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교육자 시각에서본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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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반도 작성일13-05-31 15:06 조회2,29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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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증언1. 북한 교육자의 시각에서 본 5.18사건
(전 함경남도 금야군 고등중학교 교원)
북한에서 교육부문에서 종사하는 교사는 “직업적인 혁명가”라는 칭호와 함께 김일성, 김정일 두 부자를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탁월한 수령으로 내세우는 우상화작업을 교육의 기초단계에서부터 집행하고 수행하는 세뇌전선의 일선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교육자들은 늘 학생들 앞에서 “김일성대원수님과 친애하는 지도자동지를 신격화 하고 그들 두 부자의 위대성”을 강조하고 선전해야 한다. 또한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인식시키고 사회주의 조국과 두 김 부자를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총폭탄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을 본업으로 하는 사상전선의 직접적인 주인공이고 담당자들이다. 바로 이러한 교육자들의 입과 손에서 어린 학생시절을 거치면서 김일성, 김정일을 모시고 있기에 우리민족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민족이며 부자와 거지가 없고 차별 없이 만민이 공평하게 사는 우리 사회주의제도가 자본주의에 비할 바 없는 훌륭한 제도임을 각인 받으며 김정일의 하수인들로 길들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의 교육자들도 교육현장의 장벽 앞에서 자가당착의 고민과 모순에 빠질 때가 있다. 언젠가 북한의 텔레비전에서 남조선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이마에 흰 수건을 두르고 구호를 외치면서 데모를 하는 현장 내용을 방영한 적이 있었다. 북한은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북한의 모습은 두 김 부자의 현지지도 장면이라든가 6자회담이 우리의 승리로 이겼다는 등 체제에 유리한 면만을 선정해서 고정적으로 텔레비전에 방영하고, 남한의 모습을 방영할 경우에도 국회에서 의원들이 멱살을 쥐고 삿대질을 해대면서 싸움을 하는 모습이라든가 청년학생들의 반정부시위, 또는 노동자들이 데모하는 모습과 같은 안 좋은 남한사회의 극단적인 면만을 골라 보여준다. 문제의 남조선노동자들의 시위현장이 텔레비전 방송을 타고 나간 바로 다음날 내가 담당하고 있는 반의 한 학생이 첫 수업시간에 벌떡 일어나서 나에게 당돌하게 질문을 들이댔다.
“선생님 어제 누나랑 같이 옆집에 사는 인민반장네 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봤는데 남조선노동자아저씨들이 파업을 일으키고 있던데 뭔가 좀 이상했습니다.” “뭐가 이상했니?”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면 제일 못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북조선사람들보다 몸도 더 뚱뚱하고 옷도 잘 입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병 같은데 불을 붙여서 던지고 돌맹이도 집어 던지고 그러던데 그 사람들은 제가 보기에도 우리보다 더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무엇 때문에 길거리에 몰려나와서 자기편끼리 싸움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나는 학생이 궁금해 하는 내용이 뭔지 금방 눈치를 채면서도 아닌 밤중에 홍두깨 내미는 뜻 한 어린 학생의 돌발적인 질문에 잠시 당황했다. 북한의 가정들 대다수가 다 그렇지만 우리 집도 형편이 넉넉지 못해서 텔레비전 같은 큰 물건이 없었다. 만약 텔레비전이 있어서 남조선 노동자들이 시위하는 것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내가 직접 보았다 해도 학생이 들이대는 질문의 성격을 보면 아무리 교육자고 담임선생이라 하지만 함부로 학생이 이해될만하게 정답을 말해 줄 수 없는 민감한 내용이었다. 체제에 위배되는 말 한마디 잘못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온 가족이 하루밤새에 정치범수용소로 모두 끌려가서 결단 나는 세상인데 그런 체제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내가 미련하게 학생들 앞에서 말 한마디 잘못해가지고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짓을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 학생의 질문에 내가 정확하고 솔직한 답변을 해준다면 남조선사회가 북한사회보다 더 민주주의적으로 발전된 좋은 사회라고 말해줘야 되고 신분과 토대의 구분이 없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인권을 보장받고 권리를 마음대로 행사하면서 살아가는 자유사회라는 것을 말해줘야 했다. 감수성과 진취성에 민감하고 사물에 대한 세계관이 형성되어 가는 시기의 어린 학생들인 만큼 들으면 큰 충격이 되고도 남을 정치적 성격의 발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아무래도 말이 나왔으니 학생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에 적당히 대답을 해주고 끝을 마무리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무엇이 나왔는지 아무 것도 보지 못했어요. 선생님이 텔레비전을 봤더라면 구체적으로 대답을 해줄 수도 있었는데 못 봤으니까 정말 학생들한테 미안하네요. 다음 번에 그런 것이 나오면 꼭 보고 좋은 대답을 해드릴게요.” 질문을 하려고 일어났던 학생이 실망한 듯 멋쩍게 머리를 극적 거리면서 자리에 않는가 싶더니 문득 머리를 들고 다시 질문을 들이댔다. “선생님 그런데 시위를 하던 그 사람들이 우리 편이나요 아니면 남조선 괴뢰도당과 같은 나쁜 사람들 편이나요?” 난감했던 처음의 질문과 달리 대답해주기 한결 쉬운 두 번째 질문에 나는 속으로 반색을 하며 얼른 대답을 했다. “남조선 노동자들뿐만이 아니라 남조선 인민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에요. 남조선 괴뢰도당과 미국 놈들을 등에 업은 민족반역자들이 정말 나쁜 놈들이고 우리의 원수에요. 모두들 잘들 아시겠어요?” “예” 합창을 하듯 큰 소리로 대답하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교실 밖 복도까지 울려나갔다. 남조선 사회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파악이 아니라 1988년에 올림픽 주최 이후로 북한과는 대비도 안 되게 빠르게 발전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나에게 남조선사회의 진실에 대하여 질문 받는 그 순간은 정말 만감이 교차하고 체제교육의 한계에 대해서 온몸으로 절감해야 되는 당혹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날 하루 온종일은 이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무거운 마음과 피로로 하루를 지루하게 보내야 했다. 교단에 서면 하루도 빠짐없이 늘 우리나라는 위대하신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의 현명하신 령도 아래 누구나 아무런 근심걱정 없이 행복하게 잘살고 있고 우리 인민의 철천의 원수인 미국 놈들에게 점령당한 식민지 남조선은 못 먹고 못살아서 거지가 골목골목마다 넘쳐나고 불쌍한 사람들이 부잣집 쓰레기통과 길거리의 오물통을 뒤져서 생계를 유지하며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해나간다고 교육했던 나였다.
나는 철없는 학생에게 질문을 받았던 그때부터 교육자에게서 가장 순결하고 소중한 것은 거짓과 진실을 솔직하게 구별해서 말해 줄 줄 아는 양심이라고 생각했다. 교육자가 그 어떤 상황의 벽에 막혀 본의 아니게 양심을 비켜가게 되면 한 두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나라의 기초가 무너지게 되고 대의가 뒤집혀 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름대로 북한의 김정일 체제에서 그 답을 찾게 되면서부터 교육자의 책임감과 의무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북한사람들은 10년 전만 해도 남조선사회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었고 정보의 종합채널이라고 할 수 있는 텔레비전 같은 수단은 있지만 그렇게 합법적으로 공개된 채널에서 남조선사회에 대한 상식을 얻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아주 먼 옛날이야기의 한부분이다. 현재 북한인민들 전체가 남조선사회의 발전상에 동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국경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북한의 대부분 사람들은 남조선사회의 문화와 생활수준이 대체로 어느 정도로 발전되어 있고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장점이 북한사회의 어떤 점과 모순되고 구별되는지에 대해서 누가 얼만 큼 아는가가 문제지 너무 잘 알고 있다. 훤하게 알고 있지만 함부로 입을 벌릴 수 없는 체제이다 보니 내색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에 순종하며 조용히 살고 있을 뿐이다.
김정일정권과 북한체제가 아무리 외부세계를 차단하고 총칼과 사형이라는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외부를 차단해도 중국과 일본, 남조선과 러시아를 비롯해서 가까운 주변에 있는 나라들에서 밀거래로 들어오는 영화 비디오라든가 노래카세트 등 각종 수단들은 북한사회의 밑바닥을 자본주의사회의 생활문화를 뺨칠 정도로 만들어 놓았다. 돌이켜 보면 북한이 어떤 사회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충성과 우상화에 목숨을 걸고 체제선전용 교사의 직분으로 마음이 백지같이 하얗고 청순한 학생들의 머리에 거짓을 심어주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1980년 광주인민봉기가 한창이던 때에 우리는 북한의 텔레비전을 통해서 생생하게 방영되는 5.18광주현장을 보면서도 저들끼리 물고 뜯고 잘도 싸운다라는 식으로만 생각했지 별다른 의미를 두거나 특별히 다른 해석을 하지 않았다. 김정일 정권이 선전하고 말하는 그대로 전두환 군사깡패와 남조선 괴뢰정권을 뒤집어엎고 조국을 통일시키기 위한 영웅적인 남조선인민들의 애국항쟁이라고 의심 없이 그냥 순수하게 받아들였을 뿐이다. 김대중을 비롯해서 김일성. 김정일의 추종세력들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불순한 목적으로 북한과 긴밀히 내통하여 일으킨, 폭도들의 국가전복을 위한 반란이라는데 대해서는 생각조차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5.18광주폭동이 끝나고 해를 넘긴 1981년초부터 북한 군인들과 사회간부들의 입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북한의 특수부대사람들이 참가했었다는 구체적인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내용은 북한 전역으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1981년 4월쯤이라고 기억되는데 어느 날 저의 아버님께서 당 생활총화에 가셨다가 예전보다 늦게 집에 오셔서 하는 말씀에 저의 온 가족이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작년 5월 달에 남조선에서 일어났던 광주인민봉기 때 누가 남조선괴뢰군들하고 싸웠는지 모르지? 우리 쪽의 특수부대군인들이 파견돼서 직접 싸운 거야. 오늘 군당조직 비서가 와서 그 얘기를 한 시간이 넘도록 했어.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가 정말 대단해. 남조선 놈들 아무리 까불어도 우리하고는 대상이 안 되지. 우리 군대가 세계 최강이야” 아버님의 말씀에 어머님께서 한마디 하시던 기억도 지금 생생하다. “정말 남조선의 광주까지 내려 갔었대요? 통일이 되긴 빨리 돼야지, 숱한 사람들이 고생이 말이 아니네요. 당신도 집에서 해주는 밥만 축내지 말고 총을 메고 그런 데나 좀 한번 갔다 오지 그래요. 집안 살림 좀 펴게” “나이만 젊고 총 한 자루만 있었으면 못 가게 말려도 가서 한바탕 싸우고 왔지. 그런데 광주에 가서 죽은 사람들도 많은가 봐. 조직비서 동지가 말하는데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광주인민봉기에 내려갔던 사람들의 가족들을 국가가 영원히 책임지고 돌봐주라고 말씀하셨대.”
그때부터 전해지는 여러 가지 형태의 광주사태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북한사회의 각지로 전설처럼 퍼져나갔고, 말해주는 이나 듣는 이들의 기분을 즐겁게 해주었다. 용감무쌍한 우리의 영웅적 인민군대가 목숨으로 지켜주는 사회주의 조국에서 사는 행복과 자부심이 저절로 넘쳐나게 해주는 소설과도 같은 5.18광주사건의 이야기였다. 광주사태에 대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구수하게 전해졌으며 마치 자기들이 갔다 온 것처럼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들뜨게 만들었다. 공공장소나 모임장소에서 사람들은 희열에 넘쳐 광주사태의 이야기를 화제 거리로 주고받았다. 필자도 그때 우리의 용맹한 인민군대가 광주까지 내려가서 전두환 군사깡패와 맞서 싸우는 광주시민들을 돕고 무공을 세우고 돌아온 것을 자기의 일처럼 기뻐하며 자랑스럽게 여겼었다. 그런데 북한을 탈출하고 한국으로 와서 남한사회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접한 일이지만 광주인민봉기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가 알기와는 전혀 다르게 들리는 것을 보고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7년 가을 어느 날, 학생들과 함께 5.18 광주사태를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게 되는 기회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광주사태에 대한 의문이 많았던 터라 남쪽에서 5.18당시의 상황을 그린 영화라고 하니 도대체 어떤 내용인지 많은 호기심이 생겼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가 중간쯤으로 접어들기 시작하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장면과 이상한 것들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광주현장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내가 보기에도 나오는 장면마다 ‘저건 선전을 위해서 억지로 짜 맞추기 해서 만들어 졌구나’ 하는 느낌이 강하게 풍겨왔다.
그러면서도 한쪽으로는 내가 북한에서 잘못알고 왔나 하는 생각에 한순간 어리둥절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광주사건의 내막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의 입장으로써는 참으로 상상할 수 없는 놀랍고도 기이한 일이었다. 영화전반에 설정되어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 시작부터 끝까지 증오와 적개심을 유발시키게 하는 편견적인 부분이었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분노와 감정이 일지 않을 수 없게 충동질 하는, 다시 말해서 노골적으로 이간질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질고 순수함 같은 특유의 ‘약점’을 끌어내어 미끼로 던지면서 한쪽에는 평화라는 그럴듯한 배경을 세워놓고 다른 한쪽은 그 평화를 탄압하고 짓밟는 잔인한 폭력세력을 세워서 ‘살인마’라는 진압군과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위대한’ 시민군간의 치열한 전쟁이라는 의미로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만들어 놓았다.
북한에서 1980년대 초반에 남한의 5.18광주사태를 소재로 영화를 만든 것이 있는데 그 영화의 제목이 ‘님을 위한 교향시’라는 영화이다. 또한 1920년대에 광주에서 일제를 반대해서 일어났던 청년학생들의 시위를 그린영화 “광주는 부른다”도 북한에서 만든 바가 있다.
북한의 ‘님을 위한 교향시’가 5.18 광주사태의 내용과는 전혀 아귀가 물리지 않게 남한의 민주주의가 잘못된 민주주의라는 의도로 만들어졌다면 어떻게 보면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는 ‘광주는 부른다’라는 영화 못지않게 이념이라는 색깔을 영화전체에 깔고 조작이라는 기술까지 곁들여서 친북좌파세력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계획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1980년 5월18일 광주사태에 대한 내용은 ‘화려한 휴가’나 소위 남한의 민주화세력들이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이다. 북한의 수족이라고 말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닌 친북좌파적인 불순세력이 정부전복을 위한 폭도들의 반란이었던 5.18사건을 민주화로 교묘히 포장하여 마치도 장롱 속에 건사하고 있는 자기들의 재산처럼 주무르고 있다는 것이 정말 놀라운 현실이었다. 북한특수부대군인들이 개입해서 만들어진 5.18사건을 마치도 대한민국의 성역을 바꾼 역사의 상징물처럼 묘사하고 분장까지 해대는 사기극을 보면서 대한민국이 골병드는 냄새가 지독하게 풍긴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감촉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한 눈에 알아보고 견적을 낼 수 있는 색깔과 정체성을 가진 집단이 5.18을 백주 대낮에 거리낌 없이 농락하고 있다는 것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조작과 거짓의 달인이고 위장수법에 능한 김정일 정권의 권모술수와 임기웅변술을 아무리 그대로 빼어 닮았다고 해도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교훈과 아픔의 역사인 5.18과 같은 비극의 장르를 순결한 민주화를 욕되게 하는 제물로 요리한다는 것이 가관이고 미친 짓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다. 친북좌파세력들이 입이 닳도록 말하는 민주화라는 개념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폭동도 민주화라고 우겨대고 조작하는 사람들이 도살장과 같은 북한의 인권현장에 대해서는 어째서 말 한마디도 못하고 김정일에게 아부하고 굴종하는 일에는 모범학생이 되는지 이해가 닿지 않는 일이다. 6.25전쟁 이후 평화적 시기의 대표적인 내란사건으로 전대미문의 인명학살을 빚어낸 5.18사건이 자칫 잘못하면 대한민국을 전복시킬 수도 있었던 매우 위험한 사건이었다는 것은 외면하면서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근거도 없고 죄도 없는 국군을 살인자로 매도하고 김정일을 비호하고 나서는지 친북좌파세력들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민주화라고 사기치는 폭도들의 선전에 속아서 길거리에 내몰렸다가 아까운 목숨을 잃은 억울한 사람들이 자기들이 죽어서까지도 김정일의 수종을 드는 세력들의 더러운 밥그릇을 챙겨주는 ‘종신보증인’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면 민주화를 가지고 장난질하는 친북좌파세력들에게 저주와 원망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에서 김정일 체제를 선전하는 교육전선의 일선에 서있던 한사람으로써 망월동에 묻혀있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진심어린 사죄와 함께 이 자리를 빌어서 심심한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일생에 단 한 번 밖에 차례가지 않는 소중한 목숨을 누구 때문에 잃었는지조차 모르고 저세상에 가있는 영혼들이 참으로 안타깝고 불쌍하다.
남쪽에서 광주사건의 북한군개입은 가당치도 않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라는 존재자체도 광주의 5.18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었다는 식으로 나온다면 아마도 김정일 정권은 너들끼리 물고 뜯고 잘 논다고 비웃을 것이고 북한에서 교육자의 신분으로 일했던 나를 비롯해서 1만5천 명을 넘는 탈북자들 대다수는 물론 김정일 체제를 저주하는 북한인민들 전체는 남한사회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하고 뺄 필요도 없이 5.18광주사건은 북한정권과 군부에 의해서 계획되고 설계된 대남작전의 한 부분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지고 조작된 대표적인 사건이다.
우리 탈북자들은 대한민국이 만들어지는데 삽질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나그네와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자는 내용은 북한정권이 바라는 것처럼 없는 것을 만들어 내서 이 나라에 해를 주자는 고의적인 의도도 아니고 또 그것을 바래서도 아니다. 대한민국이 오늘까지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미안한 감정도 있지만 때가 때인 만큼 이 나라의 적이 누군지 잘 가려보고 분별을 똑바로 해서 제대로 대처하자는데 작으나마 바램이 있다. 또한 북한체제를 허물고 하루빨리 통일을 해야 한다는 데 모두의 하나같은 목적이 있는 만큼 좀 힘들고 어려워도 좌우로 나뉘어서 분쟁하거나 남남으로 분열되어 집안싸움 하지 말고 대한민국 국민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뭉치고 단결해서 확실한 국력을 가지고 정확하고 바른길을 가자는데 목적이 있다.
북한이 핵을 가지고 위협하고 있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5.18을 민주화의 상징이 되게 하고 성지로 내세우는 짓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는지, 멀지 않은 앞날에 어떤 보이지 않는 위기상황이 찾아오겠는지 하는 것은 아직은 어느 누구도 모른다. 탈북자들이 살겠다고 남한으로 내려와서 한두 사람도 아니고 대다수가 자기들의 개인적인 생활과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국가적인 차원의 광주 5.18사건에 대해서 무엇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갖은 협박과 회유를 당하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파고들려고 하는지 그 배경에 대해서 국민들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해마다 5월 18일이 오면 북한의 텔레비전에서는 영웅적인 광주인민봉기라는 제목으로 광주사태의 장면들을 방영하면서 전두환 군사 깡패정권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운 광주의 애국적인 민주투사들과 영혼들을 잊지 말고 남조선인민들의 통일열기에 발맞추어 남북통일을 위한 정신사상적 준비를 빈틈없이 해야 한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우리는 북한에서 5.18사건이 텔레비전에서 방송될 때마다 격조 높게 울려나오는 방송원의 해설을 들으면서 남조선사회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사회인가에 대해 교육 받고 쇠뇌 될 수 있었다.
북한에서는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진압군들이 환각제를 마시고 시민군 진압에 나섰다고 선전하였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탈북자가 거의 없지만 북한의 당시로써는 계엄군들이 광주에 돌입하여 시위대를 진압하는 장면이 나오면 당연히 환각제를 복용하고 정신이 없는 상태로 평화적인 시민들을 상대로 저질적인 만행과 패륜적인 악행을 저지른다고 생각하였다. 어쨌거나 남조선괴뢰군들이 광주현장에 등장하는 장면만 나오면 정신문명이 잘못된 무리라고 분노가 폭발하였고 그들에게 가차 없이 증오와 저주를 보내곤하였다. 반대로 무장한 시민군들이 시청을 점거한 장면이 나온다거나 경찰서를 습격하여 총기들을 빼앗고 차량에 올라 저들의 세를 위시하며 광주의 거리들을 누비고 돌아다닐 때에는 어느 누구나 없이 환호와 박수를 보내면서 자기 일처럼 탄성을 지르곤 하였다.
북한에서 광주사태의 진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였지만 우리의 머릿속에서 항상 맴도는 것은 광주에서 온갖 악랄하고 비인간적인 만행들이 저질러질 때마다 현장에 투입되었던 우리 북한특공대원들은 과연 무엇을 했을까하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현장에서 움직이는 많은 사람들의 하나하나의 행동거지 속에서 북한냄새가 나는 훈련된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가려볼 수 있었고 장갑차와 총기류들을 마음대로 능숙하게 다루면서 진압군들과 충돌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군인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일터에 나가서 광주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마치도 자기가 광주에 내려갔다 온 듯이 “ 광주사건! 그거 다 우리군대가 했어요. 장갑차 뺏어 몰고 총 쏘는 것과 같은 기술적인 문제는 전문훈련 받은 우리사람들이 한 것이 맞아요. 평범한 시민들이 뭘 할 줄 알겠어요? 우리 쪽의 사람들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판이 그렇게 커질 수가 없지요”
어디에 가든 광주사건이라는 말만 나오게 되면 저마다 입을 열고 말 나가는 대로 너도 나도 한마디씩 하는 정도였다. 남한에 와서 친북좌파세력들이 광주폭동 때 죽창으로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여자들을 나체로 발가벗겨 강간하고 처참하게 죽인 것을 대한민국 국군이 했다고 우기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돼서 남한에 김정일 정권을 도와주는 세력이 있는지 몸서리가 칠 정도였다. 북한에서는 40대 이상이라면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귀동냥 정도로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본인이 이 글을 쓰기 전에 한국에 탈북 하여 온 40대 이상 남녀 23명에게 북한에 있을 때 1980년 5.18광주사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냐고 일일이 물어보았더니 23명 중 농촌에 있던 여성 한 명을 제외한 22명이 북한군이 남한에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북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고 꾸미지 않고 정확하게 대답 하였다. “광주사건이야 북한에서 치밀하게 작전하고 행동에 실현한 것 아닌가. 북한의 대남사업 중에 5.18만큼 크게 성공한 작전이 어디 있어. 김일성이도 아쉽다고 인정했잖아”
그들의 반응은 일괄적이었고 모두가 의문을 달 필요도 없는 확신에 찬 대답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51.8의 진실이 어디로부터 어떻게 되어 있는지 껍데기가 벗겨질 날이 하루하루 조심스럽게 다가온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북한에서 일반적으로 군대에 갔다 온 사람들은 우리군단정찰의 누구누구라든가 또는 우리여단의 누구누구가 광주에 갔다 와서 영웅이 되고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고 본인의 가족들은 당의 배려로 최고의 혜택을 누린다는 자랑식으로 하나같이 말하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있다. 군대에 나가지 못하고 사회생활을 한 사람들도 각자가 배속되어 있는 조직들과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해서 5.18광주인민봉기는 북한의 특수부대공작대원들이 남조선의 혁명적인 인민들과 연합해서 괴뢰정권을 뒤집어 업고 조국을 통일하려고 일으켰던 남조선 역사상 있어본 적이 없는 무장폭동으로 인정하고 있다.
여기서 구태여 이런 말까지는 할 필요가 없겠지만 광주사건 당시 남한에 직접 침투되어 북한의 명령을 수행하였던 사람들은 김정일 체제에 충성하고 조국을 위한 당연한 의무라고만 생각 했지 자기민족과 역사 앞에 어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마 당시로써는 본인들 자체도 분명히 몰랐을 것이다. 어떤 사건에 관한 내용이나 이야기라는 것은 입과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과정에 어떤 것은 사실이상으로 보태지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사실 이하로 덜어지기도 하는 것이 흔히 일반적인 일이다. 북한사회의 여론시장에서 돌아가는 각이한 내용들도 떼고 붙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만 좀 특이한 것은 아무리 좋은 내용거리도 김정일 체제의 성격에 대치되면 나쁜 이야기가 돼야 되고 나쁜 내용이지만 체제를 관리하는데 도움이 되고 피해가 없다면 두말할 것 없이 좋은 것으로 둔갑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지독한 북한체제라 해도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아닌 이상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빠르게 유포되는 내용에 대해서까지는 절대로 통제할 방법이 없다. 광주사건의 내막에 대해서 북한이 처음에는 그냥 야단법석을 떨면서 친미정권을 반대하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으로 치켜세우고 선전했지만 남한으로 내려왔던 5.18 참가자들이 북한으로 돌아와서 하나 둘씩 입을 열고 그 가족들이 살금살금 소문을 내면서부터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인민군부대들을 위주로 체제차원에서 점차 광주사태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하기 시작했다.
거짓과 진실을 가리는 문제에서 체제의 수단이 아무리 지독하고 잔인해도 막을 것과 막지 못할 것이 분명히 따로 있다는 것을 광주사건을 통해서 김정일 정권이 보여준 하나의 단적인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5.18광주사태와 관련된 많은 복잡한 이야기 중에서 내가 직접 광주폭동에 참가하였던 당사자로부터 여러 차례 개인적으로 들은바 있는, 현장에서 실지 있었던 내용을 최대한 기억을 살려서 알고 있는 그대로 독자들에게 말해주려고 한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나는 북한체제의 모순을 교육자라는 직업적인 관점과 입장에서 파악하고 등을 돌린 사람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북한체제와 결별했다는 이유 하나에 조건을 달고 광주사태에 대해서 뜬금없이 입을 여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나는 광주사건을 떠나서 그 어떤 문제이던 증명할 수 있는 내용이 충분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정확하고 확실하게 책임질 수 있는 일이 못 된다면 아무 일에나 무턱대고 나서서 입을 열지 않는 버릇이 북한에서부터 좌우명처럼 몸에 배어 있다. 개인적으로 어떤 문제에 관여하는데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성과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 자신이 확신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성의 신분을 떠나서 신념과 지조를 지키는 습관이 있다. 광주사건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측면에서도 다른 탈북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나서서 한 목소리로 합창을 한다고 해서 그런 분위기에 이끌려 어정쩡하게 따라나서는 것이 아니라 그 부분에서 남들 못지않게 나 자신도 파악하는 바가 확실하게 있기 때문에 서슴없이 증언자의 한 사람으로 나서는 것이다. 또한 때에 따라서 큰 것을 위해서는 작은 것의 희생이 필요할 때도 있기 때문에 나의 개인적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마지막 까지 5.18광주사건을 고발하는 증언자의 한 사람으로써 자기의 양심과 소신, 입장을 분명히 하고 싶었을 뿐이다.
먼저 ‘5.18광주사태에 대한 탈북자들의 증언록’을 출간하는 자유북한군인연합 측과 합의하고 이 글의 주인공에 본명을 밝히지 않기로 한 것은 그 어떤 후과의 문제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광주사건에 대한 진실한 내용을 객관들에게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밝히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싶다. 북한에서 교사라는 직업에 종사하면서 여성으로써 개인적으로 제기되었던 사생활문제까지 꺼내야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좀 고민이 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고 부담스러운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저것 사정을 가리면서 말을 고르게 되면 없는 내용을 억지로 만들어야 되는 상황이 제기되고 특별히 광주사건은 거짓을 말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부득이 하게 사생활의 깊이를 내놓기로 결심하면서 실명은 밝히지 않기로 하였다.
이 내용은 내가 탈북하기 전에 살던 함경남도 장진군 군당교육부의 대학모집 과장으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직접들은 이야기다. 우리가 서로 알게 된 과정은 그가 우리집안 5형제 중에 둘째인 맏오빠와 막연한 친구사이로 지내면서 부터이다. 그는 내가 북한의 교육부분에서 일할 수 있도록 특별히 힘을 써준 은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의 유년기시절 가장 큰 희망은 교육부문에서 최고의 전당이라고 하는 김일성종합대학에 가는 것이었다. 북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과 같은 큰 대학에 가려면 하늘의 별따기라고도 할 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남한과는 달리 공부 잘해서 실력이 좋다고 무조건 자기가 희망하는 대학에 가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공부도 우선 잘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집안 배경이다. 전교적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학과실력이 좋았던 나는 김정일이 한테 개인적으로 편지를 써서라도(써본들 부질없는 짓이지만) 무조건 김일성종합대학에 가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만큼 김일성종합대학에 가려는 나의 결심은 그 어느 누구보다 확고했었다. 그러는 나를 두고 학교 측에서도 이번만은 우리학교에서 김대 입학생이 꼭 나올 것이라고 지지해주었고 군당교육부에 나를 김일성종합대학 입학생으로 추천하였다.
학교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김일성종합대학에 가게 되었다고 들떠있던 1986년 8월, 군당교육부로부터 내려온 통지서에는 군적으로 단 한명을 뽑는 김일성종합대학 대상자를 우리학교의 내가 아닌 읍중학교의 교장선생님의 아들로 확정지었다고 적혀있었다. 하늘이 왈카닥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교무실로 달려가서 내가 무엇이 딸리고 모자라서 평생 꿈꾸던 종합대학에 못가느냐고 선생님들께 따져 물었다. 본인 이상으로 많은 기대를 했던 선생님들도 실망한 듯 맥을 놓고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한참동안 울면서 서있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교장선생님께서 나에게 이왕 이렇게 됐으니 김대는 포기하고 다른 대학에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으시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김대를 못가면 다른 대학을 가지 않고 인민군대에 나가겠다고 내 뱉듯 한마디 남기고 교무실을 뛰쳐나왔다.
우리 집안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 할 만큼 큰 인물은 없어도 성분도 빈농이기 때문에 토대에서 걸리는 것이 없고 당시 우리 맏오빠는 군당 선전부에 근무하고 있었던 터라 별로 문제될 것은 전혀 없는 실정이었다. 교장선생이라는 사회적 지위에 밀려 나보다 실력이 못한 사람한테 기회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니까 비록 어린 마음이지만 억울하고 분하기 짝이 없었다. 인민군대에 나가기로 결심하고 군에서 1차 신체검사를 마치고 저녁 무렵에 집에 도착했는데 군당선전부에 다니는 오빠가 한쪽 다리를 저는 사람을 집으로 데려와서 군당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라고 소개했다. 오빠는 데리고 온 친구 분한테 나를 인사시키면서 자랑삼아 말했다. “너 지금까지 공화국영웅칭호 받은 사람을 직접 본적이 없지? 이 사람이 바로 5년 전에 김정일 동지를 직접 만나 뵙고 그분 앞에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이야.”
나는 다소곳이 머리 숙여 친구 분한테 인사를 했다. 공화국영웅이라는 훌륭한 분을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우리 집에서 내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다. 그러면서도 한쪽 다리를 많이 절룩거리는 사람이 어떤 장한 일을 해서 영웅이 되었는지 많이 궁금했다. 어머님은 오빠의 친구 분이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있는 것 없는 것 다 꺼내서 푸짐하게 저녁상을 차리셨다. 맏오빠는 별로 농담을 잘하지 않는 성격인데 그날은 왜서인지 느닷없이 싱글거리면서 나를 놀리는 말투로 군대에 나갈 준비는 잘하고 있느냐고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밥상이 차려지고 남자들과 여자들이 서로 다른 밥상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남자들 상에서 술이 몇 잔 도는 것 같더니 얼근히 취한 오빠가 우리 쪽을 바라보며 내 이름을 부르면서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는데 하늘에서 운 좋게 도와주면 아무리 김일성종합대학이라도 못 간다는 법이 있겠느냐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해보는 소리겠지 하고 그냥 밥을 먹고 있는데 어머니가 내 귀에 대고 가만히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입학통지서가 내 이름까지 밝혀서 직접 내려왔다고 말씀하시면서 오빠의 친구 분이 중앙당에 힘을 써서 일이 성사됐다고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잠시 후 오빠의 친구 분도 나를 향해서 눈길을 보내면서 어렵게 성사된 일인 것만큼 김일성종합대학에 가서 공부를 잘해서 학교와 고향사람들의 기대에 꼭 보답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졸업하면 자기한테도 오늘 신세를 꼭 갚아야 한다고 농담을 건넸다. 중앙당에 든든한 줄이 있었던 오빠친구의 도움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이라는 나의 꿈이 그렇게 실현되었고 그때부터 그 사람과 나와의 인연이 서서히 시작되었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기간 동안 한 달이 멀다하게 그분한테서 편지가 자주 왔고 나도 매번은 아니지만 이따금씩 고맙다는 내용으로 답장을 보내주었다.
본인은 나에게 말을 안했지만 내가 대학에 들어 온지 1년이 지난 뒤에 오빠로부터 그 사람이 총상으로 부상당했던 다리에 골수염이 생겨서 무릎 아래를 절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많이 아팠었다. 내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3대혁명소조로 황해남도 연안군 풍천리에 나가 있던 어느 날, 온다는 기별도 없이 오빠의 친구 분이 의족을 한 다리를 절룩거리며 내가 생활하는 숙소에 문득 나타났다. 황해남도 연안지역에 군당간부들의 신원조회 문제가 제기되어 출장을 왔다가 내가 그쪽지방에서 소조생활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잠깐 보고 가려고 들렀다는 것이었다. 18살에 본 이후에 6년 만에 보는 사람이지만 내 인생의 한 부분을 도와주신 분이라 너무도 반가웠다. 그 분도 내가 그렇게 희망하고 바라던 김일성종합대학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어엿한 3대혁명소조로 성장한 모습이 대견했던지 나를 와락 껴안고 한참동안 어루만져 주면서 말이 없었다.
당시는 김일성이 죽기 전이여서 김정일 정권에 비하면 식량사정이 그래도 조금은 괜찮은 형편이었지만 농촌의 살림은 전국의 어디를 가나 찢어질 정도로 모두가 가난했고 어려운 형편이었다. 당에서 파견되어 하부 당 기관들과 공장, 농촌의 생산라인을 감독하는 3대혁명소조라고 해도 우대라는 것은 특별히 없었고 합숙에서 주는 식사도 쌀 몇 알이 드문드문 섞인 누런 강냉이밥 한 그릇에 시래기 된장국 한사발이 전부였다. 귀인이 찾아 왔어도 나라 형편이 가난하다 보니까 외지생활을 하는 처지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혼자서 궁리하다가 할 수 없이 한개 리 전반의 살림을 책임지는 창고 장에게 달려가서 은인과도 같은 귀한 손님이 왔는데 대책이 없어서 안타깝다고 몇 마디 했더니 창고 한구석에 간부들 접대용으로 몰래 감춰놓은 돼지고기가 조금 있다면서 두 키로 정도를 떼어 주었다. 오는 길에 리 당부비서 집에 들러서 소주 두병을 얻어가지고서야 그날 저녁 손님식사를 그래도 대충 대접할 수 있었다.
내가 혼자서 생활하는 작은 방에서 식사를 끝내고 우리 두 사람은 15년이라는 나이차이도 꽤 컷 지만 마치 오래 동안 떨어져 있던 사랑을 만난 것처럼 서로가 부담감이 없이 한자리에 누웠다. 지금까지 없었던 남자와의 첫 잠자리에 드는 순간이어서 긴장하기도 하고 애가 둘이 있는 한 가정의 아버지라는 생각에 머리가 찹찹했지만 내가 그만큼 성공할 수 있게 도와준 둘도 없는 은인이라는 고마움에 한순간의 두려움이 씻은 듯이 모두 사라져 버렸고 결국은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아마도 정상적인 사람도 아니고 의족을 하고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먼 길을 힘들게 찾아왔다는 동기가 정에 약하고 마음이 여린 처녀의 순진한 마음을 감동시켰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지만 그날 밤이 24년 동안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남 여 간의 연정의 세계를 내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는 첫 순간이었다. 요즘은 북한사정이 워낙 어렵다 보니까 이전과는 반대로 생활방식이라던가 인생 자체에 대한 생존개념이 많이 달라져서 성에 대한 문제가 도덕적인 차원에서 많이 도외시되고 있는 것이 지당한 현실이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김일성이 사망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리 학력이 출중하고 인물이 좋아도 남 여 관계와 같은 사생활문제에서 소문이 나면 남자 쪽은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아도 여자는 그 동네에서 절대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게 되어 있었던 것이 봉건적인 색체가 가득한 북한이었다. 어느 여자가 누구와 하룻밤을 잤소, 얼굴이 반반한 뉘 집 딸이 당기관의 어떤 늙은 간부와 좋아하다가 임신을 했소, 라고 소문이 나면 그 동네에서 그 여자는 쓰지 못할 인간이라고 단번에 도장이 찍혀야 되는 형편이었다. 하늘이 준 벌이었는지 내가 스스로 자초한 운명이었는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지만 불행하게도 내가 바로 그런 수치스러운 ‘변’을 당한 여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세상은 내가 응당한 사생활이라고 여겼던 은인과의 첫 하룻밤을 숨겨주지 못하고 당시까지 힘들게 노력하였던 인생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게 하였다.
학부에서 최고의 영어실력을 인정받았던 터라 3대혁명소조생활을 끝마치면 중앙기관의 교사로 배치 받게 되어있지만 나는 그날 밤의 잠자리 실수로 원치 않던 임신을 하게 되었고 5개월 후에 사생활문란으로 대학으로부터 3대혁명소조활동을 중지당하고 불명예스럽게도 고향인 함경남도 장진군으로 6년 7개월 만에 쓸쓸한 귀경을 하게 되었다. 고향으로 내려 온지 얼마 후에 태어난 아기의 신분을 헤어진 약혼남의 자식으로 숨기었고 영어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터라 오빠의 친구인 실지 아기아빠의 도움을 받아 다행히 이웃 군인 함경남도 영광군의 시골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게 되었다. 2년 뒤에 그 남자와의 사이에서 두 번째 아이를 낳으면서 나의 결혼은 영원히 물건 너 갔고 남편 없이 홀로 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이것이 북한에서 최고의 대학과 최고의 목표를 꿈꾸었던 내 인생의 흔적이고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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