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문제와 군축 문제는 두 가지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문제이다. 북한이 왜 핵을 보유해야만 했는가. 재래식 무기 경쟁으로는 남한을 당해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남한은 매년 50억 달러어치의 신무기를 사재고 있다. 그러나 지금 북한은 어떠한가. 중국과 구소련으로부터 무기 원조가 중단돼 있다. 단 한 대의 전투기라도 수입할 수 있는 달러가 없다. 이는 머지 않은 장래에 북한이 군사 안보에서 두손드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나라든지 이러한 입장에 놓이게 되면 핵무기와 같은 공갈 무기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울 것이다.
핵무기 하나만 가지면 북한은 100퍼센트의 억지력을 갖게 된다. 남한에 수천억 달러어치의 재래식 무기가 쌓인다해도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엄청난 가치를 갖는 핵무기를 그 영리한 김정일이 단돈 40억 달러의 경수로와 맞바꾼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바보일 것이다. 경수로와 맞바꾸는 것은 미래 핵일 뿐이다. 과거 핵이 없으면 북한은 절대로 미래 핵을 팔 수 없다.
과거 핵은 없는데 미래 핵마저 팔아 보라. 이는 북한이 남한의 엄청난 재래식 무기 앞에서 무장을 해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핵 문제를 원칙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에게 확실한 안보를 보장해 줘야 할 것이다. 바로 주변 4강과 유엔이 보장하는 평화협정과 남북한 상호 군축인 것이다.
이처럼 핵문제는 군축 문제와 분리해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정부는 지금까지 군축 문제는 접어 둔 채 북한이 마지막 밑천으로 가지고 있는 핵카드를 공짜로 양보시키려 해왔다. 미국의 위대한 힘만 믿으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무엇이었는가. 철저하게 미국의 봉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었다. 문제는 미국의 길과 한국의 길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미국의 길을 걸어 온 데 있다.
군축은 하지 않고 북한에게 경수로를 건설해 줘보라. 경수로 건설이 완료되려면 앞으로 10년 이상이 걸린다. 10년후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은 지금에 비해 형편없이 낙후돼 버린다. 재래식 군사력이 열등해질수록 북한은 핵무기와 같은 공갈 무기에 안보를 의지해야 한다. 이는 10년 후에 북한이 핵무기에 대해 지금보다 더 많이 집착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때 가서 설사 북한에 핵이 없다 해도 북한은 마치 핵을 가진 것처럼 연막을 피워야 할 것이다. 이는 지금보다 더 높은 술수의 NCND(미국의 핵무기 정책, 핵무기에 대한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는 것) 정책을 구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차라리 핵을 가졌다고 공표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 그러나 핵을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 애매하게 연막을 피우는 것은 우리를 미치게 할 것이다.
아랍 국가들이 왜 이스라엘의 NCND정책에 미치는가. 핵을 가졌다고 공표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핵을 가졌다고 공표하는 바로 그 순간 아랍 국가들은 핵보유에 대한 명분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남북한 간의 핵문제도 이와 똑같은 것이다. 경수로 건설이 완료된 시점에서의 북한 핵 문제는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불리하게 전개될 것이다. 허리 빠지게 국민이 벌어 놓은 4조원 이상의 돈을 들여 경수로를 지원해 주고도, 우리는 얻기는커녕 더 많은 것을 잃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