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기본적으로 자기수양의 종교임으로 위선에 빠질수 밖에 없음
페이지 정보
작성자 안녕하십니까 작성일10-03-18 05:52 조회2,842회 댓글6건관련링크
본문
그렇지만 문제는 무엇인가. 법정은 훌륭한 인간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무소유를 주장하는 그의 소리는 내용없는 꽹가리에 위선으로 들릴수 밖에 없다는 점에 있다. 불교는 인간의 삶이 불행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인간의 생로병사를 목격하고 시작된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것은 틀린말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만 보자면 별로 행복하지 않다. 재물이 많다고, 학벌이 높다고, 혹은 권력을 가졌다고, 아니면 결혼해서 자식을 많이 낳았다고 늘 행복한 것은 아니다. 외려 많이 가진만큼 고민이 많아지고 근심도 많아진다. 잃을 것이 없으면 무서운 것이 없다는 말이 완전히 틀린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이런 불행한 인생을 탈출할수 있는 방법을 깨달았다. 바로 해탈하여 열반에 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탈하는가.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번뇌를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백팔번뇌라는 것은 인간의 5감 + 마음 즉 6감에 (곱하기)((느끼는 세가지 감정 좋다, 나쁘다. 아무렇지 않다) (플러스) (고통. 즐거움, 아무느낌 없음)) =36번뇌 곱하기 3(과거 현재 미래) = 108번뇌 인데, 인간이 결국 이 평생 백팔번뇌에서 벗어날수가 없는 이유는 욕심에 근거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 욕심을 버려야 하는가. 완전히 버려야한다는 것이다. 완/전/히/ 그리고 싯다르타는 실제로 그것을 해내고 말았고 드디어 해탈하여 부처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윤회의 저주에서 풀려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해탈의 경지는 아니지만 선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들은 어찌 되는가. 극락에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극락에서 쌓은 공덕만큼 살다가 다시 고통스런 삶의 현장으로 되돌아 올수 밖에 없다. 악을 행한 사람들은 지옥으로 간다. 거기서 고통을 받다가 다음 생애에는 더 고통스런 짐승으로 태어난다.
과연 싯다르타는 해탈하여 정말 부처가 되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결코 그 사실을 믿지 않지만, 그것을 믿는 불교신자들도 해탈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신라의 원효대사는 중보의 개념을 도입한다. 현실적으로 해탈이 어렵다면, 특히 못배우고 삶에 찌든 서민들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일인 지경이니, 차라리 이미 해탈한 석가모니나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빌려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 관셈보살을 외우면 해탈은 못하지만 그 중보의 힘으로 극락에는 갈수 있다는 것이다. 원효는 이 깨달음을 얻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다. 도무지 해탈은 자신의 노력으로 불가능한 것이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중보로 인해 극락을 가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것이 불교이다.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욕심을 버리고 스스로 100팔 번뇌를 이겨내고 열반에 들어가라는 것이다. 그것만이 고통스런 인생을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그 예를 제시했을 뿐, 해탈의 과정까지 도와줄수는 없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출가를 감행한다. 가정을 갖는것 자체가 번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공덕을 쌓기 위해 수없이 많은 수련을 쌓고 해탈을 바라보며 도를 닦는다.
불교는 자기수양의 종교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스스로를 완벽하다고 말할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타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자기수양이 얼마나 완성되어가느냐를 확인하는 방법은 오직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서이다. 법정이 무소유를 주장했다면 그것은 그렇지 못한 누군가를 정죄하는 목소리였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무소유자라고 어느 정도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책을 썼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양심을 속이고 있었다. 해외여행을 다닐때 이것은 종교적인 사무의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급 유람선에서 좋은 음식을 먹을때도 그는 이 정도는 괜찮다고 자위했을 것이다. 이것이 단지 법정의 잘못인가? 그렇지 않다. 누구나 이 정도의 위선은 갖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금욕주의적인 자기수양의 종교는 필연적으로 수행 당사자를 위선으로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가 완벽한 인간이 아닌 이상, 위선 아니면 자신의 의를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댓글목록
aufrhd님의 댓글
aufrhd 작성일
기독교는 위선에 빠지기가 더 쉬운 것이다.
불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인은 다 위선에 빠지기 쉽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산구님의 댓글
산구 작성일
기독교는 인간을 철저하게 타락했고 철저하게 부패해서 스스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자기힘으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무능한 인간이라고 가르치는데 또 스스로 해탈할 능력도 없는 인간이라고 가르치는데 교회다니면서 기독교인 행세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자기자신을 발견치 못해서 스스로 이만하면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하기때문에 자기가 정말타락한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에 위선에 빠집니다.
사람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타락한존재임에도 사랑받기위해태어난것이 마치당연하다는 듯이 노래부르는 것보면 저사람이 과연 기독교인 인가? ㅎ라는 생각이 들죠
부처도 해탈했다는 말은 말짱 거짓말이죠!
장학포님의 댓글
장학포 작성일"안녕하십니"님의 혜박하신 불교지식에 많은 공부가 되었읍니다. 님이 밝히신.그 무소유기준에서 모든 종교인을 반추해 봄은, 오늘날 세속에 너무나 빠져있어서 무소유를 논할 가치가 없을것 같읍니다. 자기 최면을 걸은 괘변으로 면죄부를 얻으려는 것인지도 모르 겠군요!!
한가인님의 댓글
한가인 작성일
불교가 자기수양의 종교라는 것은 어찌 아십니까?
불교는 모든 사람과 환경조차도 서로 상호의존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니 모두가 윈윈하는 삶을 살자는 취지의 종교입니다.
북방에 전해진 대승계통은 원래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영원불변 전지전능의 부처를 상정하였지만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그런게 아닙니다.
석가모니가 중요시 한 것은 집착과 지나친 욕심과 분노의 마음이 이 세상 인간사를 고통스럽게 하는 요인이라는 것, 인간을 통제하는 절대자 신은 없 다는것, 이런 마음상태와 절대자 신을 믿는 마음상태가 인간사회에 억압적 통치체제를 구축한다는것, 따라서 이런 마음상태의 극복이 바람직한 세상의 건설에 필요하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생노병사의 고통때문에 불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속설입니다.
한가인님의 댓글
한가인 작성일
그리고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비판하시는데, 그분의 삶이 투명했느냐 하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있습니다만, 어는 목사님이 비판하듯 해외여행을 했다고 해서 무소유가 아닌것은 아니지요.
대문글에서 지박사님이 지적하셨듯이 자신의 능력이 있어서 생기는 자유상태의 무소유도 있는 것이고요,
중요한 것은 무소유란 것이 내것이다 집착하는것 사심을 앞세우는 심리상태를 버리라는 것이니, 거렁뱅이 같이 모두 버리고 살라는 것은 아닐것입니다.
달마님의 댓글
달마 작성일
조금만 더 전후좌우를 살핀 후 문제를 제기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글입니다.
*불교는 인간의 삶이 불행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불교뿐만이 아니라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출발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삶이 부조리하다는 전제하에서 출발했죠.
*금욕주의적인 자기수양의 종교는 필연적으로 수행 당사자를 위선으로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금욕주의 적인 자기수양의 종교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든 수행자가 자신이 귀의하고 있는
종교의 계율을 실천하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는 수행당사자를 위선으로 빠지게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