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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들이 증언하는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 (자유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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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진철 작성일11-04-20 18:41 조회2,0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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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들이 증언하는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

450쪽 규모의 탈북자 수기“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는 5.18을 “화려한 사기극”으로 규정했다. 이 책에는 36명의 탈북자들이 증언을 했다. 5.18 광주폭동은 북한이 기획-실천했고, 5.18이후 북한에서는 이른바 5.18공화국 영웅들이 갑자기 쏟아져 나왔고, 그들의 가족들은 귀족대우를 받았으며, 북한에는 공화국영웅들이 안장된 묘지가 여럿 있으며, 5.18을 기리기 위해 2개에 1만 톤 프레스에 '5.18청년호' 라는 명칭을 달아주고, ‘5.18소년 호 땅크(탱크)’ ‘5.18청년직장’ ‘5.18식품가공공장’ ‘5.18고치(누에)청년작업반’ 등의 호칭들도 생겨났고, ‘5.18무사고 정시견인차 운동’ 을 벌였고, 남쪽의 “화려한 휴가”처럼 “님을 위한 교향시”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한다.

전직 조선작가동맹 회원은 5.18을 그린 북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가 남한의“화려한 휴가”에서 보다 훨씬 더 진하고 강하게 묘사 했다고 증언한다. “쓰러진 시위자의 두개골을 개머리판으로 부수는 군인, 여러 시위자들을 거꾸로 다리를 들어 개처럼 질질 끌고 가는 장면, 여대생의 젖가슴을 도려내는 장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서 내동댕이치는 장면, 참으로 상상하기도 끔찍한 살인현장이 영화 속의 광주에 그려져 있다. ‘화려한 휴가’에서도 살인 장면은 연출되고 있지만 잔인성 면에서는 북한의 것과는 좀 거리가 있어보였다. 하지만 의아하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도청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르는 광주봉기군과 시민들에게 진압군이었던 대한민국의 국군이 고의적으로 총탄을 발사하여 살해하는 장면이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 적색깃발이나 인민공화국기도 아닌 자유대한민국의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평화적인 시위를 하는데 어찌하여 태극기의 수호자이고 국방의 의무자들인 국군의 총탄에 맞아 죽어 나가는지 영화가 보여주자는 취지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북에서는“님을 위한 교향시”라는 영화가, 남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남한 빨치산 노래가 제작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 윤상원(실명 윤개원, 화상으로 사망)은 두 개의 아주 다른 캐릭터로 부각돼 있다. 박노해가 쓴 ‘윤상원 평저’에는 윤상원이 5.18 최고의 영웅으로 그려져 있고, 그가 없었으면 5.18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5.18 광주 묘지에서도 윤상원은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고, 인터넷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박남선(배역 안상기)이 공수부대 대령 출신으로 묘사돼 있고, 윤상원은 박남선의 딸인 간호사를 흠모하는 택시기사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실제는 이와 정반대다. 윤상원은 30세 서점 점원이었고, 박남선은 26세 골재채취운전사였다. 한마디로 신본을 도용하고 두 사람의 실제 인물의 서열을 전도시켰다. 이 두 사람은 5월 25일에 형성된 ‘학생대책위원회’에 비로소 부각돼 있다. 윤상원은 학생대책위원회의 대변인, 박남선은 상황실장으로 임명돼 있었다. 위 두 개의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5.18을 지휘할만한 영웅이 없는데 5.18 시위는 군사작전이라 해도 마치 오케스트라를 보는 것처럼 매우 전문적으로 지휘되었다는 사실이다. 서점 종원원에 불과했던 윤상원과 골채운반화물차 운전수인 26세의 박남선이 지휘할 수 있는 작전이 절대 아니었다. 이는 5.18작전이 고도로 훈련된 북한 특수군에 의해 기획되고 실행되었을 것이라는 심증을 갖게 하는 매우 중요한 대목인 것이다.

제17대 총선이 끝난 2004년 5월 29일, 청와대에서 모인 정권획득 자축파티에서 386 당선자 30여명이 주먹을 흔들며‘산자여 따르라’로 끝나는 1980년대 의운동권 노래‘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불렀고, 노무현을 비롯해 대부분 참석자가 눈물을 흘렸다 한다. 무겁고 비장하게 땅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이 노래는‘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리기 위한 노래로 윤상원과 그보다 한 해 전인 79년 겨울 연탄가스로 숨진 그의 여인 박기순과의 영혼결혼식을 내용으로 하는 노래굿 '넋풀이'에서 두 영혼이 부르는 노래로 발표되었다. 전남대 선후배 사이로 들불야학에서 만난 두 남녀는 1982년 2월 망월동 묘역에 합장되어 부부의 연을 맺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5월 18일 윤상원-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서 처음 불렸다. 영혼으로 맺어진 부부가 함께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다. 이 노래는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에서 황석영이 내용을 따다가 작사를 했고, 여기에 김종률이 곡을 붙인 것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이렇게 수상했던 의문점을 바로 탈북자들이 집단으로 나서서 풀어주었다. 광주 봉기는 북한이 계획적으로 남조선을 전복하고, ‘남한에서 투쟁하는 공화국영웅 김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친북정권을 세우기 위해 북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며, 북은 살인기계로 길러진 특수부대들을 대거 내려 보내 시민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때려죽이고, 찔러 죽여 놓고, 이를 계엄군의 소행으로 인식하도록 함으로써 계엄군에 대한 광주민중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고 증언한다. 주로 여성과 임산부들을 상대로 입에 담지도 못 할 만큼의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생생하게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북한주민들에게 대남적개심을 선동했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동영상은 남한에는 없고 북한에서만 방송됐다. 북한에서 동영상이 방송되는 동안 남한에서는 그 동영상에 상응하는 유언비어들만 난무했다. “공수부대가 임신한 여인의 배를 찔러 태아를 꺼냈다” “공수부대가 대검으로 여대생을 발가벗기고 유방을 도려냈다” 등 등. 이는 북한특수군이 광주의 어느 후미진 곳들에서 이러한 만행을 저지르면서 동영상을 찍어 올려 보낸 반면, 광주에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광주에서 북한의 모략전을 위해 칼에 유방을 잘리면서 비참하게 죽어간 젊은 여성들과 임신한 배를 칼로 찔리면서 태아와 함께 처참하게 죽어간 여인들, 나체로 목이 잘려나간 여인, 전기톱 같은 것에 의해 두개골이 반으로 잘리다 만 여인 그리고 맞아 죽고, 찔려 죽고,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은 공수부대에 의해 당한 것이 아니라 북한 특수군에 의해 당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가장 자극적인 방법으로 광주 시민들을 흥분시켜 당시의 한국정부를 전복시키고,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 타도에 대한 정당성과 적개심을 고취시켜 제2의 남침전쟁을 하려 했다고 입을 모아 증언한다.

1980년 3월을 광주 폭동의 D데이로 정하고 대규모 간첩들을 소조 단위로 내려 보내, 부마사태, 사북사태 등을 지휘했고, 광주에서는 반드시 남한 정부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목표아래 축차로 투입됐던 특수부대 요원들과 고정간첩들을 총 동원하여 전라남북도 전역을 샅샅이 뒤져 무기고 위치를 찾아내 1980년 2월말에는 무기고 전반에 대한 약도와 도면을 완성했다고 증언한다. 광주 봉기 시에 방위산업 업체로부터 장갑차와 군용차를 탈취하고 그 차들을 가지고 수많은 무기고를 일시에 탈취한 것도 북한 특수군이 한 것이고, 특수군이 무기를 나누어 줄 때 "아저씨 남한 사람 아니지요?" 그를 의심하는 한 여성을 끝까지 좇아가 대문 안에서 남자와 이야기 하는 장면을 포착해 남녀 모두를 살해했다는 증언도 있다. 감옥소(교도소)를 공격한 일과 장갑차를 운전하고 기관총을 든 것도 북한 특수군의 소행이었다고 증언한다. 한 부대에서는 장갑차 위에서 기관총을 든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고 이구동성으로 “야, 저거 광수다” 외치기도 했다 증언한다. 아래에 이슈 별로 증언내용을 발췌 정리하였습니다
5.18을 북한이 기획-실천했다는 데 대한 증언들

1) 당시 북한에서 나간 특수부대들이 중심이 돼서 광주인민봉기를 물밑에서 조종했다고 말했다. 또한 광주봉기를 성공시켜 가지고 서울로 진격할 예정이었다는 말도 했다.(35쪽 5-8줄)

2) 당 기관에서 말하는데 의하면 북한군 특수부대들과 전문 공작부대가 남한에 침투하여 광주봉기를 비롯해서 주요 항쟁시위들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했다.(35쪽 11-13줄)

3) 5.18 광주인민봉기 때 북한 중앙TV에서는 매일과 같이 끔찍한 영상물들을 상영하였는데 이때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사람들과 얼굴을 가린 사람들은 모두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36쪽 9-12줄)

4) 남조선 광주인민봉기에 나갔다가 온 친구가 말하는 소리를 듣고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에서 얼마나 가혹하고 잔인하게 굴었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36쪽 하 3-6쪽)

5) 테레비에서 보았다. 친구 한명이 텔레비에서 손에 기관총을 들고 발로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이 나오자 그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 사람이라고 하였다.(37쪽 7-9줄)

6) 큰 언니 형부가 북에서 특별훈련을 받은 미인 아가씨들도 광주봉기에 개입했고 그들이 뒤에서 조정했다고 하였다.(37쪽 하 4-5줄)

7) 남조선에 갔다가 부상을 당하고 온 공장 당 위원회 초급당 비서에게서 강연시간에 직접 들었다.(38쪽, 9-10줄)

8) 대학을 마치고 3대혁명소조 기간에 남조선 광주인민봉기에 나가서 싸우고 온 사람한테서 들었다. 같이 나갔다가 죽은 사람을 불태워서 흔적을 없애 버렸다고 말하였다.(38쪽 하 5-7줄)

9) 광주봉기를 텔레비전에서 매일 방송하였고, 북한사람들은, 더구나 여자들은 무서워서 사람 죽이는 장면들을 볼 수가 없었다. 텔레비를 보면서 광주인민봉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장갑차를 몰고 총을 쏘는 사람들이 남조선 사람들이 아니라 북한에서 내보낸 특수부대사람들이라고 하였다. 회의에 참가해서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39쪽 1-6줄)


10) 1981년 초부터 북한 군인들과 사회간부들의 입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북한의 특수부대사람들이 참가했었다는 구제적인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내용은 북한 전역으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51쪽, 8-11줄)

11) 용감무쌍한 우리의 영웅적 인민군대가 목숨으로 지켜주는 사회주의 조국에서 사는 행복과 자부심이 저절로 넘쳐나게 해주는 소설과도 같은 5.18광주사건의 이야기였다. 광주사태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구수하게 전해졌으며 마치 자기들이 갔다 온 것처럼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들뜨게 만들었다. 공공장소나 모임장소에서 사람들은 희열에 넘쳐 광주사태의 이야기를 화제 거리로 주고받았다.(52쪽 8-14줄)

12) 더하고 뺄 필요도 없이 5.18광주사건은 북한정권과 군부에 의해서 계획되고 설계된 대남작전의 한 부분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지고 조작된 대표적인 사건이다.(56쪽 10-13줄)

13) 광주사건! 그거다 우리군대가 했어요. 장갑차 뺏어 몰고 총 쏘는 것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는 전문훈련 받은 우리사람들이 한 것이 맞아요. 평범한 시민들이 뭘 할 줄 알겠어요? 우리 쪽의 사람들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판이 그렇게 커질 수가 없지요” 어디에 가든 광주사건이라는 말만 나오게 되면 저저마다 입을 열고 말 나가는 대로 너도 나도 한마디씩 하는 정도였다.(59쪽 4-10줄)

14) (내 내연의 남편인 공화국 영웅은)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남조선의 전라도지역인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계 안방이었다. 침투인원들은 그곳에서 7명의 현지 북한요원들(그들 일곱 사람은 이미 전에 북한에서 파견되어 내려온 공작조)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서 앞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계획하고 있는 작전내용과 이를 위한 사전준비 작업이 무엇인지에 대한 임무사항을 전달받았다. 그들이 당시 임무내용을 전달받으면서 한순간에 파악했던 것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4.19인민봉기를 능가하는 전국적인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무장폭동의 성격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자신들이 목포지역으로 급파된 것도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목포에서 만난 7명의 북한요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대학생들의 반정부폭동을 배후조종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이었고 북한은 부산, 마산 폭동을 5.18광주사태와 마찬가지로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부산, 마산사태가 전국적인 인민봉기로 확산되지 못하고 조기에 진압된 것은 폭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와 확대될 수 있는 명분이 취약했으며 부마사태의 정당성에 대한 지역 민심의 합법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 주요한 실패의 원인이라고 했다. . . 그들이 남조선전라도 지역에 침투하여 처음으로 착수한 일은 무장폭동을 준비하는데서 관건인 무기를 확보하기위한 사업이었다. 북한의 계획대로라면 원래 광주폭동이 정상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날자는 1980년 3월경이었다고 한다. 북한이 봉기시기를 농번기가 시작되기 전인 3월로 택한 것은 폭동이 일어나서 전국적인 항쟁으로 신속하게 번지려면 농사철과 같은 불필요한 계절요소들의 제한적인 방해를 피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 1980년 2월말을 넘기면서 폭동이 전개되면 임의의 시기에 무기탈취가 원만히 진행될 수 있도록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무기고들에 대한 사전파악과 요해사업이 성과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1980년 3월로 계획되어있던 광주폭동이 5월로 늦어진 것은 1980년 4월말에 일어났던 강원도의 사북탄광사태와의 밀접한 연관 때문이었다. 사북탄광에서의 폭동조짐을 첩보망을 통해서 사전부터 구체적으로 감지하고 있던 북한은 3월로 예정되었던 광주폭동을 4월말로 연기하라는 지령을 내려 보냈고 득보다 실이 많은 산발적인 소요보다는 전국각지에서 일시에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전국규모의 항쟁이 성격으로 보나 위력으로 보나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계산하였다. 목포에 침투하였던 11명의 요원들이 사북탄광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일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말로는 그곳에도 북한의 계획적인 지령을 받고 파견된 별도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잠입하여 사북사태가 강원도지역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배후를 은밀히 조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1980년 5.18을 전후로 하여 북한이 남조선에서의 전 인민적인 항쟁을 위해 얼마나 치밀하고 계획적인 작전을 세웠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단편적인 내용의 한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북한쪽의 입장에서 사북탄광사태는 치명적인 실패작이었고 그것이 무산됨으로써 광주폭동은 부득이하게 5월 중순을 넘기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76쪽 하7줄-79쪽 10줄)

15) 당사자들한테서 직접들은 이야기지만 북한은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수립이었다. 내가 북한에서 이런 내용들을 들을 때는 신기할 정도로 희한했었지만 지금 남한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참으로 위험하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 .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80쪽 하5줄-81쪽 14줄)

16) 안창식은 교전 중에 무릎 바로 아래에 관통상을 입고 광주폭동이 끝나기 2~3일 전쯤 목포의 아지트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다가 14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해 7월 중순경에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고 북한에서 내려온 잠수함을 타고 철수하였다고 한다. 초기에 임무를 받고 타격대에서 파견되었던 안창식을 포함한 10명의 요원들 중에서 한 명이 숨지고 안창식과 함께 4명이 부상을 당했으며(부상자중 1명은 북한으로 돌아가서 치료받다가 1년 뒤에 사망) 부산, 마산폭동에 참가하기위해서 먼저 남파되었다가 그들과 합류한 7명의 일행 중 3명은 행불이 되어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했다.(87쪽 하2줄-88쪽 8줄)

17) 남한에 와서 확인해본데 의하면 이런 사실까지는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북한인민군 주력전투부대의 해당부서와 단위들은 광주사건이 터지기 며칠 전부터 상급지휘부로부터 광주라는 정확한 지역까지는 통보를 받지 못했지만 남조선에서 조만간 대규모의 사건이 터진다는 구체적인 지시를 하달 받고 전투준비상태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우리 부대에서도 미그19 - 21전투기들에 대한 특별정비는 물론 훈련반경을 일상적인 훈련지역보다 남쪽방향으로 더 내려간 군사분계선 상공으로 확대했고 4대로 편성된 전투기 편대가 주야로 항상 관할지역에 대한 비행전투근무를 감당하게 조치했다.(166쪽 하2줄-167쪽 8줄)

18) 나는 올해 1월 달에 1980년 5월18일 광주봉기에 직접 참가하고 북한으로 돌아갔다가 지금 다시 남한에 내려와서 소문 없이 조용히 살고 있는 50대의 남성분을 만나 보았던 일이 있습니다. 그는 현재 신변상의 문제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많이 꺼리고 있지만 5.18광주사건이 국민들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기회가 조성되면 자기가 직접 나서서 모든 것을 증언을 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196쪽 하7-1줄)

19) 광주봉기가 한창이던 어느 날 중대병실에 있는 텔레비전에서 광주 봉기참가자들이 장갑차를 끌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자 같이 텔레비전을 보던 중대 군인들이 갑자기 일어나서 박수를 치면서 환호를 했다고 한다. 중대 군인들 중에서 성근이보다 몇 년 선배인 사관장이 텔레비전에다가 손짓을 하면서 고성을 질렀다고 하였다. “야, 저거 광수가 아니야? 광수가 어떻게 저기 나가있어. 저자식이 별을 달고 승진해서 어느 분계선 일대의 특수부대로 간다고 하더니 저기 나가있네. 세상일은 참 모르겠다.” 라고 소리치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광수의 얼굴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었다. . . 그때 광수는 머리를 기르고 있었지만 그와 생활했던 중대의 구 대원들은 모두가 다 광수를 정확히 알아봤다는 것이었다. 성근이를 비롯한 중대 사람들은 그날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광주폭동이 가열되고 있는 장소에서 광수가 장갑차에 올라서 괴뢰군들의 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남조선에서 벌어지는 인민항쟁에 어떻게 되어서 북한에 있을 사람들이 나가서 참가하고 있는지 참으로 희한안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부대에서 한가마 밥을 먹던 사람이 광주에 나가서 총을 들고 싸우는 것을 본 성근이네 중대 사람들은 그때부터 광주사건이 남쪽에서 인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만든 것이 아니라 북쪽에서 특수부대사람들이 나가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였다.(204쪽 하8줄-205쪽 하7줄)

20) 북한 특수부대 요원으로써 광주사태에 참가하였다가 북한으로 돌아와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이 직접 발언한데 의하면 광주무장폭동은 그자체가 어떤 면에서도 전쟁 이상의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참으로 광주사태가 남한이 전복될 수 있는 위기의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광주사태 때 전쟁이 날 뻔 했다. 김일성의 지시로 본격적으로 밀고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런 시점에서 광주사태는 중요했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당시 인민군대는 광주와 남조선의 전역에서 신호가 오면 즉시 무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하려고 계획했었다. 그러나 당시 전두환 군부가 우리의 활동에 대해서는 눈치를 못 채고 있었지만 공수부대들을 진압군으로 대거 투입하는 바람에 무장폭동을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문제가 생각 외로 불가능해 졌다. 남조선으로 드나들 수 있는 루트는 해상뿐만이 아니라 육지 쪽으로도 정교하게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고가는 데서는 큰 지장이 없었다. 광주에서 대학생들의 소요가 일어나기 이전부터 우리 쪽에서 남조선에 나가서 활동하는 특수부대사람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남조선에 침투하여 단기 소부대작전을 하던 사람들은 게릴라전의 전문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고 광주에서 장갑차를 탈취하고 무기고를 습격한 것은 남조선시민들이 아니라 다 우리가 한 일이었다”(208쪽 하4줄-209쪽 하6줄)

21) 1980년 5월 18일 남조선의 광주에서 무장폭동이 전개되기 바로 하루 전인가 이틀 전에 그 책에는 광주라고 정확히 대상은 지명하지 않았지만 남조선의 전라도 지역에서 대규모의 반정부 인민항쟁이 일어난다는 내용과 함께 전당, 전국, 전민이 여기에 동참할 수 있는 만단의 태세를 갖추며 공장 기업소들은 생산라인을 군사지휘체계로 긴장하게 운영할 데 대해서 지시하였습니다. . . 바로 이틀 뒤인 5월 19일 아침 노동신문을 비롯한 각종 신문에는 드디어 남조선에서 우리 공화국 북반부 인민들이 학수고대하던 전 인민적인 무장 항쟁이 일어났다고 대서특필하였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광주의 무장폭동 첫 시작부터 얼굴을 가린 광주의 계엄군들이 부녀자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장면들을 반복해가면서 집중적으로 내보내었고 광주무장폭동이 남조선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지금이 바로 통일의 대 사변을 맞을 수 있는 기회라고 폭동 전 기간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열변을 토했었습니다.(221쪽 10줄-222쪽 5줄)

22) 김일성과 김정일, 그 앞잡이들이 민족 앞에 또 하나의 역사적 비극을 만들었음이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광주사건은 김일성이가 남조선에서 일어나는 평화적인 시위를 이용해서 친북좌파세력들과 짜고 인민군 특수부대들을 내려 보내서 만들어낸 사건입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무장폭동을 전후로 북한의 민간사회에서는 별의별 이상하고 흉한 소문들이 다 나돌았습니다. 남조선에 파견되었던 특수부대 전사들이 다 죽고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등 누구네 집 아들은 광주에 갔다가 죽었는데 당원증만 집으로 보내어 왔고 또 뉘 집 친척의 아들은 남조선에서 죽은 시체는 못 가져 오고 손목 하나만 잘려서 들어왔다는 식으로 참으로 광주사건과 관련된 하도 많은 이야기들이 항간에 많이 떠돌았습니다. (223쪽 9-19줄)

23) 조직부 지도원은 광주사건 당시 북한 해주시에 있는 대남연락소에서 근무하였으며 광주인민항쟁에는 소수의 대남연락소 관계자들만이 나가서 행동한 것이 아니라고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그 목적이 광주라는 일방적인 지역을 노렸던 제한적인 작전이 아니라 남조선 정권 전복이라는 큰 그림이었던 것만큼 특수부대에서 잘 훈련된 사람들이 대거 투입되어 사건을 주도했다고 이야기 하였다. 북한 제3군단 승용차 관리소 정치부소장(남포시 연락소 초급당비서의 조카)은 동료와의 발언에서 광주사건에 개성시 연락소도 개입하였는데, 남조선 전역에서 인민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지 못하는 바람에 광주가 봉쇄되고 아군과 시민들의 대량적인 희생만 만들었을 뿐 최종적으로 실패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고 토로하였다. (231쪽 1-13줄)

24) 군단조직부지도원이 우리에게 들려준데 의하면 대한민국에 침투하여 광주사건에 직접 참가한 “북한전투원”은 자기들은 북한의 명령에 따라서 처음에 광주시에 들어가서 대학생들의 시위만 지켜볼 뿐 며칠 동안 전투에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이 처음부터 주동적으로 나서서 과격하게 이끌어 가면 단번에 정체가 노출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던 것이 이유라고 한다. 광주시내가 해방되기 전까지는 뒤에서 조종을 하면서 광주시민들을 거리로 불러내는 작전을 수행하였고 광주가 해방된 다음부터 복면을 하고 주동적으로 개입을 시도했다는 것이다.(235쪽 2-11줄)

25) 머리가 긴 사람들 여러 명이 괴뢰군 복장에 소총을 들고 군인 한 명을 잡아다가 옷을 벗기고 무참하게 두들겨 패서 실신하게 만드는(아마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음) 장면이 나올 때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도 머리가 긴 부분은 정규부대 군인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군인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같은 군인을 때려죽인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299쪽 9-15줄)

26)‘대내지휘관에 한함’이라는 등급 표제를 달아서 총정치국에서 지휘관용으로 내려 보내는 강연 자료에는 광주사건과 관련된 김일성, 김정일의 발언들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었다. 김일성은 광주사건은 남조선을 통일할 수 있는 아주 적절하고 좋은 기회였는데 남조선 인민들한테만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 무리였다고 말하였다. 또한 민심을 움직일 수 있는 특수부대공작조들의 배후교란 작전이 기술적으로 부족하고 크게 효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광주사건이 남조선의 전국으로 확산되지 못했다는 것이 기본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300쪽 하5줄-301쪽 4줄)

27) 창고장(공화국영웅) 일행이 서울을 떠나서 광주시내로 이동했을 때는 폭동이 시작 된지 이미 이틀정도가 지난 뒤였다고 하였다. 시내는 대학생들과 광주시민들의 폭동으로 마구잡이 판으로 변해 있었고 각처에서는 전두환을 타도하라는 크고 작은 프랑 카드들을 들고 데모꾼들이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것을 첫눈에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서울에서의 모습과는 정 반대로 광주에서는 정권에 분노한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사생결단으로 진압군에 저항하면서 국가기관을 습격하고 광주의 ‘해방군’으로 등장해 있었다고 하였다.(319쪽 7-15줄)

28) 땅굴은 시멘트로 구축해서 영구화되어 있는 상태는 아니었고 규모는 탱크(북한말로 땅크)나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폭 정도는 안 되지만 순수 전투부대들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남한의 어느 지역까지 와서 갱도바깥으로 나왔는지는 한밤중이어서 지도상으로 계산해도 잘 알 수 없었다고 했고 밤중에 살펴봐도 주위가 한산한 농촌마을은 분명하였다고 하였다. 남쪽 갱도의 출입구에서 그들을 마중한 것은 두 늙은 내외라고 하였다. 소부대작전은 주로 대낮보다는 밤에 진행되는 것이 관례지만 23명이라는 인원이 밤길에 동시에 움직이면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에서 분명히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그들은 여러 개 조로 분산되어 전라북도지역으로 출발하였다고 한다.(344쪽 하1줄-345쪽 10줄)

29) 중앙당에서 내려온 지도검열부장은 광주인민봉기는 남조선을 해방하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확실한 계획에 따라 김일성과 김정일이 대남연락소가 아닌 조선인민군 정찰국과 특수부대들을 비롯한 전투무력들을 직접 광주에 파견하여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을 도울 데 대해서 특별히 지시하고 진두지휘까지 했다고 하였다.(375쪽 9-13줄)

30) 5.18광주사태 당시에는 북한군 전 부대가 전쟁상태에 돌입해 있었고 우리부대도 진지에 나가서 전투식량으로 끼니를 에우면서 신발도 못 벗고 대기상태에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2시간씩 진행하는 정치상학시간에는 방어사령부에서 나온 정치소조 원들이 남조선광주에서 일어난 인민봉기는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북한의 계획된 작전이며 많은 특수부대들이 침투해서 남조선괴뢰군들을 제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무장시켜 인민항쟁을 지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광주폭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때를 맞추어 대규모 특수부대가 남조선으로 침투해서 전면전을 피하면서 배후교란작전으로 주요시설물들을 파괴하면 사회혼란이 조성되게 되고 이렇게 되면 남조선해방은 거의 확정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평양에서부터 조직적으로 알려주던 말대로라면 남북통일은 아무리 길어야 몇 개 월정도 안팎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396쪽 하1줄-397쪽 12줄)

31) 신변상문제를 우려하는 본인의 거절로 구체적인 내용은 많이 들을 수 없었지만 그 특수부대출신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광주사건 때 비폭력시위가 무장폭동으로 바뀌게 된 것은 시위과정에서 진압군에 의한 자극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일이 아니라 북한의 계획적인 수순 속에서 국가전복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광주학살을 대한민국 국군 쪽으로 돌리고 김정일을 감싸주고 있는 친북좌파 애들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고 비꼬았다.(421쪽 14-21줄)
23. 탈북자들이 증언하는 5.18

450쪽 규모의 탈북자 수기“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는 5.18을 “화려한 사기극”으로 규정했다. 이 책에는 36명의 탈북자들이 증언을 했다. 5.18 광주폭동은 북한이 기획-실천했고, 5.18이후 북한에서는 이른바 5.18공화국 영웅들이 갑자기 쏟아져 나왔고, 그들의 가족들은 귀족대우를 받았으며, 북한에는 공화국영웅들이 안장된 묘지가 여럿 있으며, 5.18을 기리기 위해 2개에 1만 톤 프레스에 '5.18청년호' 라는 명칭을 달아주고, ‘5.18소년 호 땅크(탱크)’ ‘5.18청년직장’ ‘5.18식품가공공장’ ‘5.18고치(누에)청년작업반’ 등의 호칭들도 생겨났고, ‘5.18무사고 정시견인차 운동’ 을 벌였고, 남쪽의 “화려한 휴가”처럼 “님을 위한 교향시”라는 영화도 만들었다 한다.

전직 조선작가동맹 회원은 5.18을 그린 북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가 남한의“화려한 휴가”에서 보다 훨씬 더 진하고 강하게 묘사 했다고 증언한다. “쓰러진 시위자의 두개골을 개머리판으로 부수는 군인, 여러 시위자들을 거꾸로 다리를 들어 개처럼 질질 끌고 가는 장면, 여대생의 젖가슴을 도려내는 장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서 내동댕이치는 장면, 참으로 상상하기도 끔찍한 살인현장이 영화 속의 광주에 그려져 있다. ‘화려한 휴가’에서도 살인 장면은 연출되고 있지만 잔인성 면에서는 북한의 것과는 좀 거리가 있어보였다. 하지만 의아하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도청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르는 광주봉기군과 시민들에게 진압군이었던 대한민국의 국군이 고의적으로 총탄을 발사하여 살해하는 장면이었다. 대한민국의 국민이 적색깃발이나 인민공화국기도 아닌 자유대한민국의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평화적인 시위를 하는데 어찌하여 태극기의 수호자이고 국방의 의무자들인 국군의 총탄에 맞아 죽어 나가는지 영화가 보여주자는 취지를 이해 할 수가 없었다.”북에서는“님을 위한 교향시”라는 영화가, 남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남한 빨치산 노래가 제작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 윤상원(실명 윤개원, 화상으로 사망)은 두 개의 아주 다른 캐릭터로 부각돼 있다. 박노해가 쓴 ‘윤상원 평저’에는 윤상원이 5.18 최고의 영웅으로 그려져 있고, 그가 없었으면 5.18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5.18 광주 묘지에서도 윤상원은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고, 인터넷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박남선(배역 안상기)이 공수부대 대령 출신으로 묘사돼 있고, 윤상원은 박남선의 딸인 간호사를 흠모하는 택시기사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실제는 이와 정반대다. 윤상원은 30세 서점 점원이었고, 박남선은 26세 골재채취운전사였다. 한마디로 신본을 도용하고 두 사람의 실제 인물의 서열을 전도시켰다. 이 두 사람은 5월 25일에 형성된 ‘학생대책위원회’에 비로소 부각돼 있다. 윤상원은 학생대책위원회의 대변인, 박남선은 상황실장으로 임명돼 있었다. 위 두 개의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5.18을 지휘할만한 영웅이 없는데 5.18 시위는 군사작전이라 해도 마치 오케스트라를 보는 것처럼 매우 전문적으로 지휘되었다는 사실이다. 서점 종원원에 불과했던 윤상원과 골채운반화물차 운전수인 26세의 박남선이 지휘할 수 있는 작전이 절대 아니었다. 이는 5.18작전이 고도로 훈련된 북한 특수군에 의해 기획되고 실행되었을 것이라는 심증을 갖게 하는 매우 중요한 대목인 것이다.

제17대 총선이 끝난 2004년 5월 29일, 청와대에서 모인 정권획득 자축파티에서 386 당선자 30여명이 주먹을 흔들며‘산자여 따르라’로 끝나는 1980년대 의운동권 노래‘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불렀고, 노무현을 비롯해 대부분 참석자가 눈물을 흘렸다 한다. 무겁고 비장하게 땅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이 노래는‘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리기 위한 노래로 윤상원과 그보다 한 해 전인 79년 겨울 연탄가스로 숨진 그의 여인 박기순과의 영혼결혼식을 내용으로 하는 노래굿 '넋풀이'에서 두 영혼이 부르는 노래로 발표되었다. 전남대 선후배 사이로 들불야학에서 만난 두 남녀는 1982년 2월 망월동 묘역에 합장되어 부부의 연을 맺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5월 18일 윤상원-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서 처음 불렸다. 영혼으로 맺어진 부부가 함께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다. 이 노래는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에서 황석영이 내용을 따다가 작사를 했고, 여기에 김종률이 곡을 붙인 것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이렇게 수상했던 의문점을 바로 탈북자들이 집단으로 나서서 풀어주었다. 광주 봉기는 북한이 계획적으로 남조선을 전복하고, ‘남한에서 투쟁하는 공화국영웅 김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친북정권을 세우기 위해 북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며, 북은 살인기계로 길러진 특수부대들을 대거 내려 보내 시민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때려죽이고, 찔러 죽여 놓고, 이를 계엄군의 소행으로 인식하도록 함으로써 계엄군에 대한 광주민중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고 증언한다. 주로 여성과 임산부들을 상대로 입에 담지도 못 할 만큼의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생생하게 반복적으로 보여주면서 북한주민들에게 대남적개심을 선동했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동영상은 남한에는 없고 북한에서만 방송됐다. 북한에서 동영상이 방송되는 동안 남한에서는 그 동영상에 상응하는 유언비어들만 난무했다. “공수부대가 임신한 여인의 배를 찔러 태아를 꺼냈다” “공수부대가 대검으로 여대생을 발가벗기고 유방을 도려냈다” 등 등. 이는 북한특수군이 광주의 어느 후미진 곳들에서 이러한 만행을 저지르면서 동영상을 찍어 올려 보낸 반면, 광주에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광주에서 북한의 모략전을 위해 칼에 유방을 잘리면서 비참하게 죽어간 젊은 여성들과 임신한 배를 칼로 찔리면서 태아와 함께 처참하게 죽어간 여인들, 나체로 목이 잘려나간 여인, 전기톱 같은 것에 의해 두개골이 반으로 잘리다 만 여인 그리고 맞아 죽고, 찔려 죽고,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은 공수부대에 의해 당한 것이 아니라 북한 특수군에 의해 당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가장 자극적인 방법으로 광주 시민들을 흥분시켜 당시의 한국정부를 전복시키고,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 타도에 대한 정당성과 적개심을 고취시켜 제2의 남침전쟁을 하려 했다고 입을 모아 증언한다.

1980년 3월을 광주 폭동의 D데이로 정하고 대규모 간첩들을 소조 단위로 내려 보내, 부마사태, 사북사태 등을 지휘했고, 광주에서는 반드시 남한 정부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목표아래 축차로 투입됐던 특수부대 요원들과 고정간첩들을 총 동원하여 전라남북도 전역을 샅샅이 뒤져 무기고 위치를 찾아내 1980년 2월말에는 무기고 전반에 대한 약도와 도면을 완성했다고 증언한다. 광주 봉기 시에 방위산업 업체로부터 장갑차와 군용차를 탈취하고 그 차들을 가지고 수많은 무기고를 일시에 탈취한 것도 북한 특수군이 한 것이고, 특수군이 무기를 나누어 줄 때 "아저씨 남한 사람 아니지요?" 그를 의심하는 한 여성을 끝까지 좇아가 대문 안에서 남자와 이야기 하는 장면을 포착해 남녀 모두를 살해했다는 증언도 있다. 감옥소(교도소)를 공격한 일과 장갑차를 운전하고 기관총을 든 것도 북한 특수군의 소행이었다고 증언한다. 한 부대에서는 장갑차 위에서 기관총을 든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고 이구동성으로 “야, 저거 광수다” 외치기도 했다 증언한다. 아래에 이슈 별로 증언내용을 발췌 정리하였습니다.
특수부대가 광주에서 광주 시민을 죽였다는 데 대한 증언

1) 광주봉기에 참가해서 남조선인민들 세 명을 죽였다고 하였다. 내 생각엔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들과 현장의 간첩들의 조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4.19 혁명 때도 부분적으로 간첩들의 조작이 있다는 것을 북한에서는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 .전쟁이 일어날 경우 남조선에 숨어서 활동하는 10만 명의 간첩들이 교란작전을 할 것이라고 하더라.(35쪽 하3-36쪽 4줄)

2) 안창식(나의 내연남)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대원 세 명에게 여자를 추격해서 그를 조용히 처리하고 시신을 소각하되 사진기는 무조건 회수해 올 것을 명령했다. 분명히 다른 냄새를 맡고 따라다니는 남조선정보기관의 끄나풀이 아니면 정체를 숨기고 광주 시내를 뒤지면서 색다른 냄새를 맡고 있는 어느 특수기관의 스파이라고 짐작되었다. 그 여자는 북한요원들에 의해서 광주시내 모처로 납치되어갔고 저항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한다.(86쪽 5-12줄)

3) 광주의 일반적인 시위를 무장봉기로 확대하는데서 자신들이 빌미를 제공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절대로 가능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 당사자 본인의 설명이었다는 것이다. 능력적으로 대학생들과 함께 시민들이 완전무장한 정규군과는 절대로 상대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희생을 무릅쓰고 항쟁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자기들이 국군복장을 하고 배후에서 시민군을 죽이고 시민군과 국군 사이를 철저하게 교란한 작전의 효과라는 것이었다.(235쪽 16줄-236쪽 4줄)

4) “쌍 간 나 새끼 괴뢰군 새끼들 몰려오는데 총안잡고 머하고 서있니?” 총을 넘겨받을 생각도 안 하고 자기 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여성이 그에게 “아저씨 광주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나요?” 순간 그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고 했다. 남조선 사람들과는 어떠한 대화도 주의해야 한다고 사전에 작전에 침투되기 전부터 상급으로부터 언질을 받았지만 순간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괴뢰군”이라는 표현과 같은 북한말을 하는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앞에 있는 여성이 자기의 말투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을 봐서는 무언가 다른 것을 눈치 채지 않았는지 불안한 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게다가 복면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있었으니 그 여성은 그의 정체를 충분히 의심할 만도 한 일이었다. “나는 강원도 태생 이야요. 광주에서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이야요” 그는 그 여성에게 자기가 강원도에서 탄광노동자로 일하다가 전라도 광주로 돈벌이를 왔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여성은 그가 아무래도 수상해 보였던지 총을 받지 않고 이내 골목 쪽으로 줄행랑을 치듯 사라져 버렸다. 그냥 놔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는 무기를 나눠주는 일을 대원에게 눈짓하고 젊은 여성의 뒤를 다급히 쫒아 갔다고 한다. 개인 살림집들이 들어서 있는 골목을 따라 여자의 뒤를 쫒던 그는 대문으로 들어가는 여자를 발견하고 그리로 달려갔다. 여자가 들어간 대문밖에 도착해서 잠시 안의 동정을 살피는데 여자가 집안안의 누군가에게 벌써 자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복면을 한 이상한 사람들이 만이 나타나고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명히 아니고 외지에서 온 사람들 같아보였어요.” 순간 귀가 멍하고 가슴이 철렁 하였다. 적후에서 이런 순간에는 어떻게 행동하고 상황처리를 해야 하는지 그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도 환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좀 전에 만났던 젊은 여성과 그의 동료인 뜻한 남성이 마주서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여성은 대문으로 들어서는 사람이 자기가 금방 말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남자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가 총을 꺼내드는 순간 위험을 눈치 챈 남자가 도망치려고 집안 담장으로 뛰어 올랐다. 그는 남자를 향해 총탄 한발을 쏘았다. 담장 밖으로 도망치던 남자가 총에 맞고 떨어지는지 소리가 쿵 하고 들렸다. 그는 파랗게 질려있는 여성의 가슴에 총탄 두발을 날리고 남자가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그 쪽으로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피자국은 있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핏자국이 향한 방향으로 따라가니 허벅지에 총을 맞은 남자가 몇 미터도 못가서 신음하면서 골목길에 쓰러져 있었다. 그가 총을 꺼내서 들이대자 남자는 절망에 휩싸여 어디 가서 절대로 말하지 않겠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고 한다. 그는 살려두면 절대로 안 되는 그 남자의 심장에다가 총탄 한발을 쏘아박고 그 자리를 신속히 피했다고 말하였다. (347쪽 10줄-349쪽 7줄)

5)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전국적으로 광주인민항쟁의 여파가 퍼져나가게 만드는 것이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임무였지만 생각처럼 사건이 번지지 않자 북한에서는 현장에 파견된 특수부대 요원들에게 될수록 정체를 노출시키지 말고 주도적으로 폭동을 유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하였다. 북한으로 부터 새로운 지시가 떨어지면서 특수작전요원들은 시민군들 속에 위장 침투하여 본격적인 살인, 파괴활동을 조작하면서 광주시민들을 자극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광주인민봉기에서 죽은 사람들 중에 실제로 진압군에게 맞아 죽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요원들에 의해서 무참하게 죽었다고 공화국영웅의 말을 빌어서 친구는 말했다.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원들의 정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눈치를 채거나 이상한 기미를 보이기만 하면 그들은 두말없이 즉석에서 시체가 되어 처리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르지 않거나 그들의 요구에 불응해서 도망가면 그 사람들 역시도 절대로 살려두지 않았다는 것이다.(379쪽 9줄-380쪽 2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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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58 北의 유명영화 주인공이고 열성 애국자였던 여배우의 최후… 댓글(1) 소강절 2011-04-20 1755 21
10857 분단이한국사에미친영향에 대해.. dc도라에몽 2011-04-20 2339 1
10856 지구상 최강의 폭격기!!! 댓글(1) 개써글 2011-04-20 1843 10
10855 국보급 가치를 지난 문화재 더블디 2011-04-20 1805 6
10854 세상일 나랏일 완벽하게 모르시는 김경재 의원이지만 이렇… 소강절 2011-04-20 1863 19
10853 4.27 순천 김경재 후보가 단식 들어간다는군요 댓글(3) 좌익척결 2011-04-20 1887 22
10852 4.19의 도화선 故 김주열군 뉴스 캡쳐 비탈로즈 2011-04-20 1863 17
10851 어처구니없는 국가기관의 번역오류 댓글(1) stallon 2011-04-20 1680 10
10850 한자를 쓰는게 옳으냐, 안 써야 되느냐 댓글(4) kowi 2011-04-20 1973 7
10849 4. 19 댓글(1) panama 2011-04-20 1968 17
10848 안케작전 김영두 저자가 보내온 편지 댓글(2) 안케 2011-04-19 1888 14
10847 악마 김정일의 변호사가 된 김대중 처 이희호 댓글(3) 비전원 2011-04-19 2231 46
10846 4.19 도화선에 불지른 자는 간첩 이석이었다! 비전원 2011-04-19 1911 12
10845 4.19 혁명과 북한 댓글(1) 반공청년투사 2011-04-19 1992 9
10844 이 못난 중놈(김종오)은 절(시스템클럽)을 떠나야 될 … 댓글(11) 김종오 2011-04-19 2215 11
10843 제 2차 6.25전쟁은 언제쯤 일어날까 하는 생각에. 댓글(3) 아이러브 2011-04-19 2103 7
10842 오공화국 3S정책(이용일 KBO사무총장) 댓글(1) 신생 2011-04-19 2423 2
10841 北 주민들, 김정일 죽으면 정씨(鄭氏)가 백성을 살린다… 댓글(4) 소강절 2011-04-19 2212 2
10840 www.vetkor.com(운영자) 자유게시판 삭제된 … 민대감 2011-04-19 198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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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38 참견이 많으니 진행이 될턱 있나? 댓글(1) 시스템당 2011-04-19 1946 5
10837 무상복지반대 서명운동 한재준 2011-04-19 1731 9
10836 경의선 운영진에 좌파가 많이 침투한것 같습니다 댓글(2) 강유 2011-04-19 1830 26
10835 엄기영 후보가 과연 우익정체성에 맞는가? 댓글(1) 장학포 2011-04-19 182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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