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국제 규정을 어기면서 핵을 개발했다. 남한은 손해를 보면서까지 규정을 준수했다. 상식대로라면 북한은 벌을 받고 남한은 상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에게 상을 주고 남한에게는 그 상금을 물어 내라고 했다. 더욱 더 한심한 것은 남한 정부가 이를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이 물어야 할 경수로 비용을 남한이 대주면, 미국이 차차 북한의 과거 핵을 규명해 줄 것이라는 자체 꼬임에 빠졌기 때문이다. 미국이 과거 핵을 증명해 줄 것인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미국은 절대로 과거 핵을 증명해 주지 않는다.
북한은 과연 과거 핵을 가졌는가. 사실 이 문제는 구태여 때질 필요가 없다. 따져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미국도 북한도 이를 증명해 주지 않는다. 증명되지 않으면 북한은 NCND정책을 택할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운명은 북한의 NCND정책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한다. 현 정권의 경직된 사고 방식으로 이러한 운명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 핵의 존재 여부를 따져보는 것은 차기 정권을 위해 매우 필요하다. 많은 국제 정치 학자들이 북한의 과거 핵을 점치느라 애썼다. 그들은 주로 외국에서 산발적으로 나오는 정보를 가지고 점을 쳤다. 점을 쳤다기보다는 저명한 외국 학자들과 미국 정부 관리들의 발언을 인용하는 수준이었다.
북한에 핵이 있느냐 없느냐를 한국인이 과학적으로 증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인용했던 자료들은 모두 외국 기관들로부터 나온 것들이었다. 소위 남들에게 ‘들어서 아는 정보’ 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정보들은 미국의 이익에 따라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는 것들이다. 북한에서 추출될 수 있었던 플루토늄의 양을 가지고 핵무기 보유 여부를 점치려 했지만, 플루토늄이라는 물질은 국제 암시장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폐쇄된 북한 사회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핵무기를 IAEA라는 감시 기구를 통해 발견해 낸다는 것은 마치 잔디밭에서 바늘을 찾는 일과도 같은 것이다.
수리공학도들에게 가장 유용한 격언이 있다. 소수점까지 자세하게 계산을 해도 그림 자체가 삐뚤어져 있을 수 있으며, 주먹구구식으로 따져도 전체의 윤곽을 올바로 잡을 수 있다는 말이다(Precisely wrong, Approximately right). 나는 북한 핵을 수리적으로 계산해 내려는 이들에게 바로 이 말을 들려주고 싶다.
시스템을 알면 그 시스템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현상들은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현상을 보면 시스템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북한이 왜 과거 핵을 가졌는지를 추정하려 한다.
북한은 이미 과거 핵을 가지고 있다. 이는 네가지로 추정될 수 있다.
첫째는 북한이 [미래 핵] 동결에 합의했다는 사실이다. 과거 핵은 없는데, 미래 핵까지 팔아보라. 북한은 남한의 엄청난 재래식 무기 앞에 두손드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북한의 [과거 핵] 하나는 수천억 또는 수조억 달러어치의 가치를 갖는 것이라고 앞에서 말했다. 그 엄청난 무기를 단돈 40억 달러와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 북한은 이미 15년 전(1980)에 잠수함을 독자 개발했다. 이는 남한에 비해 엄청난 능력이다. 1974년부터 시작된 남한의 핵 개발이 미국에 의해 저지받지 않았더라면 남한도 지금쯤은 핵무기를 보유했을 것이다. 북한의 엄청난 군사 기술을 가지고도 40년동안에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셋째, 미국이 북한에 질질 끌려 왔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자존심의 국가다. 북한 핵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미국은 그 엄청난 수모를 인내하면서 테러 국가인 북한과 자리조차 마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수모를 겪으면서도 미국은 겨우 미래 핵 동결에 만족해 하고 있다. 과거 핵을 40억 달러에 살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미국이 더 잘 알고 있다.
넷째, 북한 핵을 다루는 데 있어 미국에게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북한이 핵을 갖기 전에는 갖지 못하도록 북한을 몰아쳐야 한다. 그러나 일단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으면 미국은 북한을 포용해야만 한다. 미국이 북한을 몰아치면 북한은 미국이 가장 무서워하는 일을 충분히 벌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간단한 일은 북한이 핵 보유 사실을 공표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미국의 NPT리더십은 끝장을 맞는다. 카터의 북한 방문을 기점으로 미국의 정책은 몰아치기에서 포용하기로 바뀌었다. 카터의 방북을 계기로 미국은 북한의 과거 핵을 확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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