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pira' 121.142.xxx.195
페이지 정보
작성자 벽파랑 작성일11-08-12 08:39 조회1,457회 댓글4건관련링크
본문
주의! 위장약, 심장약 찾는 분들을 위해 반드시 밑에서부터 읽어주십쇼!!
===========================================================================================
1. 5.18 북한 간첩 선동설
일부 극우 단체나 정치성향을 가지신분들은 5.18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혹은 북한 간첩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국시는 '반공' 이었고, 광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민주화와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실제로 5.18 집회 당시 시민들은 현재의 상황을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폭동'으로 몰릴 것을 우려하여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식의 구호를 채택했었고, 간첩으로 의심되는 자들은 잡아서 시민군 본부로 잡아들였습니다.
또한 광주에 수백명의 간첩이 침입했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휴전선 근방이라면 모를까 수도권과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에 수백명을 침투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이득도 없고, 설령 광주를 장악한다고 해서 지킬 수 있는 방법도 없었습니다.
만에 하나 간첩이 그렇게 침투를 했다고 한다면, 그건 광주의 잘못이 아니라 간첩경계를 게을리한 군의 잘못, 정확히 말하면 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몇 개월 전부터 병력을 임의대로 배치한 하나회,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회의 수장 전두환에게 있습니다.
또한 애시당초 간첩설은 당시 북한의 고위 간부였던 황장엽씨도 부정했던 내용이며, 황장엽씨는 '광주에 폭동이 일어났다길래 좋다고 지원을 해 보려고 했는데 준비를 마치고 나니 이미 정리가 되어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였고,
현재 극우 언론인 중 한 명이고, 당시 민주화항쟁을 목격했던 조갑제씨도 5.18의 간첩설을 부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분들은 북한이 5.18기념일 만든게 5.18에 북한이 관여했다는 증거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북한은 일단 남한에 반정부적인 무언가가 일어나면 자기 멋대로 기념일을 만드는 막장 국가입니다.
북한에는 이런 기념일이 최소 수십개 이상으로 알려져있고, 일예로 4.19 혁명이나 부마항쟁도 기념일이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북한의 5.18개입설을 주장한다면 4.19, 부마항쟁등도 모두 북한이 관여했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습니다.
2. 시민군의 무장화
시민군은 기아차 공장 등등을 털어서 장갑차등을 확보 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위에 언급된 장갑차나 탱크등의 화기를 시민군이 진압군을 상대로 전력을다해 사용하지 않았다는점입니다.
진압군의 전사자수를 이야기 하면서 시민군의 무장 수준을 이야기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실제 진압군의 상당수는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했습니다.
위에 언급된 탱크나 장갑차 등등으로 사망한 숫자는 넉넉잡아도 10명이 되지 않으며(직접적으로 장갑차에 의한 사망은 2명.),
5.18 진압 관련으로 사망한 24분의 장병 중 12분, 총 50%의 병력은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12분만이 시민군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사망 하셨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시민군의 최소 100명 이상의 사망에 비해 교환비가 1:10이 넘어가는 수치입니다.
그렇게 '중무장'했고, 시민군중 기계화보병이나 전차병이 없을 리가 없는데(애시당초 저런걸 탈취, 운전한 사람이라면 다룰 수 있는 사람이었겠지요)이런 교전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참고로 저정도의 교전비는 세계 2차대전 당시 빵빵한 보급과 무기체계를 갖춘 중무장한 미군과, 보급이 안돼 쫄쫄 굶으면서 마지막으로 택한 반다이 어택을 했던 일본과의 교전비율입니다.
거기다가 시민군은 지리에 익숙했습니다. 지형적으로 유리했던 시민군이 진정 중무기를 사용했다면 저 정도 교전비는 나올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5.18민주화운동 최후의 진압을 위해서 전남도청을 공격했을때 장갑차와 탱크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사망자로 대변되는 농성자의 숫자 역시 극소수였고, 정부가 동원한 병력에 비교하면 사실상 교전이 아니라 '진압' 수준이었습니다.
탱크, 장갑차등을 탈취했던 시민군이 왜 최후의 순간에는 가장 믿음직한 병기를 사용하지 않았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또한, 5.18 사건 직후 시민군은 스스로 무장해제를 결의했었습니다. 내부 갈등이 있었지만 상당수는 무장 해제하였습니다.
정말로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면 무장해제를 하는게 아니라 광주를 아예 '해방구'로 만들어서 '인민의 파도'를 만들어야 했지 않을지 싶네요.
3. 5.18의 재규명
5.18의 재규명은 김대중이나 노무현정부가 아닌, 5.18의 주요 참가 인물 중 한 명이었던 노태우 정부때부터 시작되었고, 피해자 보상 역시 노태우정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정당사를 아시면 아시겠지만, 민정당의 후신격인 민자당 출신의 김영삼대통령 정부 당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되고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12.12사태의 핵심 인물이었던 노태우가, 자기 혐오에 빠지지 않은 이상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12.12사태 이후로 이어져온 민자당의 핵심세력이 있는데 그들의 치부인 5.18을 규명하자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즉, 5.18이 날조된 단순한 폭동이었다면 핵심인물인 노태우나 그들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던 김영삼정부가 재규명 할 가치도 없었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5.18의 재규명은 스스로에게 자충수를 두는 셈이었음에도 규명이 이뤄진건 5.18이 날조되지 않은 진실이라는 간접적인 반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특정지역에서만 일어난 민주화운동, 당시 상대적으로 비주류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
군에 의해서 폐쇄되어 당시 국민들은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하지 못했던 민주화운동, 4.19나 6월항쟁에 비해 실패했다는 민주화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 사상 5.18만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은 사건은 없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사상이나 생각은 다를테니 5.18의 의의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는건 이의가 없습니다. 즉, 5.18이 민주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셔도 되고, 반대로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셔도 상관 없습니다.
하지만, 광주에 있었던 비극을 마치 '북한에 조종당했던, 멍청하고 사상적으로 비뚤어진 전라도 사람들이 일으킨 사건' 정도로 치부하는게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또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과 몇몇 사항(삼청교육대, 평화의 댐 등)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권을 이용하여 정권을 붕괴시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일부 극우 단체나 정치성향을 가지신분들은 5.18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혹은 북한 간첩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국시는 '반공' 이었고, 광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민주화와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제대로 파악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실제로 5.18 집회 당시 시민들은 현재의 상황을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폭동'으로 몰릴 것을 우려하여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식의 구호를 채택했었고, 간첩으로 의심되는 자들은 잡아서 시민군 본부로 잡아들였습니다.
또한 광주에 수백명의 간첩이 침입했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휴전선 근방이라면 모를까 수도권과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에 수백명을 침투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이득도 없고, 설령 광주를 장악한다고 해서 지킬 수 있는 방법도 없었습니다.
만에 하나 간첩이 그렇게 침투를 했다고 한다면, 그건 광주의 잘못이 아니라 간첩경계를 게을리한 군의 잘못, 정확히 말하면 쿠데타를 일으키겠다고 몇 개월 전부터 병력을 임의대로 배치한 하나회,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회의 수장 전두환에게 있습니다.
또한 애시당초 간첩설은 당시 북한의 고위 간부였던 황장엽씨도 부정했던 내용이며, 황장엽씨는 '광주에 폭동이 일어났다길래 좋다고 지원을 해 보려고 했는데 준비를 마치고 나니 이미 정리가 되어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였고,
현재 극우 언론인 중 한 명이고, 당시 민주화항쟁을 목격했던 조갑제씨도 5.18의 간첩설을 부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분들은 북한이 5.18기념일 만든게 5.18에 북한이 관여했다는 증거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북한은 일단 남한에 반정부적인 무언가가 일어나면 자기 멋대로 기념일을 만드는 막장 국가입니다.
북한에는 이런 기념일이 최소 수십개 이상으로 알려져있고, 일예로 4.19 혁명이나 부마항쟁도 기념일이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북한의 5.18개입설을 주장한다면 4.19, 부마항쟁등도 모두 북한이 관여했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습니다.
2. 시민군의 무장화
시민군은 기아차 공장 등등을 털어서 장갑차등을 확보 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위에 언급된 장갑차나 탱크등의 화기를 시민군이 진압군을 상대로 전력을다해 사용하지 않았다는점입니다.
진압군의 전사자수를 이야기 하면서 시민군의 무장 수준을 이야기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실제 진압군의 상당수는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했습니다.
위에 언급된 탱크나 장갑차 등등으로 사망한 숫자는 넉넉잡아도 10명이 되지 않으며(직접적으로 장갑차에 의한 사망은 2명.),
5.18 진압 관련으로 사망한 24분의 장병 중 12분, 총 50%의 병력은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12분만이 시민군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사망 하셨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시민군의 최소 100명 이상의 사망에 비해 교환비가 1:10이 넘어가는 수치입니다.
그렇게 '중무장'했고, 시민군중 기계화보병이나 전차병이 없을 리가 없는데(애시당초 저런걸 탈취, 운전한 사람이라면 다룰 수 있는 사람이었겠지요)이런 교전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참고로 저정도의 교전비는 세계 2차대전 당시 빵빵한 보급과 무기체계를 갖춘 중무장한 미군과, 보급이 안돼 쫄쫄 굶으면서 마지막으로 택한 반다이 어택을 했던 일본과의 교전비율입니다.
거기다가 시민군은 지리에 익숙했습니다. 지형적으로 유리했던 시민군이 진정 중무기를 사용했다면 저 정도 교전비는 나올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5.18민주화운동 최후의 진압을 위해서 전남도청을 공격했을때 장갑차와 탱크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사망자로 대변되는 농성자의 숫자 역시 극소수였고, 정부가 동원한 병력에 비교하면 사실상 교전이 아니라 '진압' 수준이었습니다.
탱크, 장갑차등을 탈취했던 시민군이 왜 최후의 순간에는 가장 믿음직한 병기를 사용하지 않았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또한, 5.18 사건 직후 시민군은 스스로 무장해제를 결의했었습니다. 내부 갈등이 있었지만 상당수는 무장 해제하였습니다.
정말로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면 무장해제를 하는게 아니라 광주를 아예 '해방구'로 만들어서 '인민의 파도'를 만들어야 했지 않을지 싶네요.
3. 5.18의 재규명
5.18의 재규명은 김대중이나 노무현정부가 아닌, 5.18의 주요 참가 인물 중 한 명이었던 노태우 정부때부터 시작되었고, 피해자 보상 역시 노태우정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정당사를 아시면 아시겠지만, 민정당의 후신격인 민자당 출신의 김영삼대통령 정부 당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되고 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12.12사태의 핵심 인물이었던 노태우가, 자기 혐오에 빠지지 않은 이상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을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12.12사태 이후로 이어져온 민자당의 핵심세력이 있는데 그들의 치부인 5.18을 규명하자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즉, 5.18이 날조된 단순한 폭동이었다면 핵심인물인 노태우나 그들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던 김영삼정부가 재규명 할 가치도 없었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5.18의 재규명은 스스로에게 자충수를 두는 셈이었음에도 규명이 이뤄진건 5.18이 날조되지 않은 진실이라는 간접적인 반증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특정지역에서만 일어난 민주화운동, 당시 상대적으로 비주류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
군에 의해서 폐쇄되어 당시 국민들은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하지 못했던 민주화운동, 4.19나 6월항쟁에 비해 실패했다는 민주화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 사상 5.18만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은 사건은 없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사상이나 생각은 다를테니 5.18의 의의에 대해서 달리 생각하는건 이의가 없습니다. 즉, 5.18이 민주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셔도 되고, 반대로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셔도 상관 없습니다.
하지만, 광주에 있었던 비극을 마치 '북한에 조종당했던, 멍청하고 사상적으로 비뚤어진 전라도 사람들이 일으킨 사건' 정도로 치부하는게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또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과 몇몇 사항(삼청교육대, 평화의 댐 등)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권을 이용하여 정권을 붕괴시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1) (서석구 변호사의 인터뷰가) 픽션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할정도로 과연 이것이 근거 있는 이야기 인가?
서석구: 서해바다를 통해가지고 그리고 큰 배로 해가지고 작은 배로 다 분산을 해가지고 조로 나눠가지고 침투해 와가지고 북한 지령대로 광주시민들을 무차별 사살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국군이 죽인 것처럼 뒤집어씌우고 올 때는 바다로 왔지만 갈 때는 산을 통해가지고 계속 산을 탔는데 낮에는 들킬까봐 그냥 잠복하고 밤에만 움직였다, 야간행군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북한에 가니까 자기들 조원들 가운데 반수가 결국은 돌아오지 못해가지고,
손석희:그러면 그 반수는 어떻게 됐다고 합니까?
서석구: 그러니까 사망한 걸로 추정하는데, 다만 이 광주사태 영웅묘지가 북한에 있고 그 62명이 어버이수령 훈장을 받은 걸로 봐서 결국은 그 62명 살아남아온 사람들하고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영웅이 안 됐겠습니까. 그래서 그 구체적인 숫자는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어떻든 북한의 영웅묘지가 광주사태 영웅묘지가 있다는 것이 충격적인 것이죠.
서석구 변호사가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인터뷰한 내용 중 일부입니다. 저는 이 부분 때문에 서석구의 주장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5.18 당시 전라남도는 6.25보다도 더 경계가 강화되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이 발발하기 직전 전국에는 비상계엄령에 내려져, 해안과 주요도로가 봉쇄돼 군인이 검문을 실시했습니다. 전라남도에서는 5월 21일 14시부로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습니다. 전 해양경찰에 해안경계태세 강화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전남일대 전 해안에서 대간첩 침투작전 부대로 31사단 93연대가 목표지역 해안을 맡았고요. 95연대가 고흥 여수 지역, 96연대가 무안 영광 지역 해안경계를 했습니다. 더구나 인구 70만 도시인 광주를 상무대, 공수부대, 기계화사단, 31사단 병력 약 2만으로 무등산 산길까지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경계가 강화될 때 600명의 무장공비가 후방지역에 해안지역에 침투했다 육로로 마음대로 이동했는데도 단 한명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서석구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모순되는 점이 있습니다. 서석구 말대로 광주에 침투했던 북한특수부대원 600명 중 절반 가량이 돌아오지 못했으며, 북한에는 돌아오지 못한 특수부대원을 기리기 위한 62기의 영웅묘지가 있다고 치죠. 그렇다면 5.18 민주항쟁 진압 이후, 국군과 무장공비와 교전 기록이 있어야 하고, 더불어 무장공비 수십, 수백명 사살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5.18 진압 이후, 단 한 차례도 대규모 교전 기록이 없었습니다. 만약 교전 기록이 있었다면 광주를 강경진압하고 들어선 제5공화국 정부는 무장공비가 개입했다고 선전을 했을 것입니다.
2)수십년이 지난 아직도 왜 이런 논란들이 끊이지 않는것인가요 ?
88년 국회 광주특위, 96년 검찰,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한 결과, 5.18 직전 신군부가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는 것과 5.18 당시 광주에서 공수부대에 의한 강경진압이 발생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따라서 정부, 국회, 법원은 5.18이 민주화운동임을 인정하고,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매년 기념하고 있습니다. 각종 여론 조사를 보면 우리 국민 중 약 85% 정도가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인정하고 있죠.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자는 국민적 합의는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극우 성향의 사람들, 신군부와 연이 닳아있는 사람들, 제5공화국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한 사람들은 전두환이 처벌되고 '5.18 폭동', '광주사태'가 복권되는 장면을 받아들일 수 없었겠죠. 최근들어 정당한 방법으로 5.18에 대한 평가를 뒤집을 수 없으니까 탈북자들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이고요. 탈북자들이 주로 접촉해서 의견을 발표하는 단체가 극우성향의 잡지인 이도형의 한국논란, 지만원의 시스템클럽이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3)그리고 위 글에서 김대중 정부가 왜 이 사실을 덮으려고 했던 것인가?
김대중 정부가 덮으려고 했다는 것도 서석구의 일방적인 주장일뿐, 사실로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민감한 문제일 수록 사실 여부를 철저하게 따져봐야지요.
손석희씨도 방송에서 '아무튼 그 말씀은 넘어온 사람들을 만나서 들었다는 그 사람들의 주장이긴 한데 그게 현실성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라고 말했죠.
5)지만원의 주장이 과연 신빙성이 있나?
1. 난무하는 유언비어
방송에서는 광주시민의 피해가 전혀 없다고 왜곡보도했습니다. 그런데 길거리에서는 공수부대원들이 지나가는 행인들까지 몽둥이로 머리를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는 강경진압을 하고 있었죠. 이 점은 보안사의 통제를 받아 사실보도를 충실하게 하지 않는 당시 언론의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죠.
2. 정체불명의 선동자들
당시 가두 방송을 하던 분은 전춘심, 차명숙이라는 분입니다. 5.18 때 선동을 잘한다고 계엄당국에 간첩으로 몰려 고문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첩 혐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3. 전남도청에 거대한 폭발물 설치
화순광업소 직원 등 (김영봉씨 등) 13명이 다이너마이트를 조립해서 광주에 전달했습니다. 조립하기는 했지만 도화선을 연결하지 않았고, 터지지 않게 주의를 했다고 합니다.
4. 장갑차를 운전하는 사람들
광주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에서 KM900 장갑차 4대가 있었는데요. 이 장갑차가 5월 21일 광주 시민에게 탈취됐습니다. KM900 장갑차는 궤도식 장갑차가 아니라, 장륜식 장갑차입니다. 조종방법도 매뉴얼방식이 아니라 오토 방식입니다. 따라서 일반 시민이라고 무조건 조종이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습니다.
시위대의 조종미숙으로 21일 장갑차 4대 중 3대가 계엄군에 회수되었습니다.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공수부대에게 두들겨 맞고 보안대 끌려가서 조사받았습니다.
5, 광주교도소 습격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국도하고 호남고속도로 정확히 바로 옆에 있습니다. 광주교도소 위성 사진 보면 호남고속도로와 광주-담양 국도와 10m 이내로 붙어있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고속도로를 타고 광주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공수부대가 교도소 주변 도로를 막고 통행을 금지했습니다. 광주 외곽을 봉쇄해서 폭도의 탈출을 절대로 허용하지 말라는 작전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교도소에서 직접 교전이 벌어진 적은 한 번도 없고, 교도소에서 500m~1km 떨어진 도로에서 공수부대가 바리케이드 친 곳에서 교전이 벌어진 사례가 있는 것일 뿐입니다.
5.18 당시 광주교도소장이었던 韓道熙씨(70)는 14일 "시민군이 80년 당시 光州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계엄사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고 주장했습니다. 韓씨는 이어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했다면 교도소 주변에 시체가 있어야지 어떻게 도로에 있을 수 있겠느냐"며 "당시 교도소에는 3공수여단 병력이 중무장하고 있어서 교도소 습격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고 계엄군이 시 인근 지역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무차별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64241)
가운데 운동장이 보이는 건물이 광주교도소입니다. 사진에서 광주교도소 왼쪽에 있는 도로는 호남고속도로이며, 오른쪽에 있는 도로는 광주-담양 국도입니다. 게다가 광주교도소의 출입구는 고속도로 쪽에 있지 않기 때문에, 고속도로를 타고 광주 밖으로 나가려던 광주 시민들은 교도소 습격 의도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은 http://www.gjdream.com/v2/news/view.html?news_type=201&code_M=2&mode=view&uid=403555 에 있음)
6. 해방구 건설
계엄군이 물러나고 시민들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학생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사실입니다. 학생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치안유지, 무기회수, 계엄군과 협상을 하기 위해 구성된 조직입니다. 스스로 해방구라고 칭한 적도 없고, 공산주의 조직인 해방구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7. 무등갱생원의 36인조 무장조
무등갱생원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마스크 썼다고 의심하는건데요. 단순히 마스크를 가리고, 복면을 했다고 불순분자로 몰아가는 것은 억지 주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계엄군은 최루탄, 사과탄 수천발을 광주시내에 터뜨렸기 때문에, 광주 시민들은 마스크나 얼굴에 수건을 두르고 다닌 것입니다. 제5공화국 시절 민주화 요구 집회에서도 마스크나 복면을 한 사람은 흔히 볼 수 있었죠.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단기간 대남공작하고 북한으로 돌아갈 사람들이 신원노출을 꺼릴까요? 남한에 남아서 계속 살 사람들이 신원노출을 꺼릴까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8. 평양방송 광주사태 실황 중계
일부 탈북자는 평양방송에서 광주사태 실황을 중계했다고 주장합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죠.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중계시설, 송신소도 없이 광주에서 수백km떨어진 평양까지 어떻게 생중계를 할까요. 만약 북한이 생중계를 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1980년 북한은 노트북, 와이브로, 고화질디지털카메라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9. 13구의 신원미상 시체
13구가 아니라 11구였고요. 2001년 DNA 검사로 11구 중 6구의 신원이 밝혀졌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1949099)
남은 5구 중에 1구는 4살짜리 아이, 1구는 40대 중년 남성, 1구는 22일 광주가 아닌 목포에서 비무장상태로 시위하다 차량에서 떨어져 죽은 자입니다. 북한이나 불순세력하고 관계가 있을 수가 없죠.
대구 지하철 참사나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에서도 신원미상자가 5명씩 되는데, 대형참사에서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문제라고 봅니다.
10. 5.18 유공자 윤기권의 월북
윤기권은 1962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광주 대동고등학교를 다니다 5.18을 맞았습니다. 5.18 진압 이후 항쟁의 충격으로 정신질환을 앓았고요. 윤기권이 월북한 행위는 분명히 잘못됐습니다. 하지만 광주 시민 수십명이 집단 월북한 것도 아니고, 정신질환자 단 한명이 월북했다고 5.18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그리고 5.18 당시 신원이 확실한 고등학생이였는데 항쟁을 주도했다거나 북한의 간첩이라는 주장은 말이 안 됩니다.
10. 간첩 이창룡 침투 사건
5월 24일 서울시경에서 간첩단 사건을 발표를 했습니다. 발표를 보면 간첩 이창룡이 광주에 들어가서 광주시민들 시위를 무장폭동으로 유도를 하고 또 선동 업무를 띠고 침투를 했다 라고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계엄군들의 검문검색이 심해가지고 광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서울역으로 왔다가 체포가 됐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창룡의 침투 사건이야 말로 광주의 경계가 삼엄했으며, 북한 특수부대 600명 침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죠.
11. 총상의 70%가 폭도들이 소유한 총에 의해 사망
사망자 중에 M16 보다 칼빈 소총으로 죽은 사람이 많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현존하는 5.18 사망자에 대한 검시 자료는 군부 측의 보안사가 작성한 것, 광주지검이 작성한 것, 광주시청에서 작성한 것으로 3가지가 있습니다. 카빈 사망자만을 따져보자면, 보안사 검시 자료는 카빈 사망자 21명, 광주지검의 검시 자료는 26명, 광주시청 검시 자료는 12명입니다. 세 자료에서 모두 카빈 사망자로 일치하는 사람은 8명입니다.
그렇다면 5.18을 폄훼하려는 사람들이 카빈 사망자가 더 많이 있다는 거짓말을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1980년에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 5.17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 등을 신군부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기록하기 위해, 제5공화국의 국방부는 1982년 '계엄사'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계엄사'에는 카빈 사망자, M16 사망자를 구체적으로 분류한 자료는 없습니다. 다만, 총상 사망자 중 88명이 폭도 자신들의
서석구: 서해바다를 통해가지고 그리고 큰 배로 해가지고 작은 배로 다 분산을 해가지고 조로 나눠가지고 침투해 와가지고 북한 지령대로 광주시민들을 무차별 사살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국군이 죽인 것처럼 뒤집어씌우고 올 때는 바다로 왔지만 갈 때는 산을 통해가지고 계속 산을 탔는데 낮에는 들킬까봐 그냥 잠복하고 밤에만 움직였다, 야간행군을 했다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북한에 가니까 자기들 조원들 가운데 반수가 결국은 돌아오지 못해가지고,
손석희:그러면 그 반수는 어떻게 됐다고 합니까?
서석구: 그러니까 사망한 걸로 추정하는데, 다만 이 광주사태 영웅묘지가 북한에 있고 그 62명이 어버이수령 훈장을 받은 걸로 봐서 결국은 그 62명 살아남아온 사람들하고 그리고 죽은 사람들이 영웅이 안 됐겠습니까. 그래서 그 구체적인 숫자는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어떻든 북한의 영웅묘지가 광주사태 영웅묘지가 있다는 것이 충격적인 것이죠.
서석구 변호사가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인터뷰한 내용 중 일부입니다. 저는 이 부분 때문에 서석구의 주장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5.18 당시 전라남도는 6.25보다도 더 경계가 강화되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이 발발하기 직전 전국에는 비상계엄령에 내려져, 해안과 주요도로가 봉쇄돼 군인이 검문을 실시했습니다. 전라남도에서는 5월 21일 14시부로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습니다. 전 해양경찰에 해안경계태세 강화지시가 떨어졌습니다. 전남일대 전 해안에서 대간첩 침투작전 부대로 31사단 93연대가 목표지역 해안을 맡았고요. 95연대가 고흥 여수 지역, 96연대가 무안 영광 지역 해안경계를 했습니다. 더구나 인구 70만 도시인 광주를 상무대, 공수부대, 기계화사단, 31사단 병력 약 2만으로 무등산 산길까지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경계가 강화될 때 600명의 무장공비가 후방지역에 해안지역에 침투했다 육로로 마음대로 이동했는데도 단 한명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서석구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모순되는 점이 있습니다. 서석구 말대로 광주에 침투했던 북한특수부대원 600명 중 절반 가량이 돌아오지 못했으며, 북한에는 돌아오지 못한 특수부대원을 기리기 위한 62기의 영웅묘지가 있다고 치죠. 그렇다면 5.18 민주항쟁 진압 이후, 국군과 무장공비와 교전 기록이 있어야 하고, 더불어 무장공비 수십, 수백명 사살 기록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5.18 진압 이후, 단 한 차례도 대규모 교전 기록이 없었습니다. 만약 교전 기록이 있었다면 광주를 강경진압하고 들어선 제5공화국 정부는 무장공비가 개입했다고 선전을 했을 것입니다.
2)수십년이 지난 아직도 왜 이런 논란들이 끊이지 않는것인가요 ?
88년 국회 광주특위, 96년 검찰,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한 결과, 5.18 직전 신군부가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는 것과 5.18 당시 광주에서 공수부대에 의한 강경진압이 발생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따라서 정부, 국회, 법원은 5.18이 민주화운동임을 인정하고,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매년 기념하고 있습니다. 각종 여론 조사를 보면 우리 국민 중 약 85% 정도가 5.18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인정하고 있죠.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자는 국민적 합의는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극우 성향의 사람들, 신군부와 연이 닳아있는 사람들, 제5공화국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한 사람들은 전두환이 처벌되고 '5.18 폭동', '광주사태'가 복권되는 장면을 받아들일 수 없었겠죠. 최근들어 정당한 방법으로 5.18에 대한 평가를 뒤집을 수 없으니까 탈북자들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이고요. 탈북자들이 주로 접촉해서 의견을 발표하는 단체가 극우성향의 잡지인 이도형의 한국논란, 지만원의 시스템클럽이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3)그리고 위 글에서 김대중 정부가 왜 이 사실을 덮으려고 했던 것인가?
김대중 정부가 덮으려고 했다는 것도 서석구의 일방적인 주장일뿐, 사실로 밝혀지지는 않았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민감한 문제일 수록 사실 여부를 철저하게 따져봐야지요.
손석희씨도 방송에서 '아무튼 그 말씀은 넘어온 사람들을 만나서 들었다는 그 사람들의 주장이긴 한데 그게 현실성이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라고 말했죠.
5)지만원의 주장이 과연 신빙성이 있나?
1. 난무하는 유언비어
방송에서는 광주시민의 피해가 전혀 없다고 왜곡보도했습니다. 그런데 길거리에서는 공수부대원들이 지나가는 행인들까지 몽둥이로 머리를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는 강경진압을 하고 있었죠. 이 점은 보안사의 통제를 받아 사실보도를 충실하게 하지 않는 당시 언론의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죠.
2. 정체불명의 선동자들
당시 가두 방송을 하던 분은 전춘심, 차명숙이라는 분입니다. 5.18 때 선동을 잘한다고 계엄당국에 간첩으로 몰려 고문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첩 혐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3. 전남도청에 거대한 폭발물 설치
화순광업소 직원 등 (김영봉씨 등) 13명이 다이너마이트를 조립해서 광주에 전달했습니다. 조립하기는 했지만 도화선을 연결하지 않았고, 터지지 않게 주의를 했다고 합니다.
4. 장갑차를 운전하는 사람들
광주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에서 KM900 장갑차 4대가 있었는데요. 이 장갑차가 5월 21일 광주 시민에게 탈취됐습니다. KM900 장갑차는 궤도식 장갑차가 아니라, 장륜식 장갑차입니다. 조종방법도 매뉴얼방식이 아니라 오토 방식입니다. 따라서 일반 시민이라고 무조건 조종이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습니다.
시위대의 조종미숙으로 21일 장갑차 4대 중 3대가 계엄군에 회수되었습니다.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공수부대에게 두들겨 맞고 보안대 끌려가서 조사받았습니다.
5, 광주교도소 습격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국도하고 호남고속도로 정확히 바로 옆에 있습니다. 광주교도소 위성 사진 보면 호남고속도로와 광주-담양 국도와 10m 이내로 붙어있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고속도로를 타고 광주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공수부대가 교도소 주변 도로를 막고 통행을 금지했습니다. 광주 외곽을 봉쇄해서 폭도의 탈출을 절대로 허용하지 말라는 작전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교도소에서 직접 교전이 벌어진 적은 한 번도 없고, 교도소에서 500m~1km 떨어진 도로에서 공수부대가 바리케이드 친 곳에서 교전이 벌어진 사례가 있는 것일 뿐입니다.
5.18 당시 광주교도소장이었던 韓道熙씨(70)는 14일 "시민군이 80년 당시 光州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계엄사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고 주장했습니다. 韓씨는 이어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했다면 교도소 주변에 시체가 있어야지 어떻게 도로에 있을 수 있겠느냐"며 "당시 교도소에는 3공수여단 병력이 중무장하고 있어서 교도소 습격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고 계엄군이 시 인근 지역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무차별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64241)
가운데 운동장이 보이는 건물이 광주교도소입니다. 사진에서 광주교도소 왼쪽에 있는 도로는 호남고속도로이며, 오른쪽에 있는 도로는 광주-담양 국도입니다. 게다가 광주교도소의 출입구는 고속도로 쪽에 있지 않기 때문에, 고속도로를 타고 광주 밖으로 나가려던 광주 시민들은 교도소 습격 의도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
( 다른 각도에서 찍은 사진은 http://www.gjdream.com/v2/news/view.html?news_type=201&code_M=2&mode=view&uid=403555 에 있음)
6. 해방구 건설
계엄군이 물러나고 시민들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학생시민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사실입니다. 학생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치안유지, 무기회수, 계엄군과 협상을 하기 위해 구성된 조직입니다. 스스로 해방구라고 칭한 적도 없고, 공산주의 조직인 해방구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7. 무등갱생원의 36인조 무장조
무등갱생원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마스크 썼다고 의심하는건데요. 단순히 마스크를 가리고, 복면을 했다고 불순분자로 몰아가는 것은 억지 주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계엄군은 최루탄, 사과탄 수천발을 광주시내에 터뜨렸기 때문에, 광주 시민들은 마스크나 얼굴에 수건을 두르고 다닌 것입니다. 제5공화국 시절 민주화 요구 집회에서도 마스크나 복면을 한 사람은 흔히 볼 수 있었죠.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단기간 대남공작하고 북한으로 돌아갈 사람들이 신원노출을 꺼릴까요? 남한에 남아서 계속 살 사람들이 신원노출을 꺼릴까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8. 평양방송 광주사태 실황 중계
일부 탈북자는 평양방송에서 광주사태 실황을 중계했다고 주장합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죠.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중계시설, 송신소도 없이 광주에서 수백km떨어진 평양까지 어떻게 생중계를 할까요. 만약 북한이 생중계를 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1980년 북한은 노트북, 와이브로, 고화질디지털카메라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9. 13구의 신원미상 시체
13구가 아니라 11구였고요. 2001년 DNA 검사로 11구 중 6구의 신원이 밝혀졌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1949099)
남은 5구 중에 1구는 4살짜리 아이, 1구는 40대 중년 남성, 1구는 22일 광주가 아닌 목포에서 비무장상태로 시위하다 차량에서 떨어져 죽은 자입니다. 북한이나 불순세력하고 관계가 있을 수가 없죠.
대구 지하철 참사나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에서도 신원미상자가 5명씩 되는데, 대형참사에서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문제라고 봅니다.
10. 5.18 유공자 윤기권의 월북
윤기권은 1962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광주 대동고등학교를 다니다 5.18을 맞았습니다. 5.18 진압 이후 항쟁의 충격으로 정신질환을 앓았고요. 윤기권이 월북한 행위는 분명히 잘못됐습니다. 하지만 광주 시민 수십명이 집단 월북한 것도 아니고, 정신질환자 단 한명이 월북했다고 5.18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그리고 5.18 당시 신원이 확실한 고등학생이였는데 항쟁을 주도했다거나 북한의 간첩이라는 주장은 말이 안 됩니다.
10. 간첩 이창룡 침투 사건
5월 24일 서울시경에서 간첩단 사건을 발표를 했습니다. 발표를 보면 간첩 이창룡이 광주에 들어가서 광주시민들 시위를 무장폭동으로 유도를 하고 또 선동 업무를 띠고 침투를 했다 라고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나 계엄군들의 검문검색이 심해가지고 광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서울역으로 왔다가 체포가 됐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창룡의 침투 사건이야 말로 광주의 경계가 삼엄했으며, 북한 특수부대 600명 침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죠.
11. 총상의 70%가 폭도들이 소유한 총에 의해 사망
사망자 중에 M16 보다 칼빈 소총으로 죽은 사람이 많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현존하는 5.18 사망자에 대한 검시 자료는 군부 측의 보안사가 작성한 것, 광주지검이 작성한 것, 광주시청에서 작성한 것으로 3가지가 있습니다. 카빈 사망자만을 따져보자면, 보안사 검시 자료는 카빈 사망자 21명, 광주지검의 검시 자료는 26명, 광주시청 검시 자료는 12명입니다. 세 자료에서 모두 카빈 사망자로 일치하는 사람은 8명입니다.
그렇다면 5.18을 폄훼하려는 사람들이 카빈 사망자가 더 많이 있다는 거짓말을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1980년에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 5.17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 등을 신군부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기록하기 위해, 제5공화국의 국방부는 1982년 '계엄사'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계엄사'에는 카빈 사망자, M16 사망자를 구체적으로 분류한 자료는 없습니다. 다만, 총상 사망자 중 88명이 폭도 자신들의
그렇다면 5.18을 폄훼하려는 사람들이 카빈 사망자가 더 많이 있다는 거짓말을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1980년에 일어난 5.18 민주화운동, 5.17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 등을 신군부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기록하기 위해, 제5공화국의 국방부는 1982년 '계엄사'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계엄사'에는 카빈 사망자, M16 사망자를 구체적으로 분류한 자료는 없습니다. 다만, 총상 사망자 중 88명이 폭도 자신들의 난동으로 죽었고, 29명만 계엄군에 끝까지 대항하다 사살당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훗날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이 구절을 인용하여, 카빈 사망자가 더 많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자료는 전혀 없습니다.
1985년 안기부에서 발간한 5.18 자료에 따르면, 카빈 및 기타총상 사망자가 94명, M16 사망자가 38명으로 나와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 자료에서 사체 검안위원회의 보상금 지급 내역이 있기 때문에 정확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것 역시 당시 검시 과정에 참여했던 문형배 교수(원광대 의대)가 카빈 사망자가 많아진 이유를 증언하여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1980년 당시 군에서는 M16 총탄을 맞은 경우 군에 저항한 것으로 판단하여 폭도로 분류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의사와 목사들이 반대했습니다. 당시 의사 2명과 목사는 난동자(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비폭도)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처음 폭도로 분류된 것은 20여명이 조금 넘었으나 군에서는 이 정도의 비율이면 곤란하다고 하여 격론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38명이 폭도 분류되어 늘어났습니다. 이 같은 과정 때문에 사체 검안위원회 회의 결과 M16보다는 M1이나 카빈 사망자가 더 많아졌습니다. (국방부 과거사위 12.12 5.17 5.18 조사결과보고서 126쪽)
5.18 민주화운동이 진압된 이후 검시에 참여했던 전호종교수(조선대 의대. 병리학)는 사체의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하려면 부검까지 해야 하는데 당시로서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고 합니다. 사체가 썩어 가는 중이었고, 게다가 부검을 하려면 검찰의 수색 영장과 가족의 동의를 거쳐야 하는데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검시에 참여한 의사들은 단지 사체의 외형만 보고 검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시방편으로 검시에 참여한 의사들은 총알이 몸 속에 들어간 사 입구와 몸을 뚫고 나온 사 출구의 외형적 상태만 기록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사 입구보다 사 출구의 크기가 더 크면 M16, 카빈 소총은 사 입구와 사 출구의 크기가 차이가 나지 않으면 카빈으로 결정하는 방식으로 사망자를 분류했습니다. 사출구가 없는 맹관총창의 경우 비교가 어렵다는 점이 있고, 더구나 근거리 사격, 원거리 사격 따라서 달라지는 것을 가려내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카빈과 M16을 정확하게 가려내지 못했다는 점이 두고두고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M16도 카빈도 아닌, 기타 총상으로 분류된 경우에도 예비군 무기고에서 나온 무기에 의한 총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잇습니다. 하지만 검시 자료를 직접 살펴보면, 다른 종류의 총기에 부상당해서 기타 총상으로 기록한게 아니라, 도저히 M16과 카빈 둘 중 하나로 분류할 수 없어서 총기 미상으로 분류한 것이였습니다. 또한 계엄군 측에서는 M16 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1988년 광주 청문회 결과 M16 이외의 총기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박춘권 통일민주당 의원은 계엄군이 "M16 9,646발 M2O3 19발 수류탄 12발 TNT25[파운드] 권총 667발 M6O 925발 66LCW 260발 연막탄 18발 최루탄 150발 오색신호탄 70발 화염방사기 7대 통합계 1만1,792발을 쏘았다"고 말했습니다.
12. 도청 광장에 들어온 리어카의 시체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21일 02:20 3여단 병력이 전대로 복귀를 위해 탈출 시도, 앞을 가로막는 데모대를 돌파하기 위해 방망이 구타. 사망 2명, 중상 2명 발생"했다는 보고가 보안사에 들어왔고, 시체는 허봉씨로 밝혀졌습니다.(국방부 과거사위 12.12 5.17 5.18 조사결과보고서 80쪽)
14. 북한군 출신들의 증언
북한군 출신들이 증언한다고, 무조건 믿을 수는 없습니다.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실질적인 근거가 나와야 하는데, 북한군 출신 증언자들은 제시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전직 노동당 비서 황장엽씨는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말을 한적이 없고요. 탈북군인협회라고 북한 군인들로 구성된 단체가 있는데 이 단체의 회장이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은 현실과 맞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15. 김일성 비밀교시
김일성 비밀교시도 실체 불명이고, 우리 정보 당국이 입수한 적이 있는 자료는 아닙니다.
16. 대한민국의 좌익화
5.18 당시 현장에 있던 조선일보 기자의 취재수첩과 조갑제씨의 증언을 보면, 광주 시민은 자신들이 좌익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김일성은 오판말라'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합니다. 5.18 이후 반미운동이 일어났던 것과 별개로, 5.18 당시에는 좌익적인 구호가 전혀 없었습니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130548073&qb=NS4xOA==&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1&sp=1&pid=gOMDjB331yCssZBCd+lssv--027070&sid=TPbNLQGuv00AAGFAPDMAAABJ
1985년 안기부에서 발간한 5.18 자료에 따르면, 카빈 및 기타총상 사망자가 94명, M16 사망자가 38명으로 나와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 자료에서 사체 검안위원회의 보상금 지급 내역이 있기 때문에 정확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것 역시 당시 검시 과정에 참여했던 문형배 교수(원광대 의대)가 카빈 사망자가 많아진 이유를 증언하여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1980년 당시 군에서는 M16 총탄을 맞은 경우 군에 저항한 것으로 판단하여 폭도로 분류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의사와 목사들이 반대했습니다. 당시 의사 2명과 목사는 난동자(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비폭도)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처음 폭도로 분류된 것은 20여명이 조금 넘었으나 군에서는 이 정도의 비율이면 곤란하다고 하여 격론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38명이 폭도 분류되어 늘어났습니다. 이 같은 과정 때문에 사체 검안위원회 회의 결과 M16보다는 M1이나 카빈 사망자가 더 많아졌습니다. (국방부 과거사위 12.12 5.17 5.18 조사결과보고서 126쪽)
5.18 민주화운동이 진압된 이후 검시에 참여했던 전호종교수(조선대 의대. 병리학)는 사체의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하려면 부검까지 해야 하는데 당시로서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고 합니다. 사체가 썩어 가는 중이었고, 게다가 부검을 하려면 검찰의 수색 영장과 가족의 동의를 거쳐야 하는데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검시에 참여한 의사들은 단지 사체의 외형만 보고 검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시방편으로 검시에 참여한 의사들은 총알이 몸 속에 들어간 사 입구와 몸을 뚫고 나온 사 출구의 외형적 상태만 기록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사 입구보다 사 출구의 크기가 더 크면 M16, 카빈 소총은 사 입구와 사 출구의 크기가 차이가 나지 않으면 카빈으로 결정하는 방식으로 사망자를 분류했습니다. 사출구가 없는 맹관총창의 경우 비교가 어렵다는 점이 있고, 더구나 근거리 사격, 원거리 사격 따라서 달라지는 것을 가려내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카빈과 M16을 정확하게 가려내지 못했다는 점이 두고두고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M16도 카빈도 아닌, 기타 총상으로 분류된 경우에도 예비군 무기고에서 나온 무기에 의한 총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잇습니다. 하지만 검시 자료를 직접 살펴보면, 다른 종류의 총기에 부상당해서 기타 총상으로 기록한게 아니라, 도저히 M16과 카빈 둘 중 하나로 분류할 수 없어서 총기 미상으로 분류한 것이였습니다. 또한 계엄군 측에서는 M16 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1988년 광주 청문회 결과 M16 이외의 총기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박춘권 통일민주당 의원은 계엄군이 "M16 9,646발 M2O3 19발 수류탄 12발 TNT25[파운드] 권총 667발 M6O 925발 66LCW 260발 연막탄 18발 최루탄 150발 오색신호탄 70발 화염방사기 7대 통합계 1만1,792발을 쏘았다"고 말했습니다.
12. 도청 광장에 들어온 리어카의 시체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21일 02:20 3여단 병력이 전대로 복귀를 위해 탈출 시도, 앞을 가로막는 데모대를 돌파하기 위해 방망이 구타. 사망 2명, 중상 2명 발생"했다는 보고가 보안사에 들어왔고, 시체는 허봉씨로 밝혀졌습니다.(국방부 과거사위 12.12 5.17 5.18 조사결과보고서 80쪽)
14. 북한군 출신들의 증언
북한군 출신들이 증언한다고, 무조건 믿을 수는 없습니다. 주장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실질적인 근거가 나와야 하는데, 북한군 출신 증언자들은 제시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전직 노동당 비서 황장엽씨는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말을 한적이 없고요. 탈북군인협회라고 북한 군인들로 구성된 단체가 있는데 이 단체의 회장이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은 현실과 맞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15. 김일성 비밀교시
김일성 비밀교시도 실체 불명이고, 우리 정보 당국이 입수한 적이 있는 자료는 아닙니다.
16. 대한민국의 좌익화
5.18 당시 현장에 있던 조선일보 기자의 취재수첩과 조갑제씨의 증언을 보면, 광주 시민은 자신들이 좌익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김일성은 오판말라'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합니다. 5.18 이후 반미운동이 일어났던 것과 별개로, 5.18 당시에는 좌익적인 구호가 전혀 없었습니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130548073&qb=NS4xOA==&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1&sp=1&pid=gOMDjB331yCssZBCd+lssv--027070&sid=TPbNLQGuv00AAGFAPDMAAABJ
===========================================================================================
부지런히 댓글다느라 애 많이 쓰십니다.
보통 돌아이가 아니로군요!!!
저런 놈은 그저 반역분자로 도장찍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저런 해충이 설치는 한 대한민국 네티즌 사회가 밝을 수만 없습니다.
댓글목록
대긍모애국호랑이님의 댓글
대긍모애국호랑이 작성일완전 강추합니다.
PATRIOTISM님의 댓글
PATRIOTISM 작성일대체로 조목조목 반론을 잘 하셨습니다.
PATRIOTISM님의 댓글
PATRIOTISM 작성일
또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과 몇몇 사항(삼청교육대, 평화의 댐 등)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권을 이용하여 정권을 붕괴시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 동의 못함
PATRIOTISM님의 댓글
PATRIOTISM 작성일5.18이 민주화운동= 아님. 김대중 대통령 못된 것에 한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