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시민혁명’을 목격하며 사회주의 체제에 회의를 느낀 북한 미술가 조모(38)씨가 지난 8월 주이집트 한국 대사관을 통해 망명했다. 조씨는 지난 2월 30년 철권통치를 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실각하자 남한으로의 망명을 결심했고, 지난달 입국해 국내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17일 “평양에서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2개월 전 대낮에 이집트 카이로 도키 지역의 한국 대사관에 짐을 싸들고 와 망명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외교 당국에 따르면 조씨는 2006년 북한에서 이집트 인테리어 회사에 파견됐다. 그는 이집트군 장성 등 무바라크 정권 고위층 인사들에게 벽화를 그려주고, 카이로의 메디나트 안 나스르(아랍어로 ‘승리의 도시’라는 뜻) 지역 고급 빌라 등에 실내장식을 하며 2년간 외화벌이를 했다.
조씨는 2008년 파견을 마치고 평양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공항에 가지 않고 잠적했다. 망명한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눈 또 다른 외교부 관계자는 “조씨는 아무리 일을 해도 번 돈을 가질 수 없는 북한 사회주의 체제에 회의를 느껴 귀국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어 “북한의 이집트 외교력은 과거 우리나라보다 강했지만 10년 전부터 계속 약해져 잠적한 조씨를 찾을 인력조차 부족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조씨는 3년간 이집트 여성과 동거하며 중국인으로 위장, 북한의 감시를 피해 작품활동을 했다. 생계는 인테리어 일을 하며 이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에는 카이로 오페라 하우스 미술관에서 ‘자유’라는 주제의 전시회에 중국인 이름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외교부 관계자에 따르면 조씨는 카이로에서 잠적한 뒤에도 남한으로의 망명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수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 초 일어난 이집트 시민혁명을 체험한 뒤 남한으로의 망명을 결심했다. 그는 20여년 전 북한과 이집트가 공동으로 지은 이집트 군사박물관에 새겨진 북한인민군창작단의 청동부조 작품, 김일성과 무바라크의 우호적 관계를 보여주는 돌판을 보며 권력의 무상함을 깨달은 것으로 전해졌다.
조씨는 국내로 들어오는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1개월여간 한국 대사관에서 머물렀다. 대사관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이집트 학생 A씨(22)는 “조씨가 페이스북으로 남한 사람과 쪽지를 주고받으며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노석조 기자 stonebir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