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을 쓸 때 수사법상 변화법의 한가지로 비약법이란 용어가 있다. 차례를 쫓아 평탄하게 서술해 나가던 문장의 흐름을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뛰어 넘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하는 표현 방법이다.
다음은 손동인 선생의 오늘의 문장강화론의 예문이다.
골목에서 어린 꼬마들이 싸우는 경우를 묘사한 글이다. 여기서 우리를 하나의 전형적인 생략법을 발견하게 된다.
<예문>
"너 나한데 이기겠니?"
"이긴다."
"그럼 우리 아버지 한테는?"
"이기겠다."
"너 경찰한테도 이기겠니?"
"이기겠다."
""니네 집에 고구마 많니?"
"많다."
"얼마만큼 있니?"
"하늘만큼"
"우리집에 그보다 더"
"우리집엔 그보다 더더"
"우리집엔 그보다 더더더"
"더더더더"
"더더더더더"
결국 '더' 자를 누가 더 많이 말하느냐로 싸움이 결판 난다. 어린이 대화에서 비약의 정도가 엄청나게 심한 경우이다. 그러나 아버지에서 결찰로, 경찰에서 고구마로....
어린이들 세게계에서 가장 힘이 세다고 생각되는 경찰 한테도 이긴다니까, 힘으로 안된다는 걸 알고, 이번에는 고구마의 양(量)으로써 대결하자는 동심(童心)임에 틀림없다.
요즈음엔 항간에서는 차기 지도자가 누구일까에 지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의견들이 난무하고 있다. 대부분의 문장에서 그 발표 되는 글을 읽어 보면 화자(話者)가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그 소견을 말하는 경우인데 너무 비약적(飛躍的)이다.
예를 드는 경우에 사실적인 사례라도 예(例)의 대상이 되는 상대를 평하거나 논할 때는 상대의 생각하는 그가 지닌 철학적인 차원의 범위 수준까지 완전히 파악하고 거론해야 마땅하다. 미국의 키신저가 만고역적의 후예 김정일의 애비의 종주국인 중국에 다녀 왔다고 그를 "빨갱이" 라고 하지 않는 다는 인식을 그 지도자적 됨됨이 수준에서 곱씹어 볼 대목이다. 적당히 알고 거기에다 지레짐작까지 하며 상대방의 속안에 들어가 본양 거침 없이 침소봉대 해 자제심 없이 책임감 없이 말하다 보면 자기 감정에 도취 되어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를 완전히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것 처럼 둔갑하는 예가 허다하게 많다.
곧 "것이다"의 어휘가 자신도 모르게 "이렇다." "저렇다."로 화법이 둔갑하고 있다. 특히 정치계통의 대화에서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이 결과는 필연적으로 내던져진 일종의 음해성 발언이 판을 치는 사회상으로 둔갑하고 만다. 종국엔 오늘날의 예를 보더라도 도처에서 사기꾼들만 양산하는 사회상으로 전락하고 마는 격이 되고 만 현실이다. 그런 뒤엔 자기가 한 말에 책임 질 줄도 모른다. 급한 김에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전쟁 하드시 상대방을 강압적으로 제압하려 든다.
어린이의 대화에서의 비약은 순수가 내재한다. 이런 경우의 비약적 대화에서는 그 대화 내용을 줄만 바꾸면 곧 시(詩)가 된다 라고 표현 한다. 그러나 경험과 학식을 가진 어른들의 대화에서 이런 비약은 가히 "노망" 수준이라 하겠다. 일고의 가치도 찾을 수 없는 썩은 언어이다. 이기기 위해서, 자기 합리화를 하기 위해서 뒷날 다 들통이 날 온갖 수단들을 책임감 없이 미리 다 동원하는데 그 결과는 종국에 가서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지경에 이르고 자신이나 그가 속한 사회가 파멸의 구렁텅리로 추락하고 만 예가 수두룩 하다. 인간 역사의 흥망성쇠의 사실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사례들이라 하겠다.
애국적 목적이든 사회 발전의 목적이든 간에 인류 발전을 위해서 자기 주장을 올바르게 하고자 할 땐 사회적 책임이 뒤 따른 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요즈음 정치계나 사회 전반 특히 종교계와 교육계에서까지 그 정도가 위험 수위를 훨씬 뛰어 넘은 우려 되는 지경이 되었다 라고들 식자들은 지적하여 말하고 있다. 현실에서 나의 위치가 어떠 한지를 모두가 자기 가슴 양심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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