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문서 해제로 밝혀진 6.25전쟁의 진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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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빛이비추길 작성일22-08-17 14:07 조회2,20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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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방어인가? 낙동강 방어인가?
북한이 남침한 직후 맥아더 장군은 한반도 군사 상황 조사 차원에서 처치 소장을 파견했는데 처치는 “한강 제방 남쪽 지역에서 어느 정도 한강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38선을 복원하고자 하는 경우···미 지상군을 투입해야 한다.”라고 극동군사령관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처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강 방어선을 고수해야 할 것이다.”라고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에게 조언해주었습니다.
6월 29일 한국을 방문한 맥아더 장군은 처치 장군의 브리핑을 받았으며, 이승만 대통령, 무초 주미대사, 한국군 수뇌부와 토의했습니다. 그리고 수원에서 20마일 떨어진 한강 이남의 제방으로 직접 차를 타고 가서 전선 상황을 30분 정도 관찰한 후 한강방어선에서의 방어가 가능하되, 미 지상군 부대가 즉각 투입되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즉각 미 연대 전투부대의 파병 요청과 가능한 한 조속히 2개 사단으로 증편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트루먼은 이 같은 맥아더의 요구를 거부함과 동시에 맥아더에게 “한강 이남 2백 마일 이상 떨어져 있던 부산 지역을 통제할 수 있도록 제한적인 수준의 전투 및 전투지원 전력을 운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북한군의 남침이 실패하도록 지휘한 스탈린
소련은 북한에 장비와 무기뿐만 아니라 보급물자, 병력, 전차에 사용될 유류와 탄약을 충분히 제공해주지 않았습니다. 이 같은 사실과 더불어 소련이 작성해준 북한군의 남침계획은 전략 및 전술적 측면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소련은 남침이 시작되기도 전에 남침이 실패하게 만들고자 적극 노력했습니다.
스탈린의 북한군 남침계획은 너무나 단편적인 시각에서 작성되었습니다. 소련의 남침계획은 남침 개시 4일 이후 서울을 점령하는 부분까지만 작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같은 단기적 개념에 따르면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면 민중봉기가 일어나 1달 이내에 남한 전체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계획에 남조선노동당 당수 출신인 박헌영이 “일단 서울을 점령하면 남한 도처에 있는 20만에 달하는 남로당원들이 봉기하여 남한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라며 소련의 주장을 거들었습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머뭇거리자 스탈린은 남진에 필요한 추가 장비를 제공해줄 것을 약속하며 “남진을 반드시 지속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북한군의 남침이 성공하려면 미군의 부산교두보 설치를 저지한다는 차원에서 속도가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북한군의 남진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두 가지 주요 지휘 결심을 했습니다. 스탈린은 당시 공격의 주요 축선인 서울~대전~김천~대구~부산을 따라 북한군 전력을 집중시킨 것이 아니고 분산시켰습니다. 이는 주요 축선을 따른 공격을 약화시키고 부산을 겨냥한 진격 속도를 늦추기 위함이었습니다.
먼저 북한군은 6사단을 주력에 분리하여 예산에 재집결시켰습니다. 6사단은 그곳에서 4일 동안 휴식을 취한 후 7월 13일에 남진을 시작하여 전혀 전투하지 않은 채 군산항을 점령했습니다. 그 후 6사단은 전주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7월 20일까지 머물렀습니다. 6사단을 부산에서 멀어지는 방향인 한반도 남서쪽 깊숙한 지역으로 보냈습니다.
또 북한군 3사단과 4사단도 7월 20일 대전을 점령한 후 이틀 동안 휴식을 취하며 거의 훈련을 받지 못한 1,000명 정도의 군사력을 교체했습니다. 스탈린은 주요 시점에 북한군의 전력을 약화시켰으며 이들 전력의 진격 속도를 늦추었습니다. 북한군 6사단과 4사단은 궁극적으로 낙동강방어선 부근의 유엔군 입장에서 주요 위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위협은 미군이 부산교두보 방어를 위해 충분히 많은 전력과 화력을 전개한 이후에나, 다시 말해 너무나 뒤늦게 제기되었습니다.
히긴스 기자는 “왜 북한군은 전차를 필두로 부산으로 밀고 내려가지 않았을까? 이는 6.25전쟁의 많은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이다. 맥아더 장군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있듯이 당시 북한군이 전차를 필두로 밀어붙였더라면 미군 방어 전력이 붕괴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워커 장군도 “북한군 6사단이 한반도 남서쪽 지역의 모든 항구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고 즉각 부산으로 진격하여 거세게 유엔군을 공격했더라면 나의 경우 이 같은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전력을 투입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북한군은 진격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습니다. 미 공군 역사가 푸트렐은 “공산주의자들이 천안을 점령한 7월 8일 이후 강력하게 공격을 추진했더라면 미 24사단을 격파할 수 있었을 것이며, 이 경우 대전, 대구 및 부산으로 연결되는 경부도로에서 북한군을 저지할 유엔군 전력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북한군의 진격 속도가 늦어짐으로 미국은 우수한 화력과 많은 병력을 한반도에 전개할 수 있었으며 북한군이 관통할 수 없을 정도의 막강한 방어선을 부산 부근에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보다 놀라운 것은 스탈린이 병참 측면에서 자행한 실수였습니다. 북한군은 낙동강방어선에 도달했을 당시 이미 식량, 탄약, 연료, 무기 및 훈련받은 요원이 매우 부족한 실정이었습니다. 스탈린은 북한군에 대공포도 제공해 주지 않았습니다. 스탈린은 미국의 항공력이 원거리 후방차단과 근접항공지원 측면에서 점차 위력적임에도 불구하고 대공포조차 제공해 주지 않았습니다. 또 스탈린은 북한군의 항공기 손실을 보충해주지 않았으며, 제트기도 제공해 주지 않는 등 어떠한 지원도 제공해 주지 않았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예측한 스탈린과 마오쩌둥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미 해군참모총장 서먼은 맥아더의 브리핑을 듣기 이전부터 인천이 상륙에 적합한 지역이라고 확신했지만 콜린스 육군참모총장 등은 반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맥아더는 반대하는 이들을 설득하고 강행했습니다. 그런데 소련과 중국은 인천상륙작전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분석가들은 일본으로 많은 함정과 상륙정이 집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병력은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분석가들은 이들 병력이 ‘상륙작전과 함께 확전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로 생각했습니다.
중국 정보당국은 상륙에 적합한 5개 장소를 식별했습니다. 이들 지역은 서해안의 인천, 군산 및 진남포와 동해안의 흥남과 원산이었습니다. 중국 전문가들 모두가 공감한 한 곳은 인천이었습니다. 중국의 참모진들은 마오쩌둥에게 8월 23일에 “적군이 인천에 상륙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고했습니다. 상륙 날짜가 9월 15일인 것도 파악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수간만표에 따르면 이곳 지역에서 상륙이 가능한 가장 이른 시점은 9월 15일이었고 다음번 시점은 10월 11일이었기에 장소를 파악했다면 날짜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도움이 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김일성에게 유엔군의 인천 상륙 가능성에 신경 써야 할 것이란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8월 27일에 만주에 전개되어 있던 4개 군단 전력을 3배로 강화하여 12개 군단, 즉 36개 사단의 70만 명 병력으로 증강시키라고 지시했습니다.
당시 중국 지도자들은 미군이 38선을 넘는 순간 북한을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 어떠한 경우에도 중국이 한반도 전쟁에 참전하면 안 된다는 주장, 한만국경 너머에서 참전하자고 하는 등의 한반도전쟁 참전과 관련하여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만약 이때 중공군이 전쟁에 참전했다면 전세는 다시 공산세력으로 크게 기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전쟁 초반에는 마오쩌둥에게 전쟁에 참전하라고 수차례 촉구했지만 그 뒤부터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된 9월 15일까지 마오쩌둥에게 참전을 강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없고 인천상륙작전 이후부터 다시 마오쩌둥에게 참전 독려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는데 저자는 이것을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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