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꼬레또 기브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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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뜰팡 작성일10-03-16 12:05 조회3,084회 댓글3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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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꼬레또 기브 미
그 해.
6.25동란이 일어났던 뜨거운 여름
내 나이 여섯 살이었다.
여섯 살 때 쯤 기억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도 어린나이에 빨갱이 기억은 아직 남아있다.
부산피난길에 겪었던 무서운 기억들이다.
피난길에 시커멓게 변한 죽은 몸뚱이들을 본 기억.
영동을 지날 때 즈음 기차 지붕위에 떨어질 뻔 한 기억.
빨갱이들이 잡아간다며 사람들이 벌벌 떨었던 기억.
빨갱이들에게 죽창으로 찔려 죽은 사람의 가족들이
대성통곡을 하며 슬피 울던 모습을 본 기억.
부산에서 수도 없이 많은 피난민들을 본 기억.
그중에서도 피난 갔다 돌아 온 후
인민군들이 후퇴하자 빨갱이들이 동네 우물에
사람들을 산채로 거꾸로 처넣어 죽여
우물이 시체들로 가득 차
오랫동안 우물물을 먹지 못했던 기억.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피난길에 난생 처음으로 온통 까만 얼굴을 본 것이다.
큰 철모를 쓴 흑인병사를 본 기억이다.
키가 아부지, 삼춘보다 훨씬 컸고
몸집이 山만 했다.
엄청 더웠던 낙동강변 모래사장 아침.
피난길의 우리 동네사람들이 아침밥을 지어먹기 위해
낙동강변 백사장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때
우리나라 군인이 아닌 양키군인들이 갑자기 몰려와
쏼라 쏼라하며 우리보고 빨리 떠나라고
거친 손짓을 해댔다.
난생처음 보는 코가 크고 하얀 사람들이었다.
동네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보고 양놈이라고 했다.
아부지와 엄니,삼춘은 부지런히 짐을 싸고 있었고
나와 내 동생은 처음 보는 큰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긴 총을 메고 있었고 눈이 움푹 패이고
코가 엄청 컸고 피부가 하얀 사람들이었다.
그때 그 양놈중 한 거인이 다가왔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하얀 사람이 아니었다.
얼굴과 팔뚝이 온통 까맣고 눈자위와 웃는 이빨이
무척 하얗게 보였던 기억만 남아있다.
그때 내 동생은 놀래서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겁을 먹고 동생을 끌어 안은 채
그냥 서있었던 것 같다.
기억이 나는 것은 그가 내게 까만 포장을 한
과자 하나를 주면서 하얀 이빨을 들어내고 웃으며
잔뜩 겁을 먹은 나를 달랬다는 것.
초코렡을 받아 든 나는 까만 그 흑인이 무서워
먹어보지도 못하고 그냥 움켜쥐고 만 있었다는 것.
그것이 그렇게 달고 맛있는 것 인 줄 몰랐다는 것.
그때 엄니가 달려와 벌벌 떨며 나와 내 동생을 데리고
아부지와 삼춘한테 데리고 가 뒤에 꼭꼭 숨겼다는 것.
나중에 엄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부산 피난 길 여섯살배기 나는 쵸코렡을 움켜쥐고
하루 종일 걷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초코렡을 뜯었는데
다 녹아 액체가 되어 있었지만 어찌나 맛이 있던지
포장지속을 맛있게 핥아 먹었다 한다.
어찌나 달고 맛이 있었던지 삼춘도 내 포장지를 빼앗아
조금 핥아먹다 내가 마구 울어대자
빈 포장지만 돌려주었는데 나는 며칠동안 피난길에도
그 빈 포장지를 호주머니속에 꼭 넣고 다녔다한다.
그런데 지금 나는 초코렡 기억은 별로 없고
온통 까만 사람 기억만 남아있다.
피난갔다 돌아오니 동네 아이들 사이에
재미있는 유행어가 나돌고 있었다.
"쪼꼬레또 기브 미"
나는 아직도 6.25동란 때 내게 초코렡을 건네주며
하얀 이를 들어내고 웃어주던 그 흑인병사를 잊지 못한다.
그가 인민군의 총에 맞아 죽었는지...
아직도 살아남아 참전용사로 한국을 방문한 적은 있는지...
60년이나 지난 지금 그들이 한국에 와 흘린 값진 피를
애써 외면하며 미국에 적대감을 부추키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지 묻고 싶다.
빨갱이들의 죽창을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간절히 묻고 싶다.
죽창으로 찔려 죽으면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를
상상이나 해보았느냐고...
까딱 잘못하면 우리가 죽창에 찔려 죽을 수도 있다고...
100316 뜰팡
댓글목록
마당쇠님의 댓글
마당쇠 작성일미군이 나눠주던 군용식량으로 오늘의 한국이 있다는 것을 극구 부인하는 것은 아무런 역사적 경험도 없는 천박하고 저질스럽고 초라한 지금의 젊은 세대들 이겠지요...대표해서 백배 사죄드립니다.
심심도사님의 댓글
심심도사 작성일
제가 태어난 해가 1955년인지 1956년인지
우리 아버님께서 내가 태어났을 때 저녀석이
죽을런지 살아 남을런지 몰라서 호적에 1년 늦게 올렸는 지는 나도 모른다.
어쨋거나 1956년생으로 되어있다.
내 고향은 영동에서도 가장 후미진 산골짜기로 소문이 난 곳이다
6.25때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을 정도였으니......
허나 그 당시에도 북한 군인들을 따라다닌 부역자들 있었는지..
그 당시 파출소장이 그 부역자들을 용서를 해줬다는 소릴 들은 기억이 있다
지금도 그 파출소장에게 감사를 표하는 비석이 남아있다
어렸을 적에 내 친구네 집엘 놀러가니 PL480호 구호양곡(밀가루)과 우유(지금 생각하면 탈지분유로 기억되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옥수수가루를 받아놓고 좋아하는 걸 본적이 있다
그 당시 PL 480호 양곡을 타 먹는 사람들이 왜 그리도 부러웠던지??????
왜 우리는 저런 것 안 타먹느냐고 어머니께 여쭈었더니 그건 가난한 사람들만 타 먹는 거라고 하더라
그 PL 480호 구호양곡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미국의 고마움을 아시는 분들일테고.....
언젠가 우리 작은 형님께서 이사를 하신다고 해서 이삿짐을 옮기는 데 도와 주러 갔었다
헌데....
놀랍게도 성조기와 태극기가 양쪽에 있고 악수하는 손이 그려져 있는 푸대(바로 PL 480호 구호양곡)가 보여서 깜작 놀란 적이 있었다
우리 작은형님께서 저게 뭔지 아느냐고 묻길래 잘 모른다고 했다가
작은 형님으로부터 자세한 설명과 꾸중을 함께 들은 기억이 있다
공무원을 하려고 하는 놈은 그런 것도 알아야 된다며.....
미국사람들에게 초콜릿을 얻어 먹어 본 기억은 없지만....
inf247661님의 댓글
inf247661 작성일
미군 3/4 톤 트럭.초장축 트럭! 멀리서 뽀오얀 먼지를 일으키면서 미류 나무 新作路길에 뵈면, 초조해 하면서 미군들이 던져주는 씨 레이숀 설탕 봉지, 유유 봉지, 노린내 나는 치즈, 손가락 굵기의 쏘세지, 파란색 페인트 빛깔도 화려하던 연필, 옅은 초록색 긁은 줄이 쳐진 두꺼운 겉 뚜껑이 드껍던 공책, 비스켓, 흑색 커피, 프라스틱 숫가락, 땅콩 버터, 딸기 잼, 깡그리{깡통 따개}, 연필 깎는 면도칼, 코코아 봉지, 프림 봉지, 가루가 몹시도 고운 하이얀 소금, 짙 푸른 빛깔의 콜라병, 벽에 그러도 잘 켜지는 딱 성냥 ㅡ 여름철 습기가 많아도 어김없이 잘 켜지는 곽대기 종이로 만든 야전용 성냥, ,,, ,,, ,,,! 먼저 달려가 주우려고,,. 흐,흘,흙, 흙,흙,흙! 비참하던 가난하던 시절!
절대 빈곤! 참혹하던 보릿 고개 시절! 동란 기간 중이던 길고 배고픈 긴 여름날들의 1952.1953년도 시절, 남한강 강변 마를! 경기 여주.충북 충주.강원 원주 부론면! 3개도 접경의 남한강.섬강 격오지! 고려 최후의 임금 공양왕이 경기도 여주 평야를 바라보면서 긴 한숨을 쉬시었다는 공양산.공양 나루터! 은빛 금빛 번쩍이는 왕모래 백사장에 UN 군들이 원주 Camp Long{주한 미 군사 고문관단 K.M.A.G}에서 하기 휴양{Summer Rest Camp} 의 한국군 UN 군들이 함께 와서 교대로 며칠씩 노래자랑 경연대회도 하면서오고 갈 때! ,,. 제가 국민학교 2학년이던 1953년도 경,,. 그 중에서 '프림'은 설탕도.소금도.우유 가루도 아닌 ㅡ 뭣인 줄 모륻고 그냥 버리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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