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불비(三年不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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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찬수 작성일11-07-27 19:10 조회1,359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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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불비(三年不飛)
<다음의 이야기는 고대 왕조에서나 있을 법 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현대에서도 그 이야기 내용 중에서 나타난 사실로 짐작해 볼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 하겠다.>
-김구용 선생의 열국지(列國志: 어문각 간)를 참고함-/화곡 김찬수
중국 주나라 봉건제후국 중에 초(楚)라는 나라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제(帝) 전욱(颛顼: 高陽)이 시조이며 그의 후손인 웅역(熊繹)이 주 성왕(成王)으로부터 분봉받아 단양(丹陽)에 도음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무왕(武王)때 왕호를 참칭하고, 문왕(文王)때 영으로 천도 했으며 장왕(莊王)(재위: 613~591. B.C)때는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전국시데에는 전국칠웅으로 위세를 떨쳤으나 진(秦)나라의 압박을 받아 B.C 278년 수도가 함락되었고, B.C 223년 멸망했다.
삼년불비(三年不飛) 고사(故事)는 초장왕에 얽힌 이야기이다.
초장왕의 이름은 여(旅)다. 그는 왕위에 즉위한지 3년이 지나도록 신하들에게 한번도 명령을 내린 일이 없었다. 그가 움직인다는 것은 궁성밖으로 나가 사냥을 할 때가 고작이었다.그렇지 않으면 궁성안에서 밤낮으로 여러 부인들과 어울려 술만 마셨다.
초장왕은 시자(侍者)를 시켜 조문밖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조문밖에 내 걸었다.
" 어떤 자든지 감히 짐을 간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하리라!"
이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왕에게 충언의 말을 함부로 간언 하겠는가. 그러나 역사적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충언을 하는 신하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어느 날, 대부(大夫) 벼슬의 신무외(申無畏)가 궁으로 들어 갔다. 춘추시대의 대부 벼슬은 경(卿)과 사(士)의 중간 벼슬이다. 초장왕은 오른팔로 정희(鄭姬)를 안고 왼팔에는 채녀(蔡女)를 끼고 악공으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고 그는 종(鐘)과 북 사이에 앉아 있었다.
초장왕이 신무외가 들어오는걸 보고 물었다.
"대부는 술을 마시러 왔나뇨? 음악을 들으려 왔나뇨? 또는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왔나뇨?"
신무외가 대답 하기를
" 신은 술을 마시기 위해서 라든가 음악을 들으러 온 것은 아닙니다. 며칠 전에 신은 교외엘 갔다가 왔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신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는데, 그 뜻을 알아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왕께 그걸 들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장왕이 묻는다.
" 허어! 무슨 말이관대 그 뜻을 알 수 없다는 것인가? 그러나 대부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면 과인인들 어찌 알 수 있으리오. 좌우간 이야기나 해 보라"
신무외가 아뢴다.
" 몸에 오색빛이 찬란한 큰 새가 있는데 그 새가 초(楚)나라 높은 곳에 앉은지 3년이 지났다 합니다. 그런데, 그 새가 나는걸 본 사람이 없고 우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 새가 무슨 새냐는 것입니다."
초장왕은 신무외가 풍자(諷刺)하는 뜻을 알았다.초장왕이 웃고 대답한다.
"음, 과인은 그 새를 알겠다. 그것은 비범한 새다. 3년을 날지 않았다 하니 한번 날기만 하면 하늘을 찌를 것이며, 3년을 울지 않았다 하니 한번 울기만 하면 반드시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 그대는 그 때를 기다리라."
신무외는 재배하고 물러갔다.수일이 지났으나 장왕은 여전히 주색과 음악만 즐겼다.
이번엔 대부 소종(蘇從)이 궁성으로 들어 갔다.소종은 왕앞에 나아가 크게 통곡했다.
왕이 묻는다.
"그대는 어째서 이렇듯 슬피 우나뇨?"
소종이 대답한다.
" 신은 이제 죽은 몸입니다. 장차 초나라는 망합니다. 그래서 웁니다."
장왕이 묻는다.
"죽다니? 그대가 어째서 줄을 리 있으며, 이 나라가 왜 망한다는 말인가?"
" 신이 왕께 간하면 왕은 반드시 듣지 않고 신을 죽일 것입니다. 신이 죽은 뒤면 다시 왕께 간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더욱 왕은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며 나라정치는 엉망이 됩니다. 그 지경이 되면 초나라가 언제 망하느냐는 것은 물을 필요 조차 없습니다."
초왕이 갑자기 얼굴 빛을 변하면서 대로한다."과인을 간하는 자 있으면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그대는 간하면 죽는다는걸 번번히 알면서도 이제 과인에게 덤벼드나뇨? 참으로 그대는 어리석은 사람이구나!"
소종이 앙연히 머리를 쳐들고 대답한다.
"신이 아무리 어리석을 지라도 왕처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초장왕이 더욱 대로한다.
"과인이 어째서 그대보다 더 어리석단 말이냐?"
대왕은 만승(萬乘)의 지존(至尊)이시며, 천리국토의 세금을 받으시며, 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제후들도 대왕을 두려워 하기 때문에 사시(四時)로 바치는 공물이 끊임없이 우리궁정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는 만세의 이익입니다. 그런데 대왕은 지금 어떠 하십니까? 주색에 빠지고 밤낮 음악만 즐기고 나라정치는 다스리지 않고 어진 사람을 멀리하고 계십니다. 장차 바깥 큰 나라는 우리나라로 쳐 들어 올것이며 조그만 나라들은 우리의 지배 밑에서 벗어 나려고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한때 즐거움은 바로 목전에 있지만 멀지 않은 불행은 다음 날에 있습니다. ㅇ대저 일시의 쾌락 때문에 민세의 이익을 버리니 이보다 더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습니까? 이몸의 어리석음은 이몸믕 죽이는데 불과 합니다. 그러나. 대왕이 신을 죽임으로써 후세 사람들은 신을 용강(龍강). 비간(比干)과 견줄 만한 충신이라고 칭송할 것입니다. 결과에 있어 신은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왕의 어리석음은 실로 딱하기만 합니다. 다음날 대왕은 한 백성의 마음도 얻지 못하실 것입니다. 신이 말하고자 하는것은 이것뿐입니다. 청컨대 대왕은 허리에 차고 있는 그 칼을 뽑아 신에게 주십시오. 신은 마땅히 대왕 앞에서 그 칼로 목을 찌르고 죽겠습니다. 그리하여 대왕의 명령이 얼마나 철저한가를 세상에 알리겠습니다."
초왕이 벌떡 일어섰다.
"대부는 진정하오. 그대의 말은 충신의 말이로다. 과인이 어찌 그대의 말을 듣지 않으리오. 다만 때를 기다렸을 뿐이다."
그 뒤로 초장왕은 음악을 금하고 정희(鄭姬)와 채녀(蔡女)를 멀리 했다.그리고 번희(樊姬)를 부인으로 삼고 내궁 제반사를 맡겼다.
"과인은 사냥하는걸 좋아했건만 그럴때 마다 번희는 간했고 과인이 사냥해서 잡아온 짐승을 번희는 먹지 않았다. 이것은 번희의 어진 천성이 나를 내조 한 것이다."
다시 영윤 투월초(令尹 鬪越椒)의 권력을 깎아 위가(蔿賈), 반개(潘玠), 굴탕(屈蕩)등에게 나누어 맡겼다.아침 일찌기 조회를 열고 법을 펴고 명령을 내렸다.
이때부터 초장왕의 활약은 눈부신 바가 있었다. 그는 정나라 공자 귀생(公子 歸生)에게 명하여 송나라를 치게하고 즉시 위가에게 군사를 주어 정군을 돕게 했다. 이리하여 정군은 대극(大棘)에서 송군과 싸워 송나라 우사 화원(右師 華元)을 사로잡았다. 당시 초장왕은 북림(北林)에 가서 진군(晋軍)과 싸워 진나라 장수 해양(解揚)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 왔다. 다음 해에 사로잡은 장수들을 다 그들의 본국으로 돌려 보냈다. 이때부터 초나라 세력은 날로 강성했다.(김구용의 열국지에서)
초장왕은 왕위에 올라 처음 3년간 침묵을 지키며 국내와 국외의 인간관계의 정세를 완전히 파악하였던 것이라 짐작할 수가 있겠다. 이것이 천하를 호령하는 준비과정이었던 것이다.초장왕에 얽힌 고사(故事) 이야기는 많다. 장왕의 인품은 호쾌함과 웅장함에서 그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와 치도(治道)의 멋스러움이 돋보인다. 그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일화는 아직까지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의미있는 이야기이다. 윗 글 말미에 덧붙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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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신의리(君臣義理)
군신간의 의리는 예부터 지금까지 의롭고 시종여일 해야 한다. 그 의리라는 덕목의 여파는 곧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반석위에 올려 놓고 자기 직분을 다하며 서로의 지혜를 보충해 주는 대의수행(大義遂行) 관계의 명분이 되기 때문이다.
간신이 많은 나라는 그 국가가 지탱하지를 못하고 결국 망하였다. 그것은 천리를 역행하는 방종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혼군이 나타나면 삽시간에 그 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삼국시대의 고구려가 그러했으며 백제가 그러했으며 신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고대 중국에서 조차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 말엽이 그러 하였고 동서 고금을 통하여 시대에 따라 각나라 말기에는 공통적으로 사치와 방탕으로 국운이 쇄하고 결국 망하였다. 지금의 터어키 즉, 중동의 오스만 트르크(1299~1922) 제국도 중세부터 근세에 이르기 까지 지중해 연안 거의를 623 여년 동안 장악하고 장구한 세월 동안 회교국으로 그 위용을 세계에 떨쳤으나 말년에 이르러서는 특히 공무원들의 사치와 방탕이 너무 지나쳐 결국 망하고 말았다. 위의 모두에 충신은 헌 신짝 처럼 내던져 졌고 간신만 발호 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고대 중국 초나라에 장왕(楚 莊王) 이라는 지도자가 있었다. 기원전 614년 부터∼591년까지 중국의 초(楚)나라의 제 23대 왕이며, 춘추시대의 5패(五覇)의 한 사람이다. 성(姓)은 미(羋). 씨(氏)는 웅(熊). 휘(諱)는 려(侶)이다.
초장왕에게 얽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초장왕이 집권한 초기에 초나라 내부에 반란이 일어났다. 세력가 투(鬪)씨 집안의 투월초(鬪越椒)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명궁(名弓) 양유기(養由基)가 투월초를 사살하여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장왕은 반란군 진압을 기리어 군신을 불러 이른바 태평연(太平宴)을 열었다. 낮부터 시작한 연회가 밤까지 이르러도 그칠 줄을 몰랐다.
장왕은 사랑하는 허희(許姬)에게 분부하여 모든 대부에게 술을 따르도록하였다. 명을 받은 허희가 공경하는 뜻으로 잔을 따르자 모든 대부는 다 일어서서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허희가 반쯤 돌았을 때 갑자기 괴상한 바람이 불어 장내의 촛불을 일시에 꺼 버렸다. 내시가 촛불을 가져 오기 전인데 갑자기 누군지 알 수 없는 한 대부의 억센 손이 허희의 허리를 슬며시 끌어 안았다. 어둠속에서 허희는 대부를 밀치고 그의 관(冠)끈을 잡아 끊었다. 그 대부는 크게 놀라 허희의 허리를 놓았다.
허희는 다시 제 자리에 돌아와 초장왕의 귀에다 입을 대고 아뢰었다. "대부들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술을 따르는 중 이러이러한 사연으로 무례한 대부의 관끈을 끊었으니 속히 불을 밝히어 관끈 없는 자를 찾아 벌을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허희의 이 말을 듣고 초장왕은 황급히 분부하기를 "불을 밝히지 마라. 과인이 이렇듯 잔치를 베푼 뜻은 모든 경들과 함께 기뻐 하기 위해서다. 경들은 우선 거추장스런 관끈부터 끊고 진탕 마시라. 관끈을 끊지 않은 자는 과인과 함께 즐기기를 거역하는 것이라 여기겠노라." 모든 문무백관이 관끈을 끊자 그제서야 초장왕은 불을 켜게 했다. 잔치가 끝나자 허희가 항변했다. "첩이 듣건대, 남녀는 함부로 범하지 못한다 하더이다. 왕은 그 무례한 자를 잡아 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고 서야 어떻게 상하의 예의를 밝히며 남녀의 구별을 바로잡겠습니까?"
초장왕이 웃고 대답하기를 "자고로 임금과 신하가 한 자리에서 술을 마실때엔, 서로 석잔 이상을 못마시는 법이다. 그것도 낮에만 마시고 밤엔 못마시게 되어 있다. 과인은 오늘 모든 신하들과 촛불을 밝혀가면서 취토록 마셨다. 누구나 취하면 탈선하는 것이 인정이다. 만일 그 대부를 찾아내어 처벌하고, 그대의 절개를 표창하고, 그 대부의 마음을 괴롭힌다면, 모든 신하의 흥취가 어찌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과인이 오늘 차린 잔치의 뜻이 없지 않겠나뇨?" 허희는 장왕의 큰 도량에 탄복하였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 잔치를 절영회(絶纓會) 라 하였다.
이후에 장왕은 정(鄭)나라가 진(晉)나라만 섬기고 초나라에 복종하지 않음을 크게 미워하여 대군을 총 동원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초나라 연윤(連尹) 양로(襄老)가 맨 앞부대를 거느리고 진군하였다. 장수 당교(唐狡)가 양로에게 청하기를 "조그만 정나라에 어찌 대군을 수고시키겠습니까? 군사 백명만 주시면 제가 길을 트겠습니다." 하고 목숨을 걸고 돌격하여 정군을 만나는 대로 모두 무찔러 버렸다. 장왕이 정군을 물리친 양로에게 칭찬하니 연윤 양로가 아뢰기를 "이는 저의 공로가 아니라 당교의 목숨건 전투로 승리한 바이옵니다" 하고 말하였다.
장왕이 당교를 불러 상을 주려 하나 당교가 사양하며 아뢰기를 "신은 이미 왕께 너무나 큰상을 이미 받았습니다. 신은 그 은공을 갚고자 목숨을 내 놓고 이번 전투에 임했을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장왕이 다시 묻기를 "과인은 경을 잘 모르는데 어찌 경이 과인으로 부터 상을 받았다 하오?" 하니 당교가 절영회 때의 일을 말하면서 미인을 희롱한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라고 실토를 하였다. 장왕이 찬탄한다. "기이한 일이다. 그때 과인이 촛불을 밝히고 죄인을 다스렸던들, 어찌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이런 훌륭한 신하를 둘 수 있었겠는가" 장왕이 군정(軍正)을 불러 제일 공로자로 문서에 기록하게 했다. 정나라를 평정한 뒤에 장차 당교에게 높은 벼슬을 줄 작정이었다.
그날 밤 당교는 어디론지 종적을 감추었다. 그가 떠나기 전 친구에게 말하기를 " 나는 왕에게 죽을 죄를 지었다. 왕이 나를 죽이지 않았기에 나는 그 은혜를 갚고자 했을 뿐이다. 이젠 모든 걸 다 밝혔다. 죄인이 어찌 다음 날 상을 받을 수 있으리오" 이 말을 전해들은 장왕이 탄식했다. "그는 참으로 열사(烈士)다!"
이어서 장왕은 그 여세로 정나라를 공격하여 정양공(鄭襄公)을 복종시켰다. / 화곡 김찬수
댓글목록
proview님의 댓글
proview 작성일님이 이글을 올린 이유를 모르겠읍니다. 초장왕에 대한 이야기는 사기를 읽어본 분이라면 모두 알고있는 내용이지요 그의조상 웅간(초무왕) 웅운시절 초성왕(웅운)이 패자가 되려고 주왕을 무시하는 만행을 일삼다가 제나라 환공과 참모인 관중과 포숙아의 칠국연합을 규합하여 굴복시킨 사건이 있었죠,,,,,이런 사건으로 인해 초나라는 성군이 나와도 모든 나라가 패자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죠 당시 초장왕이 초나라를 부흥시키는데는 패자로써 성공하였으나 초성왕때 이미지를 흐리는 바람에 영원한 패자는 진나라에게 계속 유지를 했던 것이죠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김 찬수'님!! ,,. 게시판 글에 나름대로 응답글을 달면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셔야지,,. 너무 거만타고 생각도 들지 않외까요? ,,. 물론 의무.강제 사항은 아니긴하외다요만,,. 이러면 오히려 역효과 납니다. ,,,.
'박 근혜'를 지지함은 내가 아마도 '김 찬수'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외다요! ,,.
'박 근혜'가 '楚' 장왕이라도 되는 인물이라는 건지,,.
난 '김 구용'의 '열국지'를 고3 시절에 대한일보{현재는 폐간! 보안법 위반으로? ,,.}에 연재 중일때 처음 알기 시작했었! ,,.
솔직히 당시로는 너무나도 배경 지식이 없어서 거의 '列國志'는 이해를 못하고,,.
'중이'가 20년간 암살자들에게게 쫒기다가 타고 다니던 말도 잡아 먹고, 급기야는 허기에 굶주려 죽을 즈음,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 긇여 주는 어느 추종자의 고깃국을 먹고 기사 회생! ,,. 寒食의 由來,,.
난 당시 너무나도 허황된 듯하여 그만 중단,,. ^*^ 내가 좀 더 그걸 끈기를 지니고 읽었었어야만 했는건데,,. 동아일보 '千里駒(천리구){김 동성}'역 의 '3국지!' 그 후속 연재 '김 팔봉'의 '星群(성군){수호지}!'
대한일보 '김 구용'의 열국지! ,,. 다 유명했었던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