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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제 적화 통일에 동조하고, 주한미군 철수와 韓美동맹 해체를 외치며, 보안법 및 국정원 폐지를 주장하는 세력과 反共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한 지붕 밑에 살 수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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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씨는 천안함 폭침의 책임은 피해자인 이명박 정부에 있다고 말한 사람이다. 그는 국가보안법을 惡法으로 본다. 惡法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김일성 만세"라고 외치는 미친 놈도 단속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는 평택미군 기지를 '침략전쟁 기지'라고
욕하고,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불법이라고 단정하였다. 김정일의 核개발과 북한주민 학살엔 철저하게 침묵하고 한국 현대사를 암흑의
시대로 몰아붙인다. 그러면서 인권변호사를 자처한다.
친일파를 斷罪하지 못하였다고 조국을 저주한 그가 일본 도요타 회사로부터는 巨金을 기부 받았다고 한다. 그가 만든 재단은, 기업을 압박하여 받아낸 돈으로 폭동을 일삼는 좌파단체를 지원하였다는 의혹에 휩싸여 있다.
박
원순씨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조직도 비슷한 이념성향이다. 김대중-노무현 세력, 민노당, 從北세력의 연합체이다. 이런 사람들이
서울정권을 잡았다. 민노당은 북한정권의 對南적화공작에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민노당이 매개체 역할을 하여 북한정권과 박원순의
서울정권이 손을 잡는 사태는 반역을 뜻하는데, 李明博 정부가 과연 이를 저지할 의지가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헌법이란 무기를 갖고
있으나 쓰지 않으면 헌칼이다.
박원순 세력이 장악한 서울이 '파리 코뮨'을 닮은 '서울 코뮨'으로 둔갑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서울 코뮨과 대한민국은 공존할 수 없다. 연방제 적화 통일에 동조하고, 주한미군 철수와 韓美동맹
해체를 외치며, 보안법 및 국정원 폐지를 주장하는 세력과 反共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한 지붕 밑에서 같이 살 수는 없다. 1871년
파리 코뮨과 프랑스 정부군은 공존할 수 없어 內戰을 치렀고 3만 명이 죽었다. 이런 비극을 피하는 길은 박원순 세력이 대한민국
헌법체제의 품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그런 轉向은 어렵겠지만 이 경고를, 후일을 위한 기록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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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左右대결은 內戰을 불렀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랜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이지만 프랑스대혁명 169년 후인 1958년(4공화국 때), 171년 후인
1961년(5공화국 때)에도 군부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左右대결은 프랑스에서 시작된
정치행태이다. 左右대결을 정치의 軸으로 하는 한국은 프랑스型에 가까운데, 그렇다면 좌익 폭동과 우익 쿠데타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인가 自問(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제1공화국 등장, 루이 16세 부부 처형,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황제 등극, 1814년 왕정復古, 1815년 워털루 전투로 나폴레옹 몰락, 1830년 7월 혁명으로 새 왕조
등장, 1848년 2월 혁명으로 제2공화국 등장(나폴레옹 조카가 대통령에 당선), 1851년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로 공화정을
종식시키고 이듬해 황제로 등극, 크리미아 전쟁, 1871년 普佛(보불)전쟁에서 프랑스 패배, 왕정폐지, 제3공화국 등장,
內戰(파리코뮌).
대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82년간의 파란 많은 프랑스 민주화 과정에서는 여러 차례의 전쟁, 두 번의
혁명, 두 번의 쿠데타, 그리고 파리코뮌이란 內戰이 있었다. 이런 소용돌이의 본질은 地主-상공업자-교회-군 장교 중심의 우익과
노동자-농민-지식인 중심의 좌익 사이 계급적 대결이었다.
1870년 독일통일을 노린 프로시아가 프랑스를 친
普佛전쟁에서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지휘한 프랑스군은 세단에서 大敗(대패), 항복하였다. 프러시아 軍이 파리로 진격, 포위하자 새
정부는 이듬해 프러시아에 막대한 배상금과 알자스-로렌 지방을 바치기로 하고 항복하였다. 노동자와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시민군은
항복을 거부하고 파리코뮌이란 독자 정권을 수립, 파리를 장악하였다. 베르사유에 본부를 둔 정부군(국회파)은 파리로 진격, 두 달
간의 치열한 시가전 끝에 코뮌 세력을 일소하였다. 약 3만 명(대부분이 파리코뮌 세력)이 죽었다. 빅톨 유고는 “파리는 이
內戰으로 最良의 남녀 10만 명을 잃었다”고 개탄하였다. 이 기간 프러시아는 포로로 잡았던 10만 명의 군인을 프랑스 정부군에
돌려보내, 진압 작전을 도왔다. 계급모순은 민족모순보다 더 강하다는 말이 있다.
파리코뮌의 참사가 일어난 것은
프랑스대혁명 82년 뒤였다. 민주주의가 성숙되기엔 너무 짧은 기간이었다. 2011년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는 나이가 63세에
불과하다. 프랑스를 오늘날까지 흔들고 있는 左右 대결이 한반도에선 南北 사이뿐 아니라 남한 내에서도 2重으로 전개되고 있다.
프랑스보다 훨씬 복잡한 內戰구도를 안고 있다. 파리코뮌 같은 사건이 한국에선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이들이 있다면
세계사 공부를 다시 할 필요가 있다.
대혁명 170년이 지나서도 군부 쿠데타 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