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맨 강성원씨의 5.16 참여 동기. 육군본부 전략정보과의 판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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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갈천골 작성일11-04-21 17:14 조회1,998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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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誠元씨와 JP와의 인연은 5ㆍ16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康誠元씨가 서울 한글학회가 세운 중등 국어교사 양성소 2학년에 다닐 때 6ㆍ25 전쟁이 일어났다. 9·28 수복 직후, 그는 그가 가장 존경하던 스승인 崔鉉培씨를 찾아가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고 한다. 崔鉉培씨는 그에게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라』고 말했다.
金鍾泌과의 만남
이 말을 듣고 그는 곧장 軍에 입대하기로 마음먹고 육군 종합학교 17기생으로 입교, 9주간의 훈련을 받은 후 소위로 임관됐다.
6ㆍ25 전쟁 발발 당시 미처 피란하지 못한 康씨의 부친은 인민군에게 붙들려 심한 매를 맞았다. 대퇴부 뼈가 으스러지며 염증이 생겨 6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康씨는 『공산당에게 부친을 잃은 적개심으로 여섯 번 부상을 당했지만 그때마다 또다시 전장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의 소년 시절 꿈은 소설가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康씨는 『문학보다 아버지를 죽인 공산당 때려잡아 아버지 원수를 갚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해서 군에 계속 남았다』고 말했다.
康씨는 이후 육본 정보참모부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金鍾泌 중령을 만났다.
『악기도 다루고 글을 잘 쓴 金鍾泌 과장은 소설가를 꿈꾸던 시절의 나를 회상하게 해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다재다능할 뿐 아니라 애국심에 불타는 분이었어요. 나는 그를 무척 존경했습니다』
―康회장님은 정보참모부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4ㆍ19 후 사회가 어수선한 틈에 북한에서는 對南 지하조직을 강화하고 간첩을 파견하는 등 혼란이 심했습니다. 나는 당시에 기획관리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기획관으로서 CIC(방첩부대), 통신, 예하 첩보기관 등에 대한 예산 담당과 부대 운영을 주로 맡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당시 정보활동에 깊이 관여하였죠. 이 과정에서 4ㆍ19 후, 사회 혼란이 우리나라 체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육군본부 전략 정보과에서 작성한 판단서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판단서는 이대로 두면 적화통일까지 갈 수 있다는 육본의 결론이 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당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공산화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혁명의 싹이 튼 것입니다. 결국 육본 정보참모부가 5ㆍ16 혁명의 모태가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5ㆍ16은 공산화를 막자고 계획한 것이다
―8기생은 어떤 성격의 사람들이었습니까.
『8기생은 배출 인원 수가 많았습니다. 보통 한 기수에 200명 내외인데, 8기생은 1600명 이상 되었습니다. 나라에서 군의 틀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장교를 많이 양성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8기생 중에는 인재들이 많았는데, 특히 우수한 사람들이 정보참모부서로 보내졌어요. 金鍾泌, 李永根(이영근), 徐廷淳(서정순), 石正善(석정선) 등이 그들인데 나중에 혁명 정부에 큰 공헌을 했어요』
―그 판단서가 康회장님이 5ㆍ16에 참여한 동기가 됐습니까.
『우리는 모두 이 판단서를 보고 흥분했습니다. 5ㆍ16이 일어난 다른 이유가 많겠지만 핵심은 첫째 이유가 反共입니다. 가난으로부터 국민을 구하겠다는 소리는 나중에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내세운 것이지만 어쨌든 근본 이유는 反共 때문입니다. 나는 先親이 공산당에게 돌아가셨으니 더 끔찍하게 생각했지요. 나는 진심으로 딴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JP를 적극적으로 도왔어요』
康誠元씨가 서울 한글학회가 세운 중등 국어교사 양성소 2학년에 다닐 때 6ㆍ25 전쟁이 일어났다. 9·28 수복 직후, 그는 그가 가장 존경하던 스승인 崔鉉培씨를 찾아가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고 한다. 崔鉉培씨는 그에게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라』고 말했다.
金鍾泌과의 만남
이 말을 듣고 그는 곧장 軍에 입대하기로 마음먹고 육군 종합학교 17기생으로 입교, 9주간의 훈련을 받은 후 소위로 임관됐다.
6ㆍ25 전쟁 발발 당시 미처 피란하지 못한 康씨의 부친은 인민군에게 붙들려 심한 매를 맞았다. 대퇴부 뼈가 으스러지며 염증이 생겨 6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康씨는 『공산당에게 부친을 잃은 적개심으로 여섯 번 부상을 당했지만 그때마다 또다시 전장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의 소년 시절 꿈은 소설가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康씨는 『문학보다 아버지를 죽인 공산당 때려잡아 아버지 원수를 갚는 것이 더 급하다고 생각해서 군에 계속 남았다』고 말했다.
康씨는 이후 육본 정보참모부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金鍾泌 중령을 만났다.
『악기도 다루고 글을 잘 쓴 金鍾泌 과장은 소설가를 꿈꾸던 시절의 나를 회상하게 해준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다재다능할 뿐 아니라 애국심에 불타는 분이었어요. 나는 그를 무척 존경했습니다』
―康회장님은 정보참모부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4ㆍ19 후 사회가 어수선한 틈에 북한에서는 對南 지하조직을 강화하고 간첩을 파견하는 등 혼란이 심했습니다. 나는 당시에 기획관리 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기획관으로서 CIC(방첩부대), 통신, 예하 첩보기관 등에 대한 예산 담당과 부대 운영을 주로 맡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당시 정보활동에 깊이 관여하였죠. 이 과정에서 4ㆍ19 후, 사회 혼란이 우리나라 체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육군본부 전략 정보과에서 작성한 판단서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판단서는 이대로 두면 적화통일까지 갈 수 있다는 육본의 결론이 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당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공산화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혁명의 싹이 튼 것입니다. 결국 육본 정보참모부가 5ㆍ16 혁명의 모태가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5ㆍ16은 공산화를 막자고 계획한 것이다
―8기생은 어떤 성격의 사람들이었습니까.
『8기생은 배출 인원 수가 많았습니다. 보통 한 기수에 200명 내외인데, 8기생은 1600명 이상 되었습니다. 나라에서 군의 틀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장교를 많이 양성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8기생 중에는 인재들이 많았는데, 특히 우수한 사람들이 정보참모부서로 보내졌어요. 金鍾泌, 李永根(이영근), 徐廷淳(서정순), 石正善(석정선) 등이 그들인데 나중에 혁명 정부에 큰 공헌을 했어요』
―그 판단서가 康회장님이 5ㆍ16에 참여한 동기가 됐습니까.
『우리는 모두 이 판단서를 보고 흥분했습니다. 5ㆍ16이 일어난 다른 이유가 많겠지만 핵심은 첫째 이유가 反共입니다. 가난으로부터 국민을 구하겠다는 소리는 나중에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내세운 것이지만 어쨌든 근본 이유는 反共 때문입니다. 나는 先親이 공산당에게 돌아가셨으니 더 끔찍하게 생각했지요. 나는 진심으로 딴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JP를 적극적으로 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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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Order Battle! ,,. The most import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