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이 적과 사전내통한 무장폭동이란 부정못할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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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새벽달 작성일13-07-02 23:32 조회2,953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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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기술한 역사적 사실은 당시 일간신문과 518측 사료, 그리고 97년 518 검찰수사기록에서 발췌한 사항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한점의 의혹도 없을 것이다.
1. 1026이후 518 직전까지 정부(최규하)의 조치
1) 박정희대통령 영결식이 끝난지 일주일후에 최규하는 향후조치사항을 발표했다.
"현행헌법에 의해 대통령을 뽑되 잔여임기(2년?)도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빠른기간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모아 새로운 헌법을 만들고 새로운 헌법에 의해 직접선거를 해서 새로운 정권에 물려주겠다." 각계각층에는 김영삼 김대중의 야당도 당연히 포함되는거지.
2) 그럼에도 불복하고 소요가 계속되자 이를 지속적으로 재천명하고 3월 중순까지 헌법위원회를 발족하기로 했어.
3)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김대중을 비롯한 긴급조치 위반자들을 전원 석방하고 형집행 면제등 가능한 모든 조치를 했어.
여기까지 최규하의 조치에 어떤 부족한 점이라도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김대중은 여기에 불복하고 당장 정권을 내놓으라고 떼를 쓴거야.
2. 김영삼 김대중의 도에넘는 지나친 요구들
1) 몇달만 기다리면 원하는 모든 조치가 이루어 질 텐데도 그걸 못참고 "당장 물러나고 정권을 내놔라." 요구한거야.
여당도 아니고 야당인사로서 될법이나 한 얘기야? 정권 내주면 대통령 누가 할껀데????
2) 정부의 합리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되는 뗑깡을 쓰고 시위를 확산하며 정국을 혼란으로 몰아갔어.
3) 그 이유는 합리적인 선거를 하면 도저히 자신이 없으니 나라를 폭력혁명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어 그 와중에 정권을 잡겠다는 술책이었지.
3. 김대중. 김영삼의 내란준비 및 정부에 대한 최후의 선전포고
1) 5월 16일날 최후의 시한을 5월 19일 10시로 정하고 그때까지 정부가 항복하고 정권을 내놓으라고 최후통첩이란 선전포고까지 했어. 내각명단까지 짜놓고.......
이건 무슨 의미야?
당시 박대통령 사망으로 비상계엄 상태기 때문에 군이 당연히 개입하겠지만 이것마저 우습게 생각하고 선전포고 한거야.
초딩이 동네 양아치 한테 가진것 모두 내놓으라고 협박할때는 전국구 조폭두목쯤 뒤를 받쳐주지 않으면 가능 하겠어?
2) 만약 불응하면 22일을 기해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키겠다고 최후통첩이라며 협박까지했어.
소결론 : 1) 이미 22일에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킬 계획도 완성하고 조직도 완전히 준비해 있었다.(내란준비 완료)
2) 대한민국국군 정도는 우습게 알 정도의 막강한 세력이 뒤에 준비되어 있다. (적과의 내통)
그게 누굴까? 미국일까? 중국일까? 소련일까? 각자 판단해.
3) 만약 사전에 국군보다 더 강력한 적과 내통한게 아니라면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한 5.18 주동세력은 모두 중증 정신병자라는 결론밖에 더 있어?
4. 몇번씩 나오는 22일과 518 사태를 연결해 보자.
1)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키기로 선전포고한 22일의 바로전날인 21일 광주에서는
- 정체를 모르는 600명의 연고대생이 출현하여
. 20사단 지휘부를 습격. 총기와 지휘차 14대를 탈취하여 그차를 몰고
. 아시아자동차를 습격하여 4대의 장갑차와 수백대의 군수용 차량을 탈취하고 그차를 이용해
. 44곳에 이르는 무기고를 순식간에 습격하여 5천여정의 총기와 25만발의 탄약, 수류탄, 폭약을 확보하여
. 시위대에게 총기사용법을 가르치고 무장을 시켰어.
- 방송국2곳을 불지르고, 수차례에 걸쳐 교도소를 습격하는등 참으로 비정상적인 시위가 일어났지.
이게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어? 치밀하게 사전에 계획되지 않고도 가능했던 일이야?
5. 진압군의 발빠르고 현명한 조치로 대규모 유혈사태 방지. 반란 무산
- 시위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진압군의 재빠른 상황판단으로 21일 광주에서 철수, 외곽포위
- 온건시위대와 시민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총기자진반납 유도 시위자제 호소.
- 진압군과 접촉하여 사태수습방안 강구.
- 광주도청에 설치된 폭약의 뇌관제거등
- 시위가 의도대로 되지 않음을 느낀 연고대생(?) 자취를 감춤
만약 진압군이 시내에서 철수하지 않았다면 무슨일이 일어났을까?
아마 심각한 무력충돌로 수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거고, 여기에 항거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대한민국은 무너지고 대한민국은 시위주동자와 배후세력에게 넘어갔을거야.
지금까지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5.18이라는 너무나 거대한 나무에 가려 숲을 볼 생각을 안한거야.
결론 : 1. 518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고, 준비되고, 적과 내통하여 전국적으로 일으키려 했던 반란의 일부로 광주에서만 부분적으로 성공한 "적과 내통하여 부모형제 자식과 이웃을 처죽인, 인류역사상 가장 추잡한 무장반란이었다."
2. 만약 적과 내통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한 시위주도세력은 모두 중증 정신병자야.
여기에 대한 정부의 공식입장은 무엇인가?
만약 1.의 경우라면 당장 [518은 적과 내통한 무장폭동]임을 천명하고 모든 조치를 적과 내통한 무장반란에 의해 처리하라.
만약 2.의 경우라면 정신병자는 당연히 대통령이 될 수 없음이니 두명의 전직대통령의 자격을 박탈하고 518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의 공직을 취소함은 물론 당시 대통령의 자격으로 행한 모든사항을 무효화하고 정신병자에게 수여한 노벨평화상까지 취소토록 요청해야 할 것이다.
아래 : 사건일지
일자 | 제 목 | 내 용 |
79.10.4 | 김영삼 의원직제명 | 김영삼이 카터방한때 주한미군철수, 군원중단등으로 박대통령 압박해야 한다고 하다 의원직 제명당함 |
10월 13일 | 신민당.통일당79명 의원직사퇴 | 국회의 신민당 김영삼 총재 변칙 제명에 항의하여 의원직 사퇴서 제출 |
10월 15일 | 부마항쟁 시작 | 김영삼 의원직제명에 항의, 부마항쟁 시작 |
10월 26일 | 삽교천방조제 준공 | 임시수도 용수공급위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
10월 26일 | 박정희대통령 서거 | 김재규의 총탄에 박정희대통령 사망 |
11월 3일 | 박정희대통령 영결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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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6일 | 박대통령 시해사건 전모 발표 |
|
11월 10일 | 정국에 관한 특별담화(최규하) | “정부는 현행헌법에 따라 대통령 보궐선거의 시한인 1980년 1월 25일 이전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을 선출하고,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헌법에 규정된 잔여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모아 헌법을 개정하며, 헌법이 개정되면 즉시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이양한다.” |
11월 12일 | 김대중: 정부의 즉각적인 퇴진요구 |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연합"정부의 즉각적인 퇴진요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보권선거를 반대한다. 유신헌법을 즉시 폐지하고, 거국내각을 구성하여 조기총선을 실시하라” |
11월13일 | 김영삼: 김대중과 동조 | 김영삼이 이끄는 신민당도 김대중의 말에 동조 |
11월 23일 | 서울대생 김대중유인물살포 | 서울대생 150여명이 김대중의 주장이 담긴 유인물을 살포 |
11월 24일 | YWCA사건 발생 | 반정부 인사 400여 명이 연세대 제적학생인 홍성업의 결혼식을 위장하여 서울 YWCA에 집결한 후 김대중의 주장을 반복하는 성명서 발표 |
11월 26일 | 계엄사, YWCA 사건 발표 | 이 사건은 결혼식을 위장하여 민주 세력들이 대통령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선출을 반대한 시위 사건임. 총 96명을 포고령 위반이라는 이유로 검거 |
11월 27일 | 반정부인사 광주농성시위 | 광주 YWCA에서 재야인사 100여 명이 모여 역시 김대중의 주장을 담은 유인물을 살포하고 농성시위 |
11월 29일 | 각대학 유인물살포 | 서울대, 연대, 고대 등 각 대학에서 “유진잔당 즉각 퇴진”이라는 선동성 구호가 담긴 유인물을 살포 |
| 김일성이 통전부에 내린 비밀교시 | * “남조선의 모든 혁명역량을 총 동원하여 전민 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한다” |
12월8일 | 긴급조치 9호 해제 | 최규하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해제 긴급조치 위반자 68명에 대해 형집행을 면제 김대중 가택연금 해제 |
12월12일 | 1212사태 발발 | 박대통령 시해에 정승화총장 관련여부 조사위한 연행에 불복, 1212사태 발생 |
12월14일 | 최규하 과도정부 출범 | 신현확 내각이 임명되어 최규하 과도정부가 합법적으로 출범 * 김대중이 선도하는 재야세력은 최규하 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즉시 거국내각을 구성하고 총선을 실시하자며 학생들을 선동함으로써 폭력투쟁의 전선을 펴기 시작 |
1980년 1월18일 | 정부주도개헌 천명 | 최규하 대통령 정부주도개헌 천명 80년 3월 중순까지 대통령 직속으로 헌법개정심의위원회 발족 약속 |
2월29일 | 김대중 사면복권 | 학생 373, 정치인 22, 종교인 42, 교수 24, 언론인 9, 기타 217 |
3월14일 | 헌법개정 착수 |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으로 ‘헌법개정심의위원회’를 발족시켜 본격적인 헌법개정 작업 돌입 |
3월15일 | 김영삼의 난동 시작 | 김영삼이 이끄는 신민당은 ‘민주화촉진대회’를 열고, 정부의 헌법개정심의기구를 즉시 해체하고, 신현확 내각의 즉각 사퇴를 촉구했다. 응하지 않으면 중대결단을 내리겠다고 협박 |
추천 34댓글목록삼족오님의 댓글삼족오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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