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은 9백만명의 생명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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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검 작성일10-05-19 18:24 조회2,826회 댓글3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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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9백만명의 생명을 구했다.
박대통령이 집권 당시 반정부 세력과 좌파 등 3만명을 못살게 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박대통령은 3천만명의 보통국민들을 잘살게 만든 것은 분명하다. 60년대초에 월남, 태국, 필리핀보다 못살던 한국이 이렇게 잘살게 된 것은 박대통령의 지도력 덕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제적인 측면이다. 이제 국방의 측면을 보자.
우선 당시 한국을 관찰하기 전에 우리와 처지가 비슷했던 월남의 경우를 살펴보자. 월남은 60년대에 군사정변이 종종 발생했고, 이념에 의해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었고 또 국방 측면에서 미군의 도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월남은 남한과 쌍둥이같은 나라였다고 볼수 있다. 이러한 월남(남베트남)과 한국을 비교해 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공산당은 1991년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러시아)의 공산주의 포기 선언으로 대부분 망하지만, 70년대는 공산당세력의 확장기였습니다. 당시 남한에는 공산주의가 옳다고 믿는 친북좌익들이 많았습니다. 1975년 월남, 캄보디아가 공산화된 것을 보면 당시 상황을 알수 있습니다.
70년대 한국의 상황을 보면, 남파된 간첩들에 의해 포섭된 대학생 등 친북좌익들은 공산주의가 옳은 이념이라고 생각하여 반정부운동을 일삼았습니다. 2006년 현재에도 북한은 70년대에 남한에서 반정부운동을 하다 죽은 친북좌익들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70년대 일부 반정부세력이 어떤 성격의 사람들이었는지 알수 있습니다.
냉전기 시기 중에서 남한이 가장 위태로웠던 시기가 70년대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70년대초 남한은 1인당 국민소득이 5백불도 안되는 후진 개도국 수준이었는데 나라가 이렇게 연약한 상태에서 미국은 닉슨독트린을 발표하고 주한미군 제7사단을 1971년에 철수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주한미군 7사단 철수에 대해 미국에 “미군철수는 절대 안된다”고 말하며 강력 항의했지만 미국은 막무가내였습니다.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한국은 월남에 파병하여 미군과 혈맹으로 월남에서 공산당과 싸웠지만, 미국은 자기들의 국익을 먼저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월남전에 참전하여 고전하고 있던 미국은 1969년 닉슨독트린을 발표하여 “아시아인의 평화는 아시아 스스로 지켜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리고 1971년 주한미군 7사단을 철수하고 1972년 2월엔 닉슨과 모택동이 회담하여 미중 국교를 정상화 합니다.
어쩔수 없이 한국도 1972년7월 남북회담을 추진하고 7.4공동성명을 발표하여 잠시 긴장이 완화되는 듯 했지만, 1973년4월부터 정세는 곧 원상태로 돌아갑니다. 북한의 무장공비 남파와 남침도발 때문입니다.
남한은 헌법개정(비상상황) 즉 1972년10월 유신을 선포할 때에도 2일전에 이를 북한에 통보하여 남북간 불의의 군사적 충돌을 예방코자 노력하였습니다. 그것은 7.4공동성명 조항에 의거한 행동이었는데, 남한은 이렇게 노력하였으나 북한은 흑심을 품고 위장평화전술로 나왔던 것이죠.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군인으로서 박대통령은 공산당의 위장평화전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1972년 남북회담을 했을 때에도 박대통령은 북한의 변화를 별로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방심하지 않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죠.
닉슨독트린과 7사단 철수는 박대통령으로 하여금 자주국방 정책에 매진토록 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미국의 정책은 한심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북베트남 공산당과 평화협정을 맺고 미군과 한국군이 월남에서 철수한 후 월남은 2년도 못가 공산화되었는데, 미국은 1975년 월남이 패망할 때에도 월남에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방관하여 월남을 패망케 했던 것입니다.
70년대는 매우 위태로운 시기였습니다. 북한은 북베트남 공산당과 공조하여 1971년 9월부터 1978년10월까지 3개의 남침땅굴을 굴착하며 기습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군사학에 밝았고 군인 경력이 많았던 박대통령은 위기를 예감하고 일련의 대응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비군 창설과 무기국산화, 무기현대화, 정예 유신국군 양성, 멸공정책 강화, 비상대권의 행사 그리고 유신헌법의 시행이었습니다. 유신시절의 국군은 군기와 기강이 세계 최강이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지금의 군인들은 당나라 군대 같다고 합니다. 이런 정신 상태에서는 무기가 좋아도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월남이 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된 요인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공산당이 만든 남침땅굴을 찾아내지 못했고, 군인들의 정신상태가 나태했고, 공산당의 위장평화 공세에 속았고, 월남내에 잠입한 공산간첩을 색출해 척결하지 못했고, 부패를 막지 못했고.. 등등의 이유가 있습니다.
땅굴은 적의 후방으로 들어가 기습 공격할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에 남침땅굴을 찾아내지 못하면 치명타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월남은 공산당의 남침땅굴이 월남 대통령궁 근처에까지 왔는데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월남은 겉으로 드러난 군사력 면에서는 북베트남 공산당보다 훨씬 앞서 있었지만 땅굴을 이용하는 공산게릴라와 간첩들로 인해 골머리를 앓다가 망했던 것입니다.
공산간첩들은 월남 국내의 각종 기관, 시민단체, 야당, 대학가, 종교단체에 잠입하여 반정부 운동을 부추겨 일으키고는 이를 민주화운동으로 둔갑시켜 선전했습니다. 때문에 일반 국민들은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공산당을 막아내는 대공 안보 기관에까지 간첩들이 잠입하여 대공기능이 마비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월남은 간첩들의 반정부활동과 땅굴작전에 속수무책이 되었던 것입니다.
박승춘 장군의 2009년 발언을 인용하면, 월남은 1975년에 공산화되어 공산당에 의해 4백만명이 학살되었는데, 당시 월남의 전체인구는 1,800만이었습니다. 즉 인구의 23%가 학살된 것이다. 캄보디아는 공산화되어 인구의 28%가 학살되기도 했다. 만일 1975년에 한국이 공산화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1975년 당시의 한국 인구는 3,400만이므로 남한이 공산화되었다면 780만~950만명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월남의 민주화 대부였던 짠후탄은 간첩들이 일으킨 폭동을 민주화운동이라고 발표하여 월남을 공산화시키는데 공헌하게 됩니다. 그러나 월남이 공산화되고 그도 공산당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월남의 대통령 선거에서 2위를 했던 변호사(야당당수) 쭝딘주는 공산간첩임이 월남 공산화후 드러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월남 민주투사들의 실체였고 어리석음이었던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월남은 국가안보를 미국 등 우방에만 의지하려 했으니 망하지 않을수 있겠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처럼 경제발전, 민생안정, 자주국방 노력, 예비군 창설, 멸공정신 강화, 정예군인 양성, 간첩 색출, 내치 안정 등으로 스스로 살려고 노력할 때 국가안보가 지켜진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노력해야 미국도 도와줄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반미운동 하면서 하는 자주국방 정책은 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나라를 망칩니다. 박대통령이 말한 자주국방은 그런 뜻이 아니고 미국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킬수 있도록 국력 국방력을 강화하자는 정책입니다. 미국이 땅파서 먹고 사는 나라인줄 아십니까? 그들도 국익에 도움이 될 때 한국을 돕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공산권이 붕괴된 90년대 이후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70년대는 남한을 공산화할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갈팡질팡하는 미국의 대외정책과 더불어 북베트남에서 은밀하게 도입한 땅굴작전의 수행으로 북한은 자신감이 있었죠. 당시 남한과 북한은 공업생산력과 국력이 비슷했습니다.
유신 시절의 중화학공업 투자 성공으로 남한은 시간이 지나면서 국력 면에서 북한을 앞서게 됩니다. 북한은 친북간첩을 보내 1974년 8월 박대통령을 총으로 저격하는 작전을 벌입니다. 다행히 총알이 빗나갔지만, 거기서 박대통령을 암살하고 남침땅굴을 이용해 기습공격을 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북한은 1971년 9월부터 은밀하게 남침땅굴 작전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1974년10월까지 남한은 북한의 남침땅굴에 대해 모르고 있었습니다. 한국군은 1974년11월에 남침땅굴(제1땅굴)을 발견하게 됩니다. 군기와 정신력이 강한 군대가 아니었으면 남침땅굴을 찾아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땅굴 발견 상황은 이렇습니다.
전방의 병사들이 군사분계선 남측지역을 순찰하다가 지표의 공기 구멍에서 증기가 새어나오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 온천이 나오나 보다”고 농담을 하고 그냥 지나치려는 것을 당시 선임하사가 뭔가 수상하다고 여겨 굴토작업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발견한 것이 제1땅굴입니다. 정신상태가 해이한 월남의 군대 같았으면 남침땅굴을 발견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만일 70년대 한국이 월남처럼 다음과 같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공산당을 막아내는 대공기관에 간첩이 잠입하여 대공기능이 마비되고, 야당에 간첩이 잠입하여 반정부운동을 선동하고, 간첩들에 의해 조종되는 시민단체들은 소요 봉기를 일으키고, 군인들은 기강이 해이해져 남침땅굴을 찾아내지 못하고, 공무원은 부패하고, 북한의 위장평화공세에 속고...70년대 한국의 정치판이 이렇게 혼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60년대 후반부터 박대통령은 예비군 창설과 대공 정보기능 강화, 간첩식별 교육, 국민 정신무장 강화로 총력안보 체제를 구축하였는데 박대통령의 이런 노력과 더불어 1974년 박대통령을 저격한 총탄이 빗나가고 그해 11월 남침땅굴이 발견되면서 남한은 가까스로 공산화 위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당시는 지구의 절반이 공산권 국가였고 그들은 세계공산화를 목표로 삼았으며 북한은 시도 때도 없이 간첩을 남파했고 남한 사회를 혼란시키기 위해 광분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학에 문외한인 어벙한 민간대통령이 집권했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었을까? 1975년 2월 실시된 유신헌법 재신임 투표에서 국민들은 73%의 찬성으로 유신헌법을 또다시 지지합니다. 국민이 보기에 당시의 난세를 극복할 사람은 박대통령 외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군사학에 밝은 투철한 군인이었고 천재적인 근대화 산업화 전략가였던 것입니다.
대만의 반공지도자 장개석은 집권25년 내내 계엄령 상태를 유지하면서 국민대회헌법 즉 유신헌법과 같은 간선제 헌법으로 1975년까지 25년 집권하였는데, 이렇게 대만은 엄하게 통치하면서 공산당을 막아내고 경제발전을 이룩하게 됩니다. 한국, 대만이 아시아에서 경제발전에 성공한 이면에는 지도자의 유능함, 청렴함과 아울러 이런 이유도 있었던 것입니다.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도 일본군 장교 출신이지만 장개석 총통 또한 일본 육사 출신으로서 그는 일본과 치열하게 항일 전쟁을 하면서도 한국 광복군을 도와준 은인입니다. 한국인들은 장개석 장군의 은혜를 잊으면 안될 것입니다. 장개석(장제스)은 손문 선생의 수제자였습니다. 냉전기 시절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은 대만을 방문하여 장개석 총통과 우의를 다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중국의 공산주의자 모택동은 그릇된 공산주의 사상을 믿고 30년 넘게 집권하면서 공산주의식 국유화, 집단농장 정책을 시행하다가 국민 4천만명을 굶겨 죽이고 또 반대파 1천만명을 학살했습니다. 그는 1976년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가 옳다고 믿고 죽었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막기 위해 대만은 1987년까지 38년간 계엄령을 유지하면서 계엄통치를 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1980년대 중반, 모택동의 동지이며 전우였던 등소평은 공산당의 잘못을 인정하고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등소평은 흑묘백묘론을 주장하며 이념보다는 먹고사는 문제 해결을 강조합니다. 이때가 80년대 중반의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개혁개방인 것입니다. 중국은 특히 박정희식 경제 개발모델을 받아들여 빠른 경제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89년 정치적 민주화를 더불어 요구하는 군중들로 인해 천안문 사태가 발생하는데 등소평은 그들을 무차별 학살하여 진압합니다. 당시 수천명 내지 수만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직 중국은 정치적 자유를 허용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죠. 중국은 2010년 지금도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인데 이름만 공산당이고 실제는 시장경제사회당 같은 정당이 바로 중국의 공산당입니다.
박대통령은 70년대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반정부운동을 할려면 하라. 후세의 역사가들이 나를 평가할 것이다.”박대통령은 그렇게 자신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70년대초에 국민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당시 농민들은 박대통령에 대해 “하늘이 낸 지도자”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당시 대권을 넘보던 야당 정치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대통령되면 저렇게 멋있고 존경을 받는가 보다. 대통령이 좋으니까 저렇게 오래 할려고 하지. 나도 대통령 한번 꼭 할거야 ’. 하지만 나중에 정작 그들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들은 존경은 커녕 손가락질을 받게 됩니다. 취임후 몇년도 못가 실력이 들통났기 때문입니다.
90년대 초반에 공산권이 붕괴되고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7천불 이상으로 되어 국력이 크게 강해진 때 즉 한국의 안보 경제 여건이 크게 좋아졌을 때 그들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들은 경제를 망치고 국가안보를 망쳤던 것입니다. 국민들은 취임후 몇년이 지나면 대통령의 실력과 그릇 크기와 인간 됨됨이를 알게 됩니다. 또 퇴임후 몇년이 더 지나면 그 지도자의 실상을 더 잘알게 됩니다.
국민들은 세세한 것을 보고 지도자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통찰력)으로 종합적으로 지도자를 판단하기 때문에 세세한 것을 들추어 박대통령을 아무리 깍아내려도 국민들의 마음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근래 정권들과 일부 언론 방송사들이 15년 넘게 박대통령을 깍아내리고 또 폄훼했지만 박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심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영웅도 천명이 다하면 흉탄을 피할수 없는 것이 또한 법칙이니, 1979년이 바로 그해였던 것입니다. 로마의 영웅 시이저가 측근(양아들)에게 피살되어 그렇게 죽었고, 충무공도 흉탄에 의해 그렇게 죽었고, 링컨 대통령, 케네디 대통령 또한 흉탄에 의해 그렇게 갑자기 죽었던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보기 드문 풍운아였습니다.
난세는 위인을 낳는다 했던가? 6~70년대는 가난과 남파간첩과 공산당으로 인해 그야말로 난세였던 것입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으로 역사를 설명했습니다. 도전을 극복하는 국가는 성공하고 도전을 극복하지 못하는 국가는 망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70년대 한국에 박대통령 같은 위인형 지도자가 있었기에 한국은 도전을 극복하고 성공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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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류인님의 댓글
두류인 작성일
전교조의 정체(12편) - 영웅정재학 편집위원 (2006.05.30 16:57:30)한국 현대사 위인 중에서 전교조가 가장 극렬하게 비난하는 인물이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다. 아니, 비난의 정도를 떠나 거의 저주 수준의 욕설을 퍼붓는 것을 보고 나는 그 근인(根因)을 알고자 하였다. 그러나 비난의 실체를 파악하고 난 뒤에는 조잡스런 전교조 주장에 대해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았다.
얼마전 전교조가 실행한, 노동절 계기수업 내용 속에 경부고속도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피땀을 흘려 이룬 것이다.”
마치 박정희 대통령의 용기와 신념과 구상과 노력이 없었어도, 노동자들이 자기끼리 모여서 엄청난 예산을 마련하고 설계를 해서 전국의 모든 건설회사와 군 공병대를 동원하여 만들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시각이 좌파적 관념에 집중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런 편향된 억지가 있을 수 없다. 소위 이런 관점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불순한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을 통치했거나 진행 중인 대통령은 모두 7명이다. 공과(功過)야 어찌 되었든 7명의 대통령은 자기가 맡은 역사의 부분에 대해 자기역할에 충실한 분들이라고 평가해야한다.
김영삼 대통령을 예를 들면 (이 부분은 동의할 수 없다;두류인)
외환위기를 초래하여 국가를 파탄으로 몰고 간 무능한 정권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민주정권으로 가는 가교 역할을 하였으며, 김영삼은 당시 격렬하게 저항이 예상되던 군부를 효과적으로 지배한 지도자였다. 만약 김영삼 대신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군부의 저항으로 인해 어떤 혼란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따라서 김영삼 대통령도 그 시대가 원하는 요구에 자신의 역할을 다했던 분이라고 해야 한다. 이들 대통령 모두 한 가지 이상의 오류에 빠지기도 했으나, 애국(愛國)을 평생의 신조(信條)로 살아온 분들이었고, 나라를 위해 흔들림 없는 충정을 바친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영웅의 반열에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영웅의 첫걸음은 용기를 갖는 일이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께서 나라를 가난에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신 수많은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새마을 운동은 차치하고라도 쌀 수확량을 높이기 위해 개발한 통일벼(좌익들은 이 통일벼 개발도 농업연구원들이 한 거라고 주장할 테지만), 심지어 보리나 밀을 눌러 쌀처럼 만든 ‘밀쌀’도 있었다.
물을 아끼기 위해 화장실 물통에 넣은 벽돌에 대한 일화(逸話)며, 석유 파동 때는 청와대 난로도 끄고 지내고, 밥에는 반드시 보리쌀을 넣어 먹으며, 스스로 국민들의 모범이 되고자 하였던 분이 박정희 대통령이셨다.
그리고 강력한 반공정치가 아니었다면, 남북이 서로가 체제의 우월성을 지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시절, 대남공작과 테러(예: 무장공비 남파)가 극에 달하던 시기를, 지금 좌익폭력과 난동이 횡행하고 있는 현상과 비교하여 연상하여야 한다. 김일성의 적화야욕으로부터 민족을 방어해야 할 의무가 필수적인 시대였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시절은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아야 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로망 롤랑은 영웅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영웅이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낸 사람이다. 범인(凡人)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만을 바란다.”
박정희 대통령은 바로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자기 성찰에서 분명한 자아를 발견한 분일 것이다. 무엇보다 ‘가난으로부터 해방’이라는 5000년 민족의 숙원에 대한 소명의식이 있었고, 그리고 완성이라는 목표를 놓치지 않았던 분이다.
비록 유신시대를 열어 반민주적인 과오가 있기도 하지만, 민주란 것은 가난을 해결하고 난 뒤에도 얼마든지 수용 가능한 문제라고 나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지금 북한이 겪고 있는 처참한 굶주림을 보면서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시대에 면죄부를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영웅이 있다. 하나는 땅을 지배하는 영웅이고, 하나는 마음을 지배하는 영웅이다. 그 분이 돌아가신지 30여년. 아직도 박정희 대통령이 생각나는 까닭은 그 분이 우리에게 남긴 뜨거운 조국애(祖國愛) 때문은 아닐까. 저 하늘에서 당신을 저주하는 전교조 좌익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디 용서하시기 바란다.
전화위복님의 댓글
전화위복 작성일
쉬우면서도 너무 좋은 글입니다.
어려운 글 싫어하는 젊은사람들이나 어린 학생들이 보기 딱 좋은 글 같습니다.
다른 곳에 이 글을 펌해도 될까요?
물런 출처는 밝히겠습니다.
진검님의 댓글
진검 작성일
얼마든지 퍼가셔도 좋습니다.
이 글은 냉전기 시절 남한의 국가안보 정세와 국제정세의 흐름을
쉽게 전달하려고 써본 글입니다.
근래 언론과 방송들 논조를 보면 대충 이렇더군요.
'당시 한국은 평화롭게 잘살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군인들이 총들고 나타나 사람들을 군화발로 짓밟고 독재를 했다.'
지금 우리나라 사회 전체가 이런 거짓주장에 물들어 있습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냉전기 당시 남한이 처했던 국가안보 정세와 국제정세를 교묘하게 은폐하여
그분들을 오직 독재자로 몰아부치기 위한 술수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