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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 노근리 비극과 서울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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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8 19:27 조회12,0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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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비극과 서울의 비극

노근리는 충북 영동군 철로변 마을로 1950년 7월26일 학살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미1기병사단의 작전지역이었다. 더러는 노근리 비극을 미군의 도덕성에 결부시키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노근리 진상을 밝혀야 하는 목적은 두 가지로 제한돼야 한다. 하나는 다시는 똑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교훈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희생자들의 회한의 삶을 뒤늦게나마 만져주고 보살펴주기 위한 것으로 국한돼야 할 것 같다.

AP통신이 미군의 공식문건 2건과 130여 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현장을 현미경적으로 재현해내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그 자체로 소중한 일이지만 노근리 사건이 전체 전쟁중에서 어떤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를 거시적으로 뒤돌아보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18만명의 인민군은 609문의 야포와 1,000여문의 박격포를 쏟아부으면서 272대의 탱크를 몰고 파죽지세로 남침을 감행했다. 전선은 겉잡을 수 없이 밀리고 있는데도 국군은 연일 대승을 거두고 있다는 방송만 했다. 의정부가 유린됐을 27일 06시에야 비로소 한때나마 국군이 밀리고 있다는 방송을 했다. 놀란 150만 서울 시민들이 급히 짐을 꾸려 한강교로 몰렸다.

그때 국군은 의정부를 다시 탈환했다며 또다시 승전보를 방송했다. 피난길을 떠나던 일부 시민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일부 시민들은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6.28일 새벽 2시15분, 어이 없게도 한강교가 갑자기 폭파돼 버렸다.

다리를 메운 피난민과 국군들이 목숨을 잃었다. 포격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닥아오자 집으로 돌아갔던 시민들이 한강으로 밀려와 아수라장을 이뤘다. 6.28일 오전 11시 30분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이때까지 서울을 탈출하지 못한 시민들중 상당수가 북한군의 앞잡이가 되어 지도급 인사들을 학살했다. 개전 당시 98,000명이었던 국군은 6.28일 당시 불과 22,000명에 불과했다.

군이 사실을 사실대로 방송만 해주었어도 그리고 한강철교만 조기에 폭파하지 않았어도 수만명의 지도급 인사와 시민들의 목숨을 절단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국민들이 겪었던 악몽같은 수난은 살아있는 사람이나 죽은 이들이나 똑같이 겪었다.

6.29일 06시 일본에 있던 맥아더 사령관이 발빠르게 C-54수송기를 타고 한강 남쪽 제방에 도착했다. 그는 한국군에 방어능력이 전무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6.30일 미24시단에 출동명령을 내려 인민군을 충주 이북에서 방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7월1일 부산에 도착한 16,000명의 미24사단은 7.22일까지 오산, 옥천 전투를 거치는 동안 8,000여명을 잃었다.

사단장인 딘소장은 중상을 입은 부하에게 물을 떠다주려다 절벽에 떨어져 36일간 민간인 집에 숨어있다가 한국인의 밀고로 북한군에 포로가 됐다. 미25사단은 7월10-15일 사이에 부산항에 상륙하여 의성, 상주를 잇는 충청 및 경북 지역에서 북한군의 주공을 저지하다가 작전 6일만에 3천여명의 손실을 보았다.

7월18일 영일만에 상륙한 미1기병사단은 바로 그 영동지역에서 북한군 주력을 저지하기 위한 치열한 방어전을 폈다. 충북 남단 지역을 나란히 방어하고 있던 25시단과 1기병사단은 피란민 때문에 골치를 않았다. 임신부가 소형무전기를 숨기고 접근해와 북한군 관측장교 역할을 해주었고, 미군 보급차량이 갑자기 피난민들로부터 총격을 받기도 했고, 피난민이 묻어놓은 지뢰에 피해를 입었기도 했다.

북한군은 미군을 공격하는데 피난민을 총알받이로 이용했고, 지뢰제거용으로 이용했다. 미군은 이들 피난민을 쏘아야 할지 실로 난처해했다는 기록도 있다. 임신부, 애기를 업은 엄마들로부터 총격을 받은 미군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때로는 제정신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노근리 비극은 이렇듯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전쟁문화의 일각일 뿐, 이제와서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전에서 아들을 잃고 있을 때 한국군 장군들은 그렇질 못했고, 미군이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을 때 한국군은 대오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채 쫒기고만 있었다.

한국 정부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UN안보리는 7월7일 UN군 창설을 결정했고, 7월8일 맥아더 원수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7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어린 한국군의 지휘를 부탁했다. 미국이 아니었다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킬링필드의 제물이 됐을 것이다. 노근리 비극은 이러한 큰 그림 속의 하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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