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경영 | 토의가 내는 지휘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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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11-19 15:03 조회12,36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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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는 사공이 열이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말들 한다. 하지만 북한의 군대사회에서는 신기료장수 세 사람이면 제갈공명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한다. 이는 필자가 1986년에 북한으로부터 탈출한 두 사람의 대위출신이었던 신중철과 이웅평으로부터 많은 사례들과 함께 들은 말이다. 한국사회에서는 토의문화가 형성돼 있지 못한 반면 북한 군대에서는 “적을 이기는 방법”에 관한 한, 토의문화가 상당히 발달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조종사들은 한강교 하나하나를 정해놓고 몇 대의 전투기가 무슨 무기를 사용하여 어느 곳을 어느 각도로 공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토의에 열을 올렸다고 한다. 교량의 구조와 콘크리트 강도는 간첩들이 보낸 사진, 도면 그리고 플라스틱 봉지에 넣어 보낸 콘크리트 조각을 분석해놓고 그 자료를 가지고 열띤 토의를 했다는 것이다. 토의는 자고나면 시작하는 생활의 일부라 했다.
전방에 근무하는 북한하사관들은 계곡 물을 가운데 두고 한국군과 인민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상대방에게는 그 물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면서 인민군만 그 물을 먹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토의를 하고, 부산까지 가는 진격 루트에 대해서는 하도 많이 토의가 되어서 눈을 감고도 훤히 기억한다고 한다. 각 루트 선상에 존재하는 한국군의 탄약고와 유류저장소들을 어떤 방법으로 탈취할 것인지에 대한 방침들도 토의를 통해 이미 자동화 시스템처럼 작성되어 있다고 했다. 그만큼 남한에는 간첩들이 많이 필요한 것이다. 인민군은 군대생활을 얼마나 오래 하던 한번 배치된 부대를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모두가 한 지역의 지역전문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포병 소위시절 월남전에 참전했을 때 매우 귀중한 사례를 관찰한 적이 있다. 같은 중대에 소속된 보병 소대장 한 사람은 매복이나 작전을 나갈 때 병사들을 인접 모래밭으로 이끌고 나갔다. 매복할 지점에 대한 지형을 모래와 풀 등으로 만들어 놓고 매복을 나가면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가, 그리고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소대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이런 것들을 토의했다. 평소에 똑똑하다고 이름 난 소위들은 작전에서 많은 피해를 보았지만 이 이름 없고 학벌 없는 소위는 병사들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도 최고의 성과를 냈다. 토의를 통해 병사들은 익숙해진 지형에서 자기 생명을 보호하는 방법에 대해 많은 상상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캄캄한 밤중에 상황이 벌어져도 각 병사는 침착하게 자기가 맡은 일을 해낼 수 있었다.
필자가 여기에서 이런 사례를 드는 이유는 생명이 달린 전쟁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전 훈련과 사전 시물레이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며, 막연한 훈련과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목적에 직결되는 구체적인 것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훌륭한 훈련, 훌륭한 시뮬레이션을 갖기 위해서는 토의를 통해 지혜와 아이디어를 이끌어 내야 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힘을 '시너지를 내는 방향'으로 합치면 승수효과 즉 곱하기 효과를 낼 수 있지만 시너지를 내지 못하는 방향으로 합치면 한 사람의 힘보다 더 작은 힘밖에 내지 못한다. 그래서 배가 산으로 올라가고 때로는 하늘로도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면 시너지를 내는 토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책을 찾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필자는 가끔 의사결정을 합리적으로 할 수 있도록 작성된 매뉴얼이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을 만난다. 하지만 이런 매뉴얼로 의사결정을 잘 할 수 있다면 미국은 어째서 수리공학으로 무장된 분석가들을 그토록 많이 교육시켰겠는가? 토의에 대한 매뉴얼도 그래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의 토의문화는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일본 토의의 핵심 메커니즘은 QCC(Quality Control Circle) 즉 분임토의이고, 이로 인해 일본은 오늘날 품질 및 신용의 1등국이 됐다. 일본 기업에서는 토의가 생활화되어 있는 데 한국은 어째서 안 되는가? 어떤 사람들이 토의를 이끌면 좋은 성과를 내는데 왜 다른 사람들이 토의를 이끌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심지어는 토의의 장이 인신공격의 장이 되고 싸움터가 되고 마는가?
정부에는 500개에 달하는 위원회들이 존재한다. 토의를 통해 좋은 아이디어를 달라는 뜻에서 설치된 것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위원회가 생산성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이는 위원장의 토의 유도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토의를 통해 문제의 본질을 정의해 내고, 그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위원들의 창의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딱딱한 분위기에서 형식적으로 각 참여자의 발언시간들을 통제하는 타임 키퍼(time-keeper)로서의 역할만 하고 있다. 지역에서 유명한 대학의 학장들을 위원장으로 위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은 기업체 간부들보다 오히려 더 관료주의적인 성향이 있다. 대부분이 아이디어의 촉진자(facilitator)로 역할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아이디어의 창출을 방해하는 방해자(obstructor)로 역할하고 있다. 그래서 총론들만 가지고 공방 하다가 헤어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수 십 명의 위원들이 수십 시간을 보내고, 컨설팅 회사에게 수억 원씩의 과제비를 주어가면서 연구를 시키지만, 진행자의 토의진행 요령의 미숙으로 인해 성과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일본의 유수한 기업들에는 우열을 가리지 못할 만큼의 토의문화들이 형성돼 있다. 하지만 책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경우는 토요타의 토의문화다. 일본 QCC의 진원지는 토요다자동자이고, 토요다 QCC의 아버지는 통계학자인 가오루이시까와 박사였다. 그는 토요다의 1개 팀을 6개월간 훈련시켜 성공사례를 만들어 주었다. 일단 성공하고 나니 토요다는 성공사례가 되었고, 토요다에 심어준 가오루 이시까와 박사의 토의 방법은 전국으로 확산돼 나갔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분임토의를 어떻게 시작했는가? 일본이 하나의 성공사례를 만들어 그 방법을 확산시킨 반면, 한국에서는 “분임토의가 좋다니 우리도 한번 해보자” 하는 식으로 CEO들이 명령을 내렸다. 분임토의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기술 없이 공문에 의해 “몇 월 며칠부터 동시에 실시할 것” 이런 식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이렇게 모범 사례 없이 시작한 분임토의는 감정싸움으로 변하고 때로는 불만을 토로하는 일부 근로자들의 성토장이 돼 버렸다.
필자는 소위 때부터 분대장들과 토의를 시작했고 월남전에서 포대장을 할 때와 중령-대령 시절에 국방연구원에 있으면서 여러 사람들을 지휘할 때마다 토의를 생활화했다. 토의는 필자의 근무수단이었던 셈이다. 1966년은 필자가 소위로 임관한 해였다. 그해 겨울. 제2포대장인 모 대위는 부대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나마 얼음판에 미끄러져 장기 입원을 했다. 그 포대장의 자리를 육사를 갓 졸업한 필자가 임시로 맡게 됐다. 퇴근 시간만 되면 예외 없이 대대장이 예하 지휘관들과 참모들을 불렀다. 지시 사항들이 떨어지면 대부분의 장교들이 얼굴을 찡그렸다. 퇴근이 늦어지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상을 찡그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인데, 구태여 대대장을 불편하게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밝은 표정으로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문제없습니다". 정말로 문제없다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니었다. 분대장들과 토의를 하면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미8군의 지휘검열이 있다 하면 지휘관들이 아주 긴장을 했다. 추운 겨울 날 저녁, 대대장으로부터 숨 가쁜 지시가 떨어졌다. "내일 새벽 6시에 8군 출동태세 점검이 있으니 만전을 기하라" 생전 처음 당하는 일이라 공포감마저 들었다. 경험이 많은 고참 대위들은 포대로 돌아가 간부들에게 엄하게 지시를 내렸다. "내일 새벽 미8군 출동태세 지휘검열이 있을 예정이다. 각자는 적재카드를 찾아놓고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 잘못하면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다. 알겠나?" 이렇게 하고 이내 퇴근들을 했다. 오랜 경험에 비춰볼 때 그렇게만 하면 잘될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출동준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조차 모르는 풋내기 소위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필자는 간부들을 모아놓고 명령의 취지를 전달했다. 이에 대해 하사관들은 "소대장님, 이런 일, 한두 번 해봅니까? 걱정 마시고 퇴근하십시오" 이렇게 건의를 했다.
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1개 분대에 대해서 만이라도 간단히 예행연습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 나이 든 하사관들이 반갑지 않은 눈치를 보였다. 얼큰한 돼지 찌개와 소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내무반 마루에 분필로 트럭적재함 크기의 네모를 그리게 했다. "지금 비상이 걸렸다고 가정하고 이 박스 안에 전투장비를 실어보십시다." 포병에는 장비와 물자가 많다. 출동하려면 차량마다 많은 것들을 실어야 한다. 빠짐없이 싣고, 찾고 싶은 것을 쉽게 찾아내기 위해서는 어느 물자가 어느 차량 어느 위치에 실려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수단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손바닥 크기의 "적재카드"였던 것이다. 어떤 주부는 냉장고의 각 위치에 무엇이 저장되어 있는지를 그림으로 그려 냉장고 문에 부착한다고 한다. 적재카드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적재카드 하나를 꺼내보라고 했다. 그 카드에 따라 장비를 하나하나 실어보았다. 문제없다던 적재카드에 문제가 많았다. 적재 위치와 적재 순서가 비현실적인 경우가 많았다. 실어야 할 장비가 어느 창고에 보관돼 있는지도 몰랐다. 찾는 장비가 무거운 물건들 속에 감춰져 있어 꺼내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자주 꺼내야 하는 물자가 맨 밑에 실리도록 작성돼 있었던 것이다. 이동 중에 물자들이 이리 저리 요동을 치도록 작성돼 있었다. 필자가 문제들을 지적하자 모두들 동감을 했는지 간부들과 병사들이 시키지도 않는 토의를 했다.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고 스스로 풀기 시작했다. 문제를 발굴해내는 데도 병사가 최고였고, 대책을 내놓는 데에도 병사가 최고였다. 새벽 2시가 돼서야 모든 문제가 정리됐고 새로운 적재카드도 만들었다.
비록 몸은 고단했지만 병사들은 다음날 아침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딱 부러지게 외웠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공기마저 팽팽하게 얼어붙은 새벽 6시. 서슬 퍼런 비상이 걸렸다. 필자가 지휘하던 제2포대는 40분도 안돼서 질서정연하게 "출동준비완료"를 우렁차게 보고했다. 대대장님 이하 모두가 놀랐다. 그러나 대위들이 이끄는 포대들은 2시간이 지나도 끝날 줄 몰랐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대위들이 병사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막대기를 던지고 소총을 휘둘렀다. 병사들은 성난 장교들을 피해 바쁘게 뛰어다녔지만 뛰는 양에 비추어 성과는 저조했다. 경험이라는 것은 조직적인 사고력 앞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비판 없이 쌓아온 경험은 두뇌만 퇴화시켰다. "엄명"은 부질없는 존재였다. 필자는 엄명을 내린 적이 없다. 협박을 한 적은 더더욱 없다. "자네들만 믿네, 잘 들 해주게. 잘 끝내고 우리 회식 한번 하지." 이렇게 한 적도 없다. 잘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필자를 예쁘게 여긴 대대장은 일주일에 두 번씩 포대 앞에 1호차를 보냈다. 그럴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병사들이 필자에게 달려와 "소대장님, 1호차 왔습니다."하며 매우 즐거워들 했다. 그들이 따르고 좋아하는 소위를 대대장이 끔찍하게 사랑해서 저녁먹자 데리러 오셨으니 얼마나 즐거웠겠는가? 대대장님은 필자를 그의 집으로 태우고 가다가 가게에 들려 2홉들이 소주 한 병을 사서 자로 재듯이 반반씩 나누어 반주로 마시곤 했다. 간부들과 토의를 하면 안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은 이때부터 굳어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근무했던 국방연구원에서 있었던 사례 하나만 더 보태고자 한다. 미국의 모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던 한국인 교수를 연구소로 유치한 적이 있었다. 연구소의 계급은 호봉이었고 새로 유치하는 교수에게도 호봉을 주어야 했다. 너무 높게 주면 기존의 간부들이 불평할 것이고, 너무 낮게 주면 유치학자를 서운하게 할 판이었다. 회의 진행자인 부원장이 8명의 간부를 불러 회의를 했다. 인사과에서 그의 경력을 기계적으로 해석해서 7.2호봉이라는 계급을 산출해냈다. 진행자는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면서 각 간부의 의견을 말해달라고 했다. 맨 처음에 대답한 사람이 7호봉을 제안했다. 그러자 다음 사람들도 돌아가면서 ‘동감’을 표했다. 필자가 맨 나중에 앉아 있다가 7호봉을 제안한 간부와 동의를 표시한 간부들에게 “왜 7호봉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까” 하고 물었다. 모두가 대답을 못했다. 단지 사사오입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사오입을 하자고 간부회의를 소집했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회의의 형식은 나무랄 데 없는 민주주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 회의의 질은 형편없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 모이신 간부들은 오직 7.2 라는 숫자가 쓰인 종이 한 장 받아 쥐고 있을 뿐입니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토의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논리가 전개되고, 그 논리에 의해 각자는 자기의 마음을 정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정한 후에 각자의 의견을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대해 사회자는 이렇게 물었다. “그 말씀은 옳은 말씀인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정보가 도출되고 논리가 전개될 것인지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필자는 유치학자를 회의장에 불러 차를 함께 마시자고 했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엄청난 정보였다. 차를 마시면서 간단한 질문들을 한 후 그를 내보낸 후 필자가 양해를 얻어 칠판으로 나갔다. "자, 유치학자를 보셨지요. 유치학자와 견줄 만한 기존 연구원들의 이름을 열거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자기 휘하에 있는 한두 명씩의 이름을 거명했다. 그 이름들을 칠판에 써놓고 한사람씩 견주어 갔다. 누가 더 높고 낮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들이 백출됐다. 마지막에는 김 박사보다는 높고 이 박사보다는 낮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그는 9호봉으로 결정되었다. 7호봉과 9호봉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한국의 조직들에서 토의문화가 정착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진행자의 탓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간부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도 해봤는데 안 되더군요, 일본과는 달리 한국문화에는 맞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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