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건설정책
29.1 국가건설 시스템의 부재
정부가 건설하는 모든 인프라 사업은 영세 설계업자들이 만든 3류 설계도면에 공무원들이 가필하여 만든 4류 설계도면에 의해 지어진다. 인생에 있어서도 태교가 중요하듯이 설계 역시 건축물의 일생을 좌우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서는 정부나 기업 모두가 설계를 경시한다. 최고의 부가가치를 창조하는 분야가 무시되어 온 것이다.
싱가포르만 해도 전철역당 2명의 역무원으로 운영되는데 반해 서울 전철역은 22명의 역무원으로 운영된다. 설계에 경제성이 반영돼 있지 않은 것이다. 환승역에도 천지간의 격차가 있다. 싱가포르에는 내린 하차대에서 에스컬레이터만 타고 한 층을 오르던지 내려가면 바로 환승 승차대가 나온다. 그런데 서울지하철 환승역에서는 평균 15분간 걸어야 하고 여기에 안내표식도 중구난방이라 짜증을 더해준다.
그 넓은 지하공간에 들어간 건설비가 얼마이며 그 공간에 들어찬 공해 먼지를 무슨 수로 다 정화시키겠는가. 환승역 설계에 국민경제, 건강, 시간, 편이성 등이 반영되지 못한 것이다.
건설비를 아낀다는 명분하에 터널 공간을 좁게 했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전차가 달리면 기관차 전면의 공기가 압축된다. 이 압축된 공기가 배출되지 못해 다음 역 전철역까지 몰고 간다. 역과 역 사이에 있는 공기를 모두 몰고 가려면 공기가 얼마나 압축되겠는가.
이 압축된 공기는 통상 추진력의 25% 이상 상쇄시킨다. 이에 더해 전차 뒤에 생기는 진공 현상이 전차의 추진력을 억제하고 있다. 터널 공사비를 몇 푼 아끼려다 더 많은 운영비가 절단 나는 것이다.
5~8호선 레일 바닥은 콘크리트로 건설됐다. 그로 인한 소음 때문에 다시 자갈길로 바꾸려 한다는 소문도 있다. 터널의 폭도 1~4호선보다 더 좁게 건설돼 있다. 철로와 차량, 신호 및 전기 시스템에 안전성이 고려되지 않았다. 이는 지하설계 내부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시스템이다. 서울시 지하철 조직은 지하철 건설본부, 지하철공사, 도시철도공사로 3원화 돼 있다. 지하철 건설본부는 지하철 건설만 담당하고, 여기에 소요된 건설비와 운영은 두 개의 공사로 이관한다. 1~4호선은 지하철 공사에게 떠넘기고, 5~8호선은 도시철도공사에 떠넘긴다.
지하철 건설본부는 차관을 얻어 건설만 하고, 두 개의 지하철 공사로 하여금 건설비를 갚게 하고 운영을 책임지게 한다. 경제성과 안전성, 편이성, 보건 등 무엇 하나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거설된 지하철을 인계 받아 운영하는 두 개의 공사에는 엄청난 불만이 야기되고 있다.
설계는 운영비의 90% 이상을 좌우한다. 여기에 건설본부의 무용론이 대두되고 무책임성이 대두되고 있다. 지하철 사고가 잦은 것은 90% 이상 잘못된 설계 때문이다. 그래서 운영을 맡은 공사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설계 자체가 사고를 잉태한 인프라는 많다. 바로 지하 매설물에서 발생하는 사고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가스 사고와 전화선 화재 사고다. 매설물의 관장 부서가 제 각각이고 이들 간에 협조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하고 예산이 낭비되고 있다.
신도시를 건설할 때마다 토지공사가 지하터널을 건설해 놓고 각 지하 매설물을 설치할 때마다 해당 업체로부터 건설비를 회수하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지만 그 수많은 공직자들 가운데 이러한 방법을 시도한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방법은 단계적으로 도심으로 확산되어야 한다.
29.2 부실공사 예방 시스템
훌륭한 설계회사와 감리회사의 존재는 부실 예방 시스템의 핵심이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정부는 외국 감리회사를 ‘부분적’으로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삼풍 참사가 발생하자 정부는 외국 감리회사를 ‘전면적’으로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외국의 감리회사는 허용되지 않았고, 부실시공은 계속되고 있다.
똑같은 한국의 건설업체가 싱가포르를 비롯한 다른 외국에 가서 시공을 하면 훌륭한 시공을 하지만 한국에서 시공을 하면 부실시공을 한다. 한국의 건설업체가 외국에 나가 품질 시공을 하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꼬박꼬박 감리사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고, 불량 시공으로 인한 처벌이 너무나 무거우며, 한국식 다단계 하청구조가 허용될 수 없고, 공무원들이 업체와 야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시스템이 운영돼야 한다. 이를 위한 첫 걸음은 외국의 공신력 있는 감리회사를 유치하는 일이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 기술자들을 고용케 하여 감리인력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외국 감리회사라면 시공업체에 따라 감리비용을 차등적으로 부과할 것이다. 시공능력과 품질관리 시스템이 우수한 시공업체에게는 저렴한 감리비용을, 이것들이 허술한 업체에게는 엄청난 감리비용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건설업체는 감리비용을 줄이기 위해 시공 및 품질관리 능력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품질시공을 유도하는 자동화 시스템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감리비를 정액제에 방치하고 있다. 원시적이다. 공인회계사가 기업의 몸종이듯이 감리사들도 공무원과 시공기업의 몸종일 뿐이다. 과거 수차례에 걸쳐 정부는 ‘철저한 감리’를 강조만 했다. 하지만 이는 감리사 매수 비용을 높여주는 결과만 가져왔다.
감리와 설계는 건설 분야에서 부가가치가 가장 높은 분야이다. 설계 및 감리에 대한 기술과 신용이 한국처럼 낙후된 상태에서는 아무리 건실 시공을 강조해봐야 헛일이다. 외국의 훌륭한 감리회사를 초청하고, 여기에서 우리 감리사들을 훈련해 내야 한다.
행정부 조직도 전면 바뀌어야 한다. 건물주로 하여금 수십 개의 부서를 돌아다니면서 인허가 절차를 밟게 하지 말고, 정부 내에 프로젝트 관리팀을 조직하여 실명제 책임 하에 건축물 건설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리․감독하게 해야 한다. 미국처럼 ‘건축물 사업관리팀’을 형성하는 것이다. 지금의 인허가제를 가지고는 누구도 사고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여러 사람에게 공동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은 결국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사업관리(PM)제는 마치 집 장사와도 같은 개념이다. 집 장사는 남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시스템적으로 결합시켜 훌륭한 집을 짓는다. 작은 집을 짓는 일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큰집을 짓는 데에는 여러 분야를 커버할 수 있는 팀 조직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공공시설물을 건설하는 일은 민간업자들에게만 맡길 수 없다. 그가 ‘품질 있는 시설물’을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감시해야만 한다. 이것이 선진국 시스템이다.
모든 건설물에 10~20평 정도의 미니 박물관을 만들어 건설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기록을 남기는 방법도 모색돼야 한다. 참여한 사람의 기여 부분과 인적 사항 그리고 그가 가장 아름다웠을 때에 찍은 사진을 전시하는 것이다. 그들의 자손들은 아버지의 업적과 사진을 보기 위해 그 미니 박물관을 찾을 것이다. 후손이 찾아올 시설물을 누가 감히 함부로 다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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