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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교육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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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8 18:05 조회14,2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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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자

1950년대에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많은 사람들은 서울 변두리에 있는 시시한 중학교들을 다녔다. 그때는 부모의 보호를 받는 학생들보다는 고학생들이 더 많았다. 직장에서 심부름이라도 할 수 있으면 고급 축에 들었다. 대부분은 신문도 돌리고 서비스공장도 다니고 시장에서 미역 같은 것을 들고 다니면서 팔기도 했다.

난생처음 서울에 올라온 학생들이 갈 수 있었던 학교는 변두리 중학교였다. 잘만 하면 나이에 맞게 2학년이나 3학년으로 월반해서 들어갈 수도 있었다. 교무실에 들어가니 영어 선생님이 영어 책을 읽히고 해석도 시켰다.

2학년 영어책을 잘해내면 2학년으로 그리고 3학년 책을 잘해내면 3학년으로 판정해 줬다. 수학 선생님이 같은 방법으로 테스트를 했다. 영어와 수학 실력만 있으면 다른 과목은 묻지 않고 교실로 데려다 앉혔다.

몇달 다니다가 월사금이 없으면 학교를 한동안 쉬고 돈버는 일을 했다. 그리고 다시 나가면 선생님이 반겨주었다. 선생님은 그 학생이 삐뚤어지지 않고 다시 학교를 찾아온 향학열 자체를 고마워했기 때문이었다.

생활들은 비참할 만큼 쪼들렸어도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낭만과 여유가 있었다. 학교를 쉴 때는 청계천에서 헌 참고서를 사다가 독학을 했다. 촛불이나 석유 등잔불 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손을 호호 불며 날을 지샜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발육이 느렸다.

혼자 깨우치느라 애쓰다보면 상상력과 궁리가 발달했다. 늘 혼자서 문제를 풀다보니 학습의 체계성은 없어도 학습의 독립성이 자라났다. 가정교사 밑에서 공부하는 아이는 가정교사가 없으면 의욕을 잃었다. 같은 문제를 푸는 데 있어 일류학교에서 공부한 학생에 비해 손재주는 없어도 생각하는 방법은 다양해 졌다.

집에서 형들이나 아버지가 일일이 데리고 앉아 공부시킨 학생은 초등학교에서 모두 등수 내에 들었다. 그러나 읍에 있는 중학교로 떼지어 진학하고부터는 혼자 외롭게 공부했던 등외 소년이 천재소리를 들었다.

부모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학생들은 좋은 학교에 가서 규율 적인 시간표에 따라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다마다한 학생들은 시간이 없어서 자기가 좋아하는 공부만 잘하고, 하기 싫은 과목은 억지로 낙제점수만 넘기면서 공부했다. 많은 선생님들이 그런 학생들을 귀여워해 줬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는 이러한 멋이 사라지고 모든 과목을 다 잘해야만 상급학교로 진학할 수 있게 됐다.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 입시에는 매번 낙방했다. 그러나 세계적인 학교 줄리아드는 그 학생을 받아들였고 또 천재로 키웠다. 좋아하는 몇 개의 과목만 잘하는 학생의 종합점수가 좋을 리 없었다.

한국의 유명대학원에서는 그러한 학생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대학원에서는 그런 학생을 받아주었다. 그런 학생들일 수록 미국에서는 천재 소리를 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잘 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잘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교육은 지금의 한국사회를 전문성 없는 사회로 만들어 버렸다. A가 할 수 있는 일은 B도 할 수 있고, A가 할 수 없는 일은 B도 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사회의 골목골목에서 과당경쟁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가정교사나 부모들로부터 과도한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학습의 독립성과 상상능력을 잃게 하는 일이다. 모든 과목을 다 잘해야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현 교육제도는 인간의 능력을 평준화시켜 사회적 대가(Guru)를 배출시키지도 못할 뿐더러 지금의 전문경쟁시대에는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해악이다.

6.25 소년들은 지금 50대의 사람들이다. 그들의 대학 시절에는 가난과 번민도 있었지만 낭만도 있었다. 다독이냐 정독이냐에 대한 각자의 독서철학을 내세우며 명작들을 손에 들고 밤을 지샜다.

그때는 좋은 책들을 지금보다 훨씬 더 쉽게 찾아 읽을 수 있었다. 정독을 하는 사람들은 매 페이지에서 저자가 독자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려 했는 지를 찾아내고 음미하며 상념을 키웠고, 다독을 하는 사람들은 읽어야 할 책들의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면서 지식욕을 불태웠다.

교육(Educauion)은 인간을 만드는(People-Building) 과정이고 훈련(Training)은 재주를 키우는(Skill-Accumulation) 과정이다. 옛날의 엉성했던 학교들의 존재는 인간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지금의 학교들은 인스턴트식 손재주(Skill)와 외우는 재주를 키웠다.

서울대학교 수학과를 나온 학생이 미국 대학원에서 응용수학을 공부했다. 3X3 크기의 매트릭스를 인버스(Inverse)시키는 데에는 엄청난 손재주를 가졌다. 그러나 그는 4X4 크기 이상의 매트릭스를 인버스 시키는데 필요한 컴퓨터 로직은 소화하지 못했다.

그의 공부방법은 그때까지 그의 한국성적을 일등으로 유지시켜온 파워 있는 것이었다. 일생을 보장했던 그 방법이 별거 아니게 되자 그는 마치 홍수에 강아지 떠내려가듯이 대책 없이 뒤로 쳐졌다.

좋은 성적 때문에 대기업에 선발돼간 일류대학 수재들이 외국제품을 베껴내는 데 급급했다. 응용능력을 기르지 못하면서 공부했기 때문에 창의력이 갑자기 솟을 리 없었다.

A기업의 공학도가 B기업의 기술을 컨닝하러 다녔다. 남의 논문을 베껴서 학위를 따내고 있다. 창조력이 정지된 사회에서는 이 이상의 부정한 일들이 얼마든지 발생될 수 있다. 이는 소수의 검찰로 바로잡아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시스템이 창조력을 키워줄 수 있는 것으로 개혁돼야만 바로 잡힐 수 있는 것이다.

한국교육은 남이 생각해 놓은 것을 외우고 남이 실험해 놓은 것을 외우며 점수경쟁을 하도록 몰아쳐 왔다. 합법적인 수단으로 컨닝을 훈련해온 것이다. 동화나 위인전을 읽고도 자기의 느낌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나 유명한 평론가들의 느낌을 외워야 점수를 받았다.

한국 선생님들은 어린이들의 개성과 재능을 키워주려 하지 않고 그들의 이기주의를 위해 꼬마들을 외우기 경쟁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어린이들의 마음속에는 백지가 들어있다. 각자의 백지 위에 무슨 그림을 그리는가에 따라 인격이 달리 형성된다. 경쟁을 통해서는 인격을 키우지 못한다.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인물과 가장 위대한 업적은 경쟁을 통해 탄생된 것이 아니다. 학교교육이 하루빨리 경쟁구도를 청산하고 자아개발구도를 수용할 수 있도록 정부는 시스템 개혁을 주도해야 할 것이다.


2000.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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