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수상거부? 흰머리 코흘리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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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유의깃발 작성일10-04-19 10:20 조회3,071회 댓글2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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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직접보지는 못했지만, 양(羊)이라는 놈은 자기가 아무리 추워도 남이 따듯해질까봐 다른 양들과 몸을 붙이고 자지않는단다.
몸을 붙여 체온을 나누면 서로가 따듯할건데, 비록 자신이 추위에 벌벌 떨더라도 남 잘되는(따듯해지는) 꼴은 죽어도 못보겠다는 심보인데..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개념인색한 동물이다.
그런데 오늘 기사를 보니, 이 양이라는 동물 뿐만 아니라 인간이란 거죽을 뒤집어 쓴 생물들 중에도, 이런 덜떨어진 사고를 뇌에 새기고 있는 이들이 보인다.
『"군사정권이 제정한 건국포장 거부"
4.19 당시 대학생 신분으로 전면에 나섰던 '4.19 혁명회' 소속회원 황건, 서정복씨 두 사람이, "유신 지지자와 어떻게 상을 같이 받겠나"며 정부가 유공자로 선정해 주는 건국포장을 거부했다. '4.19혁명회'는 18일 이 단체 회원 황건(71. 전 4월혁명회 상임의장)과 서정복(70. 전 4월혁명회 공동의장)이, 4.19혁명 5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4.19혁명 유공자(건국포장) 272명에 포함됐지만 수상을 거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4.19혁명 이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진 상인 데다, 유공자 선정 과정에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서씨는 "박정희 정권은 4월혁명으로 이뤄진 민주화를 부정한 정권이기 때문에, 이때 만들어진 상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이고, 대상자에 유신을 지지한 사람 등 4.19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한 인사들도 포함돼 있다"며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에게 같이 상을 주는 셈인데, 전부 재심사해 4월혁명 정신을 부정한 수상자를 골라내면 상을 받겠다"고 말했다. 황씨와 서씨는 1960년 4월19일 각각 서울대 법대와 문리대에 다니면서 당시 서울대생들이 발표한 '4·19 선언문' 작성에 참여하는 등 혁명의 전면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10일 전쯤 보훈처로부터 건국포장 신청 제의를 받고 거부의사를 밝혔지만, 지난 15일 '유공자로 선정됐다'는 통보가 왔으며, 다음날 내용증명을 보내 이를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19일 서울 수유동 4.19 국립묘지에서 열리는 기념행사에서, 건국포장을 받는 272명 유공자 명단에는 아직 이들의 이름이 올라 있다』
이 기사에 대해서는 뒤에서 말하기로 하고, 이 4.19를 보는 시각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한 편에선 이 4.19를 '혁명'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고, 또 다른 한 편에선 '폭동'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어떤 사상과 사고를 가졌느냐에 의해, 또한 그 당시의 시대상황과 놓여진 대한민국의 실태를 생각의 기저로 삼아, 어떤 위치에서 이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같은 극단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는데..
'어떤 경우'의 예에서 중간은 생략한, 그래서 양 끝머리 사고를 인용한 해석이기에 조금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겠지만, 4.19를 바라보는 대척점적 시각을 비교해본다.
# 4.19의 의의
* "4.19혁명은 오늘날 민주주의라는 소중함을 가져다 준 혁명으로써, 이 후로 발생한 6월항쟁 등의 모태가 되어, 민주화를 갈망하던 국민들에게 시위의 불씨를 일으킨 혁명이다"
* "소수 좌파들의 불법폭력시위로 합법적 정권이 무너진, 대한민국 법치주의의 근간이 무너졌던 사건이다"
# 4.19의 과정
*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집단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펼친 2.28 의거. 이승만 정권은 경찰을 동원하여 학생들을 진압, 짓밟아 버린다. 3월15일에 4.19혁명의 결정적 원인이 되는 3.15부정선거가 일어나자, 같은 날 마산에서 3.15 의거가 일어난다. 4월 18일에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동시에 대규모 시위를 일으키자, 경찰들이 총탄을 발포하며 해산시킨다. 그러자 다음날인 1960년 4월19일, 드디어 온국민이 한꺼번에 들고일어나 서울시내를 점령하였고, 지방에서도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그 후 4월25일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을 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이기붕 일가는 자살하고 이승만은 하야선언을 하고 영부인 프란채스카 여사와 함께 하와이로 망명한다"
* "일부의 이들이 3.15 부정선거를 트집잡아 불법폭력시위를 주도하고, 선량한 학생들까지 꼬드겨 불법폭력시위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불법폭력시위에 참가했던 김주열이라는 학생이 불법폭력시위도중에 사망하자, 그동안 부정선거를 트집잡아 불법폭력시위를 주도하던 좌파들은, 김주열군의 죽음을 이용하여 정부전복을 꾀하였다. 이들의 불법폭력시위에 의해 이승만은 하야했고,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다. 실제로 4.19 폭동에 참여한 숫자는 전체 국민들의 1%도 안되었다"
# 4.19의 결과
* "새 의원내각제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내무부장관 허 정이 대통령의 권한을 대신 맡아 보게된다. 이 4.19 혁명의 결과는 많은 희생자가 생기는데. 특히 마산에서는 김주열이란 학생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채로 바다위에 떠오르자 온국민들은 충격을 받는다. 경찰이 발포해서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죽었으며 더구나 군인들까지 동원되기도 했다. 이 혁명은 4월혁명 등으로 불리다가 1962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4.19 의거로 규정되어졌고 다시 1992년에 4.19혁명으로 고쳐졌다"
* "4.19 폭동 이후, 좌파들은 권력을 쥐고 헌법에 까지 손을 대어, 4.19 폭동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적어 넣고 자신들의 불법 행위를 합리화해나가기 시작했다. 4.19 불법폭동을 주도했던 자들이 국가유공자로 둔갑되고 각종 보상을 받아 챙겼다. 4.19 폭동 이후, 대한민국에는 "어떤 경우에도 불법폭력시위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원칙이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불법폭력시위들이 판을 치고, 그로 인해 대한민국의 경제와 근간이 무너져도, 정부가 불법폭력시위를 마음대로 진압할 수 없는 것은, 4.19 폭동 이후 좌파들이 헌법전문(憲法全文)에 박아 넣은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문구때문이다"
이상의 극과 극의 해석은 읽는 분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다시 앞서의 기사로 돌아와서.
4.19를 혁명으로 부르는 이들은 5.16을 쿠테타라 부른다.
반대로 5.16을 혁명으로 부르는 이들은 4.19를 폭동이라 말하고..
이처럼 두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결코 합칠 수 없는 물과 기름의 관계를 보인다.
그리고 이번 4.19 유공자 수상을 거부한 두 사람의 행태 또한, '우리의 敵은 아직도 박정희'란 사고가 골수에 새겨진 이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그들은 정작 이승만이 아닌 박정희를 이리도 증오하는 것일까?
물론 극히 사적인 생각이지만, 4.19가 혁명이든 폭동이든간에 혹 1960년의 4.19 후 이승만의 하야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야 하는 시점에서, 바로 다음 해인 1961년 5.16이 일어남에, 자신(일부 주동세력)들이 원하는 사상의 정권이 아닌, 결코 원치않던 정권이 들어섰다는 불만이 박정희에 대한 증오심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恨이 오늘날까지 사무쳐 이번 포상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의..
한일합방 광복 6.25 등, 그 어떤 나라들 보다 격변의 세월을 겪어왔던 대한민국이기에, 어지러울 정도의 많은 가변적 시대상황을 이해하고 염두에 두지않는 한, '무엇이 옳다'고 정의내리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언행만이 참이요 진리이며, 남들의 일거수 일투족 모든 것들은 거짓이며 악이라 생각하는 이들을 봄에, 참으로 그저 많은 세월만 보낸 흰머리의 코흘리개에 다름아니다.
자신들에 反하는 이들을 골라내면 상을 받겠다?
이건 뭐 골라먹는 재미라는 아이스크림도 아니고, 그렇다면 당신들이 주체가 되어 심사하여 상을 주고 또 후다닥 단상에서 내려가 상받으면 되겠네.
4.19 50주년이라..
이런 상황과 부동의 인식체계라면, 50년이 아닌 500년이 흘러도 지금의 물과 기름의 관계는 변치않을 것이다.
이렇게 대한민국 內에서 조차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난 이들이, 입만 열면 남북통일을 외치는 모습은 한마디로 슬픈 개그의 한 장면이다.
십년을 단위로 대표성을 삼아, 아직 의견이 분분한 건에 대해 상을 주니마니하는 것도 우습고..
흰머리 코흘리개들의 떼쓰기를 보는 것도 이젠 지겹다.
p.s
양 끝머리 사고를 인용했다고 본문에서 말씀드렸기에, 4.19를 혁명 또는 폭동으로 일컬은 점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
댓글목록
심심도사님의 댓글
심심도사 작성일
다행하게도 저희 집에는 4.19세대는 없습니다.
저는 이것 또한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요
예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희 집안은 저희 큰 아버지로부터 많은 피해를 봐 왔기에...
데모하는 곳은 지금도 피하고 있습니다.
글은 써서 올려 드리고,
그밖에 해야 할 할 짓은 하고 해서는 안될 짓은 안하지만....
마지막으로 한이 되는 것은 지박사님의 소송건에 단 한번도 가지 못하고
멀리서 응원만 하게 된 저 자신입니다
한가람님의 댓글
한가람 작성일
아... 신체는 세월에 나이를 먹어 중년, 장년을 지나 노년에 접어 들었을텐데...
그 머리는 아직 얼라의 수준을 못 넘어섰구나...
이 사회의 지도자연하는 인간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안티 박정희>를 훈장처럼 자랑하던데
퇴계의 순수도학이 배고픈 백성을 구하는데는 일조도 못했음을 모르는구나.
율곡이 더 존경받는 것도 현실참여로 백성의 고통을 덜고자 했기때문.
군사정부, 박대통령은 비난할 줄 알아도, 그때 보릿고개가 풍년고개 된 것은 모르는 자들...
그런 인간들은 퍼다 정이리 노리개로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