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연간 쓰는 돈은 GNP의 75% 정도나 된다. 그 엄청난 돈은 구시대적 예산 회계법과 가짜 회계 그리고 고식적인 감사에만 걸리지 않으면 된다는 공무원들의 비효율적인 자세에 의해 낭비되고 있다. 예산을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현대화된 경영 도구도 없고, 투명성을 위한 회계 제도도 없다. 예산을 합리적으로 배분하는 메커니즘도 없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은 “1달러 소비에 대한 1달러 이상의 가치창조”를 내걸고 예산 관리 현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한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는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가 없었다. 그래서 한국 정부의 예산은 주인 없는 돈처럼 파행적으로 낭비되고 비과학적으로 증발돼 왔다. 일곱 가지의 개혁 내용을 담는 시스템 개발이 요구된다.
첫째, 예산배분을 시스템화하고
둘째, 예산회계법을 현대화하고
셋째, 재경원의 예산통제권을 박탈하여 각 부처에게 예산관리의 자율권을 주되 사실회계를 강요해야 하고
넷째, 각급 관리자들이 스스로 예산을 과학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현대적 재무관리 시스템을 만들어 주고
다섯째, 원시적인 회계구조를 현대화하여 문제가 스스로 노출될 수 있도록 하고
여섯째, 회계를 각 부처에 맡기지 말고 중앙 회계소에서 일괄 처리하여 여기서 산출된 회계자료를 각 부처에 제공하도록 함으로써 사실회계에 의한 재정적 통합을 기하고
일곱째, 감사원의 감사방법을 현대화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예산의 배분 및 통제권은 전적으로 재경원이 가지고 있다. 예산배분은 과거 사업에 기초해 이뤄지고 있다. 신규 사업은 무조건 억압하고, 과거부터 내려오던 계속 사업은 무조건 허가해 주는 관례를 반복하고 있다. 예산 항목별로 과거 예산에 물가상승분을 증분시켜 가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 따라서 과거의 비효율성을 시정하고 새로운 사업과 방법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있다.
교육, 국방, SOC 등에 어떤 비율로 자원을 배분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기획예산처에서도 재경원에서도 해결하지 못한다. 이에 관한 한, 국회도 눈뜬장님과 같다. 결국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자원배분 기능은 우리나라의 경우 그 누구도 갖고 있지 않다.
자원 배분은 그렇다 치더라도 배분된 자원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예산은 배급단계에서 절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비단계에서의 창의력과 합리적 경영에 의해 절약될 수 있다. 그러나 재경원은 배급단계에서 예산을 통제하려고만 할 뿐, 일단 배분된 예산에 대해서는 아무런 통제를 가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예산을 쓰는 부서는 재경원 공무원들에게 로비를 해서 가급적 많은 예산을 배정 받으려 노력하고, 일단 배정된 예산을 가급적 모두 소진해 버리려고 노력한다.
재경원의 예산 통제 사례를 간단히 살펴보자. 재경원이 통제하는 예산은 예를 들어 도마를 사는 예산, 페인트를 사는 예산, 인건비, 수용비 등과 같은 낱개 품목과 경비 항목들로 구성돼 있다. 이렇게 쪼개진 예산을 틀어쥐고 전년도 예산 액수와 비교해서 물가 상승률을 보태주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1930년대에나 있었던 일이다.
이러한 예산 통제 개념은 바뀌어져야 한다. 예산부처는 예산 항목 하나하나를 직접 통제하려 하지 말고 각 부처로 하여금 가장 효율적으로 예산을 관리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필요한 시스템을 만들어 주는 일부터 해야 한다. 예산을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배급 단계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사용 단계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감사원은 과거에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를 구식 규정과 그들의 제한된 시각을 가지고 칭찬 받아야 할 공무원까지고 처벌하고 있다. 예산계획은 미래에 대한 예측이다. 이 세상에 미래를 100% 예측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예산 회계법은 대략적으로만 세울 수밖에 없는 예산을 100% 소진하기를 강요하고, 현장 관리자들의 창의력을 계발시킬 수 있는 융통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그래서 더러는 낭비인줄 뻔히 알면서도 보신을 위해 낭비하고, 더러는 가짜 자료를 꾸며가면서 감사에 대비한다.
우리나라 예산 집행의 바이블이라는 예산회계법을 보자. 우리의 예산회계법은 1961년에 일본법을 베낀 이래 15회의 개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내용은 총칙, 예산, 결산, 수입, 지출, 계약, 시효, 국고금 처리, 기록보고, 잡칙 등 11개장 97개조로 구성돼 있으며, 법령집 20쪽 분량에 수록돼 있다.
예산회계법의 입안과 회계 모두가 재경원장관 소관으로 돼 있다. 일반 국민들이 쉽게 알 수 없는 예산과 회계라는 두 가지 전문 기능이 모두 재경원장관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는 것이다. 이는 견제와 균형 원칙에 크게 어긋나며 예산관리 이론상 난센스다. 국가의 운명을 재경원장 한 사람에게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우리의 예산회계법은 전근대적인 법이다. 회계연도 독립의 원칙이 있다. 이는 당연도 예산을 당연도에 소진시키라는 법이다. 이에 따라 감사를 하기 때문에 각 부처는 남는 예산을 소진하기 위해 온갖 비리와 파행을 자행한다. 법이 낭비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목적 외 사용금지라는 원칙도 있다. 정신과 취지만을 보면 그럴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목’(目)으로 분류된 예산항목 상호간의 이동금지와, ‘세항’으로 분류된 구매 품목 상호간의 이동금지로 운용되고 있다. 재료비 예산이 남아돌고, 노임 예산이 모자라도 이들 간의 이동이 금지돼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업무를 실제로 집행하는 부서는 재료비 예산을 현실적으로는 임금 예산으로 사용하고 가짜 영수증을 구해다 소위 ‘가라정리’(가짜정리)라는 것을 할 수밖에 없다. 공무원 사회에 은밀한 유행어가 있다. “행정은 100% 가라다.” 사지도 않은 재료 구매비 영수증을 얻으려면 재료상회에 돈을 줘야 한다. 이렇게 작성된 가짜 자료를 가지고 회계 서류를 작성한들 그 자료들이 무슨 통계적 의미를 갖겠는가?
예산의 이월금지라는 조항도 있다. 물론 사전 계획에 의해 이월되는 ‘명시이월’이라는 것은 합법적으로 인정돼 있다. 그러나 집행을 하다 보면 외국과의 협상이 잘 진전되지 않아 부득이 이월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 ‘사고이월’이라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이월 사유를 작성해서, 재경원과 감사원에 제출해야 한다. 이는 소관부처에 엄청난 부담이다. 그래서 각 부처는 불리한 계약이라도 무조건 해외로 송금해 버린다. 이러한 돈은 대부분 사기를 당한다. 돈을 먼저 받은 외국 업체가 불량품을 던져놓고 가기 때문이다.
최저가 낙찰제도 있다. 아무리 싼 제품도 초기에는 그럴 듯하게 보인다. 법에 따라 최저가로 응찰된 제품을 선택하다 보면 단 1년도 안돼서 고장이 난다. 응찰한 업체의 역사적 신용은 철저히 무시된다. 겉만 번지르르 하게 만드는 불성실한 업체가 돈을 버는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산서의 골격인 예산 과목 구조도 상식과 동떨어져 있다. 상식과 일치하지 않는 낱말로 표현돼 있고, 상식적인 분류 개념과는 동떨어진 누더기식 분류가 지배하고 있다. 분류에서 체계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런 과목 구조에 때라 예산이 작성되기 때문에 투명성이 상실되고 편법이 무성하게 된다. 설사 국회의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덤벼도 얽히고설킨 분류 체계에서 잘못을 발견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담당자를 불러 따진다 해도 그 역시 횡설수설할 수밖에 없다.
예산 구조 중에 ‘목’(目)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미국의 EOE (Element Of Expense)에 해당한다. 비용의 성질별 분류 체계다. 유사한 품목들, 유사한 경비들을 묶어서 이름을 붙인 것들이다. 마치 동식물을 분류할 때 파충류 과냐 포유류 과냐 하는 식의 분류다.
비용을 성질별로 분류하는 이유는 같은 성질을 갖는 비용 요소들을 한 묶음으로 분류해야 물가 예측을 비교적 정확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가상승률 10%짜리 품목과 30%짜리 품목을 하나의 묶음으로 분류해 놓으면 ‘목’의 변화율을 예측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목’은 잡탕 요소로 구성돼 있다. 파충류 과에 포유동물이 들어가 있는 식이다. 모두가 형식적이고 상식 분류와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의 양식에 따라 예산을 작성하는 한, 국회는 영원히 장님일 수밖에 없다.
창고에 페인트가 그득했다. 이를 관찰한 기관장이 다음 해에는 페인트 예산을 반영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에 대해 부하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만일 다음 해에 페인트 예산을 ‘제로’로 해놓으면 그 이후부터는 페인트 예산을 다시 배정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재경원이 ‘계속사업’만 살려주고, ‘신규사업’은 불허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씩이나 파고 묻은 도로를 여섯 번째 파헤치는 것을 보고, 공무원의 친구에게 “이제 더 이상 묻을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땅을 또 파느냐”고 물었더니 그 공무원은 남는 예산을 정리하기 위해서 또 파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이 기막힌 사실에 대해 우리는 공무원의 의식을 한탄하겠지만 그 공무원 입장에서는 이것이 당연하다. 예산을 남기면 공연히 “윗분들만 행정적으로 번거롭게 해드리기 때문”이다.
남는 예산을 처리하기 위해 연말이면 멀쩡한 보도블록이 바뀌고, 불필요한 곳들에 신호등이 설치되고, 모험을 감수해 가면서 외국 업체에 무리하게 선금을 지불한다.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미국은 3/4분기 지출을 연간 예산의 30% 이내로 통제하고 있지만 우리에겐 그런 규정이 없다.
우리 정부의 각 부처와 청와대에는 제도개선 업무를 전담하고 있는 조직이 없다.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직자들은 많고, 제도를 개혁하려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모든 사람들이 허술한 제도를 악용하여 온갖 파행을 저지를 것이다.
예산 배분, 집행의 효율화, 회계 및 감사, 분석과 평가 등 국가 자원을 실질적으로 경영하는 일들은 재경원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 그러나 재경원 사람들은 시스템 개선에는 관심이 없고 칼자루를 움켜쥐고 권한을 행사하는 데에만 맛 들려 있다.
3공 때만 해도 정부부처에 제도개선을 위한 조직들이 편성돼 있었다. 그러나 그 후부터의 대통령과 장관들은 시스템의 허점을 악용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이러한 조직들을 해체해 버렸다. “제도가 문제냐, 운영이 문제지”; 이 말은 제도개선 메커니즘 자체를 없애버리는 데 명분으로 활용됐다.
그러나 한국엔 제도다운 제도가 없다. 그래서 파행과 시행착오가 반복돼온 것이다. 훌륭한 제도는 성악설에 근거해야 한다. 성악설을 전제로 만들어진 정교한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견물생심을 부추겨온 것이다.
전문가도 문제다. 한 사람의 전문가는 한 사람의 프로급 시스템 분석가는 수만 명의 공무원이 할 수 없는 복잡한 국책 사업에 대한 의사결정을 단시간 내에 척척 해내고, 이 부처, 저 부처에서 제각기 따로 놀던 수만 개의 계획을 하나의 유기적 시스템으로 결합해 낼 수 있다. 이들이 만들어낸 단 한 개의 소프트에어가 수십만 공무원이 달려들어도 할 수 없는 일을 무인 포스트 개념으로 척척 해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