을 듣지 못하자 본인이 맥아더로부터 듣고 싶어 했던 부분을 맥아더가 공동회견에서 말한 것처럼 맥아더의 공동회견 내용을 조작했습니다.
압록강으로의 진격 결정을 한 사람은 맥아더가 아닌 트루먼
맥아더도 압록강으로의 진격을 원했지만 맥아더보다 더 진격을 원한 사람은 트루먼과 에치슨 이었습니다. 트루먼은 반드시 중공군과의 격돌을 원했고 그렇게 되도록 지휘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중국, 영국, 프랑스는 협상을 통해 해결할 것을 제안했지만 미국과 소련이 이를 어렵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맥아더는 1950년에는 중공군이 한반도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것이며, 한반도전쟁이 조만간 종료될 것이란 트루먼 정부의 판단에 입각하여 10월 24일 압록강을 겨냥하여 전력을 다해 고속 질주하라는 명령을 8군에 하달했습니다. 맥아더는 휘하 전력이 압록강에 먼저 도착하여 한만국경과 압록강 교량들을 튼튼히 방어할 수 있는 경우 중공군의 한반도전쟁 참전이 훨씬 어려워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은 이미 8군과 10군단의 충분한 병력을 압록강 너머 한반도 지역으로 전개시키고 있었습니다. 10월 25일부터 11월 6일까지의 기간 중국인민지원군은 적이 있는지 모른 채 압록강을 겨냥하여 진격하고 있던 한국군과 미군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 후 엄청난 피해를 입혔습니다.
11월 9일에 트루먼은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그 회동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트루먼은 회동 결과를 그대로 수용했는데 그 회동에 대해 육군참모청장 콜린슨는 “당시 회동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맥아더에게 본인의 공격 계획을 그대로 추진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이었다.”라고 했습니다.
11월 19일 한국 주재 미국 대리대사인 드럼라이트가 미국에 전문을 보냈습니다. 전문에서 드럼라이트는 “중공군이 정주 북방 해안에서 시작하여, 태천, 운산을 거쳐 북동부 지역의 희천 동북으로 연결되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다는 다양한 보고가 접수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드럼라이트가 보내준 정보를 읽은 마샬 국방부장관 또한 “중공군이 유엔군 전선과 압록강 사이의 주요 지형을 중심으로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확인해주었습니다.
11월 21일에도 회동이 있었는데 트루먼은 이 회동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11월 21일에는 에치슨, 해리먼, 러스크, 매튜스 및 재섭과 같은 국무성 요원과 마샬 국방부장관, 브레들리 합참의장, 각 군 참모총장과 같은 국방성 요원들이 회동했습니다.
이 회동에서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한 후 하천 뒤편의 고지대에 전선을 설정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일대 낭패로 끝난 맥아더의 공세가 시작되기 바로 3일 전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는 맥아더에게 “압록강까지 성공적으로 공세 작전을 전개한 후 하천 뒤편의 고지대에 전선을 설정하라”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당시 회동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유엔군이 압록강에 이르기 이전에 거쳐 가야 할 고지대들에 중공군이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음을 단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던 정보 보고서를 이미 읽었음이 분명하고 다만 각 군 참모총장들도 읽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중공군과의 대규모 충동, 유엔군 입장에서 결코 승리를 거둘 수 없는 형태의 일대 충돌이 예상되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점에서 보면 압록강에 도달한 후 고수해야 할 전선의 위치에 관한 논의는 부질없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암호 해독이든 어떤 방법이든 비밀 정보들을 비밀 정보들을 알고 있었음을 암시해주는 3개의 사례가 있습니다.
첫째, 1949년 12월 19일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서 베이징의 류사오치에게 보낸 미중 외교관계 정상화 노력을 허용해주는 전문이 발송된 이후 4일 뒤 에치슨은 미중관계 개선 측면에서 매우 매력적인 제안을 구상했습니다.
둘째, 북한군의 남침을 허용해줄 것이란 내용의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보낸 1950년 1월 30일 자 전문이 발송된 후 48시간도 지나지 않아 트루먼은 수소폭탄을 개발하고, NSC-68이란 새로운 전략을 구상할 것이란 지휘 결심을 내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오쩌둥은 1950년 10월 첫째 주 동안 스탈린과 전문을 주고받은 이후인 10월 8일, 중국이 한반도전쟁에 참전할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 김일성에게 전문을 보냈습니다. 이 다음날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그 장소와 무관하게 한반도에서 유엔군과 중공군이 교전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해주었습니다.
위 3개의 사례가 우연일 수 있지만 우연이 아니었다면 미국은 6.25전쟁 전, 후 소련과 중국의 의도와 작전 등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책은 여기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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