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남침설의 근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예비역2 작성일10-07-05 23:31 조회3,008회 댓글1건관련링크
본문
Name 예비역2
Subject 남침설의 근거
* 1994년에 읽었던 책의 내용을 올립니다. 알고 계시던 내용도 있지만 처음 읽어보시는 내용도 있을 것입니다.
** 책에서 판별할 수 없었던 곳에는 (?)표시를 했습니다.
*** 한국 전쟁사 / 전쟁기념사업회 [저]. 1-6권, 서울 : 행림출판,1992
6.25전쟁 보고서. 1-3권 / [블라지미르 니꼴라예비치 라주바예프 편] ; 기광서 ; 백준기 ; 이신철 [공]역,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2001
전쟁의 배경과 원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편, 서울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
에서 많은 도움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첫번째 책 1권에서 그림만 스캔했고, 두번째, 세번째 책은 읽어보진 못했고 검색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제가 아닙니다.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남침설의 근거
1. 1950년 6월 25일의 남침전쟁을 북한에서는 북침전쟁이라 주장하고 있는가 하면 과거 일부 외국학자들이 이 북침설에 동조하기도 했고, 일부 학자들은 남침설을 인정하면서도 이 전쟁은 미국이 북한으로 하여금 전쟁을 유발케 했다는 유인설을 주장하는 학자들과 또 이 전쟁은 국내의 해방전쟁으로 보는 수정주의 학파들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한국전쟁의 조종자로 알려진 소련도 북한에 의한 남침을 시인하는 자료의 일부를 공개하고 있고, 또 그간의 많은 설득력있는 남침자료의 제시로 사실상 남침인가? 북침인가? 하는 논쟁은 이미 끝났다고 본다.
본 저자가 인민군의 창군역사로부터 6.25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의 연구를 통해서 본 측면에서 남침인가? 또는 북침인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2. 첫째로 개인간 어느 편이 공격자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공격용 무기를 어느 편에서 보유하고 있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공격용 무기 없이 공격하는 군대는 없기 때문이다.
⑴ 1950년 6월 25일 당시 북한이 보유한 공격용 무기는 T-34전차, SU-76자주포, YAK(전투기) 및 IL(폭격기)형의 전투기 등을 들 수 있다. 이에 반해 한국군은 공격용 무기라 할 수 있는 무기는 단 한 대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 이 부분에 표가 있음>
⑵ 피아간 군사력의 현격한 차이도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다. 대등하거나 약간의 차이는 극복할 수 있으나 현격하게 열세한 군대가 몇 배나 우세한 군대를 공격하는 것은 자살행위이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 당시 피아간의 전력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 이 부분에 표가 있음>
상기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국군은 병력에서 2 : 1, 화력에서 2.4 : 1 ~ 8.2 : 1 그리고 전차와 전투기는 한 대도 없는 전력을 가지고 우세한 인민군을 공격하기에 너무나 열세한 전력이다. 반대로 인민군의 병력은 한국군을 공격하기에 충분한 공격용 무기와 공격 전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겠다.
3. 둘째, 피아간의 군사력 배비를 보고 판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공격자와 방어자의 배치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공격자는 전투에 투입할 부대를 가급적 전선에 추진 배치하고 중요 공격 축선에 당일 공격집단을 구성, 중점 배치하게 된다.
⑴ 6월 25일 당일 38선 일대에 배치된 피아간의 배비 상황을 도식해보면 다음과 같다.
< 이 부분에 그림이 있음>
보는 바와 같이 인민군은 중요 축선별로 공격집단을 구성하고 있고, 피아간의 축선별 전력을 비교해보면 인민군은 두배 이상의 전력에 축선의 경중에 따라 전차부대를 배속하고 있는 이런 배치 상태에서 한국군이 과연 공격할 수 있을 것인가?
⑵ 또 6월 25일 당시 전선 후방의 배치 상황을 보자. 인민군은 전선 예비 2개 사단(제13 및 제15사단)을 김천과 철원지역(38선 북방 20~30km이내)에 배치한데 반해서, 한국군은 근거리에 배치한 전선 예비 사단은 하나도 없었고, 38선으로부터 2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대전(제2사단), 대구(제3사단), 광주(제5사단)에 그것도 모두가 2개 연대로 구성된 3개 사단이 각각 배치하고 있었음을 볼 때, 이러한 한국군의 후방배치 상황은 공격이나 방어를 위한 배치가 아니고, 다만 후방경비(공비토벌)을 위한 배치에 불과하다.
4. 세 번째는 공격 당일(6월 25일) 전개된 피아간의 전황으로 판단할 수 있다.
⑴ 북한에서 발행된 조국해방전쟁사 제1권에서는,
6월 25일 이른 새벽 남한 군대가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 지역에 불의의 무력침공을 감행해왔다. 이 적들은 해주, 금천, 철원 및 기타 지역으로 1 ~ 2킬로미터까지 쳐들어 왔다. 우리 공화국 경비대는 적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김일성 동지께서는 공화국 경비대와 인민군대에게 적의 침공을 저지시키고 즉시 반공격으로 넘어갈 것을 명령하였다. 반공격으로 넘어간 공화국 인민군대와 경비대는 6월 25일 현재 38선 이남 지역으로 5 ~ 10 킬로미터까지 전진하였다.고 6월 25일 2차에 걸친 발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6월 26일) 아침 08시에 김일성의 직접 연설에서는 "38선 이남으로 10 ~ 15 킬로미터 전진하였다"고 하였다.
만일 한국군이 북침을 감행하여 인민군의 주장대로 불의의 침공을 당해 1 ~ 2 킬로미터 철수했다며는 일단은 큰 피해와 혼란을 당했을 것이고, 침공을 당한 인민군 부대들은 재정비하여 전차부대 및 지원부대들이 배속을 받고 반격태세를 갖추는데 소요되는 작전 반응시간은 상당한 시간(최소한 수십 시간 이상)을 요한다는 것은 전쟁사의 상식이다.
그런데 인민군은 한국군의 침공을 1 ~ 2 킬로미터 밀려나서 저지시켰는데, 그 저지 병력도 인민군이 아닌 공화국 경비대, 즉 38선 경비여단 병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내무상 박일우가 1차 방송(1950년 6월 25일 08:30시경)때 발표하였다.
이것을 그대로 믿는다면 한국군 1개 사단의 공격 정면에는 경비여단 2 ~ 3개 중대가 방어했을 것인데 이 경장비로 무장된 경비병력이 한국군의 정규사단을 저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기습(불의)을 당한 부대가 곧바로 그것도 한 두 시간 이내로 반격을 개시하여 당일에 10킬로미터 이상을 전진했다고 한 보도를 그대로 믿을 군사 전문가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⑵ 1950년 6월 25일 04시 30분에 동해안 정동진(38선으로부터 남방 4km)에 인민군 유격대 제766부대와 육전대 제549부대의 일부 병력 약400명이 상륙했고, 같은 날 06시부터 07시 사이에 약 600명의 병력이 임원진에 상륙하였다.
만일 이 상륙 부대가 38선에서 가장 가까운 속초에서 승선했다고 하면 정동진까지의 직선거리가 약 70킬로미터이고 시속 15킬로미터로 항해한다해도 5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러므로 늦어도 25일 04시 30분에 정동진에 상륙하려면 늦어도 6월 24일 오후에는 승선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한국군의 북침 시간이 6월 25일 새벽이라고 북한 공간사가 밝혔는데, 공격시간을 04시 30분으로 가정해 보면 이들 상륙 부대는 한국군의 공격개시시간 그 이전에 승선하였고, 한국군의 공격개시 최소한 3시간 이전(38선에서 임원진까지의 직선거리 45km)에 38선을 월경, 남침을 하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한국군의 공격을 받고 반격을 개시했다는 북한공간사의 주장은 거짓주장임이 분명해진다.
5. 넷째는 인민군 제1단계 작전이 끝난 후 인민군 제2군단에 대한 문책인사를 북침 또는 남침이냐는 문제에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하다.
서울을 점령한 후 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전승분위기에 쌓였으나 인민군 제2군단이 6월 28일까지 계획대로 수원을 점령하지 못함으로써 한국군 주력을 섬멸하지 못했다는 김일성의 분노는 인민군 제2군단장(김광협 소장)을 보직 해임과 동시 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키고, 예하의 제2사단장(이청송 소장)과 제12사단장(전우 소장)을 보직 해임과 동시에 대좌로 강등시키는 치욕적 문책인사를 단행했다. 그런데 북한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만일 인민군이 한국군의 북침을 불의에 당했다면 인민군 제2군단은 한국군을 저지시키고 반격을 가하여 38선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6월 25일 당일 인민군 제2사단은 춘천 직전방까지, 제12사단은 자은리(38선 남방 약15km)까지 진출했고, 6월 28일까지는 춘천과 홍천을 점령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침공을 당한 부대로서는 성공적인 방어를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반격을 실시하여 38선 이남으로 당일 10여 킬로미터나 진출하였는데, 포상은커녕 오히려 치욕적인 강등과 좌천을 당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 의문은 인민군이 한국군의 침공을 먼저 받았다고 가정했을 때는 의문이 제기되지만, 반대로 인민군이 남침을 개시했다고 한다면 이 의문은 달라진다. 즉, 인민군 제2사단은 부여된 임무(당일 춘천과 홍천)와 목표(6사단 섬멸)를 달성하지 못했고, 뿐만 아니라 28일까지 수원으로 진출 한국군의 주력을 포위 섬멸하고자 한 전선사령부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데 김일성이 분노하여 단행한 문책인사라면 의문이 해소되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이 인민군 제2군단에 대한 문책인사는 인민군이 남침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6. 다섯째는 한국군이 북침했다고 주장하는 소위 "북벌계획"을 검토해보면 몇 가지 문제점이 노출된다. 북한의 조국해방전쟁사에 수록한 한국군의 북벌계획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한국군은 북침을 위해 2개 군단을 편성하였고, 제1군단은 고랑포 이서, 제2군단은 고랑포 이동을 담당, 북진한다. 주공 군단은 제1군단으로, 개성 - 사리원 - 평양 방향으로 진격하고, 제1군단의 조공부대는 옹진 - 사리원으로 진격한다. 조공 군단은 제2군단으로, 연천 - 원산 방향으로 진출하고, 제2군단의 조공은 춘천 - 원산으로 진출한다.
양개 군단의 예비 부대는 제3사단과 기계화 사단이 된다. 양개 군단의 지상 공격과 함께 공군의 엄호 밑에 서해안 한천(평남 평원군)과 동해 하남리(함남 정평군)의 동서 2개 지점에 육전대를 상륙시켜 지상군과 협동으로 북한의 허리를 짜르고 평양을 손쉽게 강점한다. (이 계획중 상륙 계획은 나중에 수정 취소되었다고 했다)
이 북침 계획을 검토해 보면, 먼저 6월 25일 당시 한국군은 군단 편성이 없었고 1950년 7월 5일에야 처음으로 국군 제1군단을 편성하였다.
국군 제1군단의 주공(군의 주공)은 개성에서 공격 개시하게 되므로, 당시 개성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던 국군 제1사단이 될 것인데 이 때 제1사단장(백선엽 대령)은 육군 보병학교 고급반에 교육 중으로 사단장도 없는 사단이 군단의 주공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군사적으로 어불성설이다.
국군 제2군단의 주공(군의 조공)은 연천에서 공격 개시하므로 당시 연천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던 국군 제7사단이 될 것인데, 이 때 제7사단은 예비 연대(제25연대가 온양에서 의정부 남방 금오리로 이동 예정)가 도착하기 전이었으므로 2개 연대로 주공을 담당한다는 것이 된다. 이것 또한 군사적으로 어불성설이다. 공격하는 부대는 공격하기 이전에 부족한 병력과 장비를 보충하고 편제상의 부대보다 보강하는 것이 상식인데, 편제상의 3개 연대중 1개 연대가 없는 상태에서 최초 공격에 임하는 사단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군에는 당시까지 기계화사단, 고사포 부대, 독립포병부대 등은 없었는데 있는 것으로 날조하고 있다. 사실 6월 25일까지 국군 3개 사단은 포병대대도 없는 사단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검토해보면 한국군은 북침할 공격준비가 전무할 뿐만 아니라, 인민군의 남침에 대비한 방어준비마저도 되어 있지 않은 군대임이 명백한데, 북침 계획을 수립하고 북침했다는 것은 황당무개한 날조된 사실로 밖에 볼 수 없다.
7. 여섯째, 1950년 6월 25일 한국군이 38선 이북의 해주를 점령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것은 남침 또는 북침을 판가름하는 핵심사항이 되어 왔는데 이를 군사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⑴ 먼저 옹진 반도에 대치하고 있었던 피아간의 전력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다음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국군은 병력에서 3분의 1, 화력에서 4분의 1, 그리고 전차와 자주포는 전무한 상태에서 과연 공격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것은 비군사 전문가라도 판단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옹진 반도의 피아 전력
< 이 부분에 표가 있음>
그런데 이 열세한 전력을 가지고 북진해서 해주를 점령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북한의 전력은 한국군의 3배 ~ 4배나 되는 막강한 전력이었기 때문에 38선에서 부포(한국군 승선지점)까지 25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6월 25일 당일로 한국군을 옹진반도에서 축출할 수 있었다. 국군 제17연대는 6월 25일 야간에 승선, 다음날 해상 철수했다는 것은 한국군이 38선에서 17 ~ 18킬로미터 되는 거리에 있는 해주까지 진격할 능력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혹자는 옹진반도 전면의 북한전력이 막강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공격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으나 당시 한국군은 북한의 전력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고 특히 국군 제17연대에서는 정면의 적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당시 제17연대장은 증언하고 있다.
또 옹진반도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였기 때문에 지속적 군수지원을 할 수 없는 불리점(인천서 부포까지 해상수송시 9시간 소요)이 있었기 때문에 만일 인민군이 이곳으로 대규모 공격시 국군은 해상으로 철수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국군 제17연대의 전력으로는 해주 전력이 불가능함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이 옹진반도 침공작전에 성공한 공으로 인민군 38선 경비 제3여단장 최현 소장은 1950년 7월 초 인민군 제2사단장으로 영전되었다.
⑵ 인민군이 주장하는 "한국군의 북벌계획"에는 한국 제1군단은 개성지구와 옹진지구의 좌우 양익으로 동시에 북진을 개시하여 사리원을 거쳐 평양으로 침공하기로 되어 있었다고 북한의 "조국해방전쟁사"는 기록하고 있다. 또 같은 책에서, 전선 서부의 옹진에서는 태탄과 벽성의 2개 방향으로 적 17련대가 침공하여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 이 부분에 그림이 있음>
이를 분석해보면 요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 이 부분에 그림이 있음>
옹진반도의 국군 제17연대가 사리원을 공격한다며는 북한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태탄과 벽성의 2개 방향이 가능하다. 즉, 옹진 - 태탄 - 신천 - 사리원 방향, 강령 - 벽성 - 신원 - 사리원 방향 축선인데, 해주는 벽성에서 동측으로 15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므로 사리원 방향으로 공격할 부대가 공격 축선 밖에 있는 해주를 우회하여 점령할 군사적 어떤 이유도 찾을 수가 없고, 그런 우둔한 계획을 수립할 군사전문가는 없을 것이다. 만일 심리전 차원에서 꼭 해주를 점령해야 한다면 이는 해주에서 1 ~ 2킬로미터 남방에 있는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에 임무를 부여하면 되는 것이지, 17 ~ 18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국군 제17연대로 하여금 해주 점령임무를 부여한다는 것은 군사적으로 상식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해주 점령 주장에 대한 발단은 사실 한국 측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 6월 25일 오후에 육군본부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이 "옹진지구의 국군 제17연대는 해주시를 점령했다. 또한 38선 일대의 국군 주력의 일부는 38선을 넘어 20킬로미터 지점을 진격중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한국정부 공보처에서도, 6월 26일 금일 아침 한국군은 북방을 향해 진격하여 해주를 점령했다"고 발표했다.
이 보도가 한국군 해주 점령이라는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와 같은 보도가 나오게 된 내막은 널리 밝혀진 사실이나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옹진반도의 국군 제17연대를 방문(6월 25일 1주일 전쯤)하고 돌아온 최기덕(당시 태양신문 기자) 기자가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6월 25일 국방부에 들르자 당시 국방부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이 "그 쪽 상황은 어떠냐?"고 묻길래,
육본에서 후퇴명령은 내린 것 같은데 제17연대장 백선엽 대령의 사기는 해주 진격한다고 할 정도였어요.
라고 대답한 것이 와전되어 "국군 해주 돌입"이라고 오보가 나오게 된 경위라고 최기덕 기자는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김현수 대령이 1950년 6월 28일 전사했기 때문에 왜 그런 보도를 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국민사기를 제고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어쨌든 이와 같은 오보를 근거로 하여 인도의 굽타(Karunakar Gupta)라는 학자가 그의 논문에서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이전에 한국군이 옹진 지역으로부터 해주를 먼저 침공하여 전쟁을 도발했다고 주장한 것이 북침설의 논쟁 시발이 되어 한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전쟁의 당사국인 한국은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을 당했는데, 한국군이 어떻게 해주를 점령할 수 있겠느냐고 부정하였고, 또 북한에서도 (북침은 주장하지만) 해주를 점령당한 적은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즉, 북한 "조국해방전쟁사"에 보면,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개시한 적들은 해주, 금천, 철원 및 그 밖의 여러 방향들에서 38도선 이북지역으로 1 ~ 2킬로미터까지 쳐들어 왔다고 했는데, 이 기록을 세밀히 보면 해주 방향으로 쳐들어 왔다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지 해주 자체를 점령했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또 상기 같은 책에서, 괴뢰군부에서도 17련대가 해주를 점령하고 괴뢰군의 일부가 38도선으로부터 20킬로미터나 북진하였다고 거짓보도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한국군이 결코 해주를 점령한 일이 없다고 북한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쟁 당사국인 한국과 북한이 공히 해주를 점령하거나 당한 적이 없다는데, 제3국의 한 학자가 해주를 점령했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도 우스운 논리이지만, 특히 이 학자(Gupta)는 앞에서 언급한 피아간의 전력의 현격한 차이나, 해주의 정확한 지리적, 군사적 위치, 더구나 옹진반도에서 사리원으로의 공격 축선과 인접 국군 제1사단의 배치 상태 등을 고려할 줄 아는 군사적 식견이 있었더라면 북침설을 주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일곱째는 한국전쟁중 대전 부근에서 1950년 7월 20일 노획한 "인민군 정찰명령 제1호"와 "인민군 전투명령 제1호"는 남침 또는 북침을 결정하는 중요자료가 된다. "정찰명령 제1호"는 1950년 6월 18일 날짜로 인민군 총사령부 정보본부에서 발행한 것으로 전방 각 사단장들에게 배포한 것인데, 노획된 문서는 인민군 제4사단장에게 보낸 소련어로 작성된 명령이었다. 그 내용을 보면 남침전 한국군의 배치 상황과 방어 시설 등을 정찰하여 공격작전에 할당하고 공격개시 후에는 새로운 공격목표를 탐색하여 적의 강력한 저항 거점에 타격을 가할 것과 특히 서울로 진격간 한국군의 부대와 포병에 대한 사항을 정찰 보고할 것등을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전투명령 제1호"는 1950년 6월 22일 인민군 제4사단장 이권무 소장이 예하 연대에 내린 "인민군 제4사단 전투명령 제1호이다. 그 내용을 보면 사단은 적의 방어진지를 돌파한 다음 차후 임무로 의정부, 서울 방향으로 진출한다는 임무를 명시하고, 각 예하 연대(제5, 16, 18연대)에 부여한 임무와 연대에 지원할 배속 부대의 지정, 그리고 공격 준비 사격은 30분간 실시하고 돌격개시신호는 녹색신호탄으로 한다. 공격준비는 1950년 6월 22일까지 완료하라는 것 등으로 아군의 공격 명령 양식과 비슷하다. 이 노획된 문서는 북한이 남침했다는 증거로 1951년 5월 2일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 유엔에 제출하였고 그 원본은 미국무성 문서 제4266호로 지금도 보관되고 있다.
이 노획된 문서가 둘 다 6월 25일 남침 직전에 발간된 것이므로 인민군이 한국군의 북침을 저지하고 반격했다는 주장은 이제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9. 여덟째, 흐루시초프 회고록과 선제타격계획은 남침의 확증을 말해 준다.
스탈린의 남침계획 승인과 선제타격계획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50년 2월 김일성이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계획을 승인 받았음이 흐루시초프의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는데, 최근 이 내용에 대해서 소련 국방성 군사문제연구소장(보르코노프 대장)과 소련의 유력지 "아가녹(?)"의 편집책임자(스미르노프)가 이를 사실로 인정된다고 확인한 바 있다.
그리고 남침용 작전 계획인 "선제타격계획"은 소련고문단(단장 바실리예프 중장)에 의해서 1950년 4월부터 5월 사이에 민족보위성 별실에서 작성되었고, 이 때 소련어로 작성된 원문을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으로부터 번역하라는 지시를 받고 유성철 대좌(후에 중장)를 비롯한 한인 소련2세의 소수 장교들이 모여 번역하였다고 당시 민족보위성의 작전국장을 역임한 유성철 중장이 1990년 10월 24일 내한하여 증언하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 민족보위성 공병국에 근무하던 주영복 소좌도 소련어로 작성된 작전 명령의 공병부록을 번역하였다고 증언한바 있다.
이와 같은 증언을 확인시켜주는 소련어로 된 "정찰명령 제1호"는 더없이 중요한 자료이다.
이들 내용을 종합해 보면 1950년 2월에 스탈린으로부터 전쟁계획을 승인 받은 후, 소련 고문단에 의해 작전계획을 소련어로 수립하고, 이를 다시 인민군 장교에 의해서 번역하였다는 수순이 된다.
그러니까 남침 계획은 6. 25 전쟁 개시 이전에 준비되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사실 인민군은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계획을 승인 받기 이전에 이미 소련은 북한을 한반도 공산화의 기지로 하여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하여 군사력을 건설하고 강화하여 온 목적이 6. 25 남침 전쟁으로 그 베일을 벗게 된 것이다.
댓글목록
김안강님의 댓글
김안강 작성일아주 정확한 정보 감사드립니다....6.25는...살인마 김정일의 디진 아버지..살인마.김일성이....잃으킨...남침전쟁 입니다..감사합니다..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